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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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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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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8
추천수 :
304
글자수 :
612,952

작성
21.03.0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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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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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13. 씨앗이 없더라도 (1)

DUMMY

마린과 사쿠마가 아지트를 떠날 때, 나리아는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린은 마주 손을 흔들어준다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신경 쓰여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봐야 했다.


“이곳에서 나리아의 존재를 아는 것은 너희 둘뿐이다.”


헌진이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마린은 그 뜻을 이해했다.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이 발설했다는 것이니 목숨을 앗아가겠다. 마린도 종종 써먹던 협박이었다.


“이곳이란 7구역? 아니면 제국 전체?”


헌진이 지그시 마린을 바라보았다. 마린은 그의 침묵이 거슬렸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 두 사람과 인연을 길게 이어나가지 않기로 했다. 헌진이 성공해서 윗구역으로 넘어가든, 실패해서 죽든 알 바는 아니다.


‘가만, 헌진이 집정관 눈깔을 뽑아버리는 동안 그쪽으로 주의가 쏠린다면 더 쉽게 병영을 털어버릴 수도 있잖아? 이놈을 먼저 성에 보내버린 뒤에 우리가 움직이면······.’


헌진이 죽든 말든 알 게 뭐야. 어차피 제국이 마음만 먹으면 쓸려나가기로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될 바에는 조금이라도 날뛰고 싶은 대로 날뛰는 편이 낫다. 나리아는 여기서 굶어 죽겠지만, 알아서 해결할 일이지.


[마린, 지금 나쁜 생각 하고 있죠?]

“꺄악!”


마린이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자 사쿠마와 헌진이 동시에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적이 있을 리 없었다. 마린이 혼자 비명을 지르더니 벽에 몸을 기대 가슴께를 움켜쥐었을 뿐이다.


“노, 놀랐잖아!”


귓가에서 나리아가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헌진은 마린이 날뛰는 꼴을 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미친놈으로 보이기 딱 좋군. 반성한다.”

“닥쳐!”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 헌진은 좀처럼 놀라지 않으니까 한 번쯤은 놀라게 해보고는 싶었어요.]

“너도 닥쳐!”

“방금 보스께서 꺄악이라고 하신 겁니까?”

“이 개자식들이!”


마린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이런 대화법에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뭘 그리 보고 있어? 길이나 안내해!”


마린이 재촉하자 헌진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너도 그렇게 함부로 말 걸지 마!”

[히히.]

“웃지 마!”


마린의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마린은 7구역에서 귀신이 들렸다는 미치광이들을 여럿 보았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마린은 거짓말은 잘하지만 자기까지는 못 속이는 것 같네요.]

“그건 또 뭔 소리니? 겨우 이걸 귀에 꽂은 정도로 그런 것까지 안다고?”

[뭐, 지표는 많죠. 맥박이라든가 목소리의 떨림이라든가. 마린은 알기 쉽네요.]

“너 그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죽는다.”

[어, 또 거짓말.]

“됐어! 귀에 이거 확 뽑아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용건만 간단히 해!”

[네네, 알았어요. 이따 밤에 다시 연락할게요.]


눈앞에 있었으면 머리채를 붙잡고 잡아당겨 줬을 텐데. 마린은 역주행하고 싶은 욕구를 달랬다.


이를 가는 마린을 헌진이 기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린이 또 뭐냐고 쌍심지를 켜자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만 참으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놈들이라는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며칠간, 상황은 지리멸렬했다. 마린은 먼저 조직을 잘게 찢었다. 함께 상황을 듣는 나리아조차 이해하지 못할 만큼 복잡하고도 정교했다. 마린은 수많은 조직원의 이름을 모두 외운 것처럼 보였는데, 인원 하나하나를 지목해 할 일을 부여했다.


마린은 사쿠마를 대동하고 하루에도 여러 아지트를 찾았다. 그곳에서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앞으로 할 일과 비상시 대처법을 전달했다. 급한 상황에 따라 무시로 뒤바뀌는 지침에도 조직원들은 군말하지 않았다. 마린이 그러라 하면 즉시 아지트를 폐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리아가 놀란 부분은 조직도를 머릿속에 온전히 가진 부분이 아니었다. 조직원들이 마린에게 보내는 다소 무례한, 그러나 복종에 가까운 존경심도 아니었다. 그 흩어진 조직을 연결하는 정보망이라는 현실적인 부분이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마린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리아는 상상도 못 한, 따스한 목소리였다.


“내가 한 말 다 기억하지?”

“네, 보스.”


소년은 수줍게 대답했다. 마린이 막 옆 조직에 전달할 지시사항을 알려준 참이었다. 나리아의 관측에 따르면 제국군 몇 부대의 움직임이 활발한 곳이다. 거점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무서운 아저씨들이 널 붙잡으려 하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몰래 손가락을 입에 넣어서 토하고 병신같이 소리를 지르라고 했어요.”

“그래, 맞아.”

[뭐같이요?]


마린은 귓속의 목소리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주머니를 뒤졌다.


“자, 네 친구에게도 전해줘.”


합성식 몇 조각을 건네자 소년은 밝게 웃더니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밖에도 마린은 몇몇 조직원에게 지시를 내리고 방을 비우도록 했다. 방이 텅 빌 때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마린은 마지막으로 문밖에 선 사쿠마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하아.”


그제야 마린은 책상에 엎드려 쉴 수 있었다. 요 며칠 거의 자지도 못하고 수척해진 마린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아무 말이나 해봐.”

[지금은 좀 주무세요.]

“그런 거 말고.”

[그럼 어떤 말이요? 옛날얘기라도 해줄까요?]

“너도 참.”


마린은 피식 웃었다. 마린의 웃음은 드물었다.


“애들이나 꼬셔서 소모품으로 써먹는 비열한 년이라느니 그런 얘기 있잖아.”

[······.]


마린은 흩어지고 뭉치는 호흡과도 같은 과정에 아이들을 투입했다. 나리아가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는 숫자만으로도 오십을 넘었다. 마린이 아이들을 어떻게 길들였을지는 모르지만, 작은 몸으로 골목길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모습에서는 책임감을 느꼈다.


[전령 이상 없음. 제국군과도 멀군요.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좋아. 천리안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네. 적어도 마음 졸일 필요는 없어서.”


마린은 답지 않은 소리를 거듭했다. 며칠을 무리했으니 심리적으로 연약해질 만했다. 또는, 그동안 끝없는 수다에 마린도 나리아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귀신이나 양심의 소리 같은 무언가로 느끼기 시작했는지 직접 마주했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을 내뱉었다.


나리아는 마린의 뇌파가 수면에 가까운 상태로 접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뭐가?”

[애들을 소모품으로 쓰는 게 어때서? 별로 이상할 것도 아니잖아요. 설마 죄책감이나 그런 게 막 솟아나고 그래요?]

“네 말대로 내가 돌연변이라서 그럴지도.”

[마린다운 말은 아니네요. 곧 있으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몇이나 죽어 나가게 될 텐데, 그때마다 우는소리 할 거예요?]

“들어줄래?”


마린의 목소리는 차츰 멀어졌다. 비아냥에 가까운 나리아의 목소리에도 분노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윽고 숨소리가 침착해지자, 나리아는 송신기능을 차단했다. 그녀의 짧은 휴식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마린이 그러했듯 나리아도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리아는 종종 그런 행동을 따라 했는데, 그렇다고 마린이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감정적이었으되 냉정했고,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이었다. 행동과 감정은 일치하지 않았고 어긋나기 일쑤였다.


그 답지 않음이 마린일지도 모른다.


나리아는 그런 마린이야말로 이 도시에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리아가 처음 마린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설렘 때문에, 그 속을 더 파고들고 싶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로 마린을 자극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마린에 대한 호기심이 나리아의 장난기를 자극했다.


마린을 따라 깨어있느라 나리아도 오랫동안 자지 못했다. 나리아는 의자에 앉은 채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런 생각이 정치로 이어지는 거예요, 마린.”


헌진과 나리아가 없는 7구역에서 왕이 싹을 틔웠다.



집정관 일광이 책상을 내리쳤다.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었다. 책상은 기어코 다리가 부러지며 무너졌다.


“이게 지금 기림 제국의 거리에서 나돌아다니고 있단 말이냐? 감히 내가 있는 이 도시에서!”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병사는 혹여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워 바닥에 처박은 얼굴을 더욱 깊이 눌렀다.


“저, 저희도 필사적으로 배포자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잡것들이 기림 제국을 능멸하고 있는데 대체 제국군이란 것들이 무얼 하고 있어!”


조잡한 나무판이었다. 종이도 잉크도 구할 수 없을 테니 반동분자의 선전물이란 이런 형태일 수밖에 없었다. 일광은 찢어버릴 수도 없는 물건에 조각된 글자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침묵으로 제국을 긍정하는 노예들에게 마린이 묻는다. 채찍의 고통이 달콤하고 주어지는 밥에 기쁘다면 무시하도록. 나는 짐승이 아닌 사람에게 말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문장들에는 차마 눈길조차 보내지 못했다. 제국은 물론이고 제국군, 공장, 심지어 집정관인 자신까지 모욕하는 말이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을 배려해서인지 조잡한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괴상망측한 그림은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성에서 사람을 뜯어먹는 괴물이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선전물은 성 곳곳에서 배포되었다. 병사들을 밤낮없이 순찰을 보냈지만 붙잡히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몇 명을 체포해서 심문했지만 죽을 때까지 정보를 말하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들일 것이었지만, 일광은 끊임없이 잡아들이라고 일렀다.


“대체 이 마린이란 년은······.”


차마 말문이 막혀 분노마저 나오지 않았다. 일광은 부글거리는 속을 달랠 방법이 없어 신음만 내뱉었다.


“다 죽여라.”

“예?”


병사가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일광이 병사의 얼굴을 걷어찼다.


“다 죽이란 말이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놈들, 고개를 든 놈들, 집 안에 숨은 놈들 전부 말이다! 누가 쥐새끼인지 모르면 쥐새끼가 나올 때까지 죄다 죽여버려!”

“지, 집정관님.”


울컥거리는 코피를 감싸 쥐며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병사의 시선이 한편에서 관망하는 무르히에게 돌아갔다.


“집정관의 뜻대로 하라.”


기사단마저 그렇게 거들자 병사는 더 대꾸하지 못했다. 주변에 선 사관들마저 고개를 숙였다.


무르히의 허가까지 떨어지자 일광은 침을 튀기며 열변했다.


“인구조정기의 목표를 초과해도 상관없다. 더 많은 시체를 윗구역으로 공급할 뿐! 노동력은 넘쳐나니 이번 기회에 아랫구역의 기강을 세우도록 하겠다.”


놈들은 기림 제국의 질서를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악이고 자신은 정의다. 일광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 병영에 전하라. 병사들을 모두 풀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죽이게 해!”


병사는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달려나갔다.


일광이 날뛰며 애꿎은 사관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집어던진 목판을 무르히가 집어 들었다.


“제국에서 비롯된 문장이 아니로다. 누구의 말과 누구의 힘에서 온 문장인가.”


무르히는 일광의 발광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범인의 윤곽은 드러나지 않았다.


“도시에 불이 피어오르는데, 폐하께서는 언제까지 침묵하시려는 겁니까.”


무르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서 목판이 으스러졌다. 황제의 침묵이 저들의 투쟁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자신은 늘 그렇듯 황제의 주먹이 되어 그것을 분쇄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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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 눈 없는 기사 (2) 21.03.11 66 3 14쪽
21 20. 눈 없는 기사 (1) 21.03.10 44 3 13쪽
20 19. 강철이 부르는 소리 (4) 21.03.09 47 3 12쪽
19 18. 강철이 부르는 소리 (3) 21.03.08 46 3 12쪽
18 17. 강철이 부르는 소리 (2) 21.03.05 47 4 12쪽
17 16. 강철이 부르는 소리 (1) 21.03.04 58 3 11쪽
16 15. 씨앗이 없더라도 (3) 21.03.03 34 3 13쪽
15 14. 씨앗이 없더라도 (2) 21.03.02 34 4 12쪽
» 13. 씨앗이 없더라도 (1) 21.03.01 4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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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1.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2) 21.02.25 51 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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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8. 돌을 깰 수 없어도 (2) 21.02.22 52 4 11쪽
8 7. 돌을 깰 수 없어도 (1) +1 21.02.19 62 5 12쪽
7 6. 목이 잘려도 (4) 21.02.18 60 2 11쪽
6 5. 목이 잘려도 (3) +1 21.02.17 94 3 12쪽
5 4. 목이 잘려도 (2) 21.02.16 92 4 12쪽
4 3. 목이 잘려도 (1) 21.02.15 112 6 12쪽
3 2. 짐승을 베어도 (2) +2 21.02.14 139 9 17쪽
2 1. 짐승을 베어도 (1) 21.02.14 313 9 16쪽
1 0. 도시의 말미 +3 21.02.14 579 1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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