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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서재입니다.

악의 문명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일반소설

완결

FromZ
그림/삽화
포타리
작품등록일 :
2019.02.22 23:57
최근연재일 :
2019.04.24 00:05
연재수 :
58 회
조회수 :
38,603
추천수 :
2,277
글자수 :
332,014

작성
19.04.11 00:02
조회
524
추천
31
글자
10쪽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5)

DUMMY

***1***



우리는 붉은 레이저에 압도되어 미동도 없이 서있다.


우리의 배후에 그림자처럼 새까만 부대가 있었다.


그들은 얼핏 보아도 특수부대 같은 복장과 장비로 온몸을 무장하고 있다. 그래서 괜히 대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저런 장비와 저런 인원수······.


철저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가, 포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리더, 저 자들은···"


그 순간 엄청나게 밝은 조명이 켜지면서, 그 조명의 앞에 어떤 여성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짧게 기른 회색의 머리카락과 한쪽으로 쓸어넘겨진 앞머리, 날카로우면서도 당돌한 인상이다.


빛을 등지고 당당하게 등장한 그녀를 괜히 대적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침묵 속에서 마침내 입을 연다.



"결국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않으셨는지요?"




- 저는 그곳에서 어떻게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일단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리더님처럼 말이죠.


- 그 뒤에 그 여자가 이곳으로 찾아온 겁니다. 그녀는···



죽은 고위 관계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말했던 여자가 저 여자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예상은 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나 빨리 등장하실 줄은 몰랐네요."


내 허세를 간파한 것인지,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이 백화점과 병원의 지도자···. 맞지요? 다들 당신을 리더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맞아요. 제가 책임자입니다."


"리더··· 책임자··· 지도자···. 어떤 단어라도 좋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유지하는 그 당찬 태도는 제법 마음에 들었어요. 그것만큼은 높이 평가하죠."


"······우선 총구는 돌리고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그럼 당신과 당신의 부대가 지금 무장을 해제할 수 있다는 말이신지요?"


"···."


그건 안 된다. 이미 지고 있다는 느낌이지만, 자발적으로 모든 무장을 해제해서는 완전히 주도권을 잃게 될 것이다. 혹시라도 저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즉각 저항할 수 있는 여지는 반드시 남겨두어야 한다.


"뭐 하시는 분들인가요? 그쪽은 누구시고요?"


"당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세력이라고 할까요? 저는 새롭게 탄생한 국가에서 군사부 부장관을 하고 있는 몸입니다."


그런 직위까지 갖추고 있는 규모의 세력이라는 말인가.


그녀가 말하는 '국가'라는 것이 단순한 허세는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들과 여러 정보를 고려해봐도 말이다.


"···그래서요? 대체 목적이 뭐죠?"


"타인, 타집단, 타국가를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가장 확실한 수단은 무력이지요. 당신도 무력의 중요성과 그 편리성에 대해 굉장히 잘 아시는 분이지 않나요?"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얼굴로 자신 있게 말했다.


"당신과 당신의 부대는 정말 굉장했어요. 치밀하고···. 자비도 없었죠. 모든 체계가 붕괴한 이 작은 도시에서 그만한 세력을 키운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당신은 정말,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늘에서 지켜보셨나 봐요?"


"잘 간파하셨어요. 맞습니다. 저희에겐 아무것도 숨길 수 없지요.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생존자들이 모여 조금씩 커지는 모습을, 더 큰 세력이 다른 작은 세력을 야생의 짐승처럼 잡아먹고 성장하는 그 모든 과정을······.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쪽의 감상은 궁금하지 않아요."


"작은 세상의 포식자였던 물고기가 먹음직스럽게 덩치를 키웠어요. 그 물고기는 큰 세상에 들어서면서 상어를 만나게 되고 ···결국 자신도 피식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물고기고 그녀의 집단이 상어라는 뜻으로 들린다.



"지금부터 여러분을 흡수하겠습니다."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어떠한 타협도 할 수 없는, 타협이라는 수단이 먹히지 않는 강대한 적의 선언이었다.


"여기서 여러분이란, 제 눈앞에 있는 당신과 당신의 부대를 포함해 그 백화점과 병원에 있는 모든 인력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최소한의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저희의 모든 것을 흡수하겠다고요···?"


"국가에 일손이 많이 부족합니다. 열악한 환경인 탓에 사망자도 속출하고 있어서 항상 새로운 노동력이 필요하지요. 이제 슬슬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해서, 이제 여러분의 차례가 되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설명을 완전히 빼놓고 있다.


"리더, 저 자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십니까?"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라는 말인가.


내 결정이, 얼마나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될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질 것 같은 싸움에 사람들의 목숨을 불사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알아듣게 설명해주세요."


"목숨을 바쳐 인류의 미래를 재건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지요."



인류의 미래? 재건?



"저희에게 거절할 권리는 없는 건가요?"


"인간은 아주 귀중한 자원입니다. 복잡한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지능적으로 문제를 탐구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인간이라는 자원에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항상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한다는 것이죠."



섬뜩했다.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바다를 건너서 저희의 영토에 도착하고 나면 다 이해하게 될 거니까요. 인류의 미래를 재건할 용기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고요."


애당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것을 설명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받아들이시겠어요? ······아니면 저항하시겠어요?"


대답을 이미 정해놓고 물어보고 있다.


내가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면, 그녀가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갈 것이다.


그녀가 바라지 않는 대답을 하면, 아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생각···?"


시간을, 일단 시간을 벌어야 한다.

거주지에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좋다.

돌아갈 수 없더라도 일단 시간을 벌어서 다른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이건 명령입니다. 명령 앞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지요. 생각은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명령이었구나.


"···알겠어요. 저희에게도 목숨을 버리면서 거부할 생각은 없어요. 그쪽의 명령에 따를게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이 도시에서 떠날 준비를 끝마칠 수 있어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정말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거면 됐다.

이것보다 나은 상황은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거주지로 돌아가서···


"동의하셨으니, 지금 바로 가시지요."


"······네?"


"따라오세요. 잠수함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바다를 건너겠어요."


"잠깐만요! 거주지에 남은 사람들은요? 저희끼리 먼저 출발한다고요?"


"병력을 파견해서 그 사람들도 뒤따라 오도록 조치할 거니까 걱정 마시지요."


꼬였다.


심하게 꼬였다.


일단은 이 상황을 넘기려고 동의하는 척을 한 건데, 이제는 어떻게 돌이켜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주장을 번복할 수 있을까? 아니, 감히 주장을 번복해도 되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합시다! 지금이 무슨 식민지 시대입니까?"


거주민이···.

내 사람들이 하나···. 둘···. 적극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불만을 토로하며 큰 소리로 뭐라 말하고 있다.


그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와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언어로서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그들을 멈춰야 한다. 말려야 한다.


우리는 저들을 이길 수 없어. 적어도 지금은, 지금은 이길 수 없어. 일단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기고 시간을 끌어서 대항할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데···


"먹음직스러운 크기의 자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소 요리가 필요한 모양이네요."



그녀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저 간단한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 순간에 깨달았다.



가장 크게 소리치던 거주민 한 명의 머리, 가슴, 팔, 다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 장면이, 피가 뿜어져 나오는 부위의 위치가 하나씩 다 인지될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시간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참혹한 몰골로 쓰러졌다.



"압도적인 격차가 있는데도 무턱대고 덤비는 건 본인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건지요?"



충격이 만들어낸 침묵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는 와중에 사람들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이번 학습을 통해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생명은 소중하니까요."



그래도 침묵이다.


그리고 나는 이 침묵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침묵이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다.


이 긴 침묵이 끝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 같다.


사실은 긴 침묵이 아닐 것이다.


사실은 짧은 침묵인데 이 상황이, 이 분위기가, 저들의 눈동자가, 나의 인지가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착각이 계속되고 착각이 더 심해져서 침묵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더는 싫다.


더는 안 된다.

더는 아무도 죽어선 안 된다.


너무 많이 죽었다.

너무 많이 죽였다.


모르겠다.

다 내 잘못이니까 다들 그런 눈을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쓰러진 거주민을 보던 당신들의 눈을, 제발 저 무서운 사람들에게 향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그런 눈빛은 안 된다.


느껴진다.


무엇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지 느껴진다.


그것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살의.



내가 막아야 해.



"잠깐···!"



그러나 우리 쪽 사람들이 이미 저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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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pilogue. 맴도는 기억의 끝자락 (1) +2 19.04.23 665 42 13쪽
56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5) +1 19.04.23 545 35 11쪽
55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4) +2 19.04.22 476 29 11쪽
54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3) +1 19.04.22 475 30 10쪽
53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2) 19.04.22 454 29 11쪽
52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1) 19.04.19 453 30 9쪽
51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5) +3 19.04.18 464 33 10쪽
50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4) 19.04.17 441 35 11쪽
49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3) 19.04.16 452 30 10쪽
48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2) +2 19.04.15 459 32 10쪽
47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1) +1 19.04.12 487 31 11쪽
»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5) 19.04.11 525 31 10쪽
45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4) +1 19.04.10 459 35 11쪽
44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3) 19.04.09 451 33 11쪽
43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2) +2 19.04.08 470 37 13쪽
42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1) +1 19.04.05 485 35 11쪽
41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5) +1 19.04.04 486 38 12쪽
40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4) +1 19.04.03 517 40 12쪽
39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3) +2 19.04.02 511 34 12쪽
38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2) +1 19.04.01 505 39 12쪽
37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1) +1 19.03.31 502 38 15쪽
36 6. 악연의 파편 (5) +1 19.03.30 519 36 12쪽
35 6. 악연의 파편 (4) +1 19.03.29 513 35 15쪽
34 6. 악연의 파편 (3) +9 19.03.28 503 37 12쪽
33 6. 악연의 파편 (2) +1 19.03.27 556 34 12쪽
32 6. 악연의 파편 (1) +1 19.03.26 525 38 12쪽
31 5.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5) +2 19.03.25 530 38 14쪽
30 5.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4) +1 19.03.24 558 3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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