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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로마제국에 이혼한 공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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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렁컨66
작품등록일 :
2024.07.2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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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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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안토니아 공주와의 첫날 밤 (2)

DUMMY

<55>


‘휴우. 어느 정도 정리가 됐네.’


팔로티눔 황궁의 가장 안쪽.


거의 외부와 밀폐되어 있는 환락의 밀궁.


네로 황제가 화려한 연회를 열던 장소와 다르게 이 밀궁은 퇴폐적인 환락과 음탕함 그 자체다.


과거 칼리굴라 황제가 건설했다는 이곳은 벌거벗은 시녀들이 도처에 가득했고, 궁 내부엔 음탕함이 가득한 거대한 목욕탕까지 있었다. 특히, 그 온천탕 주변엔 진기한 나무들과 꽃이 자라 마치 천국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냥 그대로 매음굴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진한 음행을 벌이기도 했고, 또한 이곳 황궁 주인이 달라졌음에도 그녀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즉시 그 환락궁을 정리하는 수순부터 밟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길 내버려 두면, 나 역시 퇴폐와 향락의 제왕이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 이건 깊은 늪이다. 한번 들어가면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는. 아직 난 젊다. 그리고 적어도 난 네로 황제나 칼리굴라 황제 같은 그런 폭군이 될 생각도 없다.


그래서 그 환락궁부터 정리했다.


“폐하, 그 시녀들은 각각 5 아우레우스(금화)를 주고서 모두 궁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또한, 궁 내부 청소도 모두 마쳤습니다. 앞으로 그곳은 어떻게 쓰실 생각이십니까?”


아버지의 집사 데키무스. 그는 지금 황궁 시종관이 되었는데, 그런 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기존 시종관은 퇴임해서 궁 밖으로 나갔는데, 바로 그 자리에 데키무스가 들어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종관이라는 직위는 궁정 일반 업무 관리 외에도 궁정 재산 출납 등을 맡고 있어 일종의 황제 비서 격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버지 마르쿠스는 데키무스를 나에게 보낸 것. 아직 어지러운 로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다.


특히, 데키무스는 아버지를 충실히 따랐던 노예 출신이었고, 해방 노예가 된 이후엔 아버지의 영향 탓에 로마법에도 정통해졌다. 그래서 그가 가진 로마법에 대한 지식 등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곳은 당분간 비워두도록. 절대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틸리우스, 갈라, 아킬리우스는 도착했나?”


“이미 입궁한 뒤 기다리고 있는 중이옵니다.”


“바로 가자.”


“허면 제복은 어찌하시고?”


현재 간편한 튜닉을 입고 있는 나. 이게 좀 더 편하기 때문. 이걸 한국식으로 표현한다면 지금 나는 반팔셔츠에 치마 같은 하의를 입고 있다. 사실, 이 시대 로마인들은 남녀 상관없이 이런 치마 같은 하의를 입고 있는데, 다만 다른 점은 내가 입고 있는 튜닉은 금빛 수실이 옷에 박혀 있어 화려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공식 행사도 아니잖아? 바로 가자.”


그러면서 내가 앞장서자 갈색 눈의 데키무스는 황급히 날 뒤따랐다. 그리고 시종관 데키무스의 뒤로 또 다른 시종들과 근위병들이 뒤따랐고, 복도 곳곳 대리석 기둥마다 위치를 잡고서 서 있던 근위병들은 내가 나타나자 일제히 로마식 경례를 하기도 했다.


“저기 있군.”


잠시 후, 별궁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궁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틸리우스, 갈라, 아킬리우스가 두리번거리며 서 있다가, 날 보자마자 황급히 무릎을 꿇고서 머리를 숙였다.


지금 세 사람은 하나같이 더러운 옷이 아니라 아주 깨끗한 튜닉을 입고 있는데,


반백의 틸리우스는 어지러웠던 자신의 구레나룻을 손질한 것 같았고,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때자국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은 갈라와 아킬리우스도 마찬가지.


‘다들 생각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대장간의 열기와 고된 일들 때문에 언제나 찌푸린 표정이었던 틸리우스. 그는 헐리우드 중견 배우 뺨치는 인상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는 갈라는 틸리우스보다 작은 체격이지만 역시 호리호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출신 노예였다가 내가 해방 노예로 승격시켜준 아킬리우스는 유일하게 새하얀 안구를 반짝이며 날 슬그머니 쳐다보고 있다.


“데키무스! 근위병들은 모두 밖으로 보내도록!”


“허나 폐하! 괜찮겠사옵니까? 저들은 일개 야공들이옵니다.”


“허나 내 충직한 신하들이지.”


“알겠사옵니다. 폐하. 허면 적어도 저만은 이곳에 남아 있어도 되겠사옵니까?”


시종관 데키무스는 아주 공손하게 나에게 물어봤고 내 안위를 걱정하는 그의 제안에 나는 거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키무스는 어느 근위병으로부터 칼 한 자루를 받은 뒤 그걸 소지하고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이럴 때 키르케가 옆에 있으면 더 좋을 텐테. 그러나 키르케는 여자여서 근위병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이곳 황궁의 시녀가 되는 방법뿐.


그러나 아버지 마르쿠스는 키르케를 아직 완벽하게 믿을 수 없다고 한다.


- 폐하는 과거의 폐하가 아닙니다. 황제의 측근 시녀가 되는 것과 한낱 귀족가 자제를 위한 호위병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천양지차입니다.


그러니까 이집트 노예 출신인 그녀가 갑자기 변심하게 된다면 황제인 내 생명이 아주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그 일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


“틸리우스. 그럼 그 강철 생산은 어떻게 되고 있나?”


곧이어 내가 자리에 착석한 뒤 그들에게 질문하자, 틸리우스는 공손하게 대표로서 대답했다.


“폐하! 명하신 대로 강철검 2천 자루, 강철 흉갑 2개, 강철 투구 2개, 강철 보호대 등을 모두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강철검 100자루와 강철 흉갑 및 강철 투구 등은 수레에 실어 가져왔습니다.”


“수고했다.”


현재의 여건상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 그리고 그 덕분에 내 호신 무기들이 어느 정도 갖춰졌다. 특히, 이 강철검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 근위병들에게 지급될 텐데. 물론 이들 근위병들은 아버지 마르쿠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사람들로 이미 대체된 상태다.


그러고 보면, 내가 황제가 된 지 어느덧 두 달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데, 이런 신변 보호 일 외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갈수록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그사이 강철검 생산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쿨라와 내가 소유한 각 대장간에 대형 용광로 설치도 완료되었기 때문.


그리고 그들 대장간들은 황궁 근위대 병사들이나 순찰대 병사들이 지키지 않고, 로마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수호 군단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중이다.


이런 경비에 근위대 병사들과 순찰대 병사들을 이용하지 않은 건, 결국 그들 대다수가 티겔리누스에 충성하기 때문.


그럼에도 그런 조치들 덕분에 주요 기밀들이 새어나가는 걸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고, 무기·무구 제작 외에도 스틸리우스(스테인스강) 제작 역시 좀 더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


“폐하!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장간 창고에 쌓아둔 강철 무기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창고들을 반드시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스틸리우스 제품들은 로마 식기 마트를 통해 바로 바로 판매가 되지만, 일반 무기·무구들과 다르게 강철강 무기·무구들은 내 허락 없인 아직 대장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앞으론 이런 무기저장고에 대한 각별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알겠다. 틸리우스. 그리고 갈바. 두 사람은 내가 정해준 일자에 맞춰 강철강 무기·무구들을 계속 생산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집중하라. 창고 건설 건은 내가 따로 명령해두겠다. 그리고 아킬리우스! 넌 잠시 남도록.”


그러자 틸리우스와 갈바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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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스승님 근데 괜찮으십니까? 전 땀이 너무 나서.”


갈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계속 훔쳐냈다. 조금 전 너무 긴장했기 때문.


대장간 주인이 하루아침에 황제가 되었고, 빛나는 황궁의 주인이 되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틸리우스 역시 갑자기 몸을 숙이며 후들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켰다.


대장간 주인으로서 그를 볼 때와 다르게, 황제가 된 그를 대하는 것은 곤혹 그 자체.


황제는 언제든 자신들을 죽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자신은 일개 평민 나부랭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런데 과거 자신은 황제의 면전에서 미친 짓도 했다.


황제가 만든 무기를 감히 비웃은 것.


다행히 황제의 칼이 자신의 역작을 깔끔하게 베어버렸지만, 만약 그게 반대가 됐다면 그 상황은 어떻게 됐을까.


오늘 같은 날, 불벼락이 떨어져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그땐 기분이 무척 상했지만, 정작 기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목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틸리우스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이리저리 만졌다. 솔직히 자신에게 근위대 병사 한 명조차 무서운데, 황제는 눈짓하나만으로 그 근위병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황제는 그런 위치에 있다.


“어서 가자. 지금부터 우린 무조건 폐하의 종이 되어야 한다. 무조건! 이게 우리가 살길이고 우리가 출세할 길이다.”


그 말에 갈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틸리우스를 따라갔다.


조만간 로마 황궁에 또 다른 행정관 직책들이 신설된다고 한다.


아직 그 직책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황제는 그 중의 한 자리를 틸리우스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건 평민 계급에서 단숨에 귀족 계급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


일개 야금장인 틸리우스로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회.


무조건 목숨을 걸고서 충성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


“아킬리우스. 좀 더 가까이 다가오너라. 그리고 데키무스! 아까 내가 맡긴 파피루스를 모두 가져오도록.”


내 명령에 따라 데키무스는 잠깐 밖으로 나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이때 데키무스가 가져온 파피루스는 수십 장.


그걸 바닥에 차례로 펼치자, 그 넓이가 제법 된다.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섰고 그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는 데키무스와 아킬리우스.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고 아킬리우스에게 더 손짓했다.


"더 가까이 와!"


그 말에 아킬리우스는 잠시 데키무스를 쳐다보다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이때 나는 양반다리를 하며 앉았지만, 아킬리우스는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


‘불편하게 시리.’


그러나 양반다리 자체가 이 로마에는 익숙하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저 그림들을 자세하게 보는 것과 내 설명들을 아킬리우스가 잘 이해하는 거다.


먼저 난 이공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뭔가 제작하는데 큰 소질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아킬리우스를 부른 것.


솔직히 탄소강이나 스테인리스강을 만든 것도 내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그걸 진짜 만들어낸 것은 바로 아킬리우스와 같은 야공들이 아닌가.


이 시대 로마 야공들은 현시대 최고의 제작자들, 공학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아킬리우스는 비록 노예 출신이지만 아주 똑똑한 녀석.


반복되는 일들에 대해 관리·감독에 능한 틸리우스보다 좀 더 재기가 넘치는 아킬리우스는 내가 계획하는 일들에 대해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


“이거 좀 봐. 이건 거북선이라는 건데,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을까? 물론, 쇠는 물에 가라앉지만, 이른바 부력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이게 뭐냐면···(중략). 그리고 이건 화포라는 건데, 여기서 불을 터트려 그 힘으로써 둥근 쇳덩이 같은 걸 빠르게 밀어내는 거야. 그러니까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하지?”


어쨌든 나는 머리를 쥐어 짜내면서 계속 설명했고, 최대한 아킬리우스가 그 아이디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게 바로 잔잔한 수면에 큰 돌을 던지는 격인데.


그러나 그 파문이 얼마나 번지게 될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적어도 뭔가 기대감 정도는 가질 수 있겠지.


"이해가 어느 정도 됐으면 다시 궁리해 보고, 뭐든 질문할 게 있다면 언제든 궁을 찾아오도록. 데키무스! 아킬리우스가 날 찾으면 반드시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아킬리우스에게 가문 호위병 키르케를 붙여주도록 해라."


어쨌든 나는 큰 돌을 던진 뒤, 혼란에 휩싸인 아킬리우스를 틸리우스 대장간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곧이어 다음 손님도 맞이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중요한 손님.


현재 원로원에서 주도하고 있는 내 결혼식.


그리고 그 결혼식의 당사자가 된 어느 여자.


바로 절세미녀 안토니아 공주가 시간에 맞춰 궁에 도착한 것이었다.









<56>


투구를 쓰고 있고 사슬 흉갑을 착용하며 그러나 무기가 모두 제거된 총관 메투스. 그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안토니아 공주와 함께 별궁에 나타났다.


그러나 메투스는 더 다가오지 못했고 입구에 멈춰 선 뒤, 데키무스의 눈짓에 따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느새 그 주변으로 근위병들도 나타났다.


한편, 그 메투스의 옆으로 처음 보는 어느 아리따운 시녀가 함께 서 있다.


“폐하, 그러면 저흰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시종관 데키무스는 이번엔 눈치껏 행동했다.


그는 공손하게 물러선 뒤, 화려한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바람에 총관 메투스와 그 시녀도 더 뒤로 물러서게 되었고, 이윽고 문이 닫히자 그들의 모습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색한 포즈로 의자에 앉아있던 나.


비로소 문 쪽에서 시선을 뗀 뒤 고개를 돌렸다.


이때 날 뚫어져랴 쳐다보고 있는 안토니아 공주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사실, 안토니아 공주는 황족이다. 그래서 황제의 앞에서 과다한 예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비로소 그녀는 가볍게 인사했다.


“폐하, 다시 뵙습니다.”


그러고는 이내 뭔가 기쁜 듯 날 웃으며 쳐다보는 안토니아 공주.


그 웃음은 무척 싱그러웠다.


그러고 보면, 과거 내 침실로 찾아왔던 그녀.


그때도 그 행동에 어떤 거부감이 없었는데, 지금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


그 때문에 좀 어색해진 것은 바로 나.


하루 아침에 신분이 바뀐 터라 이제 공주보다 내 신분이 더 높아진 것이다.


거기다가 조만간 저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는 생각에 좀 황당하면서도 좀 어색했다.


서로 만난 게 고작 몇 번.


그런데도 안토니아 공주는 순식간에 내 정혼자가 된 것이다.


한편, 공주는 어색한 모습을 보이는 나에게 유유히 다가왔고, 그날 침실에서 경험했던 바와 같이 백옥같이 하얀 손을 날 향해 뻗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들을 보자 나는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정혼자에 대해선 혹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싶어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고, 그녀의 손등에 황급히 키스했다.


그러자 흠칫 놀라는 안토니아 공주.


설마 이게 아닌가.


설마 이 시대 예법이 아닌가.


적어도 정혼자에 대한 서양식 예법이라고 생각했는데.


한편, 안토니아 공주는 뭔가 재밌다는 듯 그리고 손등이 무척 간지럽다는 듯 이번엔 눈을 살짝 찡그리며 웃다가 이내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손을 거둔 뒤, 다시 다른 손을 뻗어 내 옷을 가리켰다.


“폐하. 폐하 옷차림은 언제나 특이하시네요.”


그러니까 지금 나에게 손을 뻗은 것은 자신의 손을 나에게 맡긴 게 아니라 내 옷차림을 지적한 것.


아차차차차! 내가 안토니아 공주를 다시 만나게 되자 나도 모르게 좀 흥분했나 보다.


그러면서 정신을 차리던 중 불현듯 대한민국에 있는 아내가 떠올랐고 갑자기 크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모습들을 아내가 본다면 그곳의 아내는 어떤 마음이 들까.


하지만 이내 나는 긴 한숨을 삼켰다. 이젠 어쩔 수 없는 일. 돌이킬 수 없는 일. 이곳에선 대한민국 김동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몸뚱이는 바로 카리우스의 몸뚱이.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긴 시간을 이미 거슬러 올라온 것이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다른 일이 있어 제가 신경을 못 썼네요."


그렇듯 내가 깔끔하게 사과하자, 오히려 그 모습에 공주는 또 놀라는 것 같다.


현재 나는 가벼운 튜닉 차림인데.

화려하게 꾸미고 나타난 공주의 모습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닙니다. 폐하. 일부러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폐하께선 뭐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다만, 그땐 꼭 미이라 같았는데···.”


그러면서 고개를 조금 숙이며 웃는 안토니아 공주.


그러니까 아차차차, 이것도 아니었다.


정작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그날 침실의 내 모습.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웃게 되었고 어색함이 많이 풀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


“어쩌면 카리우스님은 저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냈겠죠. 리빌라 공주님의 혈통을 이었다는 사실은 반드시 감춰야 했을 테니까요."


여긴 우리 둘뿐이라 안토니아 공주는 지금 내 이름을 직접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편안한 말투는 나에게 무척 친근하게 다가왔다.


“공주님, 뭐 어쩌다 보니 전 이렇게 됐습니다. 원래 전 그냥 부유한 상인이 될 생각이었는데."


이때 나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고, 그러자 안토니아 공주는 이번에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의아해하며 물어보자,


“그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태어나는 순간에도 황제가 될 운명이었다고. 제 모든 걸 자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했어요. 제 처녀성까지."


그러니까 네로 황제 그놈 이야기였다.

태생적으로 근자감이 넘쳤던 놈.

지독한 자기애에 빠졌던 녀석.

그딴 식으로 공주에게 구애를 보냈으니 공주가 그를 쳐다보기나 했을까.


그러나 황제 같지도 않고 그냥 평범해 보이는 내 모습에 안토니아 공주는 그것만으로도 호기심이 발동한 것 같았고, 그래서 날 쳐다보는 두 눈엔 점점 더 호기심과 호감이 짙어지고 있었다.


근데 이게 그냥 색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정상인데.


단지 이것만으로도 난 공주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도대체 네로 황제는 얼마나 미친 놈이길래 이 평범함 자체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


“근데 그 상처는 다 나으셨어요?”


한편, 시간차 때문에 그 화살 상처에 대해 다시 물어보는 공주.


그러나 그 대답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어서 나는 간단하게 대답한 뒤, 다른 제안을 했다.


“공주님, 여긴 너무 답답한데 저쪽 정원으로 나갈까요? 정원이 무척 아름다운데 같이 나가실까요?”


그러자 날 빤히 쳐다보는 공주.


이때 나는 오랜만에 다시 연애를 시작한 터라 과거 경험들을 떠올리며 좀 더 과감해졌다.


그래서 더 다가서며 공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흠칫하는 공주.


눈을 조금 크게 뜨는 공주.


이 순간, 난 조금 당황했다.


설마 지금 내 행동들이 뭔가 과한 걸까.


그래서 조금 주춤거리자, 공주는 피식 웃더니 소곤거렸다.


"폐하께선 역시 자유로우신 분이시군요. 예법을 따지지도 않고."


예법? 무슨 예법?


순간 머릿속 기억들을 빠르게 떠올리다가, 불현듯 내가 배웠던 로마 문화에 대한 것들이 차례로 생각났다.


그러니까 로마에선 남녀가 실내에선 뭐든 할 수 있으나 바깥에선 손을 잡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손을 잡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래서 흠칫한 것.


그러나 난 황제다. 예법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그 때문에 손을 놓지 않고 슬쩍 끌자 공주의 입가엔 다시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당신은 재밌는 분이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뭔가 재밌다는 듯 뭔가 즐겁다는 듯.


-----


“공주님! 표정이 무척 밝으시네요. 공주님을 구해주신 폐하께선 역시 좋은 분이시군요?"


황궁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는 길. 그 와중에 황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편, 지금은 전시 상황 외에도 전임 황제가 암살당한 사건까지 겹치다 보니 이런 길목마다 수많은 근위병들이 창을 들고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화려한 마차 안.

안토니아 공주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아리따운 시녀 페네로페를 웃으며 쳐다봤다.


갈리아 귀족 출신인 페네로페.

그녀는 뭔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공주를 쳐다보고 있다.

이때 안토니아 공주는 뭔가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은 분이셔. 그리고 재밌는 분이시고. 하지만 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는 페네로페. 그녀가 계속 쳐다보자,


“얼굴도 좀 타신 것 같고, 눈빛도 좀 더 강해지신 것 같고.”


“혹시 폐하께서 대장간 일을 하셨다던데 그 때문일까요?”


그러자 안토니아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도 있고, 뭐 아닐 수도 있고.”


모호한 대답.


그러나 더는 이야기하지 않아 페네로페는 이내 다른 질문을 던졌다.


“키스는 하셨어요?”


그러자 흠칫하는 안토니아 공주.


“공주님! 두 분은 곧 결혼하시게 돼요. 지금 가장 중요한 순간이 아닌가요? 폐하의 마음을 얻어셔야죠. 그리고 키스는 공주님의 당연한 권리가 아닌가요?”


“나의 당연한 권리?”


“로마의 예법에, 남편에게 키스하는 것은 로마 여인들의 정당한 권리예요.”


“하지만 아직···.”


“곧 결혼하실 거잖아. 뭘 주저하세요?”


그러면서 페네로페는 사파이어 빛의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안토니아 공주는 그런 페네로페가 짓궂다는 듯 쳐다보다가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자신이 너무 주저했나,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손등에 키스한 것과 자신의 손을 잡고서 별장 정원을 거닐었던 기억들이 떠오르자 안토니아 공주의 눈빛은 다시 밝아졌다.


무척 즐거웠던 기억들. 공주이기 때문에 자신은 함부로 연인을 만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카리우스. 그는 무척 젊고 무척 맑은 눈을 가진 남자다. 그래서 그가 그날 자신을 구하려고 뛰어들었을 때, 그 순간 그녀는 심장의 큰 떨림을 경험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말하지 않았던. 네로 황제에게선 절대 느끼지 못했던 떨림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페네로페. 한편, 페네로페는 그때부터 계속 조언을 이어나갔다.


“공주님. 공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세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나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들이 필요해요. 남자들은 유독 그런 여자들을 더 좋아한답니다.”


계속 이어지는 페네로페의 조언들은 무척 자극적이다. 어떻게 남자를 잘 다룰 수 있는지, 어떻게 섬세하게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는지, 페네로페의 우아하면서도 무척 자극적인 말들을 들으며, 안토니아 공주는 두 눈을 크게 뜨기도 했고 때론 그 눈동자가 더 빛나기도 했다.


갈리아인 귀족 출신인 페네로페.


그녀는 갈리아인 어느 귀족의 딸인데, 헤타란의 노예가 될 뻔하다가 헤타란 주인 루벨리아 공주의 도움으로 안토니아 공주에게 보내진 뒤, 안토니아 공주의 시녀가 되었다.


이후 안토니아 공주와 거의 자매처럼 지내게 된 페네로페.


그녀는 최근에 다시 로마에 복귀했는데, 공주의 허락을 받아 자신의 고향 갈리아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런 페네로페는 이 시대 야만족 부류에 속한 갈리아인이지만, 그러나 갈리아인 귀족이기 때문에 단순한 야만족이 아니었다.


“공주님, 제가 더 많이 가르쳐드릴게요. 결혼하시기 전까지.”


그러면서 더 은근해지는 페네로페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안토니아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다면 저 시녀 페네로페는 어떻게 그런 일들을 잘 알고 있을까.


헤타란의 주인 루벨리아 공주한테서 들었던 바, 페네로페는 갈리아에 있을 때 이미 뭇 사내들과 많은 사랑을 나눴다고 한다. 다만, 페네로페의 아버지가 당시 속주 반란을 주도하다 보니 페네로페는 로마에 붙잡혀 왔으나, 만약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귀족으로서 수많은 남자들을 발아래에 두고서 수많은 사랑과 연정의 대상이 되었을 거라고 한다.


이런 이력 때문에 헤타란의 주인 루벨리아 공주는 그런 페네로페를 유심히 지켜봤다고 하는데, 다행히 네로 황제에 대한 적의 외에는 별다른 증오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루벨리아 공주는 페네로페를 안토니아 공주에게 보내게 되었고, 이후 페네로페는 외로운 안토니아 공주의 말동무가 되었다.


“근데 공주님! 폐하란 분은 대체 어떤 분이시죠? 제가 먼발치에서 봤을 때 무척 젊고 무척 준수하신 분이시던데. 예전엔 방탕아라는 소문이 자자하지 않았나요? 예전엔 어떤 분이셨어요?”


하지만 안토니아 공주도 젊은 황제의 과거 모습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머뭇거리자 페네로페의 입가엔 사르르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안토니아 공주의 청초한 미소와 다른, 다소 고혹적인 미소.


“그럼 다음에 황궁으로 가실 때 저도 폐하께 인사드리고 싶어요. 어떤 분이신지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그러자 안토니아 공주는 그게 좋겠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다음엔 널 소개할게.”


“감사합니다. 공주님.”


다시 고혹적인 미소가 입가에 번지는 페네로페.


그런 페네로페를 안토니아 공주는 정겹게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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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로마제국에 이혼한 공주가 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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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첫날 밤, 그리고 태동 (1) +4 24.09.14 817 20 12쪽
27 수부라의 현인 (2) +5 24.09.13 787 22 7쪽
26 수부라의 현인 (1) +4 24.09.12 891 26 31쪽
» 안토니아 공주와의 첫날 밤 (2) +4 24.09.10 1,086 18 25쪽
24 안토니아 공주와의 첫날 밤 (1) +4 24.09.07 1,327 29 23쪽
23 카리우스 네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5 24.09.05 1,275 33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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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황제가 되다 (1) +3 24.08.31 1,450 30 14쪽
20 쿨라의 결단, 새로운 로마황제 +5 24.08.30 1,433 3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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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세의 길이 보인다 +9 24.07.30 2,486 63 22쪽
4 향락의 밤, 벌거벗은 무희들 +4 24.07.28 2,631 59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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