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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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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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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작성
19.07.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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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8쪽

5장-파랑波浪 (6)

DUMMY

생령, 특히나 마령의 전투방식은 대부분 이렇다.

인간 마법사처럼 섬세한 식을 짜올리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비교적 직선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다소 우악스러운 공격이 많다.

마력의 양, 그리고 질, 어느 면으로든 인간보다 우위에 서는 존재들이니 단순한 정면전에서는 충분히 위력적인 방식이다.

"바람을 딛어라-."

그러나 그 불리함은 어디까지나 정면승부를 받아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힘의 크기는 바꿀 수 없지만, 기량과 경헝, 그리고 계약한 생령의 도움이면 결코 뒤집을 수 없는 커다란 격차는 아니다.

티엘의 주된 전투방식은 도약주문을 통해 상대의 사각을 찌르는 변칙적인 암습이었다.

활을 들고서도 적의 범위로 파고들어, 지근거리에서 마력을 폭발시키는 암표범같은 날렵한 움직임은 작은 체구와 어우러져 순식간에 적의 숨통을 끊는 매서운 이빨이었다.

달리는 도중 단검을 뽑아든 티엘은 순간적으로 몸을 낮추며 단검을 지면에 꽂았다.

접지력이 약한 모래가 맹렬하게 튀며 모래사장 위로 거친 흉터가 길게 그어졌다.

그러나 티엘은 바닥에 밀착한 자세 그대로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모래 위를 미끄러졌다.

단검으로 선풍의 질주를 발동시키기 위한 마법진을 미리 새겨둔 것이었다.

마령의 시뻘건 눈이 티엘을 따라 움직였다.

단순 덩치만 비교해도 네다섯 배 이상에, 무게는 그 배는 더 나갈 마령의 몸은 관성조차 무시한 채 갑작스레 방향을 꺾는 티엘의 몸을 미처 따를 수 없었다.

몸을 한껏 뒤로 젖힌 마령은 몸 아래에서부터 뛰쳐오르는 티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며 강철빛 앞날개를 힘껏 펼쳐올렸다.

위이이이이잉!

뺨을 때리는 듯한 맹렬한 날갯바람이 머리칼을 정신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반쯤 녹아내린 속날개는 비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적을 찢기 위한 공격수단으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저 날개짓이었다면 몸 구조상 몸 앞쪽까지 닿는 일은 없었겠지만, 하필이면 맹포하게 움직이는 날개가 상당히 날카로운 마력의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불어 두 쌍의 다리를 휘둘러대며 흉흉한 빛을 뿌리는 여덟 개의 갈고리발톱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티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생령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날개가 퍼뜨리는 마력의 압력은 티엘 자신도 마력을 방출하는 것으로 상쇄하고, 자신을 난자하려는 발톱을 향해서는 활 대신 단검의 칼날을 들이밀었다.

브론딜이 만들어준 칼날이 마력을 머금고 싸늘한 빛을 뿌렸다.

날아들던 발톱이 단검의 날에 걸렸다.

순간적으로 그 충격을 받아내는 다리와 척추가 뭉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티엘은 오히려 웃음을 터뜨리며 칼날을 더더욱 디밀었다.

일부러 조금 무리해서까지 칼라가스의 마력을 먹인 칼날은 곳곳이 부패해 너덜거리는 마령의 발톱을 절반 가까이나 파고들었다.

당황한 마령은 남은 팔로 티엘을 치는 것보다, 우선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머리를 들이미는 단검을 막기 위해 팔을 겹쳐 칼날을 움켜쥐었다.

"발버둥 쳐봐야 소용 없어!"

칼날 위를 맴돌던 이사드가 한층 더 짙은 빛을 내뱉기 시작했다.

칼날에 미처 머무르지 못하게 된 마력이 연기처럼 풀풀 날릴 지경이 될 때 까지 마력을 밀어넣은 티엘은 전신에 마력을 돌리며 힘껏 검을 쳐올렸다.

마령의 거체가 거짓말처럼 기우뚱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그 빈틈을 타 휘둘러진 단검은 마침내 마령의 팔 하나를 절반정도 끊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런.'

그러나 한 뼘가량 마령의 살점을 파고든 단검은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티엘은 즉시 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마령의 근육이 칼날을 꽉 잡고 있어 검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때?'

티엘은 무리하게 검을 뽑으려 드는 대신, 아예 두 발을 솟구쳐 마령의 가슴을 걷어찼다.

순간 단단한 굽 너머로도 바위나 쇳덩이를 걷어찬 듯한 둔통이 무릎을 따라 짜르르 흘렀다. 아슬아슬하게 칼날도 뽑혀나왔다.

그래도 검은 되찾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는 순간이었다.

억제력을 잃어 자유를 찾았던 마령의 발톱이 바람을 갈랐다.

티엘은 황급히 마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발판도 없는 허공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은 것도 아닌 엉성한 일격.

있는대로 마력을 때려박은 덕분인지 마령의 발톱에 몸통을 꿰뚫리는 일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칼날과 부딪히는 바람에 미끄러져버린 발톱은, 그 대신 티엘의 어깨 살점을 큼지막하게 뜯어나고 말았다.

"으크윽!"

근육이 상한 것인지,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나오는 것과 동시에 팔이 축 늘어졌다.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활을 당긴다거나 힘싸움을 하는 것은 더이상 할 수 없었다. 낭패였다.

"끼륵! 끼륵! 끼륵!"

반면 마령의 울음소리에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발톱에 묻은 진힌 피와 마력의 냄새에 흥분한 마령은 기괴한 혀를 꺼내 조심스럽게 피를 핥았다.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진한 만족감이 섞였다.

그러나 발톱에 묻은 피는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다.

얼마 없는 피를 깨끗이 먹어치운 마령은 이내 의혹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어깨를 감싸쥐고 있었던 마법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죽었거나 기절했다면 분명 물 위로 떠오를 터.

숨은걸까.

닳아버릴대로 닳아버린 흐릿한 이성이 어렵게 가능성을 제시했다.

마령은 티엘이 사라져버린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령이 흘려보낸 마력으로 인해 바닷물은 한참 전부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미 짙어질 대로 짙어진 어둠과 거품은, 설령 티엘이 물 아래에 숨어있더라도 전혀 눈치챌 수 없도록 완벽하게 그 모습을 감춰주고 있었다.

마령은 별 수 없이 몸을 낮췄다.

마력으로 밀어냈다간 곧바로 거품이 다시 떠올라버릴테니, 날개바람을 이용해 물리적으로 거품을 밀어버리려는 것이었다.

"바람을 딛어라!"

하지만 그가 몸을 낮추자마자, 기다렸다는듯 물속에서 티엘이 뛰쳐올랐다.

물 속에서 선풍의 질주를 발동시킨 티엘은 그 기세를 그대로 이용해 마령의 머리 위로 뛰어내렸다.

체중, 그리고 낙하의 충격을 모두 담은 칼날이 딱딱한 마령의 껍질을 으깨며 그 머리를 꿰뚫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에!"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밤 바다를 뒤흔들었다.

마령은 미친듯이 몸을 흔들며 마력을 뿌리고 물을 끼얹는 등 티엘을 떼어내려 발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티엘은 마치 마령의 몸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단단히 버텨선 채 두 손으로 단검을 쥐고 있었다.

'이 느낌······, 뭐지?'

단검을 통해 전해지는 마력은 평소 티엘이 봐 왔던 마령과는 사뭇 달랐다.

분명히 마력은 정상적인 생령과는 달리 엉망으로 뒤엉키고, 뒤틀려 있다.

그러나 탁해진 진흙탕처럼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일반적인 마령의 마력과도 달랐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제대로 섞이지 않은 회색.

어쩔 도리 없는 인과에 따라 뒤틀렸다기보다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꼬고 비틀어 원래의 모습을 지워버린 듯한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걸 구분할 이유가 있을까.

티엘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단검을 뽑아냈다.

이미 마령으로 변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 과정이 의도적이었다고 해서, 이 마령이 사람을 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칼라가스."

마령과 티엘의 피로 젖어있던 칼날에서 녹이 떨어져나오는 것처럼 얼어붙은 핏자국들이 파스슥 떨어져내렸다.

깨끗하게 씻겨나간 칼날에서는 그저 은백색의 이사드만이 눈부시도록 타올랐다.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린 칼날이 벼락처럼 마령의 육신으로 떨어져내렸다.

바윗덩어리를 찌르는 듯한 감촉과는 달리, 칼날은 내려칠 때마다 미끄러지듯 손쉽게 마령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살아 있는 것, 아픔을 느끼는 것을 찌른다는 죄책감은 순식간에 닳아 없어졌다.

검을 내려치는 티엘의 마음 속에는 뒤틀린 희열만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쉴새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웃는 것을 어색해할 정도로, 오랫동안 웃음을 몰랐던 그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가 번졌다.

열에 들뜬 얼굴로 검을 거의 칼자루까지 찔러넣은 티엘은 마령의 몸에 박아넣은 채로 칼날을 옆으로 밀어붙였다.

깊숙히 파고든 칼날이 근육과 가죽을 찢으며 억지로 비명과 피를 짜냈다.

그것은 토벌이 아니라 살육이었다.

단숨에 심장석을 적출해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는데도 일부러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손을 늦추는, 잔혹하고 음험한 유희였다.

-키에에에에엑!

마령의 날개가 굉장한 속도로 요동쳤다.

스치기만 해도 사람 팔다리 하나쯤은 우습게 꺾어버릴 듯한 무시무시한 날개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반하듯, 티엘은 오히려 단단히 끌어쥔 주먹에 있는 힘껏 마력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아직 마령의 등에 박혀있는 단검의 칼자루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다.

"바람을 딛어라."

콰자작!

아무리 가볍다고는 해도, 사람 하나를 하늘로 튕겨올리는 위력을 지닌 주문이다.

그 주문의 힘이 얇디 얇은 칼날 끝으로 집중되면 그 한 점에 가해지는 충격량은 거대한 공성추의 일격에 맞먹는다.

단 한 번 만으로도 뼈가 부스러지는 잔혹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무지막지한 충격에 눌린 마령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티엘은 오히려 더욱 짙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겹쳐 칼자루에 올렸다.

"바람을 딛어라!"

계속되는 무지막지한 공격에 마령의 몸이 너덜너덜해졌다.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 마령을 바라보던 티엘은 마령의 살점 깊숙히 박혀있던 단검을 뽑아, 더이상 생물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잔해 위로 미친듯이 내려찍기 시작했다.

퍽, 퍽, 퍽!

끈적한 피와 진액이 얼굴로 튀는 것도 잊은 채, 티엘은 그야말로 신들린 듯 검을 내려찍었다.

-쿠아아아악!

마지막이 다가오자 죽음의 위기를 깨달은 마령은 몸을 뒤집으며 마력으로 바다를 후려쳤다.

소금물과 포말이 미친듯이 튀며 마치 물 속에 들어간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티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발광하는 마령의 등을 걷어차 훌쩍 거리를 벌렸다.

마령의 눈이 그걸 노렸다는 듯 번들거리며 티엘을 향했다.

그러나 일부러 물 위로 몸을 날렸던 티엘은 바닷물을 한 웅큼 가득 쥐어 마령에게 뿌렸다.

아직 남아있던 칼라가스의 마력이 흩뿌려진 바닷물을 얼려 하나의 거대한 칼날을 형성했다.

파도를 그대로 얼려 잘라낸 듯한 칼날은 망설임 없이 마령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쇄도하는 칼날에 흠칫 놀라 물러서려는 마령의 턱 밑으로 재빠른 검은 그림자가 파고들었다.

마력을 머금어 새하얗게 변한 칼날이, 다시 한 번 마령의 단단한 갑옷을 종잇장처럼 찢었다.

"아하하하하하하!"

순식간에 앞가슴이 난도질에 찢겨 너덜너덜하게 변한 마령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다.

그러나 이미 움직임을 멈춘 마령의 육신에 꽂히는 칼날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한동안 써걱거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광기어린 웃음소리가가 끊임없이 빈 해변을 메웠다.

그렇게 몇 번이나 검을 내려친 것인지 기억할 수도 없게 되었을 무렵.

더이상 마력을 유지할 수 없을만큼 지친 칼끝이 아직 분해되지 않은 껍질에 부딪혀 미끄러졌다.

숨을 헐떡이며 망연히 제 손을 내려다보던 티엘은 그제서야 뜨거운 숨을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남아있었다.

마지막으로 마령의 가슴 깊숙히 칼을 꽂아넣은 티엘은 조심스럽게 칼날을 놀려 살점을 도려냈다.

마력으로 재현했어도 살아있는 짐승과 똑같은, 역한 피냄새가 한도 끝도없이 피어올랐다.

그 소름끼치는 붉은 빛 가운데, 어두운 푸른 빛을 띄는 주먹만한 보석이 마침내 눈에 들어왔다.

티엘은 단단히 움켜쥔 보석을 있는 힘을 다해 뜯어냈다.

투두둑,하고 기분나쁜 감촉과 함께 심장석이 뜯어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물 속으로 가라앉아가던 마령의 육신이 빠르게 잿가루로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헉, 헉, 헉······."

완전히 녹초가 된 티엘은 그대로 항구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우선 피라도 씻어내기 위해 바닷물에 몸을 담근 탓에 여러모로 획기적인 몰골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 몸집의 몇 배는 가뿐히 넘을 괴수와 육탄전까지 치른 덕에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상처입은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댄 탓에 이미 상반신의 절반 정도는 온통 피얼룩으로 뒤덮여있었다.

티엘은 힘없이 늘어져있는 오른팔을 눈앞으로 들어올렸다.

쑤시고 아리다못해 미친듯이 칼을 내리찍은 오른손은 감각조차 없었다. 경련하듯, 가늘게 떠는 손에서 피 섞인 바닷물이 툭, 얼굴로 떨어졌다.

"킥······킥킥킥······."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즐거운 것도, 기쁜 것도 아닌, 그저 가슴에 고인 탁한 감정을 내뱉기 위한 웃음이다.

티엘은 왼손에 쥐고있던 심장석을 들어올렸다.

마령이 마지막으로 남긴 단말마가 그 안에 메아리치고 있을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난 검은 가지의 기사로서 위험한 마령을 죽인걸까. 아니면 단순히 복수가 하고 싶었던 걸까.'

대답은, 너무나 뻔했다.

"웃기잖아. 벌벌 떨면서도, 죽이는 순간 희열을 느낀다는거. 이래서야 마치······."

첨벙. 달을 쥘 듯 경련하던 팔이 다시 바닷물로 떨어졌다.

마치, 뒤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바닷물이 들어가 쓰라린 상처의 고통을 즐기기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은 티엘은, 한 차례 몸을 뜨겁게 달궜던 격정이 식길 바라며 긴 한숨을 쉬었다.




* * *




약 한 시간 뒤. 티엘은 거의 쓰러질듯한 몸을 끌고 여관으로 되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관 사람들은 어느새 나셀의 노래에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내다 어느새 스스로 흥을 내며 놀고 있었다.

티엘은 그들의 눈을 피해 빙 둘러 여관 주인에게 몇 가지를 주문하고 슬쩍 판매대 근처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나셀은 용케도 사람들 사이를 뚫고 티엘이 돌아온 것을 눈치챘다.

나셀은 이제 저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을 피해 티엘에게 다가왔다.

"뭘 하다 왔길래 이렇게 젖은거야?"

"일."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 눈길을 끄는 대신 방에 쓰러져 자버리고 싶다.

물론 몸을 씻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하지만 물을 데우려면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걸러선 안될 일이 아직 남아있었다.

목욕물과 함께 수반 하나를 가져달라고 부탁했으니 몇 분 정도는 여기서 기다려야 했다.

아직 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주제에 눈에 띄는 곳에 떡하니 앉아있으니 여기저기서 눈총이 따가웠다.

하지만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좋은 시선은 못받는다는걸 아는 이상, 새삼스레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다.

"잠깐, 기다려. 어깨에 그 상처, 어떻게 된 거야?"

문득 나셀이 눈쌀을 찌푸렸다. 하지만 티엘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오른쪽 어깨의 상처는 누가봐도 심각한 상태였다.

상처 자체는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셔츠를 벌겋게 물들인 핏자국이 있는데 모를 수가 없다.

게다가 상처 자체도 아직 지혈이 끝나지 않아서 조금씩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보야, 이런 상처를 내버려두고 뭘 한거야? 잊어버렸다는게 신기하다. 아예 상처에 소금을 뿌려놓고도 멀쩡한 녀석이라니."

나셀은 허리에 달고있던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과 작은 병을 꺼냈다.

저거 설마?

나셀은 병의 마개를 뽑고 안에 들어있던 투명한 액체를 상처에 쏟아부었다.

"으으윽!"

티엘의 예상대로 병 안에 있던것은 술이었다.

피로 때문에 잠시 잊고있던 상처의 통증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상당히 독한 술인지, 바닷물에 몸을 담궜을 때의 몇 배는 가뿐히 넘을 정도로 자극이 강했다.

치료를 위해서라는 것은 알고있지만, 티엘은 반사적으로 나셀의 팔을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티엘이 반항할 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던 나셀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큭, 이, 이거 놔!"

"안돼, 참아. 내버려두면 큰일 나."

짐짓 엄한 표정으로 엄포를 둔 나셀이 이상한 흰 가루를 꺼냈다.

가루를 물에 물에 잘 개어 만들어진 연고가 상처 위에 세심하게 발라졌다.

너덜너덜한 상처가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티엘은 다시 한 번 비명을 참으며 숨막히는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연고 자체는 그리 자극적인 물건이 아니었다. 더불어 가루에 섞인 마취성분 덕분에 화끈거리던 어깨의 통증이 상당히 잠잠해졌다.

"단순히 지혈하고 소독밖에 못했으니까 한동안 팔 움직이지 않는게 좋아. 흉터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손수건으로 상처를 단단히 싸맨 뒤 매듭까지 짓고 나서야 풀려난 티엘은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보았다.

생각외로 갑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압박감을 제외하면, 몸에 맞춘 옷처럼 꼭 맞아 움직이는 데 별 이상은 없었다.

상당히 유용한 재주다.

작은 접시 위에 아직 남아있던 연고를 발견한 티엘은 손끝으로 약을 찍어 올렸다.

아침에 소매치기 남자에게 사용했던 것과 같은 약이라는 것 까지는 알 수 있었지만, 그 성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첼이 약물학까지는 가르쳐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톱풀이랑 세이지, 그밖에 두어가지 약초로 만든거야."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잔잔한 목소리였다.

성심껏 치료해주고 미심쩍은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목소리에 구김살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통증을 줄여주고 상처를 소독하는 정도. 거기에 약간의 지혈작용이 있어."

"약초학이라도 공부하는거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일이 많다보니 이런저런 잔재주가 늘거든. 아무리 그래도 상처를 꿰매는 건 자신 없지만. 참, 한동안 물 안닿게 조심해. 잘못하면 상처 썩을지도 모르니까, 가능하면 빨리 의원에 가보고."

그냥 넘기기에는 상당히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굵은 신경은 어떤 면으로는 부러울 정도다.

"치료, 고마워."

"천만에."

나셀의 덕분에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아직 티엘에게는 더 큰 산이 하나 남아있었다.

기사단 본부와의 정기연락.

메이트리아크가 엄금한 전투를 벌인 이상 따끔하게 혼날 것은 각오해야 했다.

리아처럼 멋대로 서면보고를 하는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 이상, 몸 곳곳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티엘의 체념을 뒷받침하듯 조금 쭈뼛거리던 여관 주인이 아까 부탁했던 작은 수반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티엘은 한숨을 쉬며 작고 동그란 금속판을 꺼내 자신의 마력을 먹여 수반에 떨어뜨렸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금속판이 스스로 소리를 내며 가볍게 울었다.

"뭐 하려고?"

"잠시만. 일과 보고 해야돼."

수면 아래로 먹물처럼 검은 기운이 퍼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한결 더 짙고 깊은 어둠이 뚫리며 바닥없는 심연이 열렸다.

줄곧 수반에서 눈을 떼지 않던 티엘은 심연의 안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단장님, 이스티엘입니다."

깊은 동굴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심하게 메아리쳤다.

동시에 수반 가운데의 검은 구멍이 티엘의 목소리에 화답하려는 것처럼 뭉클거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여 초 정도를 기다린 뒤, 갑작스레 수반의 어둠이 걷히며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어느덧 익숙해진 단장실의 풍경이었다.

제법 늦은 시간인데도 언제나처럼 말끔한 모습의 메이트리아크의 얼굴이 그 가운데 보였다.

-이스티엘이냐?

메이트리아크의 목소리 역시 심한 메아리가 섞여 선명하게 들리질 않았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지연없는 동시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영상이나 음성의 전달이 어려워진다.

공화국 최남단 정도에 이르면 대화는 불가능하며 서면으로나 전달이 가능한 수준이라지만, 라티앙이나 유엘 정도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도 생각 이상으로 왜곡이 심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런 북적대는 장소에서 쓰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이미 수반의 사용에 익숙한 메이트리아크는 무리없이 티엘의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엘의 상처를 눈치챈 메이트리아크의 눈매가 매섭게 물들었다.

-그렇게나 경고했는데도 말이 말같지 않은거냐. 안그래도 최근 명령을 무시하는 녀석들이 많아 골치가 아플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항명이라도 하겠다는건가? 단독 전투는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했을텐데?

"······죄송합니다."

-돌아온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냥 넘어가진 않을테니 각오하도록.

이미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티엘이 한 판 벌였다는 것을 확인한 메이트리아크는 근심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티엘은 '명령을 무시한' 녀석들이 있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문득 알제르망으로 가던 리아가 자신을 만나 무단으로 눌러앉았던 일이 떠올랐지만, 아무리 리아라도 그 사이 또 명령위반을 할 정도로 겁없는 성격까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메이트리아크가 한 달 전 일을 아직까지 거론할 성격도 아니고. 다들 메이트리아크에게 벌벌 떠는데, 과연 누가 명령을 위반한걸까.

-그밖에 특이사항은?

"지배력의 흔적이 남은 마령을 발견, 토벌했습니다."

처음 마령과 조우했을 때의 이질감.

당시에는 살의에 휩쓸려 금새 잊어버렸지만, 그 마령에게는 마법사와 계약한 생령처럼 이질적인 마력의 흔적이 있었다.

-지배력? 마령에게? 이상한 일이군. 알겠다. 현 시각을 기해 정식으로 지원병력을 파견하겠다. 단, 이 시간 이후 개별 행동은 절대적으로 금지한다. 알겠나? 절대로다. 얌전히 부상 치료부터 하도록.

"하지만 그리 심한-"

-멀쩡한 몸으로 마령과 싸워 그 지경이 됐으면서? 중상이었다면 대기명령이 아니라 복귀명령을 내렸을거다. 말 들어.

보통 경고를 할 때는 '따르지 않을 경우 처할 상황'을 덧붙이지만, 적어도 메이트리아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단순한 환영일 뿐이지만, 수반 너머로부터 짜릿한 살기가 전신을 단단하게 조였다.

그 뒤로도 메이트리아크는 몇 마디를 더 남긴 뒤 연결을 끊었다.

대부분은 단독행동을 금지하는 이중, 삼중의 경고 겸 충고였다.

다시 평범한 대야로 돌아온 수반에서 금속판을 꺼낸 티엘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 * *




나셀의 경고대로라면 사실 목욕은 무리였고, 단지 소금물만 씻어내는 수준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전신을 누르는 피로 앞에서, 따뜻한 욕조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티엘은 멋대로 반신욕이면 괜찮을거라며 스스로 타협을 보고 말았다.

어깨의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이리저리 신경쓸 부분이 많았다.

조심스레 감은 머리를 올려묶고, 상처쪽은 습기가 닿지 않도록 몇 겹이고 수건을 감은 뒤 따뜻한 물에 몸을 맡겼다.

긴 시간동안 긴장상태였던 근육이 뜨거운 온기에 스르륵 풀렸다.

나른한 기분과 함께 차오르는 만족감이 긴 신음소리로 흘러나왔다.

마력을 몸에 둘러 신체능력을 끌어올린다고 해도 그 부하를 받아내는 티엘의 몸에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피로가 쌓인다.

애초에 몸을 움직이는 것과 마력을 생성하는 양 측면으로 체력을 소모하는 짓이다.

게다가 스스로에게 환각을 걸어 억지로 몸을 움직였으니, 피로가 누적되어 피로골절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문득 티엘은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팔다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다행히 상처가 없는 부분은 미약한 근육통 정도만 남아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다.

그러나 어디선가 희미하게 피와 마력이 뒤섞인 듯한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티엘은 두 손을 들어올려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물론 손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설령 손에 묻었던 마령의 피를 씻지 않았더라도 심장석을 뽑아낸 이상 저절로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을테니 혈향이 남아있을리 없다.

핏자국이 남은 것은 티엘의 손이 아닌 그 머릿속이리라.

어느 밤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무의미한 분노를 불태우는 이 가슴 안에서 흘러나온 피냄새일 것이다.

'쓸데 없을 정도로 격렬한 살의······.'

눈앞을 가득 메우는 뿌연 김이 갈갈이 찢어졌다.

스스로도 마음이 자꾸 겉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만 해도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마령의 토벌보다, 그 마령을 지배하려고 했던 마력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기존의 임무는 단순히 마령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며 억지로 합리화하고 있을 뿐, 사적인 감정으로 불안요소를 남긴 것은 명백한 실수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기사단에 몸담은 이상, 언젠가는 티엘도 다른 동료와 함께 전투를 벌일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도 오늘같은 실수를 한다면······.

개인적인 증오와 동료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비열한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 티엘은 말아쥔 주먹으로 수면을 후려쳤다.

첨벙, 하고 사방으로 튄 물방울이 뺨 언저리에 맺혀 또르륵 흘러내렸다.

"진정하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어. 진정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낸 티엘은 메이트리아크가 약속한 지원병력에 대해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이번 일에서 티엘의 역할은 탐색.

전투는 되도록 피하고, 그녀를 지원해 달려온 동료들에게 긁어모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 갑작스러운 지원요청이니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짧아도 사흘, 길어야 일 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 사이 어떻게든 스스로를 억누르며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찾아내야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고의 흐름은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버렸다.

오늘 처음 만난, 이상한 음유시인에게로.

'일 주일이라······. 그 때 쯤이면 그 녀석은 떠났겠네.'

티엘은 무심결에 어깨를 감싼 나셀의 손수건을 매만졌다.

이상한 녀석.

다들 흑마법사라면 피하거나 밀어내려고 애쓰는게 보통이고, 몇 년쯤 흑마법사들과 교류한 사람도 때때로 흠칫흠칫 놀라며 본의 아니게 흑마법사를 상처입힌다.

흑마법사와 교류하기는 커녕 실제로 만나본 일도 드문 사람이 저렇게까지 태연하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경우다.

그것도 생전 처음으로 마음이 맞았던, 비슷한 나이의 또래였다.

티엘이 조금만 더 대담했다면, 아니면 조금이라도 밝은 성격이었다면, 흉금을 터놓지 않았을까.

'조금······아쉽네.'

부드럽게 울리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미처 다 듣지 못했던 노래를 막연히 떠올리던 티엘의 눈꺼풀은 어느새 천천히 감겨갔다.

잘 거라면 침대로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머리 한 구석에 떠올랐지만, 이미 눈꺼풀을 누르는 피로의 무게는 사소한 반발 따위는 압도적으로 밀어낼 정도였다.

애써 버티려던 것도 겨우 한 순간 뿐, 이내 고른 숨소리만이 주위를 조용하게 울렸다.

따뜻한 김이 퐁퐁 피어나던 욕조의 물이 식어가는 것조차 알지 못할만큼.

-찰방!

티엘이 잠든 지 얼마 후, 문득 낯선 물소리가 들렸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소리는, 어느새 욕실에 나타난 두 번째 그림자로부터 난 소리였다.

소리도 없이 침입한 검은 그림자가 무방비한 티엘의 몸을 내려다보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진흙이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피부에서 탁한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개구리를 닮은 넓적한 입에서 징그러운 혀가 튀어나와 스스로의 얼굴을 핥았다.

'그것'은 주위가 참 고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뻗었다.

티엘의 가느다란 목에 소름끼치도록 미끌거리는 점액질의 손가락이 조용히 휘감겼다.

"윽!"

순간 잠에서 깬 티엘이 반사적으로 괴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 뿌리치려해도 굵은 나무기둥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은 그대로 힘을 주어 티엘을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

목을 조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코와 입으로 물이 밀려들어오는 동시에, 금방이라도 목뼈를 꺾어버릴 듯한 힘이 티엘을 찍어눌렀다.

한계에 달한 폐가 산소를 요구하며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단검이라도 있다면 저항해볼테지만, 욕실에 그런 것이 있을리 없었다.

필사적으로 발길질을 해봐도 체격차에서부터 머리 둘 정도는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발버둥치며 우연히 발끝으로 괴물의 가슴을 몇 차례 찰 수 있었지만 괴물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채 여전히 티엘을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

티엘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심정으로 손아귀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미지근하게 식은 물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필사적인 발버둥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급박한 상황에서도, 티엘은 욕조 전체를 얼려버리는 자충수를 가까스로 피하고 투박하게나마 한 자루의 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력을 다해 괴물의 한 팔을 단단히 움켜쥔 티엘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단검을 힘껏 찔러넣었다.

"캬아아아악!"

순간적으로 목을 조르는 힘이 약해진 틈에 다시 한 번 적의 가슴을 걷어찼다.

마령의 손이 미끄러지며 그 손톱에 목 언저리의 피부가 길게 찢겼다.

그러나 목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곧바로 머리를 들어올린 티엘은 격렬하게 물과 기침을 토해냈다. 꽉 막혀있었던 숨통이 틔였지만, 이미 산소결핍을 호소하던 눈앞은 어지러울 정도로 핑핑 돌았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은 커녕 몸을 제대로 일으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는동안 팔에 박힌 얼음조각을 뽑아 던진 마령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며 찢어지는 포효를 내질렀다.

뒷목에 이를정도로 길게 찢어진 시뻘건 입안으로 몇 겹이나 줄지어 자라난 날카로운 이빨이 보였다.

먹힌다.

일방적으로 사냥당하는 자의 공포가 티엘을 엄습했다.

활도, 별의 서도 단검도 없다.

조금 전 티엘이 가까스로 낸 조그만 상처는 이미 완전히 수복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칼라가스!"

마령이 욕조를 박살내며 도약하는 순간, 티엘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이름이 터져나왔다.

마령의 톱날같은 이빨이 섬전처럼 내려꽂히려는 순간, 청백색으로 싸늘하게 빛나는 날개가 마령의 커다란 턱을 베어갈랐다.

점액질의 진흙같은 살점이 후두둑 떨어지며 피와 비명이 사방으로 튀었다.

얼굴의 절반이 무너진 마령은 상처를 수복하며 음산하게 으르렁거렸지만, 더이상 섣부르게 티엘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조그만 피얼룩조차 묻어있지 않은 눈부신 깃털을 펼친 용이 계약자의 앞을 당당히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령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인간, 그것도 강력한 흑마법사의 피와 살.

마령에게는 정말로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먹을 수가 없다.

먹어선 안됀다는 생각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머리 한구석에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째서 안돼더라······.

이미 그런 것을 떠올리긴 어려울텐데도, 마령은 잠시 그런 의문에 집중해버렸다.

아아, 그래.

저 하얀 것.

그게 귀찮게 구니까 먹으면 안될거야.

이내 그 이유를 눈 앞의 용으로 판단해버린 마령은 입을 벌린 채 용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조그맣고 하얀 용은 상당히 먹음직스러워보였다.

짙고 강한 마력 덩어리. 마법사의 피와 고기보다 더 훌륭한 음식.

이미 오늘 밤에 입은 손상은 적지 않았다.

머리의 절반 가량이 날아간 것을 수복하는 것만 해도 이미 한계에 달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소모를 메꿀 수 있는 먹잇감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상황이다.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었다.

마령의 입에서 불그스름한 타액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타락해버린 마령을 눈앞에 두고, 칼라가스는 한 조각의 연민조차 품지 않았다.

성장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의 힘을 빌리는 것조차 거부한 끝에 마법사의 피와 살을 탐한 마령.

더군다나 소중한 계약자에게 해를 끼친 이상 더 무엇을 말할까.

칼라가스는 다시 입을 쩍 벌리며 자신과 티엘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드는 마령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발걸음일 뿐이지만, 그 순간 바닥과 벽면을 타고 새하얀 줄기가 빠르게 뻗어나갔다.

싸늘한 한기를 품은 바람이 좁은 욕실 안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람을 타고 춤추는 날카로운 얼음이 마령의 팔다리를 찢었다.

"꿰에에에엑!"

마령의 그림자는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한 채, 순식간에 칼라가스가 일으킨 폭풍 속에서 바스라졌다.

"끝······났나······?"

티엘은 힘없이 벽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곁으로 다가온 칼라가스가 티엘의 무릎에 부리를 부볐다. 평소였다면 티엘의 어깨에 앉는 것을 즐기는 칼라가스지만, 티엘이 힘겹게 내민 왼손에 선뜻 올라타지 않았다.

한 쪽 어깨를 다친 데다가 방금 전에는 목이 부러질 뻔했던 티엘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티엘을 바라보던 칼라가스가 조심스레 티엘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목의 상처를 살짝 어루만지다, 천천히 자신의 날개로 티엘을 감싸안았다.

흰 날개가 피로 더러워지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뜨겁게 달아오른 상처의 열기에 날개깃의 서늘한 감촉이 기분좋게 내려앉았다.

'하룻밤에 기사급의 마령을 두 체나 만나다니······. 이번엔 정말 위험했어.'

정말 이피안의 땅으로 떠나버릴 뻔했다.

마령이 하나만 있을 거라 생각하고 허술하게 대비한 대가라고 하기엔 꽤나 우울한 일이었다.

한참 후에야 안정을 되찾은 티엘은 부들부들 떨며 방으로 돌아왔다.

격한 움직임으로 상처가 다시 터져, 나셀이 감아둔 손수건은 핏물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나셀에게 조금 얻어온 연고를 꺼내 어깨와 목의 상처에 다시 발라둔 티엘은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어깨에도 붕대를 감쌌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을 채찍질하며 방 안에 몇 겹의 결계를 설치했다.

작업을 끝낸 뒤에야 간신히 침대 위로 몸을 던졌지만 제대로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간신히 선잠 비슷하게나마 잠들려는 순간 눈앞으로 마령이 습격하는 모습을 보며 퍼뜩 깨버렸던 것이다.

입안에 쓴맛이 한가득 고였다. 잠들고 싶은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제발 조금만 봐 줘.'

그러나 수면욕을 거부하는 티엘의 의도와는 달리, 녹초가 될 정도로 지쳤던 몸은 수면과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두통이라는 이름의 새가 어느새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티엘의 신경줄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울고 싶을 정도로 귀찮은 몸뚱아리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움켜쥐고 신음을 흘리던 티엘은 결국 또다시 애냐의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환각령의 마력은 진통제와는 달리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하지만 잠들 생각은 없었다.

환각을 조금 더 강하게 걸면 꿈도 꾸지 않은 채 숙면을 취할수 있겠지만, 그 경우 주문의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조금 전 깜빡 잠에 들었던 틈에 생사를 오갈 정도로 치명적인 위협을 겪었는데, 감히 자신을 무방비상태로 놔둘 용기는 없었다.

그러나 잠들지 않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방 안에는 시간을 보낼만한 물건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름대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가만히 눕거나 앉아있다보면 순간적으로 졸음이 몰려오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책이라도 읽자니 이미 뻑뻑해진 눈에 글자가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세 번째로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던 티엘은 재미없는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덮었다.

'······내려가는건 싫은데······.'

목에 흉하게 난 상처를 드러내는 것도 싫지만, 그 이상으로 아래에 남아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싫었다.

사람들이 웅성인다는 것만 빼면, 누구 하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 방이나, 아래층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유일한 예외라면 나셀 정도겠지만, 아무리 그가 친근하게 대해준다고 해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밤새도록 말동무를 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지 않은가.

'바람이나 쐬고 오자.'

마침 방 안에는 놋쇠로 만든 거울이 걸려있었다.

티엘은 거울을 비춰보며 옷깃을 세워 목을 가리고, 큼지막한 로브 하나를 꺼내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일부러 챙겨온 헐렁한 옷 안쪽에는 별의 서와 단검이 무리없이 감춰졌다.

활도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대로 들고다니려면 지나치게 눈에 띈다.

잠시 생각하던 티엘은 남은 붕대를 모조리 꺼내, 시위를 풀어 동그랗게 말린 활 위에 감았다.

붕대를 세 겹 정도 감고난 뒤 폭 넓은 천으로 다시 한 번 더 감자 활의 모습은 약간 큼직한 팔현금, 시리아와 상당히 흡사하게 변해 있었다.

티엘이 꺼내든 로브의 색이 마침 암녹색이었으니, 흔히 보이는 음유시인의 모습으로 위장하기에 딱 맞았다.

거울에 비친 모습에 충분히 만족한 티엘은 소리없이 창문을 열었다.

그냥 뛰어내리기에는 조금 높았고, 가장 가까운 나무도 제법 떨어져있어 뛰어넘기에는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선풍의 질주라면 무리없이 닿을 거리다.

다행히 아직도 왁자지껄 시끄러운 여관 아래층과는 달리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살짝 주위를 살핀 티엘은 조금 숨을 고른 뒤 창틀을 넘었다.


작가의말

피곤해 죽겠는데 잠도 못자게 계속 건드리면 굉장히 열받죠 -_-a


마령도 생명체의 피나 살을 먹었냐 안먹었냐로 갈리는게 아니라 먹은 직후부터 마령화가 진행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강한 생령이었을수록, 그리고 마령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수록 강한 편이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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