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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1262_quddus122 3 님의 서재입니다.

재앙의 기사가 기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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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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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004 - 군주의 맹세

DUMMY

루테아 왕성, 기사단장 집무실.


“단장님, 루카스입니다.”

“들어오시게.”


문을 열고 들어온 루카스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는 루테아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있는 남자였다.


“오늘도 검을 닦고 계시는군요.”

“이놈이 자네보다 나이가 많아. 손을 자주 대주지 않으면 금방 녹슬어버리지.”


오딘이 씩 웃으며 날을 어루만졌다.

매일같이 갈고닦은 검에서는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흘렀다.


“앉지.”

“예, 단장님.”


루카스가 공손하게 의자에 앉았다.

기사단장으로 오딘을 보필한 지 5년이 넘었지만, 루카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그러고 보니 단장님께서 저 검을 휘두르시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야···, 휘두르지 않으니까?”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하하, 자네답지 않게 별걸 다 궁금해하는군.”


오딘이 유쾌하게 웃더이 턱을 어루만졌다.

매일 닦기만하고 휘두르지 않았다지만, 저 검은 결코 장식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송이 기사들은 상상도 못 할, 그런 강자들을 눕힌 검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강했던 남자.


“크림프트와 맞댔던 검이야.”


루카스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오딘의 입에서 ‘크림프트’라는 이름이 나온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바야크 왕국의 기사단장 말입니까?”

“그래.”

“항상 궁금했습니다. 일격에 산을 갈라버렸다느니, 혼자서 상급 기사 수십 명을 베어버렸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아서 말입니다. 물론, 터무니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루카스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아직 애송이 기사일 적의 이야기다.

당사자 앞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딘이 껄껄 웃었다.


“하하,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산이 아니라 하늘을 베었고, 수십이 아니라 수백을 베었으니까.”

“···예?”

“그놈은 인간도 아니었어.”

“그런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하신 건 단장님이시지 않습니까?”


오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대로 나는 전쟁에서 이긴 것뿐이네. 단 한 번도 크림프트를 이기지는 못했지.”

“그렇게나 강했습니까?”

“이미 지난 일이라 말하는 건데···.”


오딘의 빙그레 웃었다.


“그놈보다 강한 기사는 세상에 없어.”



< 4 >



기사의 시대는 끝났다.


10년 전, 오딘과 나의 싸움을 끝으로 기사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알고 있었다.


기사들의 수준이 떨어졌을 것도 얼추 예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챙! 채앵-!


밤하늘로 볼품없는 불똥이 튀었다.


“이 새끼가···!”


믿고 싶지 않지만, 얼굴에 땀이 흥건한 거로 봐서는 이놈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찰나의 순간 올리버의 검이 직선으로 뻗어졌다.

기사의 검에 거추장스러운 기교는 독이라고들 하지만, 그게 이런 뜻은 아니었다.


올리버의 공격은 지나치게 뻔하고 가벼웠다.


검날을 가볍게 흘려내며 검 자루로 올리버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올리버가 고꾸라졌다.

아마 잠깐 동안은 머리가 빙빙 돌아 일어서지도 못 할 터였다.


“으윽···!”

“네놈이 진짜 상급 기사라고?”


내가 살던 시대와 비교하면 기껏해야 중급 기사정도 되는 실력이다.


몸이 얼만큼 돌아왔나 확인해보려 했더니···.

이런 수준이면 검을 섞는 것도 의미가 없다.


실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로즈를 바라봤다.

설마 올리버가 패배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듯,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이자가 네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가?”


로즈가 대답 대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문 건지 피가 맺힐 정도였다.


이해 못 할 반응도 아니다.

내가 방금 깨부순 건 올리버 따위가 아니라 로즈의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


“쯧.”


검을 휙 던지며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몇 발자국 먼저 걸었지만 로즈도, 올리버도 내 뒤를 따르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돌려 둘을 바라봤다.


“여기서 둘 다 죽을래?”


고요한 침묵 끝에 로즈가 먼저 발을 옮겼다.

올리버도 비틀거리며 검을 챙기더니 뒤를 따랐다.


둘을 데리고 향한 곳은 하인들이 쓰는 창고였다.

책상 서랍을 뒤져 펜과 잉크를 꺼냈다.


“지금부터 선택지를 주지.”

“무슨···.”

“내게 주군의 맹세를 해라.”

"미친놈!"

“나는 기사다! 세상에 두 명의 주군을 섬기는 기사는 없어!”


로즈와 올리버가 흥분하며 소리쳤다.

펜을 잉크에 담그며 둘을 바라봤다.


“쓸모가 있어서 선택지라도 주는 거야.”

“거절하면?”

“죽겠지.”


로즈가 고고하게 눈을 감았다.


“죽여라. 너 같은 놈을 주군으로 섬길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너 말고.”


로즈의 말을 뚝 잘랐다.

눈꺼풀 속에 숨어있던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펜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그레이스의 성씨를 지워버릴 거다.”

“뭐···, 뭐라고?!”

“혹시 저 머저리보다 강한 기사가 남아있나?”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로즈가 입을 다물었다.

올리버 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이, 상급 기사."

"···말 해라."

"너는 알고 있잖아. 내가 정말 그레이스 가문의 사람들을 도륙낼 수 있는지 없는지."


창고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고 있기를 몇 분, 올리버가 참담한 표정으로 로즈를 바라봤다.


“군주의 맹세를 하십시오, 아가씨.”

“기사님!”

"저놈 말이 맞습니다. 제가 옷깃도 스치지 못하는 강자를···, 다른 기사들이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로즈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올리버가 애틋하게 웃었다.


“저는 두 명의 주군을 섬길 수 없지만···, 아가씨는 기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주 꼴값들을 떨고 있네.

뒈지기 직전에도 로맨스라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기까지 한 놈이다.


찌푸리며 팔을 휙 저었다.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너희 둘은 묶음이야.”

“무슨 뜻이지?”

“같이 죽던지, 같이 살던지 하나만 골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지금부터 열을 세지."


의자를 끌어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열을 센 후에는 죽일 테니까 그리 알고.”

“자, 잠깐만···!”

“하나.”


로즈와 올리버가 다급히 눈빛을 교환했다.

입에서 뱉어내는 숫자가 단두대처럼 한 칸씩 위로 올라갔다.


“아홉.”


자리에서 일어나 올리버 쪽으로 다가갔다.

열을 세는 순간 목을 비틀어 죽인 다음 검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뒤로는···.


“맹세하지! 아니, 맹세하겠습니다!”


올리버가 바닥에 납작 머리를 조아렸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로즈를 바라봤다.

분노와 치욕에 몸을 떨던 로즈가 마찬가지로 바닥에 꿇어 앉았다.


“···맹세하겠습니다.”

“좋아.”


나는 가문을 사랑하는 로즈의 마음을 이용했고, 그런 로즈를 사랑하는 올리버의 마음 또한 이용했다.


기사라면 손가락질 받을 행동이지만,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의자로 돌아가 올리버에게 손짓했다.

잉크를 가득 머금은 펜을 꺼내 들었다.


“웃통 벗고 이리와. 올리버 너부터.”

“가, 갑자기 웃통은 왜···.”

“등에 내 이름을 새길 거다.”


더는 묻지 말라는 뜻으로 눈을 찌푸리자 올리버가 얌전히 웃통을 벗더니 다가와 등을 내밀었다.


쿡-


살갗에 펜을 찌르자 올리버의 몸이 움찔했다.

둘은 모르겠지만, 이건 바야크의 오랜 전통이었다.


내 몸에도 당연히 바야크 국왕의 이름이 있다.

지금이야 흉터들에 묻히고 지워지긴 했다만.

원래는 인두를 써야 하니 이것도 많이 봐준 거다.


펜으로 천천히 날개뼈에 이름을 새겼다.


‘Evan’


세상이 모르는 이름을 적었을 때, 올리버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Crimft’


그리고 세상이 아는 이름을 적자 올리버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보통은 등에 이름을 적으면 모르던데···.

엉뚱한 곳의 감각이 발달 된 놈인가?


올리버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쓴 게···.”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그 영감탱이는 잘 있나?”

“예···?”

“오딘 말이야. 벌써 늙어서 뒈졌으려나.”


곧 죽을 사람처럼 있던 로즈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바뀐 올리버의 눈빛과 오가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오···, 오딘 기사단장님을 아십니까?”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나오라는 뜻으로 궁둥이를 툭 찼다.


“얼굴만 보면 으르렁거리던 놈을 어떻게 잊어?”


올리버가 멍청히 나를 바라봤다.

완전히 믿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이만 들어가. 내일 다시 부르마.”


올리버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참는 듯했다.

올리버가 창고에서 나간 뒤 로즈에게 손짓했다.


“네 차례다.”


싫다고 억지라도 부릴 줄 알았던 로즈는, 외려 내가 당황할 정도로 쉽게 옷을 내렸다.


“···그레이스 가문은 치욕을 잊지 않습니다.”


새하얀 눈에 잉크를 뿌리듯 펜을 쿡- 찍었다.

가녀린 로즈의 등이 아픔보다 분노로 떨렸다.


하얀 등에 느긋하게 이름을 새겼다.


등불만 하나 달랑 켜놓은 공간.

왕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가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떨린다거나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기사가 되고 여자를 여자로 보아온 적이 없었고, 그건 로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숨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이윽고 모든 이름을 새긴 뒤 펜을 떼자 로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으로는 나를 경멸하고 있었지만, 목과 귀는 새빨개진 상태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 이름을 묻지 않는군.”

“궁금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새기는 동안 계속 깨물고 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터져 턱으로 흘렀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내가 죽어도 그레이스의 가문의 사람들은 그냥 두실 거라 믿겠습니다.”

“목이라도 멜 건가?.”


로즈가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로즈는 뼛속까지 귀족의 피가 흐르는 여자다.

오늘의 치욕을 견디기 힘들 터였고, 저대로 보내면 정말 목을 메달 지도 몰랐다.


그럼 그 후에는?


함멜이 죽은 마당에 로즈까지 죽는다면 그레이스 가문의 명맥은 이어지지 못한다.


그레이스 가문은 내가 손에 쥔 첫 번째 무기다.

여기서 잃게 된다면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채찍을 실컷 때렸다면 이젠 당근을 줘야겠지.


“공작은 어떤가?”


로즈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레이스 백작이 아닌 그레이스 공작.”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나는 본디 공작이었다.”


먼 옛날이긴 하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다.


로즈가 그제야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얼굴은 여전히 새빨갰고 눈빛은 경멸스럽다.


“이제야 내 이름이 궁금한가?”

“들어는 보겠습니다.”


픽 웃으며 종이에 글씨를 끄적였다.


“네 등에 새긴 이름이다.”

“에반···, 크림프트···.”


종이를 바라보던 로즈의 눈이 커다래졌다.


“크림프트라면 설마···.”

“내가 바야크의 대공(大公) 에반 크림프다.”

“거, 거짓말하지 마라!”


로즈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좀 놀랐다고 바로 혀가 짧아질 줄은 몰랐는데.


“크림프트는 죽었다! 기사단장이신 오딘님께서 분명 죽은 걸 확인했다고···!”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절벽에서 떨어졌으니까.”


로즈가 지그시 나를 노려봤다.


“붉은 갑옷은 어디 있지?”

“내가 떨어졌던 절벽에."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입구 쪽으로 향했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데려갈 생각이긴 했다.


백 마디 말보다 눈으로 확인하는 게 낫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곳엔 내가 쓰던 검이 있었으니까.


“내일 바로 출발하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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