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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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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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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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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3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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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6쪽

6장-영원永遠 (1)

DUMMY

이른 새벽녘.

밤새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젊은 연인들이 아니고서야, 아침 잠 없는 노인들조차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시간이다.

이런 시간이면 제아무리 공화국의 수도인 팔람이라도 그 생기가 줄어드는 법이다.

더군다나 중심가도 아닌 변두리 지역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정적만이 가득한 이 시간에도 예외는 있었다.

타다닥!

빠르고 경쾌한 발걸음이 아직 짙푸른 어둠에 젖은 거리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가늘고 탄탄한 체격을 감싼 옷은 어둠에 녹아들기 쉬운 검은 색.

하지만 어둠을 틈타 담벼락을 타넘는 무뢰배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에 쫓기듯 달리는 모습까지만 해도 경비대와 마주친 도둑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그 뒤를 쫓는 육중한 그림자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으니.

앞서 달리는 자를 뒤쫓는 두 번째 그림자는, 먼저 지나간 가벼운 몸놀림에 비하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무겁고 둔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몇 배는 더 크고 무거운 몸뚱이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비바람에 낡아가고 있던 포석들이 비명을 지르며 으깨졌다.

땅을 갈아엎으며 느릿하게 걸음을 떼던 '추격자'는 문득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다.

내장이 산 채로 썩어버린 듯, 지독한 악취가 바람결을 더럽혔다.

딱히 공격을 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지쳐서 내쉬는 한숨에 가깝다.

하지만 그 숨결에 뒤섞이는 독기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달려가던 '도망자'는 뒤를 흘끗 바라보더니 가벼운 몸놀림을 십분 활용해 급격히 방향을 바꿨다.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추격자가 온 몸으로 지면을 부수며 뒤따라 몸을 돌렸다.

맞부딪히는 바윗돌이라도 쉽사리 부숴버릴 수 있을 강인한 육체라고 해도, 지나친 힘과 육중한 몸을 쉽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추격자의 머리 위로 날아오른 도망자는 야수의 등을 따라 미끄러지며 어느새 꺼내든 칼을 힘껏 찔러넣었다.

'단단해!'

가벼운 단검은 두터운 가죽과 불규칙인 골판에 뒤덮인 야수의 몸을 파고들기에는 너무나 약한 무기였다.

상당량의 마력을 둘렀는데도 살점을 베어내긴 커녕 겨우 긁힌 자국만 남긴 도망자는 황급히 몸을 굴려 추격자에게서 떨어졌다.

추격자가 그 거대한 몸을 눕혀, 등에 달라붙은 귀찮은 것을 짓이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자는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자연석을 쌓아 만든 벽이 마르지 않은 진흙처럼 단번에 뭉개지며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분명 추격자는 느리고 둔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감안해도, 불리한 것은 '도망자' 쪽이었다.

필사적으로 장애물을 피해 달리더라도, 뒤쫓아오는 괴물은 주변에 있는 건물이나 지형을 무시하며 아예 새로운 길을 만들어 달려온다.

아무 것도 없는 평지에서도 쉽게 따돌릴 수 없었기에 혹시나 싶어 이런 좁은 지역으로 유인한 것이지만, 오히려 도망자 쪽이 제 덫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이 이상 끌고 들어갈 수는 없어. 인명피해를 내기 전에 끝내야 해.'

다행히 이 지역은 민가가 별로 없다.

하지만 안쪽으로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일반 시민들의 주거지역으로 이어져버린다.

괴물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뻔했다.

최대한 마력의 소모를 줄이려던 도망자-이스티엘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활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 허우적거리는 마령을 향해 정면으로 달렸다.

"새벽의 창이여."

마침 지금 마령이 서 있는 곳은 조금 움푹 패여 웅덩이가 만들어진 곳이었다.

거기에 마령이 몸을 뒤틀며 포석을 거의 다 벗겨낸 덕에 흠뻑 젖은 진흙탕이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육중한 무게 탓에 수렁에 제법 깊이 빠져든 마령은 그렇지 않아도 둔한 움직임이 훨씬 더 무거워져 있었다.

마령은 티엘의 손에 맺히는 마력을 읽고 이를 드러냈다.

이미 몸 곳곳이 무너지는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심각하게 썩어버린 상태지만, 죽음을 느끼는 본능만은 아직 살아있다.

티엘을 노려보던 마령이 채찍처럼 길고 가는 혀를 창살처럼 내쏘았다.

그러자 티엘은 살짝 몸을 틀어 마령의 혀를 피한 뒤 도약주문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사람의 키만한 크기의 대궁에 걸린 화살이 마령의 미간을 노리며 싸늘한 빛을 뿌렸다.

티엘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희열이 스쳤다.

"칼라가스!"

"우오오오오오!"

화살이 시위를 떠나려는 그 찰나.

그 강건한 육신이 삐걱일 정도로 몸을 뒤튼 마령은 기어이 진흙 속에 깊숙히 빠졌던 한 팔을 꺼내드는 데 성공했다.

창동빛의 예리한 갈고리 발톱은, 이제까지의 둔중한 움직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아스트라를 맞받아쳤다.

"캬아아악!"

본능에 의한 반격 치고는 상당한 판단력이었다.

그러나 칼라가스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은 마령의 발톱을 반 가량 잘라내며 서슴없이 강철같은 가죽과 근육을 파고들어 마령의 팔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

뼈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팔을 따라 흐르다, 다음 순간 화살이 폭발하며 아예 안쪽에서부터 팔을 갈기갈기 찢었다.

굵은 통나무같은 팔이 단 한 발의 화살만으로 너덜너덜해진 것을 깨달은 마령은 분노와 고통의 포효를 내지르며 재차 날아드는 화살을 하나하나 걷어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와는 달리, 정면에서 받아치는 일은 더이상 없었다.

옆 부분을 후려쳐 궤도를 꺾는 것으로 아스트라를 방어한 마령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진흙을 뿌리치며 몸을 앞으로 디밀었다.

아스트라의 일격은 단순히 팔 하나를 앗아간 것에 그치지 않았다.

아스트라에 남아있던 칼라가스의 마력은 상처 안쪽으로도 파고들며 절단면을 얼려, 잃어버린 육체를 수복하는 것조차 차단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령은 시뻘개진 눈을 휘둘러 건방진 마법사를 찾았다.

그 마법사의 피와 마력을 빼앗아 육체를 수복하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런 고통을 안긴 마법사를 씹어삼키지 않고서는 이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

이미 닳아버릴 대로 닳아버린 이성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미친듯이 뿜어낸 마력이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 순간, 괴물의 턱 아래에서 빠르게 하나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티엘은 활을 들지 않은 빈 손으로 마령의 턱을 힘껏 올려쳤다.

같은 인간끼리였다면 순간적으로 뇌를 뒤흔들어놓을 강력한 일격이었을 일격이지만, 이미 체격차가 여섯 배 이상 나는, 그것도 인간형도 아닌 마령을 상대로는 그리 효과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마령은 별 타격도 입지 않은 채 그 거대한 입을 쩍 벌려 티엘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다.

"칼라가스!"

하지만 그 판단을 비웃듯, 막 티엘을 바스라뜨리려던 턱 사이로 큼직한 얼음이 창살처럼 자리잡았다.

얼음 째로 물어 부수려 했던 마령은 순간 자신의 턱 힘으로 빙창을 부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부서지기는 커녕, 더 입을 벌려 빠져나갈 수도 없는 애매한 상태.

낭패감을 느낀 마령은 마력으로 주위를 짓누르며 날카롭게 세운 발톱을 내려쳤다.

일반적인 중압주문과는 달리 단순히 마력으로 찍어누르는, 마법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단순한 수작이었다.

그러나 마력량만큼은 대단해서, 수십 년을 살아온 나무둥치조차 불길한 신음소리를 흘리며 조금씩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 있던 나무들 역시 굵은 나뭇가지들이 가차없이 꺾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정작 괴물이 눌러버리려 했던 마법사는 움직임이 조금 둔해졌을 뿐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선 채 단검을 들어, 자신을 향해 떨어지던 괴물의 발톱을 가로막았다.

"큭!"

자신만만한 태도에도 육체능력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마령은 티엘이 이미 한 무릎을 꺾은 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을 보았다.

시린 상처의 고통에도 승리를 예감한 괴물이 만족스레 웃음을 삼켰다.

"이제 그만······, 잠들어!"

그러나 금방이라도 짓눌려버릴 것만 같았던 티엘은 독기어린 외침과 함께 천천히 꿇었던 무릎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마령의 육중한 발톱이 조금씩 들려 올라갔다.

애초에 물리적인 타격기가 효과가 있을거라고는 티엘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접촉 자체는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뒤에 이어질 주문의 발동을 위한 준비일 뿐이었다.

"흩날려라, 얼음의 비. 시간을 깎아내고 얼어붙은 땅에 몰아쳐라."

아스트라를 겨눌 때의 격정적인 살의와는 달리, 어딘지 엄숙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주문을 영창했다.

그러자 마령이 움직이던 마력의 흐름이 갑자기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티엘이 흘려보내기 시작한 칼라가스의 마력이 마령의 힘을 밀어내며 주위 공간을 제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티엘이 몸을 일으키며 있는 힘껏 마령의 몸을 뒤집었다.

순간적으로 한 팔이 들어올려진 마령은 균형을 잃고 주춤거렸고, 그 틈을 타 다시 뛰어오른 티엘은 조금 전 접촉하며 마령의 턱에 몰래 새겼던 이사드에 마력을 찔러넣었다.

"그아아아아아!"

으득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마령의 피 속에 녹아든 마력이 마치 비 온 뒤의 죽순처럼 마령의 가죽을 뚫고 무수한 얼음창으로 자라났다.

순식간에 전신이 바늘꽂이가 되어버린 마령은 고통에 못이겨 미친듯이 머리를 지면에 때려박았다.

그 충격에 이빨 몇 개가 부러지며, 마령의 턱을 벌린 상태로 고정해두었던 얼음창이 우연히도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마령은 마지막 발악으로 다시 한 번 그 거대한 턱을 벌려 티엘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을 넘어 목까지 이어질 정도로 거대한 입이 열리며, 상처의 수복보다도 더 우선해 되살린 예리한 이빨이 줄지어 빛을 뿌렸다.

하지만 티엘은 침착하게 활을 들어, 자신을 삼키려 드는 마령의 입 안으로 다시 한 발의 아스트라를 날렸다.

마령이라고 해도, 입 안은 비늘이나 가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비교적 약한 곳이다.

단숨에 입천장을 꿰뚫은 아스트라는, 마령의 입 안에서부터 새로운 얼음창으로 피어나며 이미 너덜너덜한 마령의 머리를 산산조각냈다.

분수처럼 터져나온 피와 뇌수가, 바로 코 앞에 서 있었던 티엘의 옷을 어지럽게 적셨다.

그러나 티엘은 피를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눈을 지그시 감고 그 감촉을 받아들였다.

따뜻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묘한 만족감이 가슴을 물들인다.

"······큭!"

한동안 들떠있던 티엘은, 문득 자신이 또다시 마령을 죽이는 것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르르 떨리던 입술이 하얀 이 사이에 짓눌리며 씁쓸한 심정을 억눌렀다.

'오늘도 또 자제하지 못했어······. 이래서야 또······!'

티엘은 후드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칼에서 검붉은 액체가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며 쓰디쓴 한숨을 쉬었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은 땀에 젖어있었지만, 끄트머리는 잿가루로 부서져가는 마령의 피를 머금고 있었다.

답답한 일이다.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파르유의 사건을 겪고, 또 슈니엘과 새로 계약하며, 티엘은 마령에 대한 살의가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무의미한 증오나 원한으로 살육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가슴 깊은 곳으로 밀어두었던 탁한 욕망이 티엘의 결심을 뒤흔들었다.

자신의 실수에 떨며 울던 소녀는, 아직도 증오에 미친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

어느새 '마령을 죽인다'는 행동에 몰입해버려 섬뜩하게 웃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 등줄기로 흘러내렸던 싸늘한 감각.

어쩌면 마지막 일격조차도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을 선택해버린 것은 아닐까.

티엘 스스로도 의심을 멈출 수 없었다.

언제까지 지나간 일에 얽메여 있는걸까.

언제쯤이면 사슬을 끊고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입단한 이후, 티엘과 함께 싸운 동료들이 언제나 하는 말이 있었다.

제발 너 자신을 돌보라는, 걱정의 말이었다.

어떤 지역에 과도하게 모인 마력을 정화한다거나, 마령이나 흑마법사와 연관된 사건을 조사하러 파견된다거나, 혹은 그런 자들을 처단하는 등, 기사단에서의 임무는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하나같이 위험을 요하는 일들이다.

때문에 몸을 사려도 다치거나 죽는 일이 결코 적지 않았지만, 티엘은 마령과 연관된 일이라면 악귀처럼 몸을 내던져 싸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나마 메이트리아크의 반복된 훈계와 질책, 그리고 조용히 티엘을 타이르는 동료들 덕분에 나아진 것이 지금의 모습이었다.

구제불능에 독선적인 얼간이.

문득, 누군가에게 시원스레 맞기라도 하면 가슴이 풀릴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자책해봐야 쓸데없어. 돌아가자."

후회 역시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다.

때문에 티엘의 머릿속은 우울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어느 순간부터, 등 뒤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크와악!"

기적에 가까운 우연으로 빽빽한 빙창이 심장석을 빗겨간 것인가, 아니면 심장석이 깨져나가고도 악착같이 버텨온 것인가.

한 발 늦게 등 뒤의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서려던 티엘의 무방비한 등에 마령의 발톱이 내려꽂혔다.

살아있는 곰의 등뼈라도 바스러뜨릴 강렬한 충격이 티엘의 등에 내려꽂혔다.

방어 주문은 커녕, 제대로 공격을 흘리지조차 못한 채 맨몸으로 일격을 받아낸 티엘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종잇장처럼 쉽게도 나가떨어졌다.

"카악······! 콜록! 살아······, 있었······, 어?"

티엘은 바닥을 몇 바퀴나 바닥을 구르며 날아간 뒤에도 가까스로 어느 담벼락에 부딪힌 뒤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티엘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바르르 떨었다.

순간적인 충격으로 피가 쏠린 탓인지, 눈은 아찔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코에서도 뜨거운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등 쪽은 예리한 칼날로 그어도 베이지 않는 제복이 거짓말처럼 찢겨져, 어깨에서 등까지 뜨겁고 화끈거리는 상처가 깊게 패여 있었다.

깊고 긴 열상(裂傷)에서 피가 얼마나 흐르는지, 순식간에 뜨뜻미지근한 감각이 온 몸을 적셨다.

숨을 쉴 때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걸 보면 갈비뼈도 몇 대는 부러졌다.

아예 등뼈도 부서진 것은 아닐까.

몸을 일으키기는 커녕, 팔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다 쓰러뜨린 마령에게 당해 순식간에 반 시체가 되어버리다니.

하지만 사실 빈사로라도 살아남은 것은 어디까지나 마령이 제 힘을 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 일격에 티엘을 이 지경으로 만든 마령은 이미 몸의 반절이 잿가루로 사라진 상태였다.

한 번의 기회만 더 있다면 티엘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일격을 끝으로, 가까스로 남아있던 한 팔조차 풀썩 흩어져버린 마령은 그저 꿈틀거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티엘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한 듯 큭큭 불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그마저도 잿가루로 변해 쓸쓸하게 사라져갔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티엘은 부르르 떨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두 발로 서기는 커녕, 상체를 일으키는 것 조차도 불가능했다.

왼팔은 아예 탈골이 일어난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고,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는 오른팔도 지면을 허우적거리는 것이 한계다.

"칼······, 라가스······."

마력으로 몸을 감싸도,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움직일 방법은 없었다.

티엘은 절망적인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기사단 본부까지는 도보로 약 이십 분 거리.

이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거기까지 갈 수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척추와 늑골에 손상을 입은데다 상처에서도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니, 이대로 시간을 낭비해도 볼 것 없이 죽는다.

의원, 하다못해 민가라도 들러 도움을 요청해야하는 상황이지만, 아직도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흐려진 시야조차도 도통 되돌아올 줄 모르고, 오히려 점점 더 검게 물들어갈 뿐이다.

출혈 때문인지 머리까지 어지러워지기 시작해, 말 그대로 눈 앞이 빙빙 도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위험해.'

가지고 있는 약은 지혈제 뿐이었고, 그마저도 한 팔만으로는 등쪽의 상처에 적당히 뿌릴 수가 없었다.

붕대도 마찬가지다.

의식이 흐트러져서인지 칼라가스를 소환하는것도 불가능했다.

티엘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은 마력을 다 짜내 소환진을 그렸다.

마력을 거의 소진한 지금, 얼마 안될 한 줌의 마력만으로 소환에 응할 수 있는 생령은 단 하나 뿐이었다.

계약한 생령들 가운데서도 가장 어린 슈니엘.

"슈······, 슈니······니엘······. 도와줄······사람을······."

티엘의 상황을 알아본 슈니엘은 티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리 어리더라도 탐색령은 탐색령.

사람을 찾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리라.

그러나 과연 그 사람이 겁먹고 도망가는 대신, 티엘을 도우러 와줄 수 있을까.

터무니없이 낮은 가능성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키려 시도하다 좌절감만 맛본 티엘은 헐떡이며 팔을 뻗었다.

평소에는 가뿐하게 움직이던 몸이지만, 오른팔 하나만으로 끌어당기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잠들면······안돼······. 잠들면······."

억지로 뿌린 팔이 맥없이 미끄러지며 살짝 머리를 내민 돌멩이에 팔꿈치를 호되게 찧었다.

하지만 단단한 것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는데도 이상하게 팔이 아프지가 않았다.

전신의 감각이 구름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흐릿해져가고 있었다.

출혈 때문도, 극한의 고통을 이기기 위한 자기 방어 기제도 아니다.

어렴풋이 티엘은 조금 전 마령이 품었던 알 수 없는 속성의 마력이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와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몸은 쇳덩이처럼 무거워져 손 끝을 움직이는 것조차 무리였고, 육체기능이 멈춰가며 마력 역시 모이질 않는 상황인 것을.

"잠······들면······."

머릿속이 몽롱해지며 더이상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야 겨우 되찾아가기 시작한 삶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안 돼는······."

그러나 끝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입술이 점차 멈췄다.

더이상 아무것도 비추지 않던 눈동자도 어느샌가 눈꺼풀 뒤로 숨었다.

죽음같은 잠이 그녀의 의식을 덮었다.




* * *



포근한 어둠이 몸을 감쌌다.

마령들이 숨죽여 웃는 그림자와는 달리, 너무나 편안하고 기분좋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부드러운 어둠.

그러나 점점 되살아나는 의식은 그 어둠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 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감촉은 아무 것도 없는 허상이 아닌 얇고 부드러운 천 조각이며, 머리를 받쳐주는 푹신함 역시 도톰하게 누빈 솜 뭉치의 탄력이었다.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자각한 티엘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여기······, 어디지?'

이제는 익숙해진 기사단의 방은 당연히 아니다.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뜨는 일도, 이제는 어쩐지 익숙해진 느낌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제까지의 그 어떤 천장보다도 썰렁한 기분이 드는 방이었다.

침대 하나, 탁자 하나와 그에 딸린 의자 하나에 대체 뭘 넣을 수 있을 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작은 벽장 하나.

티엘이 누워있는 방 안에 있는 것은 그것들 뿐이었다.

별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티엘의 방도 조촐하긴 마찬가지지만, 가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다못해 외출복을 잠시 걸어둘 옷걸이 하나조차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필요 최소한만 갖춰둔 모양새였다.

조금 놀라워하며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를 살핀 티엘은 그 곳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몸을 덮은 이불도, 베개도, 깨끗하긴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한 듯 숨이 제법 죽어있었고, 여러 곳을 기운 흔적이 보였다.

게다가 천 자체도 제법 낡아 조금씩 헤져 있다.

늘상 사용하는 것이라서?

세탁이라는 것을 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새벽에, 체취조차 남아있지 않은 깨끗한 침구라면 일부러 새로 꺼내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벽에 설치되어있던 선반은 대부분 비어있었고, 일부는 고정못이 빠졌는지 빈 자리만 남겨둔 것도 있었다.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집이네······."

눈만 굴려 주변을 살피던 티엘은 무심코 몸을 일으키려다 등골을 스치는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하며 다시 몸을 눕혔다.

늑골과 척추에 금이 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린 티엘은 되도록 몸 중심부를 움직이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팔다리만 움직여 몸 곳곳을 확인했다.

관절이 빠졌던 왼쪽 어깨쪽은 제대로 맞춰져 있었고, 혹시 악화될 것을 염려해 꼼꼼하게 붕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어깨에서 시작된 붕대는 상반신에도 칭칭 휘감겨 있었다.

사실상 상체 전부를 붕대로 뒤덮은 상태였다.

'상체······?'

순간 티엘의 손끝이 잠시 멈칫거렸다.

몸을 가린 얇은 셔츠 아래에는, 붕대를 빼고는 맨 몸 뿐이다.

찢어진 제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피를 닦고 붕대를 감으려면 우선 옷을 벗겨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역시 조금 꺼림찍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게 신경쓰이는건 여자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문득 그보다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활······, 그리고 목걸이?!"

영장과 목걸이는? 티엘의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 살핀 방 안에서도 활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설마 사례비 삼아 가져가기라도 했다면?

흠칫 놀란 티엘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양 옆구리와 등줄기가 뿌드득 거리며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아프다고 부러진 늑골을 꾹 누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금니를 깨물며 신음을 참은 티엘은 황급히 다시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목걸이는 베개 옆에 별의 서와 함께 얌전히 놓여있었다.

활은 시위가 걸린 채 머리맡의 벽에 기대여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고개를 돌릴 수 없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

하나 하나, 세심하게 신경 쓴 티를 느낀 티엘은 무상으로 치료까지 해 준 사람을 잠시라도 의심했던 것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다.

더군다나 누워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등의 상처에서 흐른 피는 붕대를 적시다못해 침대보에도 커다란 피얼룩을 만들어놓았다.

이래저래 폐를 끼친 셈이다.

마침 그때 문이 열리며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돌쩌귀가 커다란 소리를 냈다.

티엘은 조금 긴장한 채로 문 뒤에 숨은 얼굴이 드러나길 기다렸다.

"아, 일어났구나?"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옅은 금발을 기른 선량해보이는 인상의 남자, 아니, 소년이었다.

겉보기에는 티엘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높게 쳐줘도 아직 스물을 채 넘기지 못했을, 젊다는 말과 어리다는 말 사이의 경계선에 선 나이.

하지만 단순히 얼굴이 어려보이는 것보다는,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듯 맑기만 한 녹색 눈 때문에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았다.

'저런 순수한 눈빛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간혹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어두운 눈빛을 떠올리던 티엘은, 문득 남자와 서로 눈이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남자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레 말을 건네왔다.

"몸은 좀 괜찮아?"

남자는 의외로 티엘을 아는 듯한 목소리였다.

난감한 일이다.

당연하다는 듯 말을 걸어오는데, 이쪽에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알고 있는 남자들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지만 딱히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티엘이 공화국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윌란 마을 주민들과 기사단 사람들 정도 뿐이다.

티엘과 가장 나이차가 적은 '젊은 남자'라고 해봐야 올로비스 정도이고, 저렇게 한두 살 정도의 나이차에 들어맞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놓치고 있던 단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이 아닌 귀. 즉, 목소리.

금방 떠올리지 못한 것은 정보가 모자라서가 아닌, 뜻밖의 정보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 자주 들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유엘에서 만났던 특이한 음유시인의 모습이 어렵잖게 그려졌다.

"나셀?"

혹시나 싶은 심정에 짚이는 이름을 던져본다.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짙은 웃음으로 물들었다. 정답이었다.

"맞아. 그때 얼굴 가리고 있었는데도 알아보네. 눈썰미 좋은걸."

깜빡 잊었다는듯 피식 웃는 입매가 눈에 익었다.

그제서야 티엘은 묘하게 느껴지던 안정감의 이유를 깨닫고 마찬가지로 피식 웃고 말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나셀의 그 얼굴을 보기 전에는 미처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투른 티엘과는 달리, 누구라도 친근하게 대할 수 있을 듯한 미소였다.

하지만 동시에 티엘은 그가 얼굴을 가리는 이유의 반 정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티엘의 보라색 눈처럼, 나셀의 그 자연스러운 미소는 쉽게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잠시 눈을 크게 뜬 채 그 미소에 말을 잃었던 티엘은 시선을 억지로 돌리며 조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웃지 마. 쓸데없는 오해 살테니까."

"오해라······. 하긴, 어딘가에서는 애인한테 꼬리친다고 맞을 뻔한 적도 있었나? 아하하하······."

"웃을 일 아니잖아. 이번 일만 해도 흑마법사랑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려고 그래?"

"소문이야 퍼져봐야 조금 성가신 일로 끝날테지만, 내버려두면 사람 한 명이 죽어. 내가 손해 보는 거랑 사람 하나 살리는 걸 따지자면 이 쪽이 이득이지."

"대책 없이 좋은 사람이네, 너."

나셀은 가늘게 한숨을 쉬는 티엘의 무릎에 들고왔던 쟁반을 올려놓았다.

낡은 쟁반 위에는 마른 빵과 묽은 수프가 담긴 투박한 나무 접시가 둘 있었다.

다행히 숟가락질을 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아직 왼손의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것을 눈치챈 나셀은 직접 빵을 잘게 찢어주었다.

"이런 것 밖에 없어서 미안. 아직 가게 문이 열리질 않아서 뭘 사올 수가 없었어."

"아냐. 그리고······고마워. 이것저것······."

상처가 심하니 거친 음식을 피했다는 형편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프는 말라비틀어진 몇 조각의 야채로 끓여 소금물에 가까웠고, 가져온 빵 역시 오래되어 딱딱하게 마른 것이었다.

잘게 찢어놨어도, 수프에 적시지 않는다면 하나씩 먹기에는 상당히 괴로운 음식이다.

애초에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 티엘도 잠시 말을 잊을 정도였으니, 더 말 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티엘은 금전적으로는 상당히 메마른 집안의 모습을 보았기에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런 환경에서, 넌 어떻게 웃을 수 있는거니.'

마음이 풍족한 사람이 진짜 부자라는 말은, 정말 가난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이기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삼 년 동안 골목의 그림자를 밟고 다니며, 그래도 마령을 사냥해 적지 않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던 티엘조차도 어느 정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돈 한 푼 없는 나셀의 미소가 한 점 구김살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남에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라고 했던가.

지금도 그 얼굴을 떠나지 않는 허물없는 웃음이 조금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사례라도-"

빵을 우물거리던 티엘은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뻗어 지갑을 끌어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나셀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그런 티엘을 말렸다.

"됐어. 변변찮은 것 뿐인걸."

"하지만 이렇게 도움을 받았는데."

티엘은 자신의 피가 잔뜩 묻어있는 시트와 이불을 흘끔 바라보며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저 얼룩, 지울 수나 있을까.

"그럼 잠시 몇 푼만 빌려줄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 상처, 의원에게 제대로 보이는게 좋을 것 같으니까. 빠진 어깨 맞추는 것도 애먹었거든. 팔람에선 의원들이 선불 아니면 왕진을 잘 와주질 않거든."

"그래? 그럼 이 붕대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 집에는 나셀 혼자뿐인 것 같은데, 누가 상처를 돌보고 옷을 갈아입힌걸까.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손이 옷깃을 움켜쥐어 가슴께를 가렸다.

입 안에 남은 음식을 삼키는 간단한 동작이 갑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미하게 얼굴을 붉힌 티엘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내 상······네가······한거야?"

"어-. 뭐라고?"

"······내 상처······네가······했어?"

나셀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벌겋게 달아오르며 눈에띄게 당황했다는 것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무슨 말을 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어버버 하는 이상한 소리만 나오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 티엘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옷깃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선행으로 한 일이니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것쯤은 알지만, 속살을 내보였다는 수치심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일단은 뭐라도 말하는게 좋다.

감사든, 용서든, 뭐라도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않으면 더 버틸 수가 없다.

거의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가까스로 짜낸 말이 티엘의 입에서 빠르게 쏟아져나왔다.

"그다지 신경쓰지 마. 알아. 알고 있어. 치료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는거, 이해 해. 그러니까 신경쓸거 없어. 괘, 괜찮아!"

"그, 그러니까 그게- 미, 미안. 어쩔 수가 없어서······. 그, 그래도 속옷은 그대로니까-"

"넌 지금 그걸 지금 말이라고······!"

당황 끝에 터져나온 한 마디에 이제껏 억눌러온 수치심이 결국 폭발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너 나 할것 없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좋은 의도에서 행한 일이라도 어느 선을 넘으면 역시 신경 쓸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나셀은 부리나케 방을 나섰고, 방안에 혼자 남겨진 티엘은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얼굴을 이불에 파묻으며 소리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 쓴 것도 모두 허사가 되었고, 한 번 깨진 얼음가면 사이로 그동안 꾹꾹 참았던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지, 진짜 치료밖에 안했어!"

문 밖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다못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릴 지경이었다.

'아아아아아! 이래놓고 어떻게 얼굴을 봐!'

기사단 사람들이었다면 조금 쏘아보는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같은 또래에, 조금쯤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나셀은 이야기가 달랐다.

더군다나 무의식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몸을 맡긴 셈이니, 나셀의 의도와는 별개로 제 정신을 차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등과 옆구리가 쿡쿡 쑤셔왔지만, 그것조차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베개를 들어 얼굴을 파묻었지만,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를 막는데는 별 효과가 없었다.

'그야 또래 남자애고,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잖아!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별로 만나본 적 없고! 당연히 신경쓰이지! 정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그 때 문 너머에서 조심스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티엘은 재빨리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지만, 몇 차례나 심호흡을 하며 조금이나마 이성을 되돌리는데는 성공했다.

마구 흔들리는 가슴을 꾹꾹 누른 티엘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괜찮다는 최면을 걸며 남은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아니던가.

"드, 들어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간신히 닿았다.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연 나셀은 두 손을 들어올린 채 천천히 티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정작 티엘은 나셀의 얼굴을 본 순간 다시 치밀어오르는 수치심에 고개를 확 숙였다.

미안한 마음, 부끄러운 마음,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쉽게 뒤섞이지 않는 마음들이 어지러이 맴돌며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나셀이 가까이 오길 기다린 티엘은,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심했어."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내가 사과해야지. 워낙 상처가 크고 위중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내 생각이 짧았어. 진심으로 사과할게."

화를 내도 모자를 상황에 저렇게 말해준다면 듣는 쪽은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생명의 은인인데 그게 무슨 말이야. 미안, 정말로 미안해. 구해줘서 고마워."

"아참. 바지쪽은 아예 손도 안댔으니까 걱정 안해도 돼."

"그,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아니, 일단 오해는 풀어야지 않을까 싶어서."

나셀은 풀이 죽었다가도 금새 죽일듯이 노려보는 티엘에게 다시금 두 손을 들었다.

"······오늘 일은 잊어줘······. 부탁이야······."

"아하하하하······. 버, 벌써 다 잊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셀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파묻은 티엘은 나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이대로 대치하다간 없던 원한도 생길 듯 했다.

그만 쉬게 해주는게 좋다는 판단을 내린 나셀은 조금 전 가져온 것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여하간 다른 뜻은 없었어. 약은 여기 둘테니까 직접 발라. 의원에서 받아온거니까 안심해도 돼. 그리고 붕대도 옆에 둘 테니까 갈고 가고. 그리고 꼭 의원한테 가봐. 아무래도 집에 있는게 별로 없어서 불편하긴 하겠지만, 원한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마음대로 쉬었다 가도 돼. 오늘은 더 들어오지 않을테니까."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꺼내 놓는 소리가 몇 차례 들렸다.

단순히 약과 붕대만 가져다놓는 것은 아닌 듯 했다.

티엘이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이 나셀의 발소리는 금새 멀어졌다.

티엘은 나셀이 집을 나서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

약과 붕대뭉치, 그리고 몇 개의 말린 과일조각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 옆에는 찢어졌던 겉옷과 셔츠도 곱게 개어진 채 놓여있었다.

셔츠는 핏자국 하나도 남지 않은데다 수선까지 되어있는 상태였다.

섬유 자체에 흐르는 마력을 해제하지 않고서는 수선조차 불가능한 재킷은 찢어진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등을 흠뻑 적셨을 핏자국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최대한 깨끗하게 되돌아온 옷과,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시트를 번갈아 보던 티엘은 잠시 말을 잊었다.

정작 해야 할 감사조차 제대로 전하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저 순해빠진 녀석, 화를 낼 줄도 모르는건가.

"저 바보가 정말······."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티엘은 쭈뼛거리면서도 나셀이 가져다준 붕대에 손을 가져갔다.


작가의말

6장, 영원 시작합니다.

옛 어른들께서 말씀하시길, 한 번 말한다고 고쳐지면 누구도 고생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사실 3년간 마령 죽이는 일에 미쳐있었던 사람이 고작 사건 한 두 가지로 마음 고쳐먹는건 어려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자기 모습을 자각하고 있으니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는 있는 거겠지요.


참, 새로 구독해주신 분께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매일매일, 조회수 늘어나는 것과 선호작 넣어주시는 분들 늘어나는게 큰 기쁨입니다 :)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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