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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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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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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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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



“가주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들라.”


남궁세가 가문의 본당이었다. 소멸된 검왕의 집무실을 임시로 대체한 작은 왕궁같은 거대한 전각 안. 드넓은 책상을 두고 앉은 남궁산이 있었다. 눈에서 새파란 광망을 흘리며 끊임없이 손을 놀리는 중이었는데, 그 손에 들린 것은 검이 아닌 붓이었다.


이윽고 바깥에서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백색 장포를 걸친 소년이 천천히 걸어들어와 포권을 취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낭랑한 목소리. 인사를 올린 남궁유진은 잠시 예를 취하고는 슬며시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검왕의 모습. 자신에게 잠시 눈길도 주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 그의 곁에 쌓인 서신과 서류의 양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흘리는 기세는 무거웠다. 사방을 타고 짙게 깔린 제왕검형의 기파. 비단 이 전각뿐만 아니라 천주산과 그 일대 너머까지 뻗쳐있는 막대한 위력의 무공이다. 그의 등 뒤를 따라서는 언제나 허리에 차고 다니던 낡은 검이 둥실 떠있었다. 허공에 검을 걸어둔 것 마냥.


‘저게 가주님의 진짜 힘.’


남궁유진이 침을 삼켰다. 자신의 부친을 대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될 정도였다.


그만큼 검왕의 기운이 강렬했다. 그로써도 이런 힘을 바깥으로 내보이고 있는 검왕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이윽고 검왕의 손이 잠시 멈춰섰다. 느릿하게 들어올려진 검왕의 시선이 남궁유진을 향해 떨어졌다.


“그 아이는 깨어났느냐.”

“아직입니다.”


백연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사흘이 흐른 참이었다. 검왕이 도착하기 직전, 스스로 상황을 마무리 지은 곤륜의 소년은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축기량이 원체 많지 않았던 몸이라고 했다. 그만큼 무리하게 끌어 썼다고.


남궁유진은 그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 화려한 무공을 쓰던 백연의 축기량이, 남궁유진 자신보다도 훨씬 적다니.


“잠든 김에 완전히 회복하려는 모양이구나.”

“예?”

“놈의 무공이 그렇다. 스스로 몸을 짜맞추는 신공이다. 심법에 실린 바람이 짙더니, 천년 무학의 뿌리를 다시금 엮어낸 것인지......”

“소자의 성취가 미진한 탓에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검왕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옅은 미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다시 일어나면 더 강해져 있을 것이란 말이다. 단순히 잠에 빠진것이 아니니.”


남궁유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왕이 그리 말한다면, 그게 맞는 것이다.


“그래. 그 일은 되었고. 내 너를 부른 것은 몇가지 일이 있어서이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허공을 응시하던 검왕이 말했다. 허허로이 말을 내뱉던 초월자의 언행이 아니었다. 검왕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하명하십시오.”

“네 시중을 들 이들이 남아 있지. 의복을 준비하고 연회를 준비하라 일러라. 규모는 크지 않게. 허나 부족함은 없어야 하느니라.”

“......무슨 연회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북경의 관리가 내려온다. 아마 어사(沙史)가 올것이니라.”


남궁유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가 당황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건만, 그만큼 깜짝 놀란 것이다.


“황실의 감찰사가 말입니까?”

“그래. 이번 일에 회녕부 지부대인이 엮였다. 단순히 무림인들만 죽어나간 것이라면 몰라도 관리가 몰살당한 사건이니 황실 측에서도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런......사흘 전에 일어난 일이 벌써 북경 황실의 귀에 들어갔다 말입니까.”

“그것이 황실이다. 새겨두거라. 해이해 보이나 철저하고,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세상을 판 삼아 대국을 짜는 것이 저 옥좌 위에 앉은 천하의 주인이니라.”


한마디씩 힘주어 말하는 검왕의 시선이 단단했다. 남궁유진을 응시하는 눈빛이 무거웠다.


“네 몸가짐도 하나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입을 의복을 특히 신경써서 준비하라. 수수하나 고귀해야 한다. 그 외양이 모여든 모든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도록. 네가 주인공이다.”

“외람되오나, 되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을 듣던 남궁유진이 입을 열었다. 검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유진이 말을 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말씀대로라 하면, 연회에서 가장 돋보여야 할 것은 소자가 아니라 가주님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사마외도가 날뛰는 상황에서 가주님께서 건재함을 만방에 과시해야 민생의 안정이 찾아오지 않을련지요.”


순수한 의문이 담긴 물음. 검왕은 잠시 자신의 삼남을 내려다보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질은 있으나 아직 부족하구나. 네 말은 맞으나 틀렸다.”


이윽고 눈을 뜬 그가 손을 뻗었다. 그의 검이 허공을 훅 날아와 손에 잡혔다.


“네 관점은 무인의 그것이다. 이제 바꿔야 할 것이다.”

“예?”

“고고히 정도를 걷는 구파와, 세가는 다르다. 현실에 엮여 있다는 점이 그러하지. 구파의 도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속세를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아니다. 우리의 관할 아래 어떤 문제가 터져나온 이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터.”


중얼거리는 어조가 담담했다. 남궁유진에게 떨어지는 시선에 담긴 감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황실은 이번 일을 누군가 책임지는 것을 원할 것이다. 안휘성의 포정사(布正使)에게도 책임을 물을테지만 그것으론 멈추지 않을 테지.”

“그 말씀은......”


남궁유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검왕을 올려다보았다. 전각의 벽면을 타고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이 남궁산의 얼굴에 진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늘에 가려진 얼굴 아래 입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다. 내가 가주의 위(位)에서 물러날 때가 왔구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한순간 남궁유진이 무례를 잊고 한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설 정도로.


천하 정파의 꼭대기에 자리한 다섯 검수. 그 사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검왕이다. 그 일신의 무위는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압도적인 힘. 단순히 세가의 가주로만 볼 인물이 아니다. 그 자체가 천주(天柱)이거늘.


“말도 안됩니다!”


남궁유진이 외쳤다.


“가주님께서 물러나신다니요. 이건......”

“이건?”

“안됩니다. 가주님은 남궁의 모든 것입니다. 가문의 일검이자 동왕(東王)이시지요. 이번 일은 간계에 당해 피해를 본 것 뿐인데 어째서 가주님께서 책임을 지신다 말입니까. 가주님은, 가주님은......”


남궁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말끝에 서린 물기가 진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검왕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이번 일.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했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주님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제가 지겠습니다. 가주님의 등을 바라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고 많은데. 아니, 다른 이들을 이야기 할 것도 없습니다.”


떨리는 시선이 남궁산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소년의 눈에 그렁그렁 차오른 눈물이 반짝였다.


“제가, 제게 필요합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검도, 사람을 대하는 법도, 아버님이 아니면......”

“유진아.”


턱.


부드러운 손길이 소년의 어깨를 짚었다. 커다란 손을 따라 흐르는 기파가 흩어지며 허공을 누볐다. 산뜻 움직인 몸짓에 일어난 바람이 남궁유진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너를 믿고 있느니라.”

“저는 너무 부족합니다!”

“나도 부족하다.”


한순간 스치는 쓸쓸한 목소리. 말투에서 언뜻 감정이 드러났다. 찰나였지만 휘몰아치는 감정을 느낀 남궁유진이 눈물 너머로 남궁산을 응시했다.


“부족......하다니요.”

“그러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느냐. 내 부족함으로 아이 둘을 잃었고, 죄를 지었다. 그 이전에도 완벽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끊임없이 기대에 부응하고 짐을 짊어지려 노력할 뿐.”


햇살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남궁산의 얼굴 표정. 그러나 그 아래 드러난 강대한 무인의 신형은 왠지 전처럼 굳건해 보이지 않았다. 살풋 처진 어깨를 시야에 담으며 남궁유진은 문득 생각했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듯 했던 자신의 부친이, 조금은 지쳐 보인다고.


“......저는 아직 어립니다. 장로들께서 반발하실 것입니다. 더해 세가간의 알력 다툼에서도 발언권이 작을테고. 무공 실력도.”


남궁유진이 한풀 물기를 걷어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궁의 이름은 전처럼 드높지 못하겠지요. 제 손에서 몰락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호시탐탐 이곳을 노릴 이는 많은 상황에. 저는 백연님처럼 뛰어나지 못합니다. 그럴 그릇이 못되는 것을.”

“그 아이가 뛰어나 보이더냐.”


되묻는 남궁산의 물음. 남궁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무공부터 일을 다루는 솜씨까지.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글쎄. 내 보기에는 그 아이와 네가 크게 다를 바가 없구나.”

“......예?”


남궁산의 입꼬리가 미미한 호를 그렸다.


“고민하고, 자신에게 묻고, 답을 찾으려 애쓴다. 항상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의심하지. 그럼에도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겉으로 보아 완벽해 보이더냐. 그런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궁산이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손에 잡힌 그의 백색 장포가 스륵 흘러내렸다.


“그 아이는, 곤륜이니.”


가벼운 손길이 남궁유진의 어깨를 덮었다. 한차례 펄럭인 가주의 장포가 소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크기가 지나치게 커 바닥에 끌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의 주인이 남궁유진이었다는 듯이.


“너는 남궁이다.”


부드러이 그를 감싸안는 장포. 포근한 감각에 남궁유진이 손끝으로 천을 매만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기가 옅어진 목소리는 전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일전, 당가의 소가주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남궁산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남궁유진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형님들의 일을 눈치채고 난 이후였지요. 제 목에 달린 것은 제 하나만의 목숨이 아니라고. 소가주가 될 각오가 되었냐고.”

“당돌한 놈이로고.”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 답을 정했었군요.”


남궁유진이 약간 붉어진 시선으로 검왕을 올려다보았다. 어깨를 덮은 장포의 소매를 꼭 쥔채였다.


“제가, 남궁이 되겠습니다.”


전각 안을 가리던 햇빛이 서서히 옮겨갔다. 남궁산의 얼굴이 다시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 속에 담긴 여러가지 감정이 복잡했다. 미안함인지, 기특함인지.


“좋은 답이다. 네 자격이 충분하구나.”

“......”

“그럼 이 아비도 남은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지.”


중얼거린 검왕이 검을 들어올렸다. 장포도 걸치지 않은 단순한 무복 차림. 손끝에 걸린 낡은 검을 치켜드는 모습에 남궁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딜 가시려 그러십니까?”

“내 아들의 앞길이다. 처음 가주가 되는 길 정도는 평탄하게 닦아주어야지. 장로와 몇몇 가솔들이 반발할지 모른다 하니.”


초로의 검객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었다. 여태까지의 진중하던 미소보다 한결 가벼운 모습. 손짓으로 검을 뽑아낸 그가 말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와야겠구나.”



※※※



그로부터 이틀 뒤.


백연이 눈을 떴다. 남궁세가의 전각 안, 그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방 안에서였다.


가장 먼저 백연이 깨어난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의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당소하였다.


“......넌 왜 여기서 졸고 있냐?”

“망할놈의 자식이. 내가 널 치료한답시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러니까 네가 왜?”


당소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굴을 쓸며 억지로 눈을 치켜뜬 그가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백연. 무려 닷새간 푹 자고 일어난 녀석의 표정이 쓸데없이 맑았다.


“누구를 믿어야 할 줄 알고 너를 맡기나. 만금장의 침입이 그리 정교했는데. 의원으로 변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아하하. 그랬던거야? 고마워.”

“덕분에 그간 한숨도 못잤다. 그래서......흐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는 당소하의 모습에 백연이 생긋 웃었다.


“나중에 뭐라도 보답할게. 덕분에 빨리 일어났다.”

“......뭐, 그런걸 바라는건 아니고. 몸만 괜찮으면 됐다. 그럼 난 이만 눈좀 붙이지.”


그렇게 앉은 자세로 즉시 잠에 빠져든 당소하. 녀석을 바닥에 눕혀놓은 백연은 그대로 창가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보이는 남궁세가의 장원들 사이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인부들이 오가며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한창 부산스러웠다. 며칠 전 피와 불꽃으로 가득했던 전장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


그 풍경을 바라보며 백연이 손을 뻗었다.


‘맑아.’


뻗은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친다. 느껴지는 감각이 훨씬 예리해져 있었는데, 그 날카롭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딱히 기감을 펼쳐두고 있는 것도 아니거늘.


‘몸 상태가.’


누워있는 동안 많은 꿈을 꾸었다. 내용은 거의 기억나질 않는데, 깨어나고 나니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볍다.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잠시 스스로를 들여다본 것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몸을 구성하는 근맥의 강도. 일전과 비교해도 확연히 단단해져 있었다. 신체가 강해진 것이다.


동시에 축기량도 이상했다.


하단전에 자리잡은 바람과 불꽃, 그리고 물. 전부 그 형태가 더 커진채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릇 자체가 커진것만 같은 느낌. 생소한 감각에 백연은 신기한 기분으로 스스로의 몸을 관조했다.


‘운연동공 바람. 몸을 올곧게 닦아주고 있어.’


그가 의식하지 않아도 세맥을 타고 흐르는 바람결이 있었다. 잠에 빠져든 이후에도 끊임없이 움직인 모양이다. 공능이 상시 미약하게 운기를 하는것과 다를바가 없는데, 일련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자극받은 것과 더불어 몸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스스로의 몸을 살피며 무공을 분석하던 백연.


단휘가 어디선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약 반시진 뒤였다. 예상외로 당소하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형. 깨어난 백연을 보고 머리를 한번 쓸어줄 뿐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일어나겠거니 했지.”

“......맞는 말이긴 한데.”

“하핫.”


웃은 단휘가 백연의 옆에 걸터앉았다. 빠르게 이야기가 오갔다. 지난 며칠간 벌어진 일과, 남궁세가의 움직임. 그리고 검왕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이야기까지.


“남궁의 가주가 바뀌는건가.”

“아직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연회가 열리고 나면 전 무림에 공표되겠지.”

“시일은 언제래?”


단휘가 주변을 슥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감찰사가 내려오면. 아마 한달은 족히 걸릴거다. 남궁세가로 바로 오는게 아니라 하던데. 안휘성 포정사를 먼저 보고 올 것이라고. 그러고도 한동안 주변을 돌며 정보를 모을거라 들었어.”

“황실의 관리라.”

“이런 흉흉한 세태에 그리 움직여도 되는 건지 모를 정도인데.”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리는 단휘. 백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특히 감찰사는.”

“검왕께선 얼추 늦가을을 예상하시던데. 첫눈이 오기 전에는 올거라고.”

“연회 구경은 못하겠네.”


이곳에 한달이나 더 머무를 생각은 없었다. 더해 감찰사를 만나는 것은 즐겁지 못한 일이다. 이번 일로 인해 크게 바뀔 안휘의 정세에만 귀를 열어두고 있으면 될 일. 연회가 열리고 며칠 사이에 이곳의 소식은 전 무림에 퍼질 것이다.


“그나저나 검왕과 이야기를 꽤 나눴나보네?”

“네가 잠든 사이 세번. 이것저것 할 이야기가 있었어. 처음은 네가 쓰러진 직후에 일처리 때문에 그랬고. 한번은 장부와 만금장 때문에. 그리고 한번은......”


단휘가 검을 매만졌다. 그가 백연을 힐끗 쳐다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 하시던데.”

“......응?”


이번에야말로 백연의 반응이 늦었다. 눈을 깜빡인 백연이 그의 사형을 쳐다보았다.


“저번 토벌. 무공을 내거셨잖아. 내 공적을 이유로 내게 무공을 주겠다 하시더라.”

“아, 채주 격살이었나. 충분한 전공이긴 하네. 그래서 뭘 배웠어?”

“안 배웠다.”


백연이 당황스러운 기분에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곤 단휘가 웃었다.


“왜?”


왜 배우지 않았냐는 물음. 다른 이도 아니고 검왕의 무공이다. 가주에서 물러난다 해도 그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무인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무공 한자락을 얻으려고 줄을 설 이가 여기서부터 회녕까지 길게 늘어설 것인데.


“지금 익히고 있는 것에만 충실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단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검왕의 무공을 배운다고 내가 검왕이 되는건 아니지. 나는 곤륜의 검으로 강해지고 싶은데.”

“아하하. 그래. 사형의 선택이니까.”


단휘의 결정에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무인은 자신이 믿는 길을 걸어나가야 한다. 그가 곤륜의 무학만으로 강해지고자 하면 그것이 그에게는 옳은 길이다.


한편으로는 왠지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그 자신이 엮어낸 무학이 사형의 인정을 받은 것만 같아서.


“음,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때 쯤이었다. 단휘가 약간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만금장 지부에서 몇가지 발견한게 있어.”

“장부? 해석하고 있다면서.”

“장부 내용도 네가 봐야할게 몇가지 있긴 한데, 그걸 말하는건 아니야. 그건 해석이 전부 끝나면 봐도 괜찮고. 내가 말하는 건 다른거.”


품을 뒤적거린 단휘가 종이뭉치 몇장을 빼들었다. 구겨진 종이의 끝자락은 억지로 잡아 뜯은 듯이 찢어져 있었고, 위에 새겨진 글씨는 조금 번져 있었다.


“그때 거기에서 금원방과 만금장의 거래 장부 말고도 하나의 일지를 발견했어.”

“......일지?”


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복잡했다.


“제목은 청해일지.”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청해. 이런 곳에서 들을 줄 몰랐던 이름이다. 물론 만금장이 청해에서 활동하니 저런 제목의 일지가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일지로 만들어 보관까지 해놓았다니.


“장부랑 같이?”

“응. 그런데 너무 커서 가지고 나오지는 못했고, 몇장을 뜯어왔는데.”


단휘가 손을 내밀었다. 찢어진 종이를 건네받은 백연이 그것을 펼쳤다. 열댓장의 종이뭉치 위로는 알 수 없는 글자들과, 그 아래 단휘의 필체로 해석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말 그대로 일지......인가?”


적혀있는 내용이 대충 훑어보니 그랬다. 군데군데 뜯겨나온 내용이라 뚝뚝 끊어지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이것이 일련의 시간 순서에 따라 한 사람이 기록한 내용인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치 일기처럼.


“첫장을 봐.”


단휘의 말에 종이를 촤라락 넘긴 백연. 맨 앞장을 들었다. 가장 뜯겨나간 면적이 커 글자 몇개밖에 알아볼 수 없는 앞장. 그러나 그것을 본 순간 백연의 표정이 변했다.


“보여?”

“......뭐야.”


백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눈에 들어온 선명한 글자. 단휘의 정갈한 필체도 여기에 와서는 끄트머리가 길쭉하게 흔들려 있었다. 길게 늘어진 글자의 끝자락이 마치 칼로 베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왜 일지에 이런게 써져 있어.”


중얼거린 백연.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첫장의 글자에 고정되었다. 길다란 문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교도 아닌 만금장의 일지에서 등장한 것이 무슨 의미인가.


“천마(天魔).”


백연이 중얼거렸다. 검은 먹물로 휘갈겨진 글씨가 더없이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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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네가 만든 마을(7) +7 23.09.27 5,134 108 20쪽
96 네가 만든 마을(6) +10 23.09.25 5,203 114 22쪽
95 네가 만든 마을(5) +8 23.09.22 5,292 107 19쪽
94 네가 만든 마을(4) +8 23.09.20 5,283 107 20쪽
93 네가 만든 마을(3) +7 23.09.18 5,520 105 24쪽
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638 113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892 106 18쪽
90 신강(4) +6 23.09.11 6,082 114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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