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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헤라

재능이 사기급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베르헤라
그림/삽화
연재 ; 부정기
작품등록일 :
2021.12.28 10:50
최근연재일 :
2022.01.26 21:10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27,426
추천수 :
693
글자수 :
144,645

작성
22.01.16 19:40
조회
866
추천
26
글자
19쪽

#012 세계 최강이 되면 되지

DUMMY

#012 세계 최강이 되면 되지


***** [마적화] *****


살던 산에서 내려와 한참을 걸어도, 여전히 스치는 풍경은 비슷했다.

내가 살던 산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거나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산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어, 호랑이와 늑대, 여우 등이 다양하게 살 정도로 넓고 산세가 험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걷고 걸어도 비슷한 길만 나온다.

여전히 멀리에는 산이 보이고, 길의 대부분은 나무와 풀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나는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태어나 지금까지 계속 산속의 생활밖에 몰랐다.

찾아오는 침입자가 있다고는 해도 항상 밤에 왔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고산신이 처음이었다.

그때까지는 계속 아버지 어머니와 나, 세명뿐.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그 사이 뼈저리게 깨달았다.

가족 아닌 타인이 매우 그리웠다.

정확하게는 그 사회가.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또 모른다. 산속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조용히 살았을지도.

하지만 이미 떠들썩한 사회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건 불가능했다.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거기에 속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주변에 사람이 떠들며 살아가는 공동체가 필요했다.


'이제야 겨우 정상적인 생활에 한 발 디디게 되었구나.'


나는 햇빛을 받으며 얼굴을 한껏 들어 올렸다.

눈을 감는다.

아, 좋다.

거기에 지금은 약혼녀를 찾아가는 길이다.

감격하지 않으면 어쩔 거야.

감격을 넘어서 기뻐 죽을 것 같다.

나는 마음껏 자유로운 공기를 흡입했다.

아 세상 최고의 미남이라는 아버지가 아름다운 여자의 딸이라고 말했으니, 약혼녀는 분명히 예쁠 거....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어라, 천하제일 미남의 아들은,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닮지 않고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약혼녀도 아름다운 어머니가 아닌 못생긴 아버지를 닮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니, 아름다움을 잇는 것보다는 못생긴 쪽을 달는 것이 더 쉬울 것 같다.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소수니까.

가능성이 큰 건 못생긴 쪽이다.


'어쩌지.'


갑자기 멈춰버린 내가 이상한지 고산신이 몸을 돌렸다.


"이 녀석아, 서두르지 않으면 오늘은 노숙이다. 어여 와."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고, 고산신이 구시렁대며 잔소리를 해댔다.


"이놈아, 무공을 할 줄 안다고 해서 하루 종일 경공이나 보법을 펼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도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 시간이 걸린다구. 쉬엄쉬엄 가다가는 한 달은 걸릴 거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는 침을 꿀꺽 마시고 입을 열었다.


"저기, 할아버지는 그, 제 약혼녀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응?"


고산신이 약간 놀란 것처럼 나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뭐, 얼마나 예쁜지가 궁금한 거냐?"

"네."


무지무지하게 궁금하다.

정확하게는 어머니를 닮았는지 아닌지가.

고산신이 히죽거리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궁금하기는 하겠지. 아직 어린 녀석이니 여자에 한참 관심이 많을 때고. 장애평 아들놈이 내 무공을 훔쳤다고 생각하면 장이 끊어질 것처럼 분노가 치밀어오지만... 네가 불쌍해서 말해주는 거다."


고산신이 느끼한 표정으로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나는 고산신의 주름진 입가만 쳐다보았다.

여기에서 만일 아버지 닮았다는 말이 나오면, 나는 그냥 방향을 바꿔서 다른 데로 간다.

긴장돼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걱정 마라, 정말 예쁜 아이란다."


고산신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몸이 흐물흐물 풀렸다.


"다행이다. 나처럼 이상한 조합이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고산신이 큰 소리로 웃었다.


"뭐, 네 말대로 그 애가 아버지를 닮았다면 끔찍한 모습이었겠지. 하지만 그 아이는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심지어 제 어미보다 훨씬 더 아름답지."

"진짜 다행이다."


기쁘다.

고산신은 내 모습을 보더니 더욱 히죽거리며 웃었다.


"네가 그 아이를 몰라서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 그 아이를 모르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는 사대미인 중 한 명이란다."

"사대미인이요? 그거,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네 명이라는 뜻인가요?"

"그래. 외모만이라면 정말 아름답지."


어째 할아버지 말투가 조금 이상하지만, 너무 기뻐서 거기에는 신경이 가지 않았다.

중국의 사대미인이라는 건 들어본 적이 있다.

서시, 양귀비 등 누구나 아는, 역사에 길이 남은 아름다운 여자들.


'내 약혼녀는 그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거지?'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 것 같다는 표현이 있는데, 정말 그렇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기쁘면 사람도 난다.

나는 가볍게 땅을 밟으며 톡톡 앞으로 뛰었다.

퐁신퐁신, 구름을 밟는 느낌이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고산신의 얼굴이 묘하게 구겨졌다.


"왜 그러세요?"

"... 너, 방금 그게 뭐였느냐?"

"뭐가요?"

"그 보법. 내 거랑 거의 흡사한데 약간 다르구나."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뭔가를 의식하고 움직인 게 아니라, 나는 그저 혼자서 통통 춤을 추었을 뿐이다.

고산신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구겨졌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움직임에 졸랑보를 적용한 건가. 너는 정말로 천재구나. 그런 식으로,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무공을 자기 걸로 소화해 내다니, 그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다. 무공이라는 건 모름지기 오랫동안 익히고 숙성해야 겨우 자신의 걸로 받아들이는 법인데."

"...."


어라, 이건.

고산신은 천재라고 말하며 감탄하고 아쉬워하고 있지만, 왠지 이거 좋아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아버지한테도 말했듯이, 나는 누군가의 무공을 보고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고산신의 보법을 따라 한다는 느낌 없이, 그저 춤을 추었을 뿐이다.

왜 있잖아, 사람들이 너무 기쁘면 룰루랄라 하면서 발을 가볍게 구르고 뛰는 거.

난 그걸 했다고 생각했던 거다.

한데 고산신은 자신의 보법을 변형시켜 사용했다고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남의 무공을 따라 했다고.


"위험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쩌면 내가 가진 능력 자체가 소설에서 죽었던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 능력을 눈치챈 놈들이 작당해서 죽여버린 거지.

그렇다면 열일곱 살까지 살아남았으니 죽음에서 멀어졌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눈으로 배우는 능력이 있는 한 계속 위험할 것이다.

천재라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어.

내가 천재인 건, 이 세계에서 죽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을 뿐인지도.

이 소설을 쓴 작가가 만들어놓은 죽음의 장치인 거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달았다.

나 바본가.


"어쩌지. 나 이러다가는 진짜로 죽겠다. 누군가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고산신이 눈을 약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다.


"응? 너, 지난번에는 자기가 잘못한 거냐고 그렇게 열변을 토하더니, 이제는 네가 도둑놈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냐? 내 말에 동의하는 거야?"

"... 지금도 제 능력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 목숨이 위험하다는 건 절실할 정도로 깨달았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는 것처럼 대답하고 하늘을 보았다.

인생은 불합리한 것이다.

모처럼 어릴 때 죽은 목숨 되살아났는데, 천재라서 다시 죽을 운명이라니.

아, 정말 어쩌면 좋지.

문득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표정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바위처럼 굳은 어머니의 얼굴.


'어머니가 나를 산에서 내려가지 못하게 했던 건 죽을까 봐서였구나.'


이제 알았다.

집안 잡일을 할 일꾼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어.

어머니의 사랑이었을 뿐이다.


"...."


하지만,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을 해줬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미리 경고했다면 굳이 산을 내려오지는 않았을, 아니다, 알았어도 나는 아마 산을 내려왔을 거다.

올해가 아니면 내년, 내년이 아니면 몇 해 뒤라도, 아마 내려왔을 거다.

계속 혼자 산속에서 살지는 못했을 게 분명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만 보고 살면 행복하고 부족함 없었겠지만, 그 산에 내가 보고 기뻐할 얼굴은 없었으니까.


'그래. 역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려왔을 거야.'


내 짝을 찾아서.


'하아.'


산속에서 조용히 혼자 죽어가는 삶은 무덤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어쩌면 어머니는 내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아무 말 안 한 걸지도 모른다.


"...."


아니, 그냥 말을 안 한 것뿐이겠지.

어머니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소설의 악의가 느껴지는 재능을 가지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아 하지?

나는 골머리를 앓으면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


여러 날 걷고 노숙을 하면서, 몇 개의 마을을 지났다.

무공이 있는 소설 속 세계다.

뭔가 엄청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평범했다.

대부분의 마을은 작고 초라한 편이었다.

으리으리한 집은 거의 없었고, 대개는 나무나 진흙으로 지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오래전 시골 마을 같은 느낌이다.

살고 있는 사람들도 평범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협소설인데.'


조금 실망했다.

살벌한 무림인이 우글우글해, 가는 곳마다 검과 손바닥에서 나가는 기가 난무하는 세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이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고 대비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마을에, 무공을 익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조금 김이 빠졌다.

고산신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놈아, 무인이 무슨 길가에 떨어져 있는 돌멩인 줄 알아? 너는 그냥 쉽게 쉽게 따라 하지만, 장애평 같은 천하제일인조차도 십몇 년은 두문불출하고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익히는 게 무공이야."


고산신이 나를 흘겨보았다.


"보통은 그렇게 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법이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 중에 어느 정도 틀을 잡고 무림인이라고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도 겨우 한 줌이지. 자질이 없으면 아무리 무공을 배워도 쓸모없어."


말하다 보니 더욱 열이 뻗치는 모양이다.

고산신은 발밑에 있는 돌을 한 번 퍽 차고, 험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 도시나 성에서 중견 정도로 이름을 알리는 사람은 더욱 적다. 어릴 때부터 무에 재능이 있다고 불리는 사람이 겨우 그 정도 이룰 수 있으려나. 나도! 너한테는 보자마자 까발려졌지만! 이 나도 그렇게 드문 수재였던 거야! 웬만한 무림인은 발밑에 두고 있을 만큼 뛰어난 사람이었다. 천하에 이름을 알리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운 줄 알아? 비록 네 어미 같은 천하제일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이 분야에서 최고였단 말이다!"


고산신이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그걸 보자마자...."


고산신은 한껏 부풀렸던 몸을 조금씩 줄였다.

작은 구멍이 생겨 서서히 바람 빠지는 풍선 같다.


"너 같은 놈은 정말 천년에 한 번, 만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할 거야...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다. 무림인이 개나 소나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나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도둑놈이었다는 거고!"


고산신이 원망스러운 듯이 힐끔 나를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나한테 네가 가진 재능이 조금만 있었으면, 아니,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어요, 할아버지. 이건 재능이 아니라 저주라구요."


내 말에 고산신의 눈이 이마 위까지 쭉 찢어지며 올라가 붙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보였어.


"이놈이! 네놈의 재능은 무림인이라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정도로 원하는 거다! 그 때문에 죽는다 해도! 단 한순간,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목숨은 물론 혼이라도 내놓겠다는 사람이 수도 없을 거다. 어디 가서 저주니 뭐니 그런 말 하면 당장 맞아 죽어."

"...."


그건 틀렸어요, 할아버지.

고산신의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서 입 밖으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으면 재능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죽는 순간 모든 게 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야. 물거품처럼.

그러니까 고산신의 말은 오답이다.

실제로 죽어본 사람이 말하는 거니까 틀림없다.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 밀어 넣었다. 뭐,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


도적을 만난 것은 이제 며칠이면 북경에 도착한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지구는 도시와 도시가 콘크리트 도로로 연결되어 있지만, 이 세계는 자연 속에 사람 사는 공간이 있는 느낌이다.

산이 아니라도 길가에는 무성하게 잡풀이 가득하고, 그런 게 없는 지역은 돌길이거나 사막 같은 황무지였다.

좁거나 넓은 길가에 사람의 모습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데도 길은 생겨 있으니, 조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넓은 세상인데, 사람들은 길이 생길 정도로 같은 길로만 다니는 거다.

음? 감상이 조금 이상한가.

하지만 정말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조금 더 가깝거나 괜찮은 길을 찾아다닐 것 같은데.'


나는 앞서가던 고산신을 불렀다.


"할아버지, 잠깐만요."

"왜 그러느냐?"

"이 길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

"왜?"


나는 말없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우리 앞쪽에 놓인 길은, 언덕처럼 조금씩 높아지면서 나무가 무성해지는 산이었다.

양쪽이 빽빽한 풀로 뒤덮인 길이, 그 산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차가 한두 대 지나갈 정도의 폭이다.

내가 가리킨 곳은 이곳에서 한참 먼 숲 속이었다.


"응? 저기가 왜?"

"조금 전에 뭔가가 번쩍했거든요. 칼 같은 걸 거예요."

"...."


고산신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그는 잠시 서서 가만히 숲을 쳐다보았다.

한참 기다려도 다시 빛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산신은 내 말을 믿은 모양이다.


"이런 곳은 도적이 나오기 쉽지.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관에서는 종종 산적 토벌을 하니까, 잔당들이 이쪽으로 몰려왔을 가능성도 있어. 여기는 북경으로 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나가는 길이니까."


고산신은 여기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큰 산적이 있었다고 말하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어쩐다. 여기를 피하려면 정말 한참 돌아가야 하는데. 몇 달은 걸릴 거다."

"그냥 숲 속으로 들어가서 피하면 안 되나요? 산이라면 저도 익숙하거든요."


도적을 피해 가는 정도의 거리라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고산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놈아, 네가 산에 익숙한 건 네가 태어나 살았던 곳이나 그런 거지, 아무곳에나 마구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린다구. 현지인이 아니라면 이미 생긴 길을 가는 게 안전한 거야."


고산신이 펄쩍 뛰어오르며 알밤을 먹였다.

키가 작은 고산신은 그냥 손을 뻗어서는 내 머리에 손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고산신은 화가 날 때마다 펄쩍펄쩍 위로 튀어 올라 때린다.


'그렇다면 굳이 머리를 때릴 필요는 없을 텐데.'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얼굴로는 미소를 띠었다.

약혼녀를 만날 때까지는 이 할아버지의 성미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기 무공을 훔쳤느니 뭐니 하며 투덜대는데 더 심기를 건드리면 약혼녀고 뭐고 모르겠다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곤란해.

아무리 약혼녀 이름과 가문을 알아도 혼자서 찾아가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거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산신은 약혼녀 집안과 교류도 있는 것 같다.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찾아가는 것보다야, 아는 사람의 소개가 있으면 훨씬 더 그 가문과 접하기가 좋겠지.

그래, 꼭 이 할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다.

나는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

고산신의 얼굴을 살피면서 물어본다.


"할아버지,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고산신이 한숨을 쉬었다.


"글쎄다. 나 혼자라면 도적을 만나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겠지만, 너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고산신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뭐, 너라면 걱정 없으려나. 내 보법도 순식간에 익혀버리는 놈이니."


고산신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산을 쳐다보고, 다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얘야, 도적을 만나면 네 몸은 네가 지켜야 한다. 할 수 있겠니? 나는 타인을 해치는 무공은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너를 지켜줄 수 없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서워. 도적이라니!

생긴 건 이렇게 무서워졌지만 전생에서는 친구들하고 주먹 다툼도 한 적이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호랑이와 싸운 적이 있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다.

내 감각으로는 호랑이보다 사람하고 싸우는 게 더 무섭다.

게다가 호랑이를 죽였다고 감옥에 가지는 않는다.


'그렇지. 그것부터 확인해야겠다.'


지구에서는 잘못해서 사람을 죽여도 재판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는 정도지만, 여기에서는 문답무용으로 처형될지도 모를 일이다.


"저... 도적을 그냥 피할 수 없어서 싸우다 죽이면 어쩌나요? 정당방위가 인정될까요?"

"뭐? 정당방위?"


고산신이 약간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푸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얘야, 생김새는 사람 열두 명은 죽인 것처럼 생겨서 왜 그렇게 초식동물처럼 구는 거냐. 네가 무슨 토끼야?"


고산신이 내 팔을 툭툭 쳤다.

아마 어깨를 치고 싶었던 거 같지만, 고산신은 키가 작으니까.


"무림이라는 건 말이다, 힘과 명분이 최고다. 뭐든 명분이 있으면 사건을 무마할 수 있고, 힘이 있으면 명분조차도 뭉개버릴 수 있지. 무림인끼리의 싸움은 관에서도 개입하지 않아. 산적이나 도적 같은 놈들의 경우에는 더하지. 죽여도 된다. 도적 죽였다고 해서 감옥에 갈 일은 없어."


고산신이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웃었다.


"네 어미를 봐도 알지 않니. 여자를 열두 명이나 죽였지만 멀쩡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고산신은 그렇게 말한 뒤 산길을 올려다보았다.


"자, 그럼 갈까?"


그렇게 말한 뒤, 고산신은 몸을 약간 흔들흔들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술 취한 게가 똑바로 걸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적이 언제 나와도 괜찮도록 졸랑보를 펼친 거다.

나는 그 뒤를 쫓아가면서 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번쩍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을 들은 것 같다.

무림은 명분이 최고, 하지만 그 명분조차 힘이 있으면 뭉개버릴 수 있다.

내 능력을 본 사람들이 나한테 누명을 씌워 죽이려 해도, 그게 다수이거나 힘이 강한 놈들이라면 통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면, 다른 사람을 모조리 눌러버릴 힘이 있다면, 나는 무림인이 떼거지로 몰려와 도둑이니 뭐니 누명을 씌워도 살아남을 수 있다.


'어차피 뭘 봐도 본능적으로 따라 할 수밖에 없는 게 내 재능이라면.'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모든 걸 배워서 최강이 되면 되는 거 아닐까?

어머니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거다.

희망이 햇빛을 타고 내려와 길을 비추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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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021 내가 소녀공 익혔다구? +3 22.01.25 499 28 14쪽
20 #020 예쁘기는 하지만... +8 22.01.24 519 30 15쪽
19 #019 약혼녀의 호위가 되었다 +4 22.01.23 621 28 15쪽
18 #018 만년한철을 뭉개는 주먹 +3 22.01.22 655 24 15쪽
17 #017 약혼녀의 향기 +4 22.01.21 710 21 14쪽
16 #016 힘내라, 적화야 +2 22.01.20 697 21 16쪽
15 #015 그녀의 웃음소리뿐 +2 22.01.19 745 25 15쪽
14 #014 약혼녀 집 앞에서 +3 22.01.18 760 23 14쪽
13 #013 제발 단칼에 떨어져라, 목! +2 22.01.17 783 25 15쪽
» #012 세계 최강이 되면 되지 +3 22.01.16 867 26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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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009 아버지, 저 도망가요 +3 22.01.13 1,193 31 14쪽
8 #008 도둑을 뛰어넘는 도둑 마적화 +4 22.01.12 1,248 31 15쪽
7 #007 마적화, 너는 대체 누구냐 +3 22.01.11 1,317 30 14쪽
6 #006 이상한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3 22.01.10 1,478 31 14쪽
5 #005 도망가야겠다 +4 22.01.09 1,618 34 13쪽
4 #004 소설의 강제력 +3 22.01.08 1,834 42 16쪽
3 #003 나는 살기 위해 밀고자가 되었다 +5 22.01.07 2,166 43 14쪽
2 #002 어머니를 닮았다 +7 22.01.06 2,780 49 13쪽
1 #001 천하제일인의 아들로 환생했다 +11 22.01.05 4,010 6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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