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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서재입니다.

악의 문명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일반소설

완결

FromZ
그림/삽화
포타리
작품등록일 :
2019.02.22 23:57
최근연재일 :
2019.04.24 00:05
연재수 :
58 회
조회수 :
38,689
추천수 :
2,332
글자수 :
332,014

작성
19.04.10 00:00
조회
460
추천
36
글자
11쪽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4)

DUMMY

***1***



눈이 쌓인 도시는 굉장히 침체되어 보인다.


도로의 폐차, 꺼진 가로등과 신호등, 전면의 유리창이 박살 난 건물들.


그런 풍경을 자동차의 창밖으로 보면서, 우리 리더팀은 정부의 지하 시설에 도착했다.


"설마하니 법원 밑에 이런 시설이 있었다니!"


"엄청난 규모네요."


도심지에서 조금 동쪽, 이 땅의 정중앙에 있는 법원 건물의 지하였다.


어떠한 안내도나 표지판도 없이 지하의 벽에 뜬금없이 커다란 통로가 나있었다.


"이 벽,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벽이었나 봅니다."


"숨겨진 문이었군요."


본래 움직이는 벽으로 숨겨졌을 통로는 폭탄 따위로 부서져서 그 비밀스러운 출입구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외부 침입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손전등을 켜고 비밀스러운 출입구를 통과했다.


특수 합금 재질의 통로를 일직선으로 통과하다가 보안 게이트가 나타났다.


지하철에서 쓰이는, 누군가 통과하면 이용자의 돈을 자동으로 결제해주는 낮은 게이트였다.


게이트를 통과해서 끝까지 가보니, 커다란 승강기가 세 개나 있고 주변에는 화장실, 집무실, 회의실 같은 잡다한 방들이 있었다.


"이 승강기겠죠."


승강기의 문은 공허하게 뚫려있었다.

승강기가 다니는 통로를 살짝 내려다보니,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승강기가 시야의 끝에 아슬아슬 닿는다.


우리는 아주 긴 사다리를 타고 마침내 정부의 지하 시설까지 내려왔다.


손전등으로 주변을 대충 둘러보아도 침입의 흔적이 낭자하다.


문은 대부분 열려있거나 파괴되어 있었고 곳곳에 양복을 입은 시체들이 가득하다.


총알 자국이나 핏자국이 벽면을 더럽히고 있다.


더 깊게 나아가면 하얀 가운을 입은 시체도 간간이 보인다.


"이건···."


"완전히 돌파 당한 것 같습니다."


파손된 보안용 드론과 죽은 경호원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생전에 착용했던 방탄복에는 구멍이 듬성듬성 뚫려있었다.


그렇게 계속 불 꺼진 시설을 탐험하다가 서버실을 발견했다.


서버 장비가 책장처럼 쌓여서 배치되어 있는 서버실의 구석에 시체가 또 하나 있었다.


그 시체는 작은 책상 위에 엎어져서 어떤 문서들을 가리고 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정보를 데이터로 저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설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몇 장의 종이는 나에게 의문을 품게 해주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시설 관계자의 일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



***2***



2105/11/28

컴퓨터를 이용할 수 없어서 급한 대로 메모하겠다.


사태가 발발하고 시설을 한창 점검하던 때였다.


이 '지하 마천루'에 무장한 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와 어떠한 대화도 시도하지 않고 시설 인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해 왔다.


훈련을 받은 경호원이나 최신식 드론도 그들 앞에선 무력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얼굴들이 하나씩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연구실의 냉장고에 숨었다.


소동이 끝나고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 냉장고에서 나와보니 모든 것이 망가져있었다.


누군가는 이 일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2105/11/29

별다른 일 없음. 기분이 너무 안 좋음.


휴게실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구할 수 있다.



2105/12/2

쓸 수 있는 어떠한 전자 장비도 없다.


서버도 컴퓨터도 단말기도 모두 작동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갈 순 없다.


그들이 아직도 지상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총에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아파하는지 기억한다.


나는 절대 총에 맞기 싫다.



2105/12/3

입에서 피가 나왔다.


코피가 흐르고 항상 구역질과 복통이 나를 괴롭힌다.


배변을 볼 때마다 설사가 나온다.


나는 이 증상의 원인을 알고 있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냥 여기서 천천히 죽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일말의 희망도 없는 바깥의 상황을, 우리의 상황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모르는 자는 생존을 택하고


알고 있는 자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



2105/12/4

어떻게 이런 중요한 시설에 화학전 대비 물품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미래가 없다.


이곳이 이 도시국가와 시민들의 미래였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어차피 가족들에겐 관심도 없어.



2105/12/5

몸을 움직이는 게 버겁다.


모든 곳이 피폭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도심지의 주요 구역은 방사능 대책을 세우도록 우리가 미리 로봇들을 조정해놨으니 다행일까.


모르겠다.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미래가 있다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나에게 남은 것은 원시적인 종이 몇 장과 펜 한 자루뿐이다.



2105/12/6

방전되지 않은 건전지를 모았다.


그것들을 카메라에 넣어서 카메라를 켰다.


카메라 내부에 있는 전기선에 휴대폰 충전기의 잘라낸 선을 이었다.


하루를 꼬박 걸려서 노트북 한 대에 전원을 넣는데 성공했다.


노트북을 도시 외부로 빠져나가는 광케이블에 연결해서 인터넷망에 접속을 시도해보았다.


인터넷은 아직 살아있었다.


평소에 접속하는 사이트는 모두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이트를 찾아서 접속할 수 있는 기본값이 시스템 내부에 입력되어 있었다.


드디어 내가 죽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광케이블을 통해 프로토콜을 숨긴 패킷을 아직 살아있는 사이트로 전송했다.


왜 그렇게 했냐.


그 살아있는 사이트가 권한 없이 열람할 수 없도록 설계된 사이트였기 때문이다.


사이트의 생성 일자는 사태가 벌어지고 4일이 지난 시점이었으니까.


충분히 의심스러운 사이트다.



2105/12/7

패킷의 캡슐을 뜯어내고 최소한의 인공지능 헤더만 붙였다.


그런 패킷을 2바이트씩 작게 쪼개서 새벽동안 저쪽의 서버에 쌓았다.


데이터가 쌓이자 작동 가능한 코드가 되었고 드디어 지금, 여기서 저쪽의 서버에 명령어를 입력할 수 있게 되었다.


권한의 수준을 찾기 위해 방문자, 열람자, 관리자 같은 적당한 단어를 쳐보다가 '점검용'이라는 유저 등급을 찾았다.


나는 점검용이라는 권한을 탈취해서 서버 내부에서 오간 데이터를 내려받았다.


다중 해시화 데이터라도 내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패턴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16진수나 8진수 등으로 전환하면서 복합적인 값을 보고 예상되는 함수를 온종일 하나씩 때려 넣어보면 답이 나온다.


나는 사이트의 내부 주소를 조작해서 이쪽의 주소를 겹쳐놓았다.


이제 사이트의 주소는 하나지만, 경로는 둘이다.


하나는 저쪽 대륙 어딘가의 서버이고 또 하나는 내 노트북이다.


들킬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저들이 알아낼 때쯤이면 이미 나는 죽어서 없을 거니까.



2105/12/8

운영체제를 엿보니 저들은 양자 컴퓨터나 그에 버금가는 대규모 병렬 서버를 운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건 개인이나 작은 기업이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방금 알아냈다.


저들의 사이트는 지배계층의 내부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비밀 플랫폼이었다.



2105/12/9

선제공격을 받은 북반구의 나라들은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


그래서 궤멸 직전의 강대국들이 대량의 핵미사일과 중성자탄으로 보복한 모양이다.


그 결과, 남반구의 일부와 북극, 남극 같은 극관을 제외한 모든 구역이 핵으로 파괴되었다.


내가 감시하고 있는 저들은 강대국의 거대한 시설에서 살아남은 주요 인원들, 강대국의 우월한 방공 시설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이었다.


여력이 남아있는 생존 집단들은 다시 모여서 피해를 회복하고 있다.



2105/12/10

전쟁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 땅에 전쟁의 여파가 퍼진 이유는 가히 충격적이다.


모든 국가가 전쟁으로 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아무런 피해도 없이 홀로 살아남은 이 도시국가가 세계를 강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미친놈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미친 인간들.

저것들은 그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이다.



2105/12/11

계속 인류를 재건하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대화 내용이 있는데,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그 프로젝트', '자원'이라는 중요해 보이는 단어만 말하면서 직접적인 언급을 금지하고 있는 것 같다.



***3***



그리고 더 작성된 일기는 없었다.


"끔찍한 것들······."


나와 함께 온 리더팀들은 서로 일기를 돌려보면서 욕지기를 내뱉거나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제 챙겨야 할 것만 챙겨서 나갑시다."


정보는 이 정도면 됐다.

이제 남은 것은 드론 병기, 전쟁기계, 에너지 계열의 신무기다.


우리는 연구 구역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걷는다.


새로운 무기를 선전하는 포스터가 벽면에 띄엄띄엄 붙어있고 한층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멈춘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난다.


또 통로가 나타나고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그 끝에는 커다란 철문이 까맣게 그을려서 억지로 개방되어 있었다.


이미 개방된 문을 통과하니 꽤 넓은 구역이 나왔다.


우리의 손전등이 곳곳을 비추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우리가 찾던 글자가 있었다.



「시험생산 전쟁기계」



근미래적인 디자인의 커다란 받침대 위에 자동차 정비소에서 보일 법한 기계 팔이 좌우로 늘어져있다.


아주 굵은 전선과 작은 단말기가 위아래로 붙어있다.


"말로만 듣던 전쟁기계가······"


매체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전쟁기계.


그것은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설계된 로봇이 아니다.


테러리스트나 다른 국가와의 대규모 교전이 일어났을 때, 일방적인 살상을 목적으로 설계된 거대한 기계다.


좌우로 웅장하게 세워진 기계 팔의 높이는 대충 보아도 12미터는 넘어 보인다.



"······회수당했네요."



전쟁기계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것도 아마···"



"정지."



그 순간, 수없이 많은 붉은 레이저가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쏟아졌다.


야간투시경을 장비한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복장의 특수부대가 10명? 20명? 30명?


저들이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다.



"정지!"



우리 거주민들이 일제히 총을 들려고 한다.

그래선 안 된다.

이미 우리가 먼저 노려지고 있다.


우리를 덮치고 있는 이 수많은 붉은 레이저가, 이미 우리가 압도당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쏴봤자 불리한 싸움, 지근거리에서 서로에게 난사할 뿐인 살육전이 된다.



"잠깐···! 다들! 다들, 총 내리세요!"



나는 일단 그렇게 말하긴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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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3) +1 19.04.22 476 31 10쪽
53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2) 19.04.22 455 30 11쪽
52 10. 살인충동과 바벨탑 (1) 19.04.19 454 31 9쪽
51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5) +3 19.04.18 465 34 10쪽
50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4) 19.04.17 442 36 11쪽
49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3) 19.04.16 453 31 10쪽
48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2) +2 19.04.15 460 33 10쪽
47 9. 지옥으로 향하는 핏빛 계단 (1) +1 19.04.12 488 32 11쪽
46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5) 19.04.11 526 32 10쪽
»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4) +1 19.04.10 461 36 11쪽
44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3) 19.04.09 452 34 11쪽
43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2) +2 19.04.08 471 38 13쪽
42 8. 어리석은 역사의 되풀이 (1) +1 19.04.05 486 36 11쪽
41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5) +1 19.04.04 488 39 12쪽
40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4) +1 19.04.03 518 41 12쪽
39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3) +2 19.04.02 512 35 12쪽
38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2) +1 19.04.01 506 40 12쪽
37 7. 부디 이 신기루를 영원히 (1) +1 19.03.31 504 39 15쪽
36 6. 악연의 파편 (5) +1 19.03.30 521 37 12쪽
35 6. 악연의 파편 (4) +1 19.03.29 514 36 15쪽
34 6. 악연의 파편 (3) +9 19.03.28 504 38 12쪽
33 6. 악연의 파편 (2) +1 19.03.27 557 35 12쪽
32 6. 악연의 파편 (1) +1 19.03.26 526 39 12쪽
31 5.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5) +2 19.03.25 532 39 14쪽
30 5. 그래도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4) +1 19.03.24 559 3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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