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러 명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가 여기에 어쩐 일이냐?”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할아버지.”
“여태껏 부탁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한 녀석이 부탁이라니. 무슨 부탁인지 한번 들어나 보자.”
“저 반 옮긴 거는 알고 계시죠?”
“그래, 교장한테 들었다. 너 지금 다시 원래 있던 반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냐?”
“그건 아니고, 지금 있는 반 수업 좀 시켜주세요.”
“대체 이 녀석이 뭐라는 거요? 수업을 시켜 달라니. 어떻게 된 일인지. 교장이 한번 말해 보시오.”
학교 이사장인 할아버지의 물음에 교장이 좌불안석이다.
“그럼, 교감인 자네가 한번 말해 보게.”
뜸을 들이던 교감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과 친구분들이 계시는 반은 일명 문제아들의 반으로 불립니다.”
“아니 그럼, 머지않은 미래에 이 학교의 주인이 될 내 손자가 문제아란 말인가!”
불같이 화를 내시는 할아버지 덕분에 교장과 교감이 안절부절못하며 식은땀을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화부터 내세요? 그러다가 혈압으로 넘어가세요. 그리고 저 문제아 맞아요. 말씀 계속하세요. 교감 선생님.”
“학기 초 그 반에서 작은 소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슨 소동 말인가?”
“네, 그게 그 반을 담당하던 교사가 학생 한 명에게 위협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서로 완만하게 해결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 교사들이 그 반 애들을 무서워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사를 협박하다니 그게 가당치나 한 일인가.”
“저기요. 할아버지 손자는 중학교 때 선생을 팼거든요.”
할아버지가 내 말에 몹시 당황하신다.
“그때는 그 망할 놈이 네 부모가 어떻게 죽었다느니 패드립을 하는 바람에 네가 그랬던 거고. 애들 시켜서 그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려다가 네가 말리는 바람에 멈췄지.”
“이유야 어찌 됐든 팬 건 사실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기회는 한 번 더 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인데, 두 분은 어떠세요?”
내 말에 교장과 교감이 할아버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 왜 내 눈치를 봐. 둘이 알아서 결정해야지. 근데,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앞으로 누구 밑에서 일을 더 오래 할지.”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더 사색이 되어 간다.
“회장님도 참 짓궂으십니다. 두 분을 꼭 궁지에 몰아넣으셔야겠습니까.”
옆에서 차를 홀짝거리며 관망만 하던 할아버지의 고문변호사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는다.
“내가 너무 심했나? 빨리 결정하게 나 오후에 골프 약속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하네.”
“네, 도련님의 뜻대로 기회를 한 번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눈도 못 마주친 채 얘기하고 있었다.
“제 의견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들이 두 번 다시는 사고 못 치도록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두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두 분, 앞으로 저 부르실 때, 도련님 하지 마시고 현태 군이나 현태 학생이라고 하세요. 부탁드립니다.”
교장과 교감이 내 등 뒤에 대고 굽신 그러는 게 느껴졌다.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고급 세단 한 대가 내 앞으로 와 섰다.
“태워주랴?”
뒷좌석 창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미셨다.
“됐어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이 할애비 골프 캐디 좀 해 주지 그러냐. 알바비는 내가 두둑이 챙겨 주마”
“제가 따라다녀 봤자 잔소리밖에 더하겠어요? 그러지 마시고 캐디 언니들 더 챙겨 주세요.”
“망할 것, 제 친구들 생각하는 거 만큼 나도 좀 생각해주면 어디 덫이라도 나냐. 다음에 또 보자.”
나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시고는 가버리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난리야.”
모두의 예상대로 진환이가 제일 먼저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잠이나 자고 그러면 되겠냐. 학교 공짜로 다니는 것도 아닌데.”
“뭐래? 학교에서 맨날 잠이나 자는 건 너면서. 그리고 우리가 친구를 잘 둔 덕분에 모두 공짜로 다니잖아. 고등학교 안 간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 놓고선.”
“진환아, 너 지금이라도 학교 그만둘 생각 없니?”
“어, 없어, 너희가 다 학교에 있는데 나 심심해. 근데, 현태야.”
“왜?”
지금껏 장난만 치던 진환이가 진지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너 작년에 일 년 동안 여행 갔다 온 후로 변한 거 아니? 예전에 우리가 알던 오현태가 아니야.”
‘설마 진환이 녀석이 내가 진짜 현태가 아니란 걸 눈치챈 건가?’
난 진환이의 말에 살짝 위축됐다.
“애가 한 살 더 먹더니 꼰대가 돼서 나타났어. 에잇. 꼰대 냄새나 저리 가.”
‘이 새끼한테 속은 내가 머저리지.’
난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진환이에게 한 방 날렸다.
녀석은 뒤로 자빠져서도 날 약 올리기라도 하듯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우리 7명은 애들 앞에 섰다.
“얘들아, 내 말 좀 들어 줄래?”
그 말 한마디에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긴장을 잔뜩 한 채 나에게 집중했다.
“너희는 쪽 팔리지도 않니? 다른 애들은 다 공부하고 있는데, 누구는 교실에서 잠만 자고 애들 삥이나 뜯고.”
난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문제아, 양아치 소릴 들으며 살 수는 없잖아. 우리도 남들한테 잘한다는 인정도 받고 남들한테 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자.”
말을 하고 나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걸 느꼈다.
이 얼마나 닭살 돋고 청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인지. 순간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요는 하지 않은 게. 하지만 어떤 게 더 괜찮은지 너희가 판단해. 우리도 바뀌려고 노력할게.”
난 얼른 자리로 돌아왔다.
“태환아, 내가 주말 내내 생각해봤는데, 혹시 현태 불치병이라도 걸린 거냐? 그렇다고 몇 년 뒤에 이사장 될 놈이 학생회장 나가려고 저러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진환이가 진지한 얼굴로 태환이에게 물었다.
참고로 학교에서는 학생회장을 뽑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이었다.
“갑자기 불치병은 왜?”
“사람이 변하면 빨리 죽는다잖아. 맨날 잠이나 자던 놈이 뜬금없이 저러니까 난 솔직히 무섭다.”
진환이의 말에 애들이 모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이 새끼들이 내가 학교에선 욕 안 하려고 최대한 참고 있는데, 내 성질을 건드리네.”
난 애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애들에게 보여줬다.
“이놈들아! 지난주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다! 나, 무지 건강해. 그리고 너희보다 특히, 진환이 너보다는 더 오래 살 거야!”
나의 반협박성 부탁이 통한 것인지 1교시부터 애들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생들도 처음에는 무슨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들어왔다가 달라진 우리의 모습에 의아해하거나 놀라는 눈치였다.
애들에게 말한 게 있어서 나 또한 수업시간에 안 자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그 결과 매사에 무력감을 느꼈다.
“야, 점심 먹으러 안 가냐?”
“너희끼리 먹고 와. 난 생각 없어. 좀 잘래. 못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수업 시작하면 좀 깨워줘.”
4교시가 끝나자마자 점심도 포기한 채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렸다.
의리 없는 놈들, 예의상 한번 딱 묻고는 모두 급식실로 가 버렸다.
비록 배는 좀 고프지만, 한참 달콤한 잠에 취해 있을 때, 밖이 좀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애들이 밥을 먹고 벌써 돌아왔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배고픈데, 누가 먹을 거라도 좀 사 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놈들은 절대 그런 짓을 할 놈들이 아니다.
‘매점까지 갔다 오기 너무 귀찮은데.’
사실 지금 화장실을 너무 가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있다.
‘설마 싸지는 않겠지. 참 미련한 놈.’
그러는 사이 밖은 더 시끄러웠다.
싸움이라도 난 것인지 궁금했지만, 궁금증이 내 잠과 귀차니즘을 이길 수는 없었다.
“현태야, 오현태.”
그 잠깐 사이에 꿈을 꾸는 것인지 내 앞에 15년 전에 죽은 내 아내, 선영이가 서 있었다.
“정신 좀 차려 봐. 현태야.”
“그래, 선영아 나도 보고 싶었어.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해. 하지만 널 잊은 건 아니야. 사랑해.”
“아니야. 성현 씨, 괜찮아. 날 기억해 줘서 고마워. 나도 사랑해.”
참 꿈같지 않은 생생한 꿈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어 눈을 떠 보니, 내 앞에 그 애가 서 있었다.
최선영!
선영이의 얼굴을 본 나는 마치 발가벗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선영의 등장에 너무 놀라서 발버둥을 치다가 그만 의자 채로 뒤로 넘어졌다.
“괜찮아? 현태야.”
내 모습을 보고 놀란 선영의 동그랗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내 눈 속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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