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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밀 님의 서재입니다.

나를 죽인 히로인만 회귀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공모전참가작

풀밀
작품등록일 :
2024.06.06 02:47
최근연재일 :
2024.06.10 15:04
연재수 :
6 회
조회수 :
91
추천수 :
4
글자수 :
41,157

작성
24.06.06 03:14
조회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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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24쪽

이야기가 시작하기도 전의 이야기

DUMMY

땅쥐를 등쳐먹었다. 탁한 흙 맛과 비린 피 맛, 소량의 마력이 입에서 뭉쳐져 내 속으로 들어왔다.


소리치고 싶을 만큼 기뻤기에, 나는 이미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다시 덫을 팠다.


돌멩이를 모아 점점 좁아지는 길을 만들고 그 끝에 작은 고기를 한 점 두었다.


땅쥐는 빠르고 냄새를 잘 맡았다. 다리가 망가져 달리기는커녕 걸을 수도 없던 나는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땅쥐는 냄새를 잘 맡기에 이 미끼의 냄새를 맡을 것이고, 빠르게 달리기에 이 함정에 끼인다. 다리가 망가진 내게 죽여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땅쥐뿐이었다.


"킁. 킁킁.“


이런. 나한테 피 냄새가 난다.


피가 묻은 두 손을 흙바닥에 비볐다. 몸이 원하는 데로 움직이지 않았기에, 팔로 지면을 긁다시피 했다. 피가 묻은 입과 얼굴에도 몇 번이나 흙을 부었다.


입안에 흙을 넣고 우물거리려 했으나, 순간 느껴지는 역한 맛에 전부 토해버렸다.


"욱...우웩.“


고통스러운 맛이었다. 얼마 전에 짐승이 지나간 자리였나. 표현할 길 없는 분노가 넘쳐 눈물로 흘렀다.


마족들 사이에 있을 때는 그저 힘들 뿐이었다. 도망쳐 숨어서, 입을 틀어막고 울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있는 이 지역으로 도망치고 나서부터는 참을 수 없는 열기가 아랫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 새끼들은 존나 약했다. 마지못해 휘두른 봉에 맞고 팔이 부러졌다. 만약 그때 겁먹지 않고 계속 싸웠다면, 녀석을 죽여서 먹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리 약해 빠진 녀석들임에도 몇몇 강한 인간들의 비호를 받았다. 안전한 곳에서 편안히 자고,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으며, 꼴리는 암컷을 범했다.


약한 놈들이. 나보다도 약한 놈들이!

약았다. 약하면 약한 대로 살아야지. 너보다 강한 나에게 죽어야지!!!


좆같다. 전신이 쑤셨다. 둥둥둥 가슴 속에서 바위 같은 것이 진동하는 듯했다.


그때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부스럭


나는 숨을 멈추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잠시 죽었다. 하지만 계속 죽지는 않았기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땅쥐였다.


"크르렁!!!“


소리 질렀다. 땅쥐 따위가 나를 농락한 게 참을 수 없었다. 땅쥐는 도망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분노는 금방 휘발되고, 공포가 나를 차가운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소리를 질러 버렸다. 들킨다. 숨어야 하는데. 움직일 수 없다. 몸이 덜덜 떨렸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먹을게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도망쳤다.


다 인간 때문이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은 다 그 새끼들 때문이다!


흐릿해져 가는 시야 속에서 달콤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래. 만약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면 인간 놈들에게 복수하리라.


그 녀석들이 다니는 길목에 숨어 약한 암컷을 기다리겠다. 적당히 나이를 먹은 녀석들은 어린 인간에게 약했다. 몸을 숙인 채 거적때기 같은 거로 가리면 어린 인간으로 위장 할 수 있으리라.


"으, 으어엉...“


애달프게 울어야 한다. 암컷은 그 듣기 싫은 소리에 약했으니. 그러면 내게 다가올 것이다. 처음에는 주의하다가도, 조심히, 그리고 상냥히, 내 위의 거적때기를 걷을 것이다.


그때다. 전신의 마력을 쥐어짜 그년을 덮친다!


두 팔을 뒤로 밀며 체중으로 넘어뜨린다. 이제 내 아래에는 인간 암컷이 있다. 저항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괜찮니?“


코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이 짜릿했다.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넘어, 자기를 혹사하려는 내게 제재를 가했다.


"흐, 억.“


비명도 지를 수 없는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뇌를 관통했다. 아득해진 시야, 흐려진 세계 속으로 빠져버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꿈을 꾸듯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안전한 곳에서 인간을 관찰하듯 이 순간을 관찰했다.


"...뭐야.“


멍하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차분히 눈앞에서 다리를 쪼그려 시선을 맞추고 있는 괴물을 보았다.


나와 비슷한 키의 인간 암컷이나, 그 안에는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인간보다도 강렬한 성력이 고고히 빛나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성력과 닮은 금발을 쓸어넘기며 내게 말했다.


"안녕. 혹시 히델족이니?“


소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비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동정도 하지 않는, 그저 상냥한 미소였다.


"...'너희'들은 부른다.“


"음. 그렇구나. 다행이야.“


"뭐가.“


"후후. 그보다도 왜 이곳에 온 거야?“


소녀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옆이 하늘이 보이는 공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이 산 밖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진 바다를 양옆에 두고, 하늘이 검푸른 땅까지 이어지는 넓은 평야... 그 한중간에 인간 기사들이 모여 진지를 치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온 거지? 왜 온 거야?“


바람이 소녀의 어깨를 스쳤다. 살랑이는 머릿결을 보며 나는 답했다.


"죽어. 저기.“


"왜?“


"먹을 걸 그냥 주는 녀석 생겼어.“


"음? 그건 좋은거 아니야?“


"살아 있는 녀석은, 그냥 없어. 이유 있어.“


내 말에 소녀는 놀란 듯 잠시 숨을 삼켰다.


"넌 똑똑하구나.“


"너 인간. 난 아니다.“


내 말에 소녀는 웃었다. 그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심심풀이가 끝난 걸까. 나는 그 외날 검이 자신의 목에 박히는 상상을 했다.


촤악-!


검이 살을 가르고 피가 솟구쳤다. 성력이 가득 담긴 피였다.


"...?! 너. 너 뭐 하는 짓이냐.“


소녀는 고통에 표정을 찡그렸다. 아름다운 얼굴은 비틀려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팔을 타고 손에 모이는 선혈마저도 그랬다. 소녀는 그 피를 내게 내밀었다.


"자. 마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라는 것을 바라는 자신을 말이다. 처음으로 먹을 것을 앞에 두고 망설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히델족은 성력을 마족임에도 성력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지. 그래서 어디서든 잘 숨을 수 있는 거야.“


"그걸 묻는 게 아냐.“


"음. 내 성력과 피에는 재생력이 있거든. 너는 히델족이니까 내 피를 취하면 분명 그 상처도 회복될 거야.“


"아니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친 후, 목 안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 콜록댔다. 그러면서도 소녀를 노려보았다. 그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양 말했다.


"그냥 받는 건 없다고 했지. 응. 그 말 대로야. 나는 너한테 바라는 게 있어.“


손을 까딱하는 것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나에게 무엇을 바란다는 말인가. 삶의 끝 외길에 꿀꺽 침을 삼켰다.


소녀는 작은 얼룩조차 없는 새하얀 의복에 피 묻은 오른손을 올리며 나를 보았다. 무너뜨리고 싶었던,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아름다움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마치 그런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소녀는 나와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네가 살아 주기를 바라.“


하. 이런 상황에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자신보다 약한 개체를 지키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게 팔다리를 묶은 후, 그 앞에서 먹이를 게걸스럽게 씹어먹는 그 새끼들처럼. 이 암컷은 나의 생명을 쥐고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흠. 오해를 하는 것 같네.“


"?!“


마법, 아니 성법? 생각을 읽은 건가?


"아니. 너 지금 생각하는 거 다 말로 꺼내고 있어.“


"......“


뭐가 재미있는지 소녀는 푸후훗 웃었다. 그리고는 돌연 상의를 벗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내 눈은 소녀의 새하얀 속살을 그 안에 욱여넣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온 것은 역겨움을 모아둔 듯한 괴기스러운 검은 살점이었다.


얇은 천으로 가린 가슴 왼쪽, 뚫리면 죽는 위치의 피부가 폭포 밑의 소용돌이치는 강처럼 뒤틀려 있었다.


"얼마 전에 마족 아이가 내게 살려달라 애원 한 일이 있었거든.


다른 사람들은 날 말렸지만 고집을 피워서 그 애를 치료해주려 했어. 그때 몸 안에서 칼을 꺼내 찌르더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타인의 상처 따위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나, 저 구멍은 달랐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한 공허함과 저주스러움이 느껴졌다.


”나 사실 좀 중요한 사람이거든. 정확히는 중요한 사람의 딸. 그래서 마왕이란 녀석이 함정을 준비한 거야.“


소녀의 흠 잡을 곳 없이 아름다운 여체 한중간에 있었기에 그 이질감이 극명했다. 적어도 단순한 상처가 아님은 그때의 나도 알았다.


"나는 죽을 뻔했고, 이번 원정에서 더 싸울 수는 없게 되었어.“


소녀의 말은 거짓으로 들리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거짓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 말이야. 병상에서 계속 생각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소녀는 상의를 벗은 채 눈을 감았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자신의 결론을 한 번 더 자문하는 듯했다.


암컷의 속살을 보고 있는데 욕망이 일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빨리 몸을 가렸으면 바란 것도, 혹시 다른 이가 지금의 소녀의 모습을 보지는 않을까 걱정을 한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소녀는 눈을 떴다.


"나는 이 세상의 싸움을 끝내고 싶어.“


그녀의 말에 느낀 충격은 이전까지 느꼈던 어떤 고통보다도 거대했으며, 선명했다.


멀어졌던 시야가 다시 가까워졌다. 현실감이 생기자 고통이 따라서 돌아왔고, 그 너머에는 한없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소녀는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존재였다. 생존을 넘어선 이성이 있었다. 이성이 옳다고 여기는 길을 걷기 위해 생존을 소모하고 있었다.


내게는 허황한 꿈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목표가, 그녀에게는 힘겹게나마 입에 담을 만큼 가까웠다.


빛나고 있었다. 눈앞에 있음에도 아득히 멀었다. 성스러움이란 의미를 이해했다.


"...으- 으으으...“


벌벌 떨고 있는 내게 소녀가 다시 다가 왔다. 다리를 굽혀 흙과 피로 범벅이 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너와도 싸우지 않을거야. 너도 싸우지 않아 주었으면 해. 너의 적이 아닌 이들과.“


소녀의 손에서 나는 탐스러운 냄새가 내 몸을 매혹했다. 침이 입에 고였고, 시선은 자꾸만 그곳으로 갔으며 내 입은 이미 그 손을 잡고 있었다.


싫었다. 뭔가가 싫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손에 피를 삼켜 마시기 시작했다. 아리따운 손을 탐해, 더럽게 핥고 빨고, 씹었다.


역겨움에 울음이 났다. 이러기 싫었다. 그녀의 손을 더 더럽히기 싫었다. 그냥 당장 죽었으면 했다. 하지만 몸은 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도망치고 숨어서, 남을 속여서 먹는데 거부감은 없었다. 모두가 그랬고, 그 외에는 길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다른 길이 있었다.


맞서서 물리치며, 남에게 자신의 뜻을 베푸는 이가 있었다. 당당함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겁함을 깨달았다. 선을 알아 악을 알았다.


그렇다면 나는 악인가?


소녀에게는 의미가 있었고, 그것은 아름다웠다.


비겁하게 숨어 오늘을 살고, 마주하기 싫은 것에서 도망쳐 내일을 살고, 남을 속여 날을 연명하다가, 그 다음에는 죽을 나는...


악조차 되지 못했다.


나는 소녀와 달랐다. 저기 어딘가 마을에 있을 인간들과도 달랐다. 원래 있던 곳에 수없이 굴러다니는 마족들처럼.


나는...


나는 없어도 되었다. 내가 존재 함으로 인해 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숲의 그림자가 깊어졌다. 해가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 손에 있는 피를 다 마시기도 전에 입이 멈추었다. 몸 안에 받아들인 성력이 나의 한계를 아득히 웃돌았다. 하지만 부담일 뿐, 내상을 입히지는 않았다.


전신이 고통과 힘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녀가 미소지으며 피와 나의 타액으로 더러워진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역시 너는 똑똑하구나.“


그녀의 눈빛에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자애가 어려 있었다. 나를 향한 일방적인 호의와 사랑이 있었다.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의미가 바뀌었다. 괴롭지 않았다. 두렵지 않았다. 소녀의 눈빛을 받음으로써 나는 분명히 이 세계에 실존하고 있었다.


해가 바다에 걸쳐질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하늘에 노을이 드리워졌다. 해와 바다가 맞닿는 곳에서부터 황금빛이 하늘과 바다로 섞여 들어갔다. 허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존재는 소녀였다.


나무 그림자 사이로 들어온 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던 머리칼 가닥 하나하나가 산에서 본 강줄기처럼 빛을 흘러내렸고, 원래도 고왔던 피부는 저 하늘 밖의 존재 처럼 성스럽게 빛났다.


"이제 해어질 시간이야.“


당연한 사실이고, 몇 조금 전만 해도 간절한 바람이었으나 지금은 깜짝 놀라 헛기침을 내뱉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너를 보고 몰래 도망쳐 온 거거든. 같이 온 기사들이 너를 보면 지킬 수 없어.“


소녀는 그리 말하고도 먼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물러서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건 시험일까. 아니. 아니었다. 소녀는 그저 한없이 나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만약 내가 한사코 떠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지켜 주리라.


"...알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물러갔다.


싫었다. 소녀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릴 바에야 차라리 소녀에게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싫었다.


지금까지 나는 하고 싶은 일만을 했다. 그러지 않았을 때는 하지 못할 때뿐이었다.


지금 나는 소녀에게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떠날 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안' 할 것이다.


"......“


소녀가 나를 보았다. 뒷걸음치는 것도 힘겨워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꽈악-


돌연 그녀가 나를 안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 허락해서는 안 되는 거리를 한순간에 침범당해, 소녀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당황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옹을 풀고 눈을 마주쳤다.


"고마워! 네가 나의 희망이야.“


모두 아는 단어임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 아름답기 짝이 없는 소녀의 웃음을 보았다.


"사람들이 너를 쫓지 못하게 할 테니 남쪽으로 향하기만 하면 될 거야. 인간의 돈도 주고 싶지만, 지금은 힘들겠네. 그럼...“


소녀는 그리 말하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이제 끝이었다. 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소녀를 불렀다.


"자, 잠깐...!“


"응? 왜?“


소녀는 곧바로 다시 나를 돌아봐 주었다. 하지만 안도감은 잠시, 나는 할 말을 찾아야 했다.


짧은 순간 수없이 많은 하고픈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나 같이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소녀가 내 말을 기다렸다. 목에서 뭐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목구멍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토할 것 같았다.


해가 져가며 숲속에 완전한 어둠이 드리워져 갔다.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소녀가 있는 곳까지, 어둠이 빛을 삼켜나갔다. 초조했다. 마치 이 어둠이 그녀에게 닿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너, 너가 되려면. 뭘 해야 하나!“


그래서 내뱉은 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절대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소녀는 나의 물음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해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어, 어둠은 소녀를 포함해 세상 전체를 삼켜버렸다. 나는 이제 죽고 싶었다.


그리고 소녀는.


이제는 나를 비추지 않는 태양 빛보다도 밝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원래는 말을 탄 병사를 뜻했어.“


"...어?“


"지금은 귀족의 가신으로서 그를 지키는 이를 말하지.“


"그게 무슨...?“


"하지만 나는 생각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성력과 박력에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


"기사란! 불의를 저지하며, 약자에겐 기회를 주고, 사람을 지키는 이들이라고.“


소녀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조각이라 착각할 만큼 절도 있는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말했다.


"명예롭게.“


명예.


처음 듣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마 알고 있었다. 소녀가 가진 아름다움. 빛나는 무언가. 그것이 명예였다.


"...나는...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물음에 소녀는 미소지었다.


"....후후. 너를 만난 건 내 인생에 손에 꼽을 행운이야. 기억해줘. 인간들의 나라에는 '아카데미'라는 곳이 있어. 자격이 있는 이를 기사로 키우는 곳이지. 그곳을 향해 봐. 응원할게.“


소녀는 그리 말하고는 정말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소녀가 내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소녀는 나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나의 주춧돌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위에 세 단어를 올렸다.


명예. 기사. 아카데미.


그 순간 나의 운명이 정해졌으리라.

.

.

.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처럼 말이다.


검붉은 하늘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치 예전 소녀의 몸에 났던 것과 같은 구멍이... 내가 만든 것이었다.



"...이제 끝이다.“


그녀는 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정말 많은 것을 잃었으니, 그럴 만했다.


"드디어. 이곳까지 왔구나.“


아카데미. 그 중심에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이자 분수대인 '용사의 은총', 그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를 향해 검을 향하고 있는 '용사'를 보며 말이다.


"...그래. 드디어.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


그녀는 한없이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 일이 던져진 주사위가 떨어진 것과 같이, 필연적으로 왔을 순간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떨어지는 주사위를 원하는 수로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내던졌던 나로서는 탐탁지 않았다.


"이봐. 마지막인데 뭘 그리 숨기시나."


"닥쳐라."


"그래. 좀 낫네."


내 말 한마디에 결코 무너질 일 없을 것 같던 그녀의 표정이 움찔거렸다. 부들부들 입가와 관자놀이가 울긋거렸고 마지 못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일을 벌였나. 마왕."


그 질문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껏 그 이유를 그녀에게 전하는 것을 얼마나 바라 왔는가. 이 모든 것이 너를 위함이었다고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얼마나 바라 왔던가.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용사. 넌 마족을 뭐라고 생각하지?"


내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자문을 위한 머뭇거림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정의를 분해하고 증명한 뒤에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참 아름다웠다.


"사람이야. 인간에 비해 욕구가 강할 뿐인. 사람들이야."


"나도 말인가?"


".......“


그녀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고민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배신하고 죽여, 세상의 악이 된 나를, 사람일 수도 있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


그래. 이거면 되었다.


나는 오른손에 마력을 모았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그것을 눈치챘다. 그녀의 백금색 검에 황금빛 성력이 모였다.


쾅-


정반대의 두 힘이 부딪혀 발산했다. 은빛의 구체형 충격파가 두 힘이 부딪힌 곳을 기점으로 아카데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녀의 세이버와, 나의 오른손이 날아갔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구실은 하는 왼팔에 다시 한번 마력을 모았다.

그녀도 판단을 내렸다. 그녀의 오른손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검붉은 마력과 황금빛 성력이 교차했다. 찰나라 부를 만한 세계 최강자들의 한 합이, 억겁처럼 길었다. 지루하다 못해 하품이 나오려 했다.


아. 과거가 떠오른다. 한때의 추억이. 그립고도 아련한 청춘이 나를 집어삼켰다.


새파란 바닷속에서 익사하고 있었다. 푸른 불꽃에 타죽으며, 서슬 퍼런 칼날에 찔려 죽고, 하늘 너머에서 숨이 막혀 죽었다.


아프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 고통 속에서도 확실히 느꼈다.


시발. 시이발!!!


담담히 죽기를 맹세하지 않았나. 누구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명예를 지키며, 담담히 바스러지기로 하지 않았나.


코앞에 와서 이러기냐. 이래서는 그때와 다른 바 없지 않은가. 숨죽여 울며 끝을 기다리는 그때와, 다름이 없지 않은가.


다가오는 황금빛의 손을 보며, 내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내 몸을 뚫어 달라고 빌었다. 제발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달라 빌었다.


하늘은 어느 쪽 소원도 들어주지 않았다.


푹-


몸을 관통당했다. 한순간에 전신에서 힘이 빠졌다. 안타깝게도 머리 쪽은 그것이 늦었다.


"흐, 흐어엉...“


추하다. 그래서 울었다. 그래서 추했고, 그래서 울었다.


그녀의, 소녀의 표정에서 당황이 보였다.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수초 앞에 다가올 상태를 진심으로 바랐다.


"너, 설마. 그때의...?"


그녀의 말을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내 본질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죽어가며 이 좆같은 세상을 저주했다. 어느 것 하나 들어주는 법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이룰 수 없었다.


시야가 멀어졌다. 현실감이 사라지고, 꿈을 꾸는 듯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었다.


'다시 하고 싶나?'


어디서 울리는 말일까. 뒤? 이 분수의 안에서...?


'다시 하고 싶나?'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나? 당연하지 이 시발 새끼야.


'좋다.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으니, 계약은 이루어지리라.'


뭐? 잠깐. 너 무슨...


그 한순간, 분수가 터져나갔다. 새하얀 폭발은 모든 것을 휩싸았다. 광장을 덮고, 아카데미를 덮고, 지역 일대를 덮고, 대륙을 덮고, 세상을 덮었다.


지금에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세계의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과거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야. 과거의 나 새끼.


이거 꿈 아니다. 시발 진짜라고. 적지 못하면 몸에 그려서라도 새겨!


그때의 소녀를, '하이드레건 베레스'를 지켜라!!!


지켜!!!!!!

.

.

.


###

아카데미 제 1056회 입학식이 진행되는 날 하루 전이었다. 아카데미 아랫마을에는 세상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세상에서 모여든 귀족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팔기 위해 목숨을 깎고 있었고,


한 남자는 그 뒷골목 구석에서 자고 있었다.


다 해져 누더기나 다름없는 옷과 날은 진작에 다 나간 검을 대충 천으로 싸매 껴안은 채 자는 그는 잘 쳐줘야 끝물의 용병이었고, 그 본질은 인간으로 위장한 마족이었다.


움찔. 세상 모르게 처자던 얼굴이 움찔 떨렸다.


벌떡-


갑작스러운 기상에 옆에서 한가로이 놀던 고양이가 앙칼진 소리를 지르고는 도망쳤다.


눈을 뜬 마족. '에이'는 상황을 파악하듯 주위를 살피더니 긴 한숨을 쉬었다.


"시발 개꿈이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다시금 누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섹시하고 몸 잘빠진 여자가 꿈에 나오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그토록 기다리고 준비했던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이 있는 날.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꿈에 컨디션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한 가운데의 광장. 그 중앙의 '용사의 은총' 앞에서.

금발의 소녀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녀를 추종하던 시기 하든, 그 외의 어떤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든. 그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건내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 현시대의 사람들이 부르기를 '용사의 아이'. 한 번도 늠름함을 잊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는 쇳소리조차 되지 못하는 소리를 하늘에 흘려 퍼트렸다.


자신을 위해 인생을 바친 남자를 제 손으로 죽여버리기라도 한 듯이.

.

.

.


작가의말

불안 불안, 두근 두근. 주인공의 감정을 함깨 느끼고 있으니 이만한 몰입이 또 있을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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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히로인만 회귀함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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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차 시험 24.06.10 7 0 11쪽
5 그의 기억 24.06.09 9 0 11쪽
4 지각한 자들 24.06.08 11 0 18쪽
3 싸우고도 친해질 수 있다면 좋은 친구 24.06.07 13 1 12쪽
2 시작은 착각으로 24.06.06 17 2 14쪽
» 이야기가 시작하기도 전의 이야기 24.06.06 35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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