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과 도둑 (4)
신검(神劍)이 궤적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멈췄다.
검에서 뿜어진 예기에 주위의 어둠마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아래로 내려 긋기만 하면 여인의 생은 끝난다.
하지만 곽영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검을 치켜드는 순간 스스로도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초란이라는 이 여인을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곽영의 가슴이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서가 아니었다. 빙심내단이 ‘우우우우-’ 하는 비음(悲吟)을 토해내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영감에게 입은 은혜를 갚겠다며 소면에 보은면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고 있는 이 여인.
영감이 죽었다는 말 한 마디에 폭우처럼 눈물을 저리 펑펑 쏟아내던 여인을 그의 손으로 어찌 벨 수 있겠는가.
영감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득 궁금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이 내일 당장 죽는다면 자신을 위해서 울어줄 누군가가 과연 있을까.
한 사람의 얼굴이 금방 떠올랐지만 애써 그 얼굴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다른 몇몇의 얼굴도 차례로 떠올랐지만 역시 지워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곽영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기꺼이 목 놓아 울어줄 수 있는 곽영은 아마 푸짐한 살집에 친근한 미소를 머금은 무사부 곽영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다시피 가짜다. 진짜 곽영은 미소를 모르는 잔혹한 악귀.
살막에 붙들려 온 지 오년 만에 함께 잡혀왔던 아이들 일흔셋 중 쉰하나를 혼자 도륙하고 살아남은 살성.
나이 열아홉에 마흔 다섯 가지나 되는 최고의 살인 기예들을 죄다 극성으로 익혀냈고 불과 스물엔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백 번의 살행 모두를 성공시킨 진정한 살귀였다.
그러니 그런 그를 위해 누가 울어줄 수 있을까. 곽영은 처음으로 영감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라는 사실. 자신을 위해 눈물 흘려줄 이 하나 없이 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라는 사실.
그의 삶이 시작된 뒤로 서른다섯 해 동안 결코 변한 적 없는 불변의 사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입이 썼고 가슴이 아릿했다.
철컥.
곽영이 비천신검을 거둬 도로 검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검이 검집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에 초란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 터벅터벅 벽 앞으로 걸어간 곽영은 출구를 여는 기관을 찾기 위해 벽 위를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초란이 입을 열었다.
“저를 죽이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래.”
“왜죠?”
“왜, 죽고 싶나?”
“아,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니면 됐다.”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데도 괜찮나요?”
“내 비밀? 뭘 알고 있지? 내 이름을 아나?”
“아니요.”
“그럼 내 고향은?”
“몰라요.”
“내 부모님이 누군지 혹시 아나?”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군.”
“당신이 검협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검협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도 알고요.”
“...”
“어디에서 익혔죠?”
“어디다 떠벌리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건 아니에요.”
“그럼 됐군.”
“검협의 제자인가요?”
“아니다.”
“그럼 어떻게 그분의 무공을 익혔죠?”
“그가 강제로 익히게 하더군. 다음 세상에 그의 무공을 전하라고.”
“...”
“왜 거짓말 같으냐?”
“아니요. 당신의 말을 믿어요.”
믿는다는 말에 곽영이 고개를 돌려 초란을 바라봤다.
“나도 널 믿는다. 그래서 널 죽이지 않는 것이지. 죽은 검협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이가 검협의 무공을 세상에 전할 자에게 해(害)가 될 일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 말과 함께 곽영이 벽의 한 부분을 눌렀다.
스르륵-.
맹주좌가 한쪽으로 움직이며 지하 공동의 입구가 열렸고 곽영이 그 위로 신형을 뽑아 올렸다.
시간은 어느새 인시 초. 맹주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곽영의 뒤를 이어 초란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거 그냥 그렇게 가지고 가실 건가요?”
곽영이 들고 있는 비천신검과 철궤를 보고 초란이 물었다.
“그렇다. 그건 왜 묻지?”
“거기 혹시 추종향 같은 것을 뿌려놨을지도 몰라요.”
“추종향?”
“네. 외성 정문에서 서쪽으로 십 리 정도를 가면 폐사가 하나 있어요. 거기 가져가면 냄새를 없앨 수 있을 거예요.”
아마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추종향을 전문으로 다루는 이를 대기시켜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곽영에게는 쓸모없는 괜한 수고일 뿐이었다.
“강호에서 쓰이는 추종향의 종류는 총 이백스물여섯 가지. 그 냄새 모두를 내가 다 알고 있다. 여기에는 추종향이 뿌려져있지 않다.”
곽영이 단언했다.
그런데 그때 초란이 두 눈을 부릅떴다. 왜냐하면 추종향 냄새를 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곽영의 주먹이 서서히 뇌기로 물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추종향이 뿌려져있지 않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곽영의 주먹에서 네 줄기의 뇌전이 뿜어져 나왔다.
쿠궁-쿵쾅-!
비천신권의 주먹 한 방에 지하 공간을 덮고 있던 맹주좌가 산산조각으로 날아갔다.
이어서 곽영이 비천신검을 뽑아들었다. 신검에서도 뇌기가 이글거렸다.
곽영의 급작스런 행동에 초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뇌기를 머금은 신검을 곽영이 아래로 휘젓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대전 중앙 바닥에 새겨졌다.
‘맡긴 팔과 검을 찾아간다.’
삐익!
삑! 삑!
그때 사방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맹주좌가 뇌전에 터져 날아가는 소리를 들은 경비 무사들이 출동한 것이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순식간에 무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곽영이 초란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라.”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초란이 업혔다. 곽영이 복면을 풀어 은잠포로 만든 뒤 그것으로 초란의 몸과 철궤를 둘둘 말아 자신의 몸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번개 같은 신법으로 몸을 날려 맹주전 지붕 위로 올라섰다.
곽영의 백발과 백염이 달빛에 비쳐 더 하얗게 빛났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수염과 머리가 펄펄 휘날렸다.
사방에서 몰려오던 맹의 무사들이 전부 그 모습을 봤다.
“거,검협이다!”
“맹주다!”
무사들이 곽영의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네 명의 인영이 몸을 날려 곽영을 공격해왔다.
“받아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검협의 목은 내 것이다!”
“팔 하나 잘린 검협쯤은 하나도 안 무섭지!”
바로 무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들. 보아하니 공명심에 눈이 멀어 물불 가릴 줄 모르는 세가의 애송이들이었다.
그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던 곽영이 문득 비천신검을 들어 하늘 위로 가볍게 뿌렸다.
그러자 뇌전 네 줄기가 뽑혀 나오더니 전후좌우 사방으로 날아갔다.
퍽! 퍼벅-!
퍽-! 퍽-!
그리고 날아들던 애송이 넷의 머리가 동시에 터져 나갔다.
으아아악!
아아악!
죽었다고 믿었던 검협이 보여주는 신위에 무사들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살아있다는 게 진,진짜였어.”
공포감이 한곳에서 생겨나자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저기서 주저앉는 자들이 생겨났다. 누구는 검을 놓아 버렸고 또 누구는 도를 팽개쳐 버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곽영이 갑자기 긴 웃음소리를 뽑아냈다.
크크크크-하하하하하-!
한 마리 날쌘 독사 같은 섬뜩한 무엇이 무사들의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그 속에 담긴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무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맹에 대한 복수심일 거라고 생각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검협의 가슴에 쌓인 한(恨)과 원통함이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에 담긴 것은 서글픔이었다. 홀로 세상에 태어나 홀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의 서글픔.
악귀의 형상을 한 진짜 얼굴을 그 아래에 숨긴 채 미소 띤 이의 가면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의 슬픔이었다. 물론 그 감정을 이해하는 이는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무사들을 내려다보며 긴 웃음소리를 흘리던 곽영이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무사들 위를 뛰어 넘어 반대편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하하하하하하하-!
그는 비록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가 남긴 기다란 소성(笑聲)이 무림맹 동쪽 숲을 오랫동안 뒤흔들고 있었다.
무창 빈민촌 제일 깊숙한 곳에 위치한 어느 골목 모퉁이. 곽영이 초란을 등에 업은 채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났다.
모퉁이를 돌아 나온 곽영이 어느 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초란을 내려놨다.
“죄송해요.”
등에서 내려오자마자 초란이 미안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곽영의 등에 업혀 무림맹 동림을 가로질러 달려오면서 그의 웃음소리를 몸 전체로 들어야 했다.
그의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린 소리의 울림을 듣고 있자니 그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초란 자신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세상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적 있었다. 그때 느꼈던 암담함. 막막함.
이 세상에 초란이라는 아이를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느꼈던 슬픔.
그래서 희미하게나마 그 소리에 담긴 곽영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죄송하다는 초란의 말에 곽영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뭐가 죄송하지?”
“그냥요.”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으니 말해라.”
“제가 너무 유난을 떨었어요. 그래서 죄송해요.”
곽영의 눈에 순간 이채가 떠올랐다.
‘너무 유난을 떨어서 죄송하다.’
새삼 이 초란이라는 여인의 눈치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곽영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던 그녀의 말도 어쩌면 그냥 빈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란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어요. 협(俠)의 길을 걷는 자는 외롭지 않다. 제 사부님이 언젠가 해주신 말씀이에요.”
‘협의 길을 걷는 자는 외롭지 않다.’
곽영이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그러자 영감과 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그러게 서럽게 우느냐고 물었을 때 초란이 했던 대답이 떠올랐다.
“검협과 무슨 관계라서 우는 게 아니에요. 검협은 우리 모두의 친구였어요. 소외받는 이들의 친구, 힘이 없는 이들의 친구, 가난하지만 정직한 이들의 친구, 배움이 짧지만 의로운 이들의 친구, 고통 받고 아파하고 신음하지만 항상 희망을 잃지 않는 모든 이들의 친구였어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협의 길을 걷는 자는 외롭지 않다.”
곽영이 이번에는 그 말을 소리 내어 되뇌었다.
그리고 힐끗 한번 초란을 바라보고 무심히 은잠포를 접어 다시 얼굴에 뒤집어썼다.
“좋은 말이군.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겠지?”
여기서부터 혼자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네. 알아요.”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곽영이 반대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초란이 급히 그 뒤에 대고 말을 쏟았다.
“하,합비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나요?”
하지만 곽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곽영이 사라진 쪽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초란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곽영을 집어삼킨 어둠을 향해 공손히 계수배례(稽首拜禮)를 올렸다.
그 모습이 얼마 전 검협을 위해 했던 배례보다 훨씬 더 공손하고 경건한 모습이었지만 먼저 자리를 뜬 곽영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당신의 등은 여전히 따뜻하더군요.”
이마를 땅에 바짝 붙인 초란의 입에서 이런 말도 흘러 나왔지만 그 말 역시 곽영은 들을 수가 없었다.
- 작가의말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요즘 슬럼프네요. 글이 너무 안 써집니다.
글을 쓰면서 느끼던 즐거움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 저도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서 연재주기를 좀 조정해서 여유를 가져볼까 합니다.
일단 월수금 주 3일로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읽고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께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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