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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노래 님의 서재입니다.

사슬의 학살자와 오두막의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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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천공의노래
작품등록일 :
2021.04.09 16:55
최근연재일 :
2021.08.02 07:50
연재수 :
118 회
조회수 :
8,177
추천수 :
231
글자수 :
613,867

작성
21.05.23 20:20
조회
38
추천
1
글자
11쪽

46화

+와 +사이의 글은 외국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DUMMY

마을 북쪽 공동묘지 한쪽 구석에 놓인 비석 두 개.

묻힌 게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이름마저 적혀있지 않은 두 돌덩이에

울다 지쳐 등을 기대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온다.


“흐흐흐.”

“왜 갑자기 웃나? 아주 정신 놔브렀나?”

“그렇지만 이거,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그 옆에서 술을 병째 들이키던 노인이 말없이 보기만 한다.


“그놈의 직계가 뭐라고, 그놈의 가주가 뭐라고, 그놈의 권력이 뭐라고, 그놈의 성물이 뭐라고,”


어차피 죽으면 다 스러질 것을.


“그렇게 서로를 죽여서라도 얻고자 했을까요. 같은 핏줄인데, 가족인데.”

“저들도 그걸 중요시하지 않는 널 이해하지 못할 게다. 말 그대로 성물인데 말이야.”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도, 그 할아버지도 계속 그렇게 했겠지요.”


성물을, 가주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썼겠지.

그게 아무리 비윤리적이라고 해도.


데스트리아누스의 직계가 아닌 방계가 가주 지위를 차지했던 시기,

직계 대표와 방계 대표의 사이는 꽤 좋았다고 한다.

다르게 말하면, 직계 대표가 가주 자리를 놓칠 정도로 물렀다는 것.


“매번 같은 핏줄, 같은 핏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저를 괴롭히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은 했는데, 정작 자신들이 그 같은 핏줄을 죽여버릴 줄이야.”

“그 꼴이 역겹나?”

“너무나도요. 너무나도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팔을 파고드는 손톱과 손가락 끝에 맺히는 핏방울.

지금 당장에라도 찾아가서 얼굴에 대고 토악질을 해주고 싶다.


“다 필요 없는데, 그냥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도 되는데.”


성물을 갖고 있어서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성물을 가졌기에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 상황이 되었을 때, 성물을 얻기 위해 가족을 죽일 수 있냐고 한다면

고민도 않고 그럴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성물을 바쳐서 가족을, 그 순간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고민도 않고 가져가라 할 것이다.


증오가 넘실이는 눈을 보고는 노인이 한숨을 쉰다.


“그래도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놈이 나와서 다행이구나.”

“······지금까지는 없었습니까?”

“내가 알기론 아무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없었다고 들었고, 조카사위도 분노할지언정 억울해하진 않았지.”


그게 테 살베니움 가문에 오랫동안 쌓이던 폐단이고,

모두 그 폐단에 젖어있으니까.

그저 당연하다 여길 뿐이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면 바로 단죄할 게냐?”

“아니요.”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병에서 입을 떼고 멍하니 위즈를 본다.


“그럼 용서라도 할 생각이냐?”

“설마요. 반드시 단죄할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섣불리 행동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문에 불만을 가진 이가 원로들을 죽인 ‘사건.’

저들은 목숨을 잃고 위즈는 자유를 잃으며 가문은 여전히 썩어빠진 그대로겠지.


“동생이 카누악 지역에 있다고 했지? 그럼 너도 거기로 갈 생각이냐?”


고개를 젓는다.

본 에레체인 가문에 더 폐를 끼칠 수는 없다.


“그리고 동생이 부모님 사정을 몰랐으면 합니다.”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적어도 당장에 짊어질 사람은 저 하나로 충분할 테니까요.”


그리고 그 계획을 실현하려면······.


“그럼 여기서 지내는 건 어떠냐? 내 일을 도우며 때를 기다리는 거다.”

“아니요. 저는 엘렌으로 돌아갈 겁니다.”

“엘렌으로? 본가로 가겠다고?”

“거기보다 행동하기 좋은 곳은 없지요.”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만큼, 범의 약한 살을 찌를 기회는 더 많아진다.


“견디기 힘들 게다.”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마주해야 한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 됩니다.”


물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멋대로 본가에 끌고 왔을 때부터 이미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저 충동만 참으면 된다.


노인이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말한다.


“복수할 거면 대상은 확실히 정해야지. 자네는 가문이 싫나?”

“예?”

“복수의 대상이 자네 가문이냐고.”


그 말에 옛 선생이 생각나 고개를 젓는다.


“저는 가문이 싫은 게 아닙니다. 적어도 가문 자체는 자랑스럽습니다.”


용을 무찌르고 나라를 세운 이도,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킨 이도.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문다.


“그래서 가주와 원로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제 자랑을 망쳐놓았으니까요.”


단순히 지금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위즈 바로 위로 올라가면 있는 직계 가주들과 원로들도,

위즈의 증조부나 고조부일지도 모를 이 역시 밉다.

똑같이 이런 일을 방조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얻었다면, 똑같이 평가받아야 한다.


“자정작용이라고 할까요, 제가 원하는 가문의 모습을 위해 싸울 겁니다.”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 한 방울이 들어간다고 그 물이 깨끗해지지는 않는다.”

“그럼 그 더러운 물을 담은 통을 부수고 새로 만든 뒤 깨끗한 물을 담아야지요.”


어쩌면 복수하기도 전에 가주와 원로들이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분명 기회는 온다.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부정한 이들을 없애고 가문을 정화할 기회가.


“네 동생과 같이 복수할 게냐? 본 에레체인 가문에서 가르칠 정도면 실력은 뛰어날 텐데.”

“아니요. 걔 손에 묻힐 피는 제 피뿐입니다.”

“니 동생 손에 죽으려고?”

“설마요. 전 제 목숨이 너무나 아깝습니다. 그저,”


풀을 뜯어 바람에 날린다.


“정의의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권력을 얻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괜찮냐? 굳이 혼자 희생할 필요는 없다. 네가 가주가 되지 그러느냐.”

“전 그럴 재목이 못 되는걸요.”


걔는 분명 이런 피해자를 만들지 않으리라.

적어도 제 형의 속내를 안다면 함부로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는 않을 터.


“그렇게 다 포기하면, 넌 어쩔 생각이고?”

“다 끝나면 이 나라를 떠날 겁니다.”

“환멸을 느꼈느냐?”

“네. 도저히 이곳에서 못 살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조카손자가 안타까워 술병을 건넨다.

주저하지 않고 병을 받아 한 모금 들이키는 위즈.


“언젠간 네게 희망이 찾아왔으면 좋겠구나.”


조카와 똑 닮은 그 얼굴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웃는 걸

가만히 보고 있기가 힘든지 목소리가 떨린다.

그 말에 위즈는 입을 닦고 살짝 멘 목소리로 말한다.


“희망이요?”


- 위즈. 내가,


“제 희망은 놈들의 파멸입니다. 전 그걸 꼭 이루고야 말 거고요.”

“희망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아까보다 더 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희망은 앞으로 걸어가는 자에게만 찾아온다고 하지. 그리고 넌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고 있어.”

“그렇다면 전 그 희망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무너지지 말거라.”


무시하고 계속 말한다.


“무너지더라도 손은 뻗고 있거라.”


- 내가 위즈의 희망이 되어 줄게.


그 목소리가 석양을 깨부수고 그 너머로 짙은 녹색 바닥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무의식적으로 노인의 말을 따라 손을 뻗는다.


“그래야 적어도 스쳐 지나가는 희망을 붙들 수 있을 테니까.”


손에 닿는 무언가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움켜쥔다.



******



악몽에서 깨듯 정신이 번쩍, 하고 든다.

몸은 움직이려고 썩은 내로 가득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신다.


“리, 리나.”


몸을 힘겹게 일으켜 앉고 눈이 마주친 머리를 손으로 쳐 날린다.

손에 쥐고 있는 건 리나의 가방끈.


누르고 있는 시체들 때문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데

정작 그 시체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멀리에 서서 위즈를 안쓰럽게 보던 두 사람은 잔영만 남기고 사라져간다.


“······그렇게 보지 마요.”


위즈가 두 사람을 향해 중얼거린다.


“저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동생은 지켰잖아요.”


언제 즈음 다시 만나서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힘냈다고, 열심히 했다고.


한숨을 내쉬고 리나 가방을 든다.

옛날 꿈을 꿀 때 마지막에 쥐었던 게 어쩌다 보니 이것이었던 모양인데,


- 내가 위즈의 희망이 되어 줄게.


그 말이 떠올라 왠지 기분이 묘하다.

리나를 본 순간 느낀 충격도 어쩌면 위즈가 내심 리나를 희망이라 여겨서 그런 걸까.


어쨌든 리나 모습만큼은 헛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리나는 안전할까.

어떻게 리나를 찾아야 할까.


‘지금 이러는 사이에도 리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빨리 움직여야 해.’


심호흡하고 눈을 꽉 감았다 다시 뜨자 저 멀리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완전히 사라졌다.

땀을 쫙 뺐을 때처럼 몸이 나른하지만, 그래도 머리만큼은 맑다.

최대한 생각을 짜낸다.


‘일단 적부터 생각하자. 내가 뿌린 마력이 감지를 못할 적이라면 분명 마력을 흡수하는 마법사일 터.’


마력을 마음껏 흩뿌릴 수 있던 만큼 마력으로 감지하는 데 많이 의존했고

그 때문에 위험해진 적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수색 부분에서는 마력을 흡수하는 마법사들이 천적이라는 것쯤은

위즈도 잘 알고 있다.


‘놈들이 상대라면 무작정 돌아다닐 수는 없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적들도 나름 훈련받은 병사들일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리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만 커진다.

위즈 입장에서도 돌아다니다가 적을 상대하면 지금 상태로는 피해가 크리라.


‘숲 전체에 마력을 뿌려서 공허한 부분만 찾으면······.’


이렇게 하면 마력을 흡수하는 마법사만 찾을 수 있으나

적병 중 마력을 흡수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리나를 따라온 것, 그리고 과감히 위즈가 있는 곳까지 온 걸 생각하면

분명 위즈를 상대하려고 저들을 차출했을 것이다.


또 전체 마력량과 상관없이 위즈가 한 번에 마력을 뿜을 수 있는 양은 평범하다.

그런 만큼 이 숲 전체를 마력으로 뒤덮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결국, 그 방법뿐인가?’


남은 방법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기 싫었던 짓이다.


‘아니, 잠깐만.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다른 방법이······.’


떠오를 리가 없다.

있다고 해도 위즈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을 수 없다.

그리고 위즈도 그걸 알고 있어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다.


‘이런 때에도 그런 장난을.’


이러니 결코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다.

직접 당하는 처지인 위즈도, 본능이나 다름없는 상대방도 서로 바꿀 생각이 없으니까.


“토루마.”


그래도 아쉬운 건 언제나 위즈라 어쩔 수 없다.

가장 싫어하는 상대가 가장 기뻐할 행동을 취할 수밖에.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도와줘.”


- 제발 이 고통을 끝내줘.


문득 처음 마주쳤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도 달라진 건 없다.

원하는 대로 이룰 수만 있다면, 리나를 구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빌 수 있다.


- 내가 위즈의 희망이 되어 줄게.


“내가 리나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손에 쥔 가방이 조용히 흔들린다.

그 말에 숲에 있는 누군가는 섬뜩한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려 길을 가리킨다.

어둠이 바라는, 파멸에 다다르는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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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5화 21.05.23 41 1 12쪽
45 44화 21.05.22 35 1 11쪽
44 43화 21.05.22 4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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