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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1262_quddus122 3 님의 서재입니다.

재앙의 기사가 기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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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안중
작품등록일 :
2024.06.26 16:12
최근연재일 :
2024.07.02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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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16

작성
24.06.2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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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001 -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DUMMY

발칸 평야.


건조한 바람이 흙바닥을 쓸었다.

한 명의 기사를 수백 명이 포위하고 있었지만, 떨고 있는 건 오히려 포위한 쪽이었다.


모두가 숨소리조차 죽였다.

지금 이 순간, 마침내 하나의 신화가 마침표를 찍기 직전이었다.


다각다각-!


기사단장 오딘의 말이 앞으로 나아갔다.


“실로 전쟁을 위해 태어난 놈이구나.”


오딘이 붉은 기사를 내려다봤다.

핏빛의 갑옷에는 ‘크림프트 기사단’의 상징인 사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크림프트 기사단이 어떤 곳이던가?


인간의 성을 딴 유일한 기사단이자, 악마들만 모아뒀다는 최강의 집단이 크림프트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장의 핏빛 갑옷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였으며 시대의 상징이었다.


오딘이 검을 들고 엄숙히 경고했다.


“바야크 왕국은 멸망했다. 검을 버리고 투항하라.”

“오딘.”


오딘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독할 정도로 침묵하던 사내가 처음으로 입에 담은 것이 자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 투구를 벗긴 적이 없다.”


붉은 투구 속의 안광이 오딘을 향했다.


“너라고 다를성싶은가?”

“여길 포위한 기사만 수백 명이다. 설마 싸울 생각은···.”

“오딘.”


붉은 기사가 오딘의 말을 잘랐다.

쥐새끼 하나 도망갈 틈 없는 포위망 속에서도 붉은 기사의 검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네놈은 투구를 벗길 수 있느냐 물었다.”


오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는 신화이자, 한때 자신조차 동경하던 기사가 적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면 그것대로 실망했으리라.


오딘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몰아쳤고 이내 오딘의 검이 단두대처럼 떨어졌다.


수백 명의 기사가 동시에 칼을 뽑아 들며 붉은 기사 쪽으로 달렸다.



< 1 >



와장창-!


멍청한 표정으로 상자를 떨어뜨렸다.

안에 있던 유리 접시들이 산산 조각나며 깨졌다.


“이런 등신 새끼가!”


빠악!


뒤통수를 후려치는 손에 멍하던 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니 겔만이 벌게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쳤어?! 이게 얼마짜린데···!”


붉은 기사로 살던 기억, 그리고 바보 등신으로 살던 기억이 두서없이 쏟아졌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겔만이 황급히 상자를 줍더니 주변을 살폈다.

새빨갛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한 흙빛이었다.


“너는 이따가 뒈질 줄 알아.”


겔만이 상자를 들고 황급히 사라졌다.

상자에 비싼 식기들이 들어있던 듯했고, 내가 그걸 깬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머리로 조각난 기억들을 이어붙였다.


분명 기사단장 오딘과의 격돌이 있었다.

바야크 왕국은 그날 멸망했으며 내가 이끌던 기사단 역시 역사에서 사라졌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지던 추격전 끝에 결국···.


절벽에서 떨어졌구나.


멍청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백작가의 마당은 연회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아는 얼굴이기도, 모르는 얼굴이기도 했다.


안개 낀 듯하던 머리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기억을 잃어버린 거구나.

그렇게 바보 등신이 되어 10년을 떠돌았고, 흘러 흘러 도착한 곳이 이곳 '그레이스’ 백작가였다.


나사 빠진 머리가 갑자기 멀쩡해진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이, 등신!”


웬 사내의 고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나, 나는···.”


입이 왜 이러지?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턱을 어루만지다가 지난 10년간의 기억을 더듬어 이유를 찾았다.


사람들은 나를 벙어리, 등신, 혹은 바보 새끼 정도로 불렀다.


그간 말을 너무 안 해서 턱을 움직이는 방법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나를 부른 사내가 다가오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뺨을 짝! 때렸다.


“정신 안 차려?!”

“아···, 으어···.”


감히 내 뺨을 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억을 잃기 전의 일이었다.


지난 10년간 하루가 멀다고 당해온 폭행이다.

나는 말도 똑바로 못 하는 병신이었으니까.


“할 거 없으면 뒷마당 가서 의자나 날라!”

“의···, 의자···.”


짝!


다시금 손바닥이 뺨에 작렬했다.

마음 같아서는 맨손으로 팔다리를 뜯어버리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꾹 참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찢어발길 수 있는 놈이다.

소란을 일으킨다 해도 몸이 돌아온 다음이었다.


이를 갈며 발을 돌렸다.

뒷마당으로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짐을 나르고 있었다.


토마스, 패트릭, 아트리아, 올리···, 하나 같이 나를 괴롭히는 낙으로 살던 놈들이었다.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해 열심히 턱을 움직였다.


“아···, 으아···.”


그간 말을 얼마나 안 했으면 턱이 굳어버렸을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절벽 아래에 쓰러져 있던 나를 노부부가 구했을 때···, 그러니까 기억을 잃은 직후만 해도 머리만 멍청해졌을 뿐 말은 곧잘 했다.


문제는 노부부가 죽은 후였다.


나를 구해줬던 노부부는 산적들의 손에 죽었다.

산적들은 나를 끌고 가 팔아버렸고, 10년 동안 수없이 흘러 도착한 곳이 여기였다.


거처를 옮겨 다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질을 당했다.


내 삶에는 대화보다 비명이 많아졌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말하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린 결과,


“개··· 새끼들···.”


처음으로 말 다운 말이 튀어나왔다.

슬슬 일어나려는데 모퉁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겔만! 얼굴이 왜 그래?”

“집사한테 얻어터졌어! 에반 이 개새끼···!”

“바보 에반? 그놈이 왜?”

“그 등신 새끼가 접시를 몽땅 깨버렸다고! 걸리기만 해 봐! 산 채로 뼈를 부러뜨려버릴 거니까!”


바보 에반.


어딜 가나 따라붙던 이름이었다.

저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었으며, 실제로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기사단장 오딘조차 알아내지 못한 이름과 얼굴이 세상을 떠돌고 있으리라는 것을.


바닥에서 부러진 각목을 하나 주워들었다.


“살살 해. 에반 그놈이 사고는 쳐도···, 어라?”


말하던 사내가 나를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아이고···, 딱 걸렸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농땡이 피우고 있었어?”


겔만의 입가에 살기 넘치는 웃음이 걸렸다.

옆에 선 사내가 내 손에 들린 각목을 바라봤다.


“쓰레기 줍고 있었나 봐. 애는 착하다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그래, 적당히 하고 와.”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짧은 순간 보인 눈빛에는 동정이 담겨 있었다.


겔만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멱살을 잡았다.


“지금부터 소리 지르면 죽여버릴 줄 알아.”

“소리··· 지르지 말라고···?”

“어쭈, 이젠 말대꾸도 하네.”


겔만이 힘껏 주먹을 들어 올렸다.

형편없는 자세를 보니 약한 놈들 때려보기나 했지, 싸움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듯했다.


툭-


가볍게 발목을 차자 겔만의 몸이 휘청댔다.

틈을 놓치지 않고 복부를 시원하게 걷어찼다.


우당탕!


“끄윽!”


겔만이 우당탕 바닥을 굴렀다.

각목을 양손에 쥐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자그마치 10년이다.

꼬마가 성인이 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검은커녕 이렇다 할 무기조차 쥐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얼마나 무뎌졌는가?


“너···, 너 방금 나 찼냐?!”


겔만이 성난 멧돼지처럼 몸을 일으켰다.

숨을 들이마시며 각목을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발은 태산처럼 굳건하게,


뻗어지는 검은 벼락처럼,


베지 못할 것은 섬기는 국왕뿐이니.


“흡!”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겔만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동시에 각목이 그의 목을 후려쳤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겔만이 목을 부여잡으며 고꾸라졌다.


“커···, 커헉!”


정확히 급소를 노렸음에도 살짝 빗나갔다.

애초에 저놈이 살아서 꿈틀댄다는 것 자체가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증거였다.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손바닥을 바라봤다.


“다시··· 하면 돼···.”


기사단장을 역임했던 나이가 스물둘이다.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을지언정, 몸이 찬란했던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쿨럭! 에반 너 이 새끼···!”


겔만이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냈다.

손톱만큼만 위쪽에 맞았어도···, 아니, 진짜 힘을 실었으면 즉사했을 놈이다.


고통스러워하는 겔만을 보며 기억을 곱씹었다.


백작가에 팔려온 지가 어언 5년째였다.

모두가 나를 무시하고 손찌검했지만, 겔만 저놈은 특히 정도가 심했다.


실수하면 실수했다고, 실수를 안 하면 건방 떤다고 나를 쥐어팼으니까.


타고난 강골이어서 다행이지 다른 놈이었으면 벌써 반병신이 되고도 남음이었다.


생각할수록 열이 끓어오른다.

부러진 각목의 끝을 놈의 정수리에 툭 댔다.


“너···, 너 이거 감당할 수···, 쿨럭! 감당할 수 있어?!”

“감당···.”


아직도 턱이 뻑뻑하다.


“그건··· 지금부터··· 네가 해야지.”


* * *


창밖으로 온갖 소음이 넘나들었다.

평민들과는 하등 상관없는 연회 소리였다.


창밖을 바라보다 흠칫 정신을 차렸다.

10년을 멍청히 산 탓인지 아직도 틈만 나면 정신이 멍해졌다.


우선 상황을 정리해보면···.


마지막 전쟁에서 나는 패배했다.

비겁한 수에 당했다는 것도 핑계일 뿐이다.

나는 오딘에게 패배했으며, 왕국은 멸망했다.


“그 다음이···.”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도망치다가 끝내 절벽에서 미끄러졌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떨어지자마자 뒈졌을 높이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때 머리를 박았던 모양이다.

이름 모를 노부부의 손에 구해져 1년을 살았고···, 다음 해에 산적이 쳐들어와 노부부를 살해한 뒤 나를 끌고 갔다.


그 뒤로는 이름도, 출신도 모른 채로 떠돌았다.


조용히 창밖을 내다봤다.

기억이 돌아온 후에도 등신으로 살 수는 없다.


"···기다려라, 오딘."


나의 조국과 나의 백성, 나의 기사를 짓밟은 놈이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오딘 그놈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등신으로 살아서 좋은 점도 있군.”


따지자면 운이 좋았다.


멍청하다는 이유로 나를 대나무 숲처럼 쓰던 놈들이 한둘이었던가?


누가 불륜이 났다느니, 대법관이 치질이 있다느니, 가문의 돈을 빼돌려 숨겼다느니···.


멍청해서 저절로 비밀이 지켜진다.

내 귀에 비밀스러운 것들을 쏟아내면서도 사람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말을 못 했으니까.


하지만 평생 잠겨있을 줄 알았던 창고가 열렸다.

등신으로 살 때는 의미조차 몰랐던 말들이, 지금은 무엇보다 큰 무기가 되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발소리가 문 앞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문에 붙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 병신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렇다니까!”

"하하, 아주 작살이 났네?"

“입 닥쳐!”

"다들 조용히 해. 깨겠다."


외려 당황스러운 기분이다.

발소리가 하도 시끄러워서 다 들으라고 저러는 건 줄 알았는데.


“셋에 열고 덮치는 거야.”

“알았어.”

“숫자 셀 테니 준비···.”


끼익-


문을 열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놈들이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태연하게 문을 닫고 나왔다.


"에, 에반!"

“조용한 곳으로 가지.”


모여있는 놈들을 지나쳐 복도를 걸었다.

귀신이라도 보는 듯하던 놈들이 정신을 차리며 내 뒤를 따랐다.


뒤통수를 때리려 들면 이 자리에서 목을 꺾어버리려 했는데, 그럴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놈들과 함께 향한 곳은 짓다 만 창고였다.

이번에도 바닥에서 각목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겔만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댔다.

아까 죽도록 얻어 터졌던 게 떠오른 모양이다.


"미리 말하는데···."


느긋하게 각목을 들어올렸다.


“한 놈은 죽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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