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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밀 님의 서재입니다.

나를 죽인 히로인만 회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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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풀밀
작품등록일 :
2024.06.06 02:47
최근연재일 :
2024.06.10 15:04
연재수 :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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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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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수 :
41,157

작성
24.06.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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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지각한 자들

DUMMY

아카데미아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초대 용사 ‘하이드레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긴 이야기는 다들 싫어하니, 간단히 말하겠다.


처음으로 ‘마왕’을 물리친 용사. 그분은 여생 동안 마계의 입구를 막기 위해 ‘마계의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세계를 구했음에도 권력과 부에서 멀어지려는 듯한 그 행보에 그분을 동경하는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자연스레 그곳에 기사를 위한 학교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아카데미아의 기원. 아직 아카데미가 순수히 기사도와 무력을 배우기 위한 곳이던 마지막 때였다.


세계 최강의 기사와 그의 추종자들이 직접 운영하는 학교였다. 당연히 실력 있는 기사들을 배출했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주군을 찾으러 떠나야 했다.


인재는 아카데미로 모이고, 인재는 옆 나라 보다는 자기가 가지는 게 나았다. 세계 곳곳에 아카데미 세력이 침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아에 대한 명성은 필요 이상으로 드높아졌다.


즉 세상의 많은 세력이 아카데미아에 반발하고 위협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초대 용사의 명성. 반발하는 전 세계 곳곳의 막강한 기사들이 반대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카데미아가 지금의 위상을 가진 결정적인 이유.


그것은 아카데미아가 어떤 세력의 어떤 가문이든, 심지어 어떤 세력도 아닌 이조차. ‘자격’이 있다면 모두 학생으로서 받아준다. 그 원칙을 수백년간 지켰기 때문이다.


그래. 자격. 수많은 친구인 척하는 적들이 매 순간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세상에서 ‘자격’을 들이민 것이다.


그것을 증명할 사람들은 이미 각 나라에 적어도 한 명은 있었고, 그들은 아카데미아를 자신의 두 번째 고향으로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렇게 흐름이 만들어졌다. 귀족들은 자신의 아이를 아카데미아로 보냈고, 졸업한 이들은 뛰어났으며 인맥을 만들었다.


아카데미아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인맥은 그 자체로도 아카데미아의 지반을 다졌으며, 그에 참가하기 위해 사람들을 그곳으로 기어오르게 했다.


그것이 수백 년간 수 세대를 건너가며 이어졌다. 그렇게 흐름은 해류가 되었다.


해류에 타는 이는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고, 해류에 역류하는 이는 긍지를 얻을 것이지만, 해류를 막으려는 이가 존재할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도, 그것을 막으려 하는 자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아카데미아는 이미 하나의 개념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륙 북부, 호루드 지방의 랜드마크이자. 산맥과 평야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16명이나 사상자를 낸 원인. 거대한 언덕이자 평야, ‘대지의 마개’ 위로 이전하게 된 것도 모두 그 해류의 탓.


그러니 에이와 하르가 죽기 직전 마지막 숨을 쉬는 노인처럼 헐떡거리며 오르막을 기어오르는 것 또한 세계의 해류였다.


“흐억...! 쉬이빨...! 허억...!”


“헉...헉...헉...”


계단 위로 올라온 두 사람은 함깨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앞에는 거대한 성벽과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건물들이 있었고, 양 옆으로는 끝없는 듯한 지평선, 뒤로는 아카데미 아랫마을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는가 보네...”


하르는 성우의 깃 부분을 자기 목에 꽂고는 하나를 에이에게 건냈다.


에이는 얼떨떨하게 깃털을 받고는 강하게 목에 꽂았다. 푹. 성력이 몸을 파고들었다.


"윽!"


물리적으로 뚫린 것과는 달랐다. 몸 속의 성력이 지나는 길을 통해 꽂혀 있었다. 성질을 바꾸는 것으로 내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겠어. 아까 나한테 쓴 '낙성'이란 스킬도 그렇고...'


에이는 이 능력의 응용성을 생각하며 하르를 보았으나, 그는 아파서 그런 줄 알았다.


“깃털 부분으로 쓸어내리면 느리긴 해도 아프지 않게 치료가 돼."


"...사기구만 진짜."


"어...?"


"됐다. 그보다 어떻게 할지나 생각해. 다은 시험은 3년 후라고."


그 말에 두 사람은 표정을 찡그리며 앞을 보았다. 이 오르막의 끝과 성벽사이에는 풀 한 포기 없는 대지가 있었고, 그 끝의 성벽 앞에 천막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느긋이 걸어가면 1시간은 걸릴까. 그만한 거리를 지나면 존재하는 아카데미아의 성벽과 높은 건물 탓에 위압적인 부조화를 느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남자의 눈빛이 거대했다.


"베네트 급이 통제를 하네. 이게 아카데민가."


에이가 중얼거리자 검을 허리에 찬 남자는 귀찮은 듯 한숨을 쉬었다. 1km 밖에서 말이다.


"하...시발..."


에이는 숨을 고른 후 평야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르는 그런 그를 부르려다가 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었다.

.

.

.

아카데미의 거대한 성벽 앞에는 간이로 설치한 대기소가 있었다. 비록 줄과 나무쐐기로 영역을 나누었을 뿐이었지만, 그 안에 모여 선 이들이 이 공간의 클래스를 만들었다.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양식의 천막과 텐트. 마차와 텐트를 넘어서 간의 건물이라 부를 만한 것도 있었다.


전 세계의 각 사회의 정점. 그 권력과 부를 온전히 받을 이들이 한 곳에 모여 하나 같이 성벽의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이는 자신의 인식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했다. 아카데미아. 이곳은 분명 세계의 압축판이었다. 그때 그 소녀에게 자신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금줄과 그 위에 걸터앉은 남자에 의해 막혀 있었다. 저 무대에 서는 것조차 지금은 불가능했다.


"아저씨. 저희 진짜 사정이 있었거든! 진짜로. 진짜로! 그 막. 어? 사고를 맞닥트린 남자를 구하고 막. 어? 불의를 참지 못하고 사람을 구하고 오는 길이라고!"


에이는 남자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하르는 숨을 고르면서 그 모습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으으."


완전 거짓말은 아니지만, 또 떳떳하지는 못했다. 평소라면 모든 상황을 설명하며, 상대에게 판단을 맡겼겠지만, 양심을 이유로 에이까지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20대 후반의 긴 코트를 걸친 남자는 두 사람을 보고는 푸욱 한숨을 쉬었다. 세상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표정은 시골 마을에 한 명쯤 있는 한량의 얼굴이었으나, 허리에 찬 검의 존재감과 그 몸에 담긴 성력의 양은 일반인이 볼일 없는... 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수준의 높음이었다.


"시끄러워. 다 들리니 좀 닥쳐."


그는 자신의 검을 툭 치며 말했다. 에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어떻게 이딴 놈이 통제원이냐고.'


베르트면 인간이 가진 잠재력을 모두 끌어낸 이들이었다. 기사단에서는 기사 단장. 용병단에서 찾으라면 작은 나라 수준의 크기를 가진 곳에서나마 한 명을 찾을 수 있었다.


에이는 베르트가 단장인 용병단을 찾는데 만 1년이 걸렸고, 그곳에 들어가 단장이랑 말 한번 섞는 데는 2년이 걸렸다. 배에 칼이 꽂히고 두 팔이 묶인 채로 말이다.


그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줄에서 일어나 검을 잡았다. 에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들며 물러섰고, 하르는 긴장했지만,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혼자서 이곳의 모든 이들을 '통제' 할 수 있는 사람이네.'


하르는 뒤에 있는 자기 또래들도 상당한 실력자들임을 알았다. 몇몇은 지금의 자신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눈앞의 남자에게 동시에 달려들어도 이 사람은 막아낼 수 있으리라. 급이 다르다. 그 의미를 실감했다.


그리고 그런 급이 다른 이가 귀찮은 듯한, 하지만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 시각도 못 지키는 녀석들이 정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의 말에 하르는 패배했다. 거의 반년간 걸어서 이곳에 왔음에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에이는 달랐다.


"그럼 시발 없냐?"


칼질 한 번에 자신을 떨이로 파는 돼지 뒷다릿살처럼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 할 말치고는 상당히 용기 있는 발언이었다.


말한 자신이 곧바로 후회할 만큼.


"...취소."


"미친놈."


통제원 남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르였다.


"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들어가."


""?!?!""


"뭐. 싫냐?"


남자의 말에 에이는 곧장 넙죽 몸을 숙였다.


"감사함다아!!!!"


하르는 공명정대와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는 남자의 행동에 얼이 빠졌다.


"에에..."


"아. 너도 들어가."


"네?!"


"하... 넌 진짜 싫다는 얼굴이군. 귀찮게 진짜. 말하지만 나는 통제를 맡았을 뿐이다. 통제하는 건 내 마음이고, 합격에 대해서는 일절 권한이 없어."


"하, 하지만 이래선 다른 지원자와 형평성의 문제가...!"


"의지 없는 놈들 말고는 다 들여 보내줬다. 막기 귀찮았거든. 너네도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


남자의 말에 에이와 하르는 입을 다물었다. 한 놈은 방금까지 자신이 하던 일이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은 그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이었다.


"꼴아보지 말고 빨리 가. 원래 지원자들을 위해 베레스님이 격려사가 있었는데, 웬일로 지연이 되고 있거든."


두근. 에이의 심장이 뛰었다. 단 한 번의 박동이 가슴을 터트릴 것처럼 강했다.


"...지금 누구라고?"


"? '하이드레건 베레스'... 진짜 모르나?"


에이는 자신의 기억을 훑어보았다. 그 이름에 대한 정보는 있었다. 지난 5년간 어디를 가도 한번은 접하게 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십거리를 생각하는데 쓸 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하이드레건 베레스... 할아버지가 말한 적이 있는 사람이에요. 분명 용사의 딸이라고..."


"허. 쌍으로 촌뜨기 놈들이구먼."


통제원 남자는 끌끌거리며 비웃고는 고개를 까닥여 성벽조차 뚫고 하늘을 향하는 첨탑을 턱으로 가리켰다. 에이와 하르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남자는 그곳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양 진지한 눈빛이었다.


"7년 전, 아니. 이제 8년 전이지. 성마전쟁의 용사님은 또다시 하이드레건 가의 기사였다. 그분은 그 전투에서 마왕을 물리쳤으나, 큰 상처를 입으셨는지 이후로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으셨지.


그 대신 돌연히 나타나 세간의 이목을 받은 이가 바로 그 용사님의 딸, 하이드레건 베레스님이다."


남자는 그 소녀의 강함이나 인격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소개했다. 방금까지 보이던 만사 귀찮은 성격과 대비되는 행동에 하르는 감동하면서도 그 베레스란 여성에게 호기심을 가졌다.


그리고 에이는 관심이 없었다.


'이건 도대체...뭐지?'


그의 기준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충격적이나 옅었고, 강렬하나 연약했다.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에 화가 났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흠.


콧방귀를 뀌는 에이를 보며 통제원은 불만을 느꼈다.


"이해를 못 하고 있군. 저기를 봐라. 저 녀석들이 목이 빠져라 성벽 위를 보고 있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하이드레건 베레스님을 기다리고 있는거다. 조금 전에는 오로지 그 사람만을 보고 싶다고 이곳에 온 이도 있었다. 그녀만을 보고 돌아가겠다는군. 재미있어서 허락해 줬지.


알겠나? 강대한 조직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편지와 음유시인이 정보를 다루는 이 세계에서 단 5년 만에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전 세계에서 떠돌고 있다."


"쯧. 아저씨. 뭘 그렇게 흥분하는데? 뭐 걔한테 털리기라도 했어?"


에이는 비아냥대듯... 아니 그냥 비아냥거렸다. 그에 통제원 남자는 픽 웃었다.


"그래. 한 합 만에 털렸다. 나보다 15년은 덜 산 꼬마에게."


""!?""


눈앞의 남자는 에이에 있어 강함의 개념에 끝에 서 있었다. 그런 그가 이기지 못하는 이가 존재한다니.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통제원의 경외 어린 표정을 진심이었다.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분은 분명 용사가 될 거다. 적어도 나는 확신 해."


에이는 입을 다물었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발로 차 굴렸고, 긴 시간 끝에 답을 냈다.


"하! 웃기고 앉았네. 내가 알기로 용사란 건 인간 중에 최고인 사람이라며?"


하르는 그 말에 삐질 땀을 흘리며 '그런 건 아닌데...' 라고 중얼거렸지만, 에이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었다.


"그럼 그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다."


도발적인 어투에 통제원은 호기심을 보였다.


"호오. 누군데?"


씨익. 에이는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그 소녀."


완전히 틀려처먹은 인칭대명사의 사용법에 안내원과 하르는 얼이 빠졌다.


"그래 그래 미안하다. 내가 짐승이랑 대화를 하려고 해버렸네. 빨리 들어가."


그는 털석 금줄 위에 앉았다. 철렁거리는 줄을 에이는 높이 뛰어넘었다. 그 모습에 고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르는 그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어하다가 통제원이 말한 남자를 중얼거렸다.


"하이드레건 베레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지방을 지난 그였다. 생활 양식, 관심사, 사회. 모든 것이 제각각인 지방들에서도 베레스에 대한 이야기는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할아버지가 직접 말한 유일한 사람... 만나봐야겠지.'


하르는 고개를 돌려 에이를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 검은 눈이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드디어 왔다. 진짜로 왔어.'


눈앞의 인산인해는 세계 전체에서 뛰어난 이들을 위에서부터 골라 모아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점이자 다음 세대를 이끌 초석들. 그런 이들이 모두 평등하게 바닥에서 성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에이는 다리를 내디뎠다. 하르도 곧 뒤따라 금줄을 넘었다.


시작부터 어그러질 뻔한 인생의 계획이 다시금 경로를 찾았다. 두 사람 앞에는 확실하고도 확고한 성벽이 자리를 잡고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을 연다면 나아가기라. 열지 못하면 나아가지 못하리라.


대화를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가 되었을 때, 통제원 남자는 말했다.


"뭐, 힘내라."


그 말에 답한 것은 하르 뿐이었다.

.

.

.

두 사람이 떠난 후 통제원 르펠가오는 다시 앞을 보았다. 베레스가 하는 연설을 들으면서도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 참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충할 마음도 없기에...


"귀찮다..."


"안녕하세요."


르펠가오는 놀라 까무러쳤다. 금줄이 고무줄처럼 출렁이고, 검집 안에 있었을 칼날이 태양 빛을 반사하며 의문의 인영()을 향했다.


"아하하... 놀라게 할까 봐 인사한 건데 역효과였네요."


하지만 그 인영은 당연하다는 듯,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듯 칼날을 비껴갔다. 정말 그림자에 검을 휘두른 듯한 감각에 르펠가오는 뒤늦게나마 인영을 살폈다.


외형과 목소리는 15살 정도의 소녀였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 그런 이들 중에 자신의 검을 피할 수 있는 이는 한명 밖에 없었다.


"베레스님?"


"네."


전신을 가렸음에도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분위기는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르펠가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연설을 하셔야 하는 분이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아... 지각 이려나요?"


쓰디쓴 농담이라는 양 자조하는 어투였음에도, 르펠가오는 그대로 받아드릴 뻔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아카데미에 민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설을 시험 후로 미루기로 했어요. 지금쯤 교장님께 연락이 갔을 겁니다."


개인 사정. 그 단어에 르펠가오는 베레스가 어제 울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정말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미안해요.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생각이 정리되면 말해줄게요. 혹은, 말하지 않거나요."


놀리는 듯한 문장이나,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교직원인 자신에게도 쉬이 알릴 수 없는 일이라니.


"...!"


르펠가오는 대면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이인지 새삼 깨달았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세상의 진리에 가까운 이. 용사의 딸 하이드레건 베레스. 그는 미혹을 떨쳐내고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길에 성스러운 빛이 비치길."


그저 네가 하는 일을 따르겠다. 그런 의미의 관용구였다. 하지만 지금의 베레스는 그 의미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감사해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성벽을 올려다보는 이들을, 그 중에서도 에이를 보았다.


"...저 소년에게 저를 소개해 주셨지요?"


처음부터 듣고 있었나. 그것을 알아채지도 못한 것에, 또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르펠가오였으나, 베레스는 괘념치 말라는 뜻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르펠가오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녀쯤 되는 이니 자신을 모르는 이가 자신을 보는 눈을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시하지도 않았으나, 특별히 여긴 기색도 없었습니다. 아. '그 소녀' 같은 이상한 말을 운운하더군요. 아마 정신적 지주가 이미 존재하는 듯 합니다."


르펠가오는 긴장하며 말을 다듬었다. 거의 해본 적 없는 일이라 힘들었지만, 이 소녀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 힘듦 조차 기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음미 하는데 열중했고, 때문에 후드 아래에 있는 베레스의 눈을 읽지 못했다.


"저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베레스는 자리를 떠났고, 르펠가오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관용구를 읊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역시 기억이 없구나."


베레스는 성벽 안으로 들어온 채 그리 중얼거렸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또 한 번 주위를 탐색해 사람이 없음을 파악하고 오른손의 장갑을 벗어 그 안을 보았다.


일생에서 검을 쥐지 않은 시간보다 검을 쥔 시간이 많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가녀리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손바닥 한가운데 박힌 붉게 빛나는 결정이 인상적이었다. 결정이 박힌 근처는 터질 듯 붉게 번들거렸고, 댐을 방류한 강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성법구 장갑으로 막았던 마력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고통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하악."


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

.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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