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시작과 끝
성역.
이곳은 [V. 교황(The Hierophant)]이 만든 곳이기도 하며, 자신의 신성력을 최대한 끌어 올린 성역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V. 교황(The Hierophant)]은 [XV. 악마(The Devil)]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메이저 아르카나들은 이 성역을 중심으로 행동하며, 대재앙에 맞서 싸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좋지 않은 소식이 [XX. 심판(Judgement)]의 귀에 들렸다.
물론.. 형제의 일은 전적으로 형제에게 맡겼다지만..
지금은 대재앙이 다시 돌아온 특수한 상황인 만큼 이런 형제간의 싸움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올 줄 몰랐다.
“ [V. 교황(The Hierophant)]. 설명해라. 어째서 [VIII. 힘(Strength)]을 혼자 보낸 거지? “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바로 질문을 해대는 [XX. 심판(Judgement)]을 바라보며 [V. 교황(The Hierophant)]은 얼굴을 찌푸린다.
“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
“ 그때는 [XIII. 죽음(Death)]과 [XV. 악마(The Devil)]가 없었을 때나 해당하는 말이었지 지금 이 상황에서 메이저 아르카나 하나를 잃는 것이 얼마나 큰 전력에 손실인지 알고는 있는가? 심지어 하나도 아니고 둘 다 죽는 일이 벌어지다니... “
[V. 교황(The Hierophant)]도.
아니..
다른 메이저 아르카나도 [VIII. 힘(Strength)]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 상황이나 남아있는 마법의 흔적을 통해 유추해보건대 [VII. 전차(The Chariot)]도 [VIII. 힘(Strength)]과 함께 죽었으며, 그 범인은.. 베티르라고 추측된다.
“ [XX. 심판(Judgement)]. 진정해라. 지금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 할 때다. “
순간 [XX. 심판(Judgement)]의 눈이 아주 날카롭게 변하며 [XIV. 절제(Temperance)]를 째려본다.
“ 앞으로의 일? 우리에게 미래가 지금 남아있는 건가? 언젠간 [XIII. 죽음(Death)]도 [XV. 악마(The Devil)]도 어딘가에서 죽음의 군대와 악마 군대를 이끌고 이 탑을 지배하러 올 테고, 지금은 잠잠하다만 잠잠할수록 더욱 거대한 계략을 꿰고 있을 베티르도 살아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수많은 메이저 아르카나를 잃었다. 이젠 우리밖에 없어. 모든 게 다 끝이란 말이다..!! “
“ [XX. 심판(Judgement)]. “
[XX. 심판(Judgement)]의 어깨 위에 손을 얹자 잔뜩 화난 얼굴로 [XIV. 절제(Temperance)]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 분노는 왠지 다른 메이저 아르카나에게 내비치는 분노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왠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 그래. 너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까지 패배했으며, 한심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VIII. 힘(Strength)]을 잃은 손해는 치명적이지만 그렇다고 형제의 마음을 저버리는 짓 또한 하고 싶지 않았다. “
“ 그게 무슨... “
“ 그렇다면 네 녀석은 [VIII. 힘(Strength)] 앞에서 세계를 위해 너희 형제들은 얌전히 있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가족을 우선시할 것인가.
세계를 우선시할 것인가.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아르카나 그 자체로 칭하던 과거의 [XX. 심판(Judgement)]이라면 망설임 없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 어리석은 자신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XI. 정의(Justice)]를 생각한다면
결국, 이들과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 ...젠장... “
그런 분해하는 모습을 보며 매 순간 표정이 굳어있던 [XIV. 절제(Temperance)]가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 네 녀석도 많이 변했군. “
“ ..진짜 변한 것은 내가 아닌 세상이다. 이제는 두려워서 눈을 돌렸었던 문제밖에 남지 않았어. “
[XIV. 절제(Temperance)]는 그대로 웃으며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V. 교황(The Hierophant)]을 바라보았다.
“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V. 교황(The Hierophant)]이여. 준비는 되었는가? “
“ ...나는. 첫 번째 대재앙이 있던 이후부터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준비해왔다네. “
-탁.
[V. 교황(The Hierophant)]이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으며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저 지팡이만을 내려쳤을 뿐인데 이 성역에 소리가 울려 퍼지는듯한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평범한 사람들.. 아니.. 아르카나 소유자들도 눈치채지 못하는 신성력이 한가득 차 있는 듯하다.
“ [XV. 악마(The Devil)]는 내가 맡겠네. “
아마 평범한 인간으로서 [XV. 악마(The Devil)]라는 존재에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대재앙 이후로 지금까지 준비해온
신에게 한평생을 바쳐온 [V. 교황(The Hierophant)]이라면..
신의 영역에 손을 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준비란 것은.. 이런 건가.
“ ...[XIII. 죽음(Death)]은 어떻게 할 거지? “
“ 그자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인간의 몸으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아르카나라고 결론지었다. “
[XIII. 죽음(Death)]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그 순간 인간은 패배한다.
그러나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인간은 없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한 [XIII. 죽음(Death)]에 대한 공략이다.
“ ...[XVII. 별(The Star)]이 없다 싶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
[XVIII. 달(The moon)]과 [XIX. 태양(The Sun)].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모조리 죽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미 이 탑 안에는 평범한 사람들은 없다.
전부 탑의 밖에서 살고 있다.
거리낄 것은 없다는 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XIV. 절제(Temperance)]가 손을 내민다.
“ [XX. 심판(Judgement)]. 너는 나와 함께 베티르를 맡는다. 잘 부탁하지. “
베티르를 상대한다..
아마 지금은..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우지 않아도 베티르를 심판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래. 어쩌면 [XX. 심판(Judgement)] 혼자서도 베티르를 상대할 수도 있게 되었다.
거기다 [XIV. 절제(Temperance)]가 지원까지 해주니.. 아마 질 일은 없겠지.
[V. 교황(The Hierophant)]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악마의 군대가 몰려온다고 해도 얼마든지 받아칠 수 있으며, 악은 선으로 뒤덮어 버리게 되겠지.
인간이 가장 상대하기 두려운 [XIII. 죽음(Death)]도
죽음이라는 개념이 희미한 [XIX. 태양(The Sun)]과 [XVIII. 달(The moon)]. 그리고 [XVII. 별(The Star)]이라면 충분하다.
...계획 자체는 완벽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는가.
꼭 이렇게 많은 수의 희생을 내고 난 뒤에나 행동해야만 했는가.
아니.. 애초에..
[XIII. 죽음(Death)]과 [XV. 악마(The Devil)]와 함께 지내는 수는 없었던 것인가.
-딸랑.
[XIV. 절제(Temperance)]의 내민 손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고 할 때
[V. 교황(The Hierophant)]의 지팡이에 달린 종이 울린다.
“ ...누군가 왔군. “
자신의 성역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V. 교황(The Hierophant)]이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했다.
“ 누구지? “
딱히 올 만한 사람은.. 없는데 말이다.
“ ...[XVIII. 달(The moon)]일세. “
“ 큭..... 읏..! “
팔에도, 다리에도, 목에서도 은빛 가루가 흩날리며 빠져나간다.
점점 육체를 유지하기 힘들어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죽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이런 육체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달에서 오랜 시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후우... “
[XVIII. 달(The moon)]은 억지로 손을 움직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은빛 가루를 더이상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상처 부위를 짓눌러 막아본다.
“ [XVIII. 달(The moon)]. 무슨 일이지? “
“ 괜찮은가? 이게 무슨.. 무슨 일이 있던 거지? “
역시.. 성역인가.
[XVIII. 달(The moon)]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채고 메이저 아르카나들이 찾아온다.
“ ..무엇을 하든 치료가 우선일세. [V. 교황(The Hierophant) - 신의 가호] “
따뜻한 빛 한줄기가 [XVIII. 달(The moon)]을 감싸며 상처가 벌어지는 것을, 은빛 가루가 새어나가는 것을 늦춘다.
인간이었으면 치유되었겠지만..
역시 인간이 아닌 존재의 육체는 알 수 없는 것인가.
[XVIII. 달(The moon)]이 치유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더이상 치유되지 않는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먼저 입을 뗀 것은 [XVIII. 달(The moon)]이었다.
아주 충격적인 내용으로 말이다.
“ ...대재앙이 돌아왔다. “
그 한마디에 모두가 숨을 죽인다.
그리고 모두가 긴장한다.
하지만.. 괜찮다.
대응할 수단이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 [XX. 심판(Judgement)]. 가자. 이들이 싸우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베티르를 찾아서 저지해야 한다. “
그래.. 작전대로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그런데..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진짜 [XI. 정의(Justice)]는 무엇일까.
어째서..
이 타이밍에 아디나가 생각이 나는 걸까.
“ ...난 혼자 가겠다. “
“ ..뭐? “
“ ..[XX. 심판(Judgement)]이여. 그게 무슨 말인가? “
[XX. 심판(Judgement)]은 모두를 등지고 섰다.
“ 걱정하지 마라. 도망치는 것은 아니니. “
그리고 그렇게 모두를 무시하고 걸어 나간다.
그래.. 처음부터 모두가 ‘ 운명 ‘ 처럼 [XIII. 죽음(Death)]과 [XV. 악마(The Devil)]에게 다가갔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구분 짓지 않았으면 이런 거대한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XX. 심판(Judgement)]이 메이저 아르카나를 평범한 사람들과 떼어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 운명 ‘ 이 멋대로 이어받아
그 끝을 아디나에게 넘긴 것이다.
“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 끝도 내가 맺어야겠지. “
그렇게 [XX. 심판(Judgement)]은
아디나를 만나 [XIII. 죽음(Death)]과 [XV. 악마(The Devil)]를 상대하기 위해 탑을 내려간다.
분명 [XVIII. 달(The moon)]은 대재앙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디나가 이 탑 안에 있다는 뜻이며, 아디나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아마 [XIII. 죽음(Death)]이나 [XV. 악마(The Devil)]에게 육체를 지배당한 것이리라.
[XX. 심판(Judgement)]은 베티르가 회유하러 왔을 때 [XVI. 탑(The Tower)]을 이용해 뚫어놓았던 지름길을 통해 1층의 로비로.. 아니..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으로 돌아왔다.
흐음.. 여기서 기다리면 아디나가 올까?
아니면 위층으로 이미 올라가고 있을까?
너무 급하게 떠나버린 탓에 [XVIII. 달(The moon)]에게 어디에서 싸웠는지를 물어보지 못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베티르도 만나서 대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 여기에 있다 보면 누구든지 와주리라.
만약 베티르를 먼저 만난다면 [XVI. 탑(The Tower)]을 이용해 아디나에게 데려다..
-케륵....
[XX. 심판(Judgement)]이 한순간 반응해 손에 두 장의 메이저 아르카나를 띄우고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한다.
분명 들었다.
“ ...누구냐. “
섣불리 움직였다가 만약 숨어있던 인간이 호기심으로 탑에 들어왔던 것일지도 모르니 조심스레 다가가 본다.
....
...
-케에에에엑!!!
갈라진 바닥 틈에서 악마가 튀어나와 [XX. 심판(Judgement)]을 향해 발톱을 휘두른다.
..악마.
“ [XX. 심판(Judgement) - 심판의 창] “
빛을 모아 휘두른 창으로 눈앞의 악마를 두 동강 내버린다.
어째서 여기에 악마가 있는 걸까.
아니.. 답은 알고 있지 않나.
[XV. 악마(The Devil)]가 여기에 있다는 뜻이다.
“ 아디나. 어디 있지? 너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건가? “
....
아무런 답이 없다.
그렇다면...
“ [XV. 악마(The Devil)]. 거기 있나? “
그때 어둠 속에서 더욱 짙은 어둠이 나타난다.
아니.. 여자다.
아니... 이마에는 뿔이, 등에는 검은 날개가, 손에는 거대한 손톱이 자라있는 악마다.
사나는 자신의 등을 붙잡고 있는 [XV. 악마(The Devil)]에게 물어본다.
“ ...[XV. 악마(The Devil)].. 저 사람이 널 부르는데? “
“ 키킥... 오랜만이군 [XX. 심판(Judgement)]. 저 녀석의 아르카나도 매우 맛있다고? 맛있는 만큼 강력하지! 키키킥!! “
[XV. 악마(The Devil)]의 속삭임.
그 속삭임이 사나의 귀에서 울려 퍼지자 사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 그럼.. 저 녀석도 죽여서.. 내가 더 강하다는 걸 증명해줄게. “
- 작가의말
아르카나의 한글 명칭은 진행에 맞게 임의로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영문은 타로카드명칭 그대로 적어놓았기 때문에
한글이름과 영문이름에 조금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부분이 불편하시다면..
죄.. 죄송....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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