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5,011
추천수 :
304
글자수 :
612,952

작성
21.02.17 21:36
조회
94
추천
3
글자
12쪽

5. 목이 잘려도 (3)

DUMMY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다. 너희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상징이 필요하면 딴 데서 알아봐. 벌레에게는 벌레의 입장이 있지 않겠나.”

[지금 엄청 사악해 보이는 거 알아요?]


돌변한 헌진의 태도에 마린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것이 본모습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자연스러웠다. 마린은 멸시에 익숙했으므로, 헌진의 말에서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그럼, 당신의 목적은 뭔데?”

“즐거움이지.”


헌진이 단검을 꺼내 들어 손바닥에서 굴렸다. 마린을 발끝부터 훑어보는 시선에 언뜻 살기가 맴돌았다. 방금까지의 위협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마린은 저도 모르게 사쿠마를 돌아보았다. 사쿠마가 마린의 곁에 섰지만, 평소처럼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껏 내 명성이 좋은 쪽으로 발전한 것 같군. 이 구역에서 벌어지는 범죄 중 내가 저지른 게 없다고 생각하나? 몇 놈이고 죽였고, 몇 년이고 범했다. 제국군은 내 먹잇감에 방해가 됐을 뿐이지.”

“······당신, 방금까지 카얄란을 뿌리는 범인을 찾으려 했잖아.”


마린의 눈빛에 서서히 분노가 차올랐다. 10구역에서 탈출하고 조직을 키울 만큼의 수완은 있었을 테지만,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보였다. 헌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얄란에 중독된 놈들은 죽이는 보람이 없다. 생생하지가 않거든. 산 놈들이랑 싸움을 붙여보기도 했지만 한두 번이어야지.”


헌진이 품속을 뒤졌다.


“근데, 나도 몇 번 해봤는데 마음에 들어서 유통권을 차지해볼까 싶더군. 네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헌진이 꺼내 든 것은 자그마한 우표 조각이었다. 마린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헌진이 거래현장에서 빼앗아두었던 카얄란이었다.


“필요하면 말해. 몇 장은 싸게 팔아주지.”

“······진심이야?”

“거짓으로 보이나.”

“그럼 왜 우리의 부름에 응했지?”

“호기심. 그리고 여차하면 쓸어버릴 수 있으니.”


헌진이 코 밑에 카얄란을 대고 향을 음미했다. 카얄란은 혀에 부착하는 마약이니 효과가 있을 리 없다. 다만 악독하게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이······이······.”


마린이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배신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마린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개새끼야!”


마린이 의자를 집어 던졌다. 헌진은 고개만 움직여 가볍게 피했다. 마린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도 결국 우리의 적이었던 거야?”

“허, 멋대로 사람을 데려와 사랑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떠들어대더니 지금은 적이라? 조직원들이 불쌍하군. 이렇게 순진한 년이 보스라니.”

“그만두시오, 밤까마귀. 보스를 모욕하지 마시오.”


사쿠마가 마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적의를 드러내는 그에게서 어리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헌진이 짐짓 사쿠마를 노려보았다.


“목이 달아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볼까.”

“죽여봐! 차라리 죽여!”


날뛰는 마린을 사쿠마가 팔을 들어 막았다. 이 이상 다가가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살기를 감지한 사쿠마는 마린을 자제시켜야 했다.


“너희들을 모두 죽이는 건 취미가 아니고 작업이겠지. 귀찮은 짓은 안 한다. 다음 기회로 미뤄주마. 하나둘씩, 은밀히.”

“그럼 썩 꺼져!”

“그러지. 이야기는 잘 들었다. 제국군에 신고하면 너희들을 대신 처리해줄 테니, 내 취미가 편해지겠군.”


헌진은 비웃음을 남겨두고 몸을 돌렸다.


“야, 밤까마귀.”


헌진이 돌아보자 마린이 핏발 섞인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팔이 잘려도 손을 들어야 할 때가 있고, 다리가 잘려도 일어나야 할 때가 있어.”


헌진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이고 방을 나섰다.


“내가 너 따위한테 쫄 거 같아? 두고 봐! 두고 보라고 이 자식아!


방을 나서자마자 마린이 발광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안 되는 집기를 때려 부수는 모양이었다.


“내가, 내가 왜 여기서 이 지랄을 하는데! 어떻게 저런 새끼일 수가 있어! 세상에 왜 이렇게 개새끼가 많은 거야!”


헌진은 걸음을 떼기 전에 이마를 짚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는 체질에 맞지 않았다.


[10구에도 저런 사람이 태어나네요.]

“돌연변이다. 제국이 알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머리를 자를 거야. 그리고 해부하겠지.”

[우리처럼요?]


헌진은 그 말이 돌연변이와 해부 중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필요할지도 모르죠.]

“그래 봤자 범죄조직이야. 오래 못 간다.”

[범죄라, 제국이 정한 법이죠.]



올 때까지는 복잡한 길이었지만 외워둔 이상 문제는 아니었다. 헌진은 출구를 향해 나아갔다.


[제국을 엿 먹이고 싶어 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네요.]


어지간히도 마린의 말버릇에 감명받았는지 나리아는 자연스럽게 유서 깊은 관용구를 읊었다. 헌진은 귓가에 한동안 욕설을 매달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데 너무 꿈만 꾸고 있어요.]

“나름대로 험한 꼴을 많이 봐왔다고 생각할 테지만, 삶은 사람을 결정짓는다. 10구에서 살아온 저들에겐 저 모습이 최선인 거야.”


헌진은 통신기 너머로 나리아가 머뭇거리는 것을 느꼈다. 헌진이 그 머뭇거림을 찌르듯 말했다.


“반란은 실패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기계의 반란도, 7인의 반란도, 어르신 반란도 그랬다.”

[그럼 하위 구역 사람들은 계속 통제되며 살아가야 하나요?]

“전쟁에 내몰리는 것보다는 그편이 오히려 안전하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휩쓸릴 바에야, 조금씩 제물을 바쳐가며 살아가는 게 더 많은 사람이 더 길게 살아갈 수 있어.”

[그렇군요······혹시, 동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녀에게 어지간히 매혹되었나 보구나.”


나리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작게 웃었다.


[부정할 수는 없네요.]

“멍청한 자들만 희망을 품는 세상이다.”

[그래서 저도 멍청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요.]


바깥은 여전히 처형식이 한창이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저기서 죽는 사람과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분노하거나 욕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두 사람이 택한 방법이었다. 제국군이 성을 비우면 집정관을 친다. 오직 그뿐이었다.


헌진이 마린 앞에서 뱉은 말들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헌진은 사람들을 위해 분노해줄 수는 있지만, 그들이 목적은 아니다. 오로지 황제에게 가는 것만이 헌진과 나리아가 할 일이었다.


[하긴, 똑똑한 건 우리 둘로 충분해요.]


또 하나 목이 달아나는 것과 함께 나리아가 중얼거렸다.



의자를 모조리 박살 낸 마린이 마지막 남은 탁자마저 집어 던졌다. 뿌연 먼지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마린은 그 속에서 주저앉았다. 한편에 섰던 사쿠마가 다가갔다. 그가 어깨를 감싸자 마린이 힘없이 안겼다. 거친 숨이 목을 긁으며 터져 나왔다.


“사쿠마, 나 힘들어.”

“고생하셨습니다, 보스.”

“저놈이 날 바보 취급했어.”

“씹어 죽일 놈입니다.”


마린은 자신을 내려다보던 헌진의 눈을 떠올렸다. 10구에서 살아가며 평생 남의 눈치를 살피던 마린은 안다. 그 눈은 일말의 동정을 지닌, 하잘것없는 존재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것이 분했다.


그녀가 부리는 조직은 7구로 탈출하고 나름대로 쌓아온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은 사쿠마의 무력을 빌린 덕분이었지만, 사람을 휘어잡고 자그마한 조직에서 출발해 세를 불린 것은 마린의 수완이었다. 그녀는 밀주를 유통하는 경로 몇 개를 빼앗았고, 음지에 숨은 불법 의료시설의 운영에 관여했다. 밤까마귀라는 이름을 집어삼켰을 즈음에는, 수많은 작은 조직이 발밑에 굴러들어왔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마린은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았으니 언어로 체화되지 않았다. 그저 삶이 쌓은 분노가 그녀의 원동력이었다. 분노는 거름 속에 뒹굴면서, 몸을 팔다 죽은 어미를 보면서, 지금쯤 썩어 곡식이 되었을 아비를 생각하면서 자랐다.


그 원인을 제국으로 지정하는 순간 마린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저 더 나은 삶을 위해 이 자리까지 기어오르자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다. 그 결론에 자의와 타의는 구분되지 않았다. 하루를 먹고 하루를 살아남을 사람들은 모를 생각이 싹을 텄다.


반란. 그녀의 핏줄 어딘가에 심어져 내려왔을 그 단어를 발견한 순간부터 마린은 확고했다.


그것이 밤까마귀에게 부정당했다. 단순히 어린애 같은 생각일 뿐이라고, 그 눈은 말했다. 어렴풋한 소문 속에서 남몰래 동경해왔던 환상이 박살 났다.


“사람은 죽어도 남기는 것이 있어. 맞지?”

“그렇습니다, 보스.”


마린은 깊게 심호흡했다. 분노는 먼지와 함께 가라앉았다. 계획에 변함은 없다. 헌진이 함께하지 않는 점은 아쉬웠지만, 밤까마귀가 없다고 밤까마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계획은 변함없어. 애들한테 하던 일 계속하라고 일러둬.”


사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원들을 무장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린은 조직원들에게 다듬은 목재나 공장에서 주운 자그마한, 어쨌든 날카로운 금속들을 챙겨 모으게 했다. 제국을 증오하는 만큼 모아두라고도 했다. 조직원들에게 뒷말은 낯설었을 테지만 앞말은 알아들었다.


“파괴되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


마린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목이 잘려도 소리를 질러야 할 때가 있단 말이야.”


절대 부정되지 말아야 하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늦은 밤이었다. 헌진은 하루종일 성을 맴돌며 제국군의 이동을 읽었고 상황을 파악했다. 처형식은 해가 저물 때까지 오래도록 이어졌다. 아직 성이 빌 것 같지는 않았다.


[헌진, 안 돌아올 거예요?]


나리아가 늘어지는 하품을 하면서 재촉했다.


“들릴 곳이 있다. 먼저 자도록 해.”

[그럴 수는 없죠. 파트너 좋다는 게 뭐겠어요? 훌륭한 영웅 나으리께서는 항상 파트너의 도움을 받죠. 예를 들어 빨간 망토 소녀에게 늑대가 있듯이, 토끼에게 거북이가 있듯이.]


잠을 깨기 위해서인지 나리아는 주절거렸다.


헌진은 흘깃 고개를 들었다. 인구조절기를 맞이해 공장이 휴식에 들어가자 매연도 없고 검은 비도 내리지 않으니 밤하늘이 밝다. 이런 날은 지붕 위를 뛰어봤자 성에서는 7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으니 위험했다. 헌진은 평범하게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밤은 늦었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다. 오늘 있었던 처형식에 관해 어떤 식으로든 흥분된 의견이 오갔다. 누군가는 벼르고 벼르던 상대를 고발하기로 마음먹었을 테고, 누군가는 상황이 심상찮으니 어딘가로 숨으려 할 것이다. 7구에서 사육되는 인간들은 제 목에 칼이 드리워진 줄도 모르고 저마다의 생각으로 달아올랐다.


[어디 가는 건데요?]

“사쿠마라는 이름, 어디서 들었나 싶더니 막 떠올랐다.”

[호, 아는 사람이었어요?]

“안다면 안다고 해야겠지.”

[헌진이 까먹기도 하네요.]

“내 머리가 몇 년을 굴렀다고 생각하냐. 이미 낡을 대로 낡았다.”

[몇 년이랬죠? 50년?]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헌진은 술집에 들어갔다. 시끄러운 와중에 헌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기림 제국이 직접 운영하는 술집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폭리를 취했다. 쥐꼬리만 한 공장의 임금은 그렇게 다시 회수되었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님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아하, 어른의 놀이터로군요.]


헌진은 아무 술이나 주문해 받아들고 지하로 향했다. 헌진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의 흐름이 그곳으로 흘렀다. 기묘한 분위기에 나리아는 당황했다.


[어······혹시, 저 눈 가려야 되는 거 아니죠? 이거 청소년관람 가능인가요?]

“엄연히 합법이다. 나도 한때 신세 졌던 곳이야.”

[네? 무슨 의미로요?]


지하로 들어서자 넓은 광장이었다. 철창에 둘러싸인 채 중앙에 설치된 무대에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나리아는 말을 삼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 26. 6구역 (2) 21.03.18 39 3 12쪽
26 25. 6구역 (1) 21.03.17 43 3 13쪽
25 24. 설계자 (2) 21.03.16 42 3 13쪽
24 23. 설계자 (1) 21.03.15 38 3 12쪽
23 22. 눈 없는 기사 (3) 21.03.12 46 4 11쪽
22 21. 눈 없는 기사 (2) 21.03.11 66 3 14쪽
21 20. 눈 없는 기사 (1) 21.03.10 44 3 13쪽
20 19. 강철이 부르는 소리 (4) 21.03.09 47 3 12쪽
19 18. 강철이 부르는 소리 (3) 21.03.08 46 3 12쪽
18 17. 강철이 부르는 소리 (2) 21.03.05 47 4 12쪽
17 16. 강철이 부르는 소리 (1) 21.03.04 58 3 11쪽
16 15. 씨앗이 없더라도 (3) 21.03.03 36 3 13쪽
15 14. 씨앗이 없더라도 (2) 21.03.02 34 4 12쪽
14 13. 씨앗이 없더라도 (1) 21.03.01 46 4 12쪽
13 12.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3) 21.02.26 43 3 13쪽
12 11.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2) 21.02.25 51 5 14쪽
11 10. 반란을 시작해볼까요 (1) 21.02.24 52 3 14쪽
10 9. 돌을 깰 수 없어도 (3) +1 21.02.23 52 4 11쪽
9 8. 돌을 깰 수 없어도 (2) 21.02.22 53 4 11쪽
8 7. 돌을 깰 수 없어도 (1) +1 21.02.19 62 5 12쪽
7 6. 목이 잘려도 (4) 21.02.18 60 2 11쪽
» 5. 목이 잘려도 (3) +1 21.02.17 95 3 12쪽
5 4. 목이 잘려도 (2) 21.02.16 92 4 12쪽
4 3. 목이 잘려도 (1) 21.02.15 112 6 12쪽
3 2. 짐승을 베어도 (2) +2 21.02.14 139 9 17쪽
2 1. 짐승을 베어도 (1) 21.02.14 313 9 16쪽
1 0. 도시의 말미 +3 21.02.14 580 13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