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4,991
추천수 :
304
글자수 :
612,952

작성
21.03.18 23:31
조회
38
추천
3
글자
12쪽

26. 6구역 (2)

DUMMY

성 꼭대기에서 나리아는 작업에 매진했다. 전선을 끌고 성 아래와 위를 오가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헌진은 나리아의 작업을 거들어주지 못했다. 과거 전선을 잡아당기다가 몇 번이고 끊어버린 적이 있으니 나리아가 안심하고 맡길 리 없었다.


“구리선이 얼마나 귀한데, 모르는 사람한테 맡길 수는 없잖아요?”


몇 명쯤은 사람을 부릴 수도 있다. 루미스의 제안도 그렇게 거절한 나리아는 열심히 성을 오르고 내렸다.


제국군은 나리아를 제지하지 않았다. 기사단과 얽힌 소녀를 건드릴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전기를 사용해도 되냐는 나리아의 물음에 집정관 볼프람은 잠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허가했다. 나리아의 뒤에 심드렁하게 서 있는 헌진을 잠시 노려볼 뿐이었다.


바삐 움직이던 나리아는 4번째 왕복을 마치고 쓰러져 잠을 잤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해가 점차 기울고 있었다. 멍하니 태양을 바라보던 나리아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작업을 개시했다.


“거기 드라이버랑 못 좀 주워줄래요?”


졸린 눈으로 장갑을 고쳐 끼며 나리아가 기계장치에 매달렸다. 오늘 밤까지 작업을 마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니 시간이 없었다.


나리아의 뒤에서 잠시 우왕좌왕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공구 더미를 헤집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드라이버가 뭔지는 알고 있······.”


고개를 돌린 나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그곳에는 루미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공구를 더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무생물을 식별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어, 미, 미안해요! 저는 헌진인 줄 알고······.”

“헌진은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녀는 손끝으로 읽어내리다가 마침내 나리아가 주문한 것을 내밀었다.


“이게 맞습니까.”

“네, 맞아요······.”

“한 번 촉감을 기억해두면 다음부터는 잘 찾을 수 있습니다.”


나리아가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손안에서 드라이버를 굴리던 나리아가 루미스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없는 사람을 대하기란 어쩐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배려가 없으면 무례이고 지나쳐도 무례이다. 안 그래도 기사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족속들인데 루미스는 둘 다 겸했으니 나리아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지하에서 거의 평생을 지닌 나리아가 사람을 대하는 일에 익숙할 리 없다. 나리아는 다시 창밖으로 의식을 돌린 루미스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음······지금 뭐 하고 있어요?”

“관측 중입니다.”

“어디까지 가능해요?”

“필요한 범위 내라면.”


나리아는 순간 맥이 빠졌다. 어쩌면 천리안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짐승을 포착하는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소음이 심해 식별이 힘듭니다.”

“그, 그래요?”


그렇다면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나리아는 기운을 차리고 작업을 재개했다.


“루미스는 안 물어봐요? 제가 뭔데 헌진을 따라다니는지.”

“알 필요가 있을 때 묻겠습니다.”


짤막한 대답에 나리아는 무안했다. 자꾸만 찾아오는 침묵이 어색했다. 스스로는 그다지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루미스와의 침묵이 무거운 모양이었다.


나리아는 헌진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새삼 의식했다. 그는 루미스라면 나리아를 맡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무르히와 다르다. 그리고 나리아는 그것이 궁금했다.


“루미스는 헌진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래야 합니까.”

“적어도 제가 아는······무르히라고 했죠? 그 기사는 그랬거든요. 아, 들은 거지만요. 아는 사이는 아니에요. 그리고 헌진은 루미스의 눈을 그······했잖아요?”


나리아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고자 했다. 통신장애와는 다른 의미로 말문이 걸렸다. 적어도 보통사람처럼 대화하고 싶었다. 모든 게 겉으로 드러나는 마린은 대하기 편했는데 루미스는 달랐다.


“혹시 불쾌한 질문인가요? 제가 지금 대화를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이랑 대화를 잘하는 법을 조사해보기는 했는데······.”

“헌진의 행동에는 헌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나리아의 말에 루미스가 끼어들었다. 나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저는······모르겠습니다. 헌진은 항상 저보다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그를 따랐습니다. 이제는 단장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본질적인 부분은 같습니다.”

“눈에 관해서도요?”

“제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헌진의 눈이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루미스가 눈가를 쓰다듬었다. 남들보다 깊게 팬 부분을 더듬는 행위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기사는 감각 한두 가지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건 제 허물이 아닙니다. 헌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미스가 무르히랑 다른 이유는요.”


나리아가 손에 공구를 든 채 루미스를 돌아보았다. 루미스도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공격에 있지 않을까 해요. 헌진의 체인소드가 얼굴을 가를 때 발생한 역장이 머릿속에 있는 기사단의 칩을 망가뜨린 거죠. 그래서 기억 왜곡도 없고, 감정이 뒤틀리지도 않은 거예요.”


루미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루미스는 솔직할 수 있는 거죠. 적어도 무르히보다는.”

“그렇습니까.”


나리아의 말에 루미스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일에 매진할 뿐이었다.


“저는 제가 더는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루미스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한동안 작업하는 소리만 났다. 그리고 침묵이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을 때, 나리아는 머릿속으로 사람과 능숙하게 대화하는 법 1장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기, 루미스는 취미가 뭐예요?”




헌진이 봉투 한 아름을 들고 돌아오니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루미스가 다소 핼쑥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 비유하자면 넋을 놓았다고도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 이유는 벽을 향한 채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리아의 입에 있었다.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중에 눈이 먼 사람이 범죄조직과 싸우는 내용이 있거든요? 뭐, 언어를 이해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 내용이 아닐 수도 있지만, 분위기란 게 있잖아요. 거기서······.”

“그렇습니까.”


맞장구를 치는 루미스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기사 중에서도 적었다. 헌진은 피식 웃으며 나리아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밥이다.”

“오, 왔어요? 이게 다 뭐에요?”

“피자 가게는 박살 났다더군. 장소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충 주워왔다.”

“제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요. 이래 봬도 까다롭거든요?”


반색하며 봉투를 풀어헤치는 나리아를 뒤로 하고 헌진은 루미스 옆에 섰다. 그녀는 나리아가 입을 다물자 안도하는 듯이 보였다.


“어땠나.”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부쩍 늘었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게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저 친구가 필요한 것뿐이야. 그동안 외로웠으니 그럴 만도 하지.”


헌진이 합성식 한 조각을 내밀었다. 루미스는 잠자코 그것을 입에 넣고는 잠시 코끝을 찡그렸다.


“피 냄새가 납니다.”

“잠시 둘러보고 왔다.”

“어땠습니까.”

“소강상태지만 밀리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진형이 뭉친 채 굳어있다. 방어에 전념한다는 건 앞으로 뻗어 나갈 수 없기 때문이겠지.”

“적병······5구역의 병사들을 보았습니까.”

“아직 보지 못했다. 듣기로는 제법 난폭한 모양이더군.”


여전히 식사에 무관심한 헌진은 합성식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웠다. 등 뒤에서 나리아가 햄버거를 들어 올린 채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비전투 구역은 유지되는 것 같던데.”

“오래 가지 않을 겁니다. 중간지역인 대교를 5구역이 점령한 채 남진하고 있습니다. 한 번 암묵적인 선을 넘어온 이상 그 이상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전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이제 상하관계에 있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맺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5구역의 기사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미르돈과 대화한 적은 있나.”

“거부당했습니다. 그도 전선에 나오지 않았고, 전령을 통해 그저 폐하의 명에 따라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미르돈이라니.”


그의 전임이었던 알베릭이라면 그나마 말이 통했을 것이다. 어쩌면 의도된 인선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황제의 의도라면 확실했다.


“미르돈은 어떤 기사인데요?”


나리아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입안 가득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광신도다.”

“신을 믿는다고요? 종교는 어떻게 알고?”

“아니, 그는 황제를 신으로 받든다.”


기사단이 맹목에 가까운 충성으로 황제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르돈의 충성심은 성향이 달랐다. 그는 황제가 일으킨 기적을 믿으며 황제를 신이라고 불렀다. 황제는 직접 미르돈에게 종교적인 발언을 그만두도록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는 그만의 교리를 마음속으로 건설했다. 헌진은 미르돈이 그만의 교리로 자신의 제안을 거부한 전적을 떠올렸다.


‘폐하께 귀국하자고 건의하겠다고요? 우리는 후퇴할 수 없습니다, 단장! 그것이 폐하의 영광입니까? 단장은 지금 폐하의 예지력을 의심하는 겁니까? 우리는 그분이 인도할 낙원에 당도하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에 대해 언급할 때만 열성적으로 되었던 미르돈이 지금은 대교 너머 어딘가에 있다. 헌진은 원만하게 윗구역으로 올라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신이 전쟁을 바라신다는 거군요.”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성안에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는 법인데.”

“어쩌면 황제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기사일지도 모르지.”


루미스가 작게 어깨를 움츠렸다. 나리아는 자신이 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던 루미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보다 완성됐나, 나리아.”


나리아는 이미 햄버거 하나를 끝장내고 봉투를 뒤져 하나를 더 꺼내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요. 저기 저거 보여요?”


루미스의 거처 한구석에 나리아의 아지트가 완성됐다. 7구역의 것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나리아가 장담한 만큼 충분히 기능할 것이다. 헌진은 온갖 글자가 복잡하게 떠오르는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목표를 설정하지. 윗구역으로 넘어갈 방법을 찾으며 허수의 정체를 파헤치고 이 전쟁의 의도를 밝힌다.”

“막연하네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헌진이 루미스에게 시선을 보냈다.


“필요하다면, 미르돈을 친다.”


루미스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미르돈을 친다는 것은 기사단의 개입을 유발하는 말이다. 그러나 끝끝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급변했다. 갑자기 루미스가 고개를 들더니 창을 집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살벌한 분위기에 나리아가 햄버거를 향해 막 벌리던 입을 멈추었다. 헌진은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나타났나?”

“나타났습니다.”


루미스가 창틀에 발을 올렸다. 몇 번이나 그런 행위가 있었는지 그녀의 발이 닿은 곳은 너덜너덜했다.


“출격하겠습니다.”


루미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창틀을 밟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화살처럼 쏘아졌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진 루미스가 땅에 꽂혔다. 나리아가 황급히 아래를 살피자 피어오르는 흙먼지 사이로 뛰쳐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화살 같네요. 아니, 미사일?”

“여전하군.”

“헌진은 안 갈 거예요?”

“나는 너를 지켜야 한다.”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헌진에게 나리아는 문득 쑥스러웠다.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리아는 단말기 앞으로 돌아가 인근 지역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26. 6구역 (2) 21.03.18 39 3 12쪽
26 25. 6구역 (1) 21.03.17 43 3 13쪽
25 24. 설계자 (2) 21.03.16 42 3 13쪽
24 23. 설계자 (1) 21.03.15 36 3 12쪽
23 22. 눈 없는 기사 (3) 21.03.12 46 4 11쪽
22 21. 눈 없는 기사 (2) 21.03.11 66 3 14쪽
21 20. 눈 없는 기사 (1) 21.03.10 44 3 13쪽
20 19. 강철이 부르는 소리 (4) 21.03.09 47 3 12쪽
19 18. 강철이 부르는 소리 (3) 21.03.08 46 3 12쪽
18 17. 강철이 부르는 소리 (2) 21.03.05 47 4 12쪽
17 16. 강철이 부르는 소리 (1) 21.03.04 58 3 11쪽
16 15. 씨앗이 없더라도 (3) 21.03.03 34 3 13쪽
15 14. 씨앗이 없더라도 (2) 21.03.02 34 4 12쪽
14 13. 씨앗이 없더라도 (1) 21.03.01 45 4 12쪽
13 12.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3) 21.02.26 43 3 13쪽
12 11.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2) 21.02.25 51 5 14쪽
11 10.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1) 21.02.24 52 3 14쪽
10 9. 돌을 깰 수 없어도 (3) +1 21.02.23 52 4 11쪽
9 8. 돌을 깰 수 없어도 (2) 21.02.22 53 4 11쪽
8 7. 돌을 깰 수 없어도 (1) +1 21.02.19 62 5 12쪽
7 6. 목이 잘려도 (4) 21.02.18 60 2 11쪽
6 5. 목이 잘려도 (3) +1 21.02.17 94 3 12쪽
5 4. 목이 잘려도 (2) 21.02.16 92 4 12쪽
4 3. 목이 잘려도 (1) 21.02.15 112 6 12쪽
3 2. 짐승을 베어도 (2) +2 21.02.14 139 9 17쪽
2 1. 짐승을 베어도 (1) 21.02.14 313 9 16쪽
1 0. 도시의 말미 +3 21.02.14 579 13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