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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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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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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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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5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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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3. 설계자 (1)

DUMMY

사쿠마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레를 끌었다. 성내에 들어서는 동안 수레 뒤를 밀고 있는 밤까마귀 조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급조한 수레에는 각각 다른 크기의 상자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 위에는 나리아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앉아있었다.


“다 옮겼소.”


나리아를 올려다보는 사쿠마의 시선은 다소 불만에 차 있었다. 안 그래도 무거운 수레인데 작은 몸 하나쯤 상관있냐며 나리아가 올라탔다. 사쿠마는 처음에 흔쾌히 승낙했다. 실제로 별 차이는 없었지만, 수레의 무게는 상상을 넘어섰다.


“고생했어요.”

“쾌적하셨소?”

“그럼요. 흔들림 없어서 얘들도 안전할 거예요.”


모두 지하 아지트에서 꺼내온 물건들이었다. 개중에는 처음으로 햇빛을 보는 것도 있었다. 나리아가 굳이 수레에 올라탄 것도 반드시 상자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리아가 상자에 찰싹 달라붙어 쓰다듬었다.


“역사의 무게란 결코 가볍지 않죠.”


그 좁은 통로에서 물건을 꺼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사쿠마의 힘으로 그럭저럭 해결되었다. 사쿠마는 나리아에게 빚도 있으니 인력이 필요하다는 말에 자청했다가 호되게 고생한 꼴이었다.


“그걸 다 들고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거야?”


작업 과정을 지켜보던 마린이 물었다. 나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헌진이 옮길 거니까 괜찮아요.”


마린이 과연 사쿠마가 저렇게 고생한 무게를 헌진이 끌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저절로 떠오르는 장면에 이해했다. 헌진이라면 수레를 한 손으로 끌어도 문제없을 것이다.


“그, 도서관이라고 했지? 박살 나면 어쩌려고 그래?”

“백업은 준비해뒀어요. 문제는 헌진의 갑옷인데, 어차피 고칠 방법을 찾지 못하면 고물이나 다름없으니 밑져야 본전이죠.”


가장 커다란 상자를 나리아가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거대한 갑옷이 그 안에 있었지만 마린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헌진의 칼이나 무르히의 철권처럼 일반인의 상식을 넘어서는 물건에는 애초에 흥미를 느껴봤자 위험할 뿐이다.


“고생했다.”


헌진이 수레에 다가왔다. 그는 루미스가 떠나고 이틀 내내 잠을 잤다. 잠이라기보다는, 가동을 중지한 기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6구역으로 출발하기 전날인 오늘 마침내 눈을 떴는데, 그동안 몸에 있던 상처는 사라졌고 움직임은 멀쩡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던 몸이 회복된 것을 보자 마린은 기사란 족속을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헌진이 수레에 다가와 넘겨받았다. 사쿠마는 내심 아무리 헌진이라도 혼자 옮기기는 무리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마린의 상상대로 그는 정말로 한 손으로 수레를 끌었다.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사쿠마는 작게 입을 벌렸다.


“역시 캡틴이십니다.”


조직원 하나가 눈을 빛내며 헌진에게 말했다. 헌진은 다소 민망하게 표정을 찌푸렸다. 헌진이 잠을 자는 동안 밤까마귀는 헌진을 부르는 호칭을 정했다. 한참 고민하던 그들은 보스이자 사장이자 대장인 마린이 있으므로 헌진에게 캡틴이란 호칭을 붙였다. 헌진을 좇아 밤까마귀란 조직명이 정해졌으므로 자연스러운 순서라고도 했다. 헌진은 그들을 최선을 다해 무시하기로 했고,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수레를 관문 가까이에 댄 헌진은 다시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6구역으로 올라가기 전에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자유자재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마린은 이틀간 7구역의 병영을 협박하고 어르는 일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사이사이에 면목 없는 얼굴로 서류를 내미는 사관들과의 입씨름은 당연했다.


상자에서 뛰어내린 나리아가 헌진에게 다가가더니 냅다 귀에 손을 꽂았다. 헌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리아는 고장 난 통신기를 회수했다. 그 광경을 본 마린은 욕을 내지를 뻔했다. 통신기는 긴 전선과 함께 뽑혀 나왔는데, 도저히 사람의 귓속에 있을 만한 길이가 아니었다.


나리아는 통신기를 주머니에 넣고 새것을 꺼내 헌진의 귓속에 넣었다. 역시 이해되지 않을 길이의 전선이 헌진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신중하게 전선을 꽂아 넣는 나리아는 진지했지만, 그 광경을 보는 주변 사람들은 마린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뭘 그렇게 봐요?”


나리아가 혀를 반쯤 내밀고 집중하며 조금씩 전선을 밀어 넣었다.


“물어봤자 당연히 이해가 안 될 대답만 돌아오겠지만, 대체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네에? 그야, 통신기랑 시신경을 접속하는 중이죠. 정확히 말하면 시신경이 뇌랑 연결되는 부분에 슬쩍 끼어드는 건데, 왜요, 마린도 해볼래요?”

“뒤지고 싶어?”

“농담이에요. 기사한테는 충분한 공간이 있거든요. 일반인한테는 못 꽂아요. 황제도 똑같은 생각을 한 거죠. 기사의 눈이 곧 지휘관의 눈인 셈이에요.”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마린은 습관적으로 귀에 꽂고 있던 통신기를 당장 바닥에 내팽개치려 한 참이었다.


헌진의 몸이 기괴하게 움찔거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흠칫했다. 나리아는 괴이치 않고 작업을 계속했다.


“걱정 마요. 지금 막 뇌에 닿아서 몸이 반응하는 거니까요.”

“정말로 괜찮은 거야?”

“기사는 튼튼하니까요.”

“윽······.”


마린은 헛구역질을 간신히 억눌렀다. 밤까마귀에게는 구경거리로 전락한 두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잠자코 보기에는 힘들었다.


헌진의 몸부림은 한참을 이어졌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리아는 순진하게 웃어주었다. 헌진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익숙하게 귓가를 두드리며 통신기를 테스트했다. 마린은 나리아의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한기를 느꼈다.



밤, 마린은 집정실을 나섰다. 번을 서던 조직원들이 졸고 있었다. 마린은 그들의 정강이를 한 번씩 걷어차 주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머리는 상쾌했다. 7구역의 병영들이 속속 항복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정관의 부재에 당혹스러워했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린은 그런 그들에게 협박에 가까운 권고를 보냈다. 요약하자면, 새 주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죽음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마린은 이 도시에는 단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저항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황제와 황제가 아닌 사람으로 구성된 기림 제국에게는 당연한 이분법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전자를 선택했고 제국군은 후자를 선택했다. 사실 선택이란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린이 저항을 선택해서 저항하는 것이 아니듯, 제국군 역시 지배당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근본이란 선택하는 것이 아닌 내재한 것이다. 마린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근본인지는 판단하지 않았다. 지배가 악이 아니듯 피지배도 선이 아닐 것이며, 모두 그 안에서 갈라지며 저마다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마린은 자신의 행동을 정의라고 여기지 않았다.


‘가치는 증명되는 것이고 평가받을 뿐.’


아무에게도 증명되지 않고 평가받지 못하는 가치에는 애도를 보낼 수밖에.


마린은 눈을 비볐다. 졸음에 두서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일 헌진과 나리아가 6구역으로 떠나면 더는 그들을 구경하며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 7구역을 정리하면 8구역과 9구역과 마주해야 하고, 10구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태어난 곳으로.’


마린은 답지 않은 감상을 느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집정관이 지켜보았을 풍경 속에서 7구역은 아담하게 보였다. 마린은 자신이 생각보다 담담하다는 생각을 했다. 권력이란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았고 힘이란 생각만큼 가볍지 않았다.


“그게 마린이란 사람의 그릇인가요?”


창문 근처 그늘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아였다.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낮과는 또 다른 신비감으로 빛났다.


“그릇이라니?”

“성을 차지한 보스가 창문을 내다보면서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술잔을 손에 들고 잔인하게 웃는 거죠. 옆에 고양이가 있으면 고양이도 쓰다듬으면서요. 근데 마린은 안 그러네요.”

“내가 어때 보이는데?”


마린은 드물게도 나른한 목소리였다. 어차피 두 사람은 내일이면 사라질 테고, 게다가 나리아는 마린의 긴장감을 비집고 들어올 줄 알았다.


“무거워 보이네요.”

“넌 왜 그런 데 있는 거니?”


마린이 말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나리아는 몸을 움츠렸다.


“보스 흉내를 내려고 했는데 제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방금 막 깨달았어요. 하긴, 거의 평생을 지하에서 살았으니까요.”

“맞춰볼까? 내일 6구역으로 올라가는 게 무서워서 잠이 안 오는 거지? 죽을지도 모르니까.”


마린이 비아냥거리자 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자 도리어 마린이 머쓱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차라리 죽기를 바랄 만큼 굴러봤거든요. 배가 고파서 제 몸을 물어뜯은 적도 있어요.”

“그럼 뭐가 두려운데?”

“잊히는 거죠.”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이유였다. 마린은 코웃음을 쳤다. 보통 어린아이란 죽음보다 그 언저리의 것을 두려워했다. 나리아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제게는 잊히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아요. 기술, 일족, 시작.”


나리아가 몸을 일으켜 마린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마린의 옷소매를 잡은 모양새가 겁에 질린 듯했다.


“그게 다 네 거라고?”

“전 8구역 출신이에요. 마린은 거기가 무슨 구역인지 알아요?”

“광산이 있지. 곡괭이보다 삐쩍 마른 몸들이 동굴에 들어갔다가 시체가 돼서 실려 나오는 꼴 많이 봤어.”

“거기 있는 건 그냥 광산이 아니에요. 9번 구역에 있는 광산은 암염이나 철을 캐내는 곳이지만 8번 구역은 좀 특별하죠.”


마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알고 있는 정보에서 8번 구역의 생산물은 없었다. 다른 구역과 마찬가지로 도시에 필수적인 무언가라고만 생각했다. 광산이니 광물일 것이다.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리아의 말에는 뒤끝이 있었다.


“그럼 8구역에는 뭐가 있다는 거야?”

“유물이에요. 지금까지 이 땅에 세워졌던 일곱 도시의 유물.”

“일곱 도시?”

“지금까지 이 땅에, 어, 쉽게 태양이라고 표현하죠. 태양은 몇 번이고 떨어졌죠. 그럴 때마다 도시는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졌어요. 그 흔적들이 땅 밑에 파묻혀있고, 8번 구역에서는 그걸 캐내는 거죠.”

“캐내서······뭘 하는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마린은 흥미를 느끼고 나리아를 돌아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나리아의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그걸 엮어서 도서관을 만들죠. 잊히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서요. 기사단 시술이나 그 무기 같은 것들은 부산물에 불과해요. 우리는 그것들을 통째로 일컬어 역사라고 불러요.”

“······.”


마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나리아의 말은 다소 두서없었고 장황했다. 마린은 그녀의 말을 채 쫓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면서 옛일을 입에 올리는 나리아에게서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느꼈다.


“우리 일족은 황제를 도와서 몇 번이고 도시를 새로 세웠어요. 이 땅에 다시 번식하기 위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기 위해, 검은 비가 내리는 이 땅을 정화하기 위해.”


마린은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나리아가 마린의 소매를 놓쳤다. 소녀는 그것을 어딘가 서글픈 눈빛으로 보았다.


“너, 황제의 끄나풀이었어?”


마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먼일이에요. 제 선조들 시대의 일이죠. 도서관이 정벌 당하고 이제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됐지만, 적어도 저는 살아남았어요.”


나리아가 마린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은 나리아는 항상 누군가를 올려다 봐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 표정은 늘 어딘가 절박해 보였고 위태로웠다. 그러나 마린은 이제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저는, 잊히면 안 돼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잊히고 싶지 않아요.”


나리아는 언제나 절박했고 위태로웠다.


작가의말

좋은 월요일입니다. 사실은 전혀 좋지 않습니다. 그나마 즐거운 출근등교외출길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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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2. 눈 없는 기사 (3) 21.03.12 46 4 11쪽
22 21. 눈 없는 기사 (2) 21.03.11 66 3 14쪽
21 20. 눈 없는 기사 (1) 21.03.10 44 3 13쪽
20 19. 강철이 부르는 소리 (4) 21.03.09 47 3 12쪽
19 18. 강철이 부르는 소리 (3) 21.03.08 46 3 12쪽
18 17. 강철이 부르는 소리 (2) 21.03.05 47 4 12쪽
17 16. 강철이 부르는 소리 (1) 21.03.04 58 3 11쪽
16 15. 씨앗이 없더라도 (3) 21.03.03 35 3 13쪽
15 14. 씨앗이 없더라도 (2) 21.03.02 34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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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1.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2) 21.02.25 51 5 14쪽
11 10.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1) 21.02.24 52 3 14쪽
10 9. 돌을 깰 수 없어도 (3) +1 21.02.23 52 4 11쪽
9 8. 돌을 깰 수 없어도 (2) 21.02.22 53 4 11쪽
8 7. 돌을 깰 수 없어도 (1) +1 21.02.19 62 5 12쪽
7 6. 목이 잘려도 (4) 21.02.18 60 2 11쪽
6 5. 목이 잘려도 (3) +1 21.02.17 94 3 12쪽
5 4. 목이 잘려도 (2) 21.02.16 92 4 12쪽
4 3. 목이 잘려도 (1) 21.02.15 112 6 12쪽
3 2. 짐승을 베어도 (2) +2 21.02.14 139 9 17쪽
2 1. 짐승을 베어도 (1) 21.02.14 313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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