맹주의 선물 (2)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뒤통수나 쳐 맞고. 쯧쯧. 그래 어떤 놈이요? 아니 어차피 한둘로는 안됐을 테니 어떤 놈들이요?”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
그 핏물에 몸을 담근 채 꼼짝도 못하고 있는 서문강을 내려다보며 곽영이 물었다.
“왜. 알면 어쩌려고?”
“가는 길 적적하지 않게 몇 놈 길동무로 붙여줄 테니 말만 하소.”
곽영이 목을 우둑우둑 좌우로 꺾으면서 말했다.
“실력도 안 되면서 무슨.”
“아니, 단전이 박살나더니 이제 눈마저 먼 거요?”
그 말에 서문강이 눈을 반개했다.
심력을 모아 곽영의 경지를 가늠해 보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지금 곽영의 새 경지가 보일 리 만무했다.
게다가 그나마 남은 심력마저 바닥이 났는지 잠깐의 집중에도 금방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놓아 버렸다.
곽영이 재차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일다경을 기다리자 서문강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쿨럭쿨럭. 어쨌든 축하할 일이군.”
“축하고 나발이고 빨랑 불어 보슈. 똥둣간에 하루 이틀 숨는 수고 정도는 내 감수하더라도 몇 놈은 확실히 골로 보내줄 테니.”
“됐다.”
“복수 안 할 거요? 화도 안 나우?”
“왜, 너는 화가 나나?”
서문강의 입가에 왠지 미소가 피어나는 것 같았다.
“화는 무슨. 내가 화 날 일이 뭐 있소. 영감이랑 나랑 뭔 대단한 사이도 아니고. 영감이야 뒈지든 말든 나는 하등 상관도 없소이다.”
곽영이 괜히 입술만 이죽댔다.
서문강은 그런 곽영을 온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봤다.
“뭘 그런 눈으로 보슈?”
곽영이 괜스레 눈을 치켜떴다.
“얼굴 좀 보자.”
“무슨 얼굴 말이오?”
“네 진짜 얼굴.”
“뒈지기 직전에 원하는 것도 참 많구려.”
투덜대는 말본새와는 달리 곽영이 순순히 천면술예를 풀었다.
우드득 우드득.
우드드득.
그러자 괴면이 드러났다.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표정도 없는 괴이한 얼굴.
서문강이 그 얼굴을 말없이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입을 뗐다.
“너는 앞으로 어찌 살 테냐?”
“곧 세상 하직할 사람이 참 오지랖도 넓소. 남 어찌 살까 걱정까지 다하고. 별거 있겠소? 배운 게 이거니 어디 가서 혼자 의뢰라도 받으면서 살지 않겠소?”
손날로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곽영이 삐죽거렸다.
입을 떼는 것도 이제 힘든지 서문강의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많이 죽었나?”
아마 맹 내에서 서문강을 따르던 사람들, 팔에 흰 천을 두르지 않은 이들에 관해 묻고 있음이리라.
“많이 죽었소. 하지만 잘 알지 않소. 앞으론 훨씬 더 많이 죽을 거요.”
영감의 두 눈에 물기가 맺혔다.
“내 손바닥을 펴봐라.”
영감의 하나 남은 손이 꽉 쥔 주먹 속에 뭔가를 감춰두고 있었다.
그 주먹을 강제로 펴자 새알만한 환단이 하나 나왔다.
“이게 뭐요?”
“잠혈단의 해약.”
“....”
“임시가 아니라 완전한 해독약이다.”
잠혈단의 독기를 누르기 위해서는 영감에게서 매해 한 차례 해독약을 받아먹어야 했다.
잠혈단의 극통을 기억하는 곽영은 그래서 무공을 되찾은 뒤로도 서문강 곁을 떠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임시 해약이 아닌 완전한 해약이란다.
곽영이 손 안의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환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발아래 점점 더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서문강을 쳐다봤다.
“네게 부탁이 있다.”
기운이 빠져 가는지 서문강의 목소리가 점점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냥 부탁이요 아님 소원이요?”
“부탁이자 소원이지.”
“뭐요.”
“들어줄 건가?”
“뭔지 일단 들어나 보고.”
서문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웃어라. 많이 웃어라. 세상은 아직 밝다.”
“그게 다요?”
“그래.”
정말 웃기는 늙은이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웃으란다.
늙은이가 그간 고생해서 이룬 맹의 세력권 안에서야 세상이 밝지 그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봐도 아직 사기와 협잡,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이 밝단다.
게다가 늙은이가 쓰러진 지금부터는 맹의 권역 안팎을 불문하고 그럴 것이다.
지금도 밖에선 피가 튀고 살이 베이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세상은 아직 밝으니 많이 웃으란다.
“나도 부탁이 있소.”
“뭔가.”
“아니 부탁이라기보다 예전부터 꼭 묻고 싶었던 거외다. 그날 대체 왜 나는 죽이지 않은 거요?”
살막의 최정예 일곱이 영감을 암습했던 그날, 특급 살수 여섯이 모두 두 동강 났지만 곽영을 갈라오던 검만은 도중에 멈췄었다.
곽영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정말 듣고 싶나?”
“그렇소.”
서문강의 입가에 어느 때보다 밝은 미소가 피어났다.
마치 예전부터 그 이유를 묻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듯.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서문강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정말 갈 때가 다 된 듯 소리가 입 밖으로 아예 나오질 못했다.
곽영이 몸을 기울여 서문강의 입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서문강이 그 귓가에 대고 천천히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 속삭임을 듣던 곽영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늙은이와는 그렇게 작별을 했다.
물론 비동을 나설 때까지 아직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불어넣어준 진기를 모두 소진한 탓에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늙은이는 결국 그곳에서 혼자 죽어갈 것이다.
무림맹의 비동에는 한 가지 기물이 존재한다.
빙옥침이라는 침상이 그것인데 시퍼런 냉기를 내뿜는 통짜 빙옥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서문강의 말에 따르면 빙옥침이 내뿜는 빙옥의 기운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아주 탁월한 효험을 갖는다고 했다.
또한 그 위에서 기공을 연성하면 그 효과도 배가 된다고도 했다.
음한기공을 익힌 이가 연공을 하면 빙옥의 냉기가 더해져 스스로의 기운이 더욱 승(勝)하게 되고, 양강기공을 익힌 자라면 연공자의 양기와 빙옥의 음기가 서로 길항하여 양기를 더욱 돋운다는 것이었다.
곽영 역시 과거 이 침상 덕을 아주 톡톡히 본바 있었다.
비동을 나서기 전 곽영은 서문강을 그 빙옥침 위에 뉘여 놓고 나왔다.
물론 늙은이가 그 위에서 연공을 하거나 상처를 치료하기를 기대해서는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단지 그 냉기로 인해 신체의 활성이 줄어, 마치 곰이 동면을 하듯 그렇게 서서히 꿈속에서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길 바라서였다.
거기다 더해 빙심지단 속 내단의 기운 일부를 뽑아내 영감의 혈맥 안에 심어 주었다.
그 기운은 서문강의 찢겨진 혈맥을 타고 돌며 내부 곳곳을 얼릴 것이다.
무너진 흉곽이 폐와 심장을 찌르는 고통마저 느낄 수 없도록 장기들을 죄다 꽁꽁 얼려줄 것이다.
곽영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렇게 하고나서 곽영은 비동을 나섰다.
그리고 와룡협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라며 영감이 해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네 눈에서 협(俠)의 씨앗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감이 들려준 말은 이거였다.
풉.
자기 목을 따러 온 살수에게서 협의 씨앗을 보았다니.
실소가 절로 나왔다.
원체 시답잖은 영감이라 갈 때도 객쩍은 농담 한 마디쯤 남기고 싶었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제 영감과의 인연도 끝이다.
곽영이 품속에서 환단을 꺼냈다. 이 작은 단환 한 알이면 잠혈단의 독기와도 안녕이다.
영감에게 붙들려 산 지난 세월과도 영원히 안녕일 것이다.
곽영이 망설임 없이 환단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넘어간 해약이 위장 안에서 녹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이곳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 자유롭게 살리라 다짐하는 순간, 곽영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꺼억꺼억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뒤로 넘어가 동혈 바닥에 처박혔다.
쿵-!
그리고 눈을 까뒤집은 채 파닥파닥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토요일은 휴재일입니다.
하루 쉬고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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