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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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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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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



“이 밤에 대체 무슨!”


거리를 내달리는 발걸음이 재빨랐다. 천하 개방의 걸음. 삽시간에 대로를 가로지르는데, 그 신형이 가히 직전 달려간 무인들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았다.


개방도 종무득. 직전 백연의 질주에 나뒹굴었던 거지였다.


그는 경공 선풍신법(旋風身法)의 성취가 일신의 무공에 비해 드높았다. 그 발걸음이 빨라 금번 용봉지회가 열리는 회녕을 오가며 소식을 전하고 있었던 이다.


그렇잖아도 소식이 빠르게 오가는 이곳 회녕에서 나름 재미를 보고 있던 차. 밤중에 벌어진 사건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이것은 엄청난 정보라고.


“저기, 저기인가?”


종무득이 내달리며 커다란 전각에 시선을 던졌다. 직전 그곳의 문을 부수고 들어간 거대한 덩치의 무인과, 뒤따라 몸을 날리는 무인들이 있었다. 비록 찰나에 스쳐 지나간 이들이지만 누구인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장 앞서 달리던 이는 하오문 금원방의 금원방주일 터. 특징적인 외양은 한번 정보를 접한 이라면 잊어버리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런 이가 저리 급히 내달리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놀랄 일이건만, 뒤따르는 이들의 면면이 더 놀라웠다.


“악가의 뇌룡과 팽가의 도룡.”


찰나 스친 흑발의 여인. 길다란 창을 꼬나쥐고 안광을 번뜩이는 모습이 강렬했다. 거대한 도를 들고 뒤따르는 팽악 또한 특징적이었다.


그리고.


“불꽃이라 하면. 암화인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이 뒤집어진 금원방주가 갑자기 권격을 날리는 순간 나타난 무인. 아직 어린 소년에 가까운 검객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화려한 붉은 불꽃을 그 눈으로 똑똑히 본 참이었다. 작금 무림에 그러한 무공을 쓰는 이는 한명밖에 들어본 적이 없거늘.


이들이 모두 엮여들었다. 심지어 그들이 달려간 저 방향의 전각. 관아의 건물이다. 회녕부 아래 관리되는 건물을 자기 집인양 부수고 들어간 금원방주와 뒤따르는 무인들.


“이건 특보다.”


종무득이 손을 떨며 달렸다.


평시라면 관아 근처로는 침도 뱉지 않았을 그이건만, 지금은 달랐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저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어쩌면 용두방주를 독대할 만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렇게 달려선 그가 전각 근처의 나무 위로 재빠르게 올라갔다. 마침 안에서 연이어 터져 나오는 강대한 기파가 피부로 느껴졌다.


소름이 돋는 수준의 강렬한 내공 경파가 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멀리 떨어진 이 자리에서도 느껴질 정도.


숨을 가다듬으며 눈에 손을 가져간 그가 내공을 있는대로 끌어올렸다. 종무득의 눈이 번뜩이며 안법 안광을 발하기 시작했다.


“허어, 이게 무슨 일인지.”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나뭇가지 위에서 전각 안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품에서 낡아빠진 종이와 목탄을 꺼내들어 서신을 기록할 준비를 마친채였다.


그 시야 너머. 불꽃이 터져나왔다.


쩌엉!


귀청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수놓는 불꽃의 검식. 화려한 빛이 한순간 눈을 얼얼하게 만들며 대기에 수십의 검로를 그려낸다. 길다란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명멸하는 자색 안광을 뚝뚝 흘리는 소년의 모습이 종무득의 눈에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괴이. 괴이다.”


일련의 검식을 금원방주에게 쏟아내곤 상대의 공격을 아슬하게 회피한다. 한수 앞을 보고 싸우는 것마냥 유려한 움직임. 종무득의 낮은 안법 성취로는 그 움직임이 전부 보이지 않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저 소년의 이름이, 향후 강호 무림의 후기지수들 가장 위에 우뚝 서리라는 것을.


그 곁을 따라 움직이는 뇌룡과 도룡의 무위도 과연 일절이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세명의 합격. 그 가운데에서 모조리 받아치고 반격하는 금원방주의 모습이 강렬했다. 휘두르는 주먹 속에서 광기가 엿보였는데, 그 기세가 섬짓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을 보던 종무득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헌데 금원방주와 저들이 왜 싸우고 있는 것이지?”


사파 하오문 소속의 금원방 금원방주. 그 성정이 종잡을 수 없다 알려져 있으나 아무 이유없이 정파 무인들과 분쟁할 이는 아니다. 그런 이가 칠룡 중 둘, 그리고 암화와 저리 생사결을 펼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 한데.”


중얼거린 그가 몸을 숙이곤 빠르게 종이에 글을 적어내려갔다.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은 의문을 품지말고, 정보를 취합해 즉시 회녕 총타주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인시 초(寅時:새벽3시), 회녕부 관아에서 금원방주를 위시한 다섯의 무인이 격돌. 금원방주를 적대하는 네 무인중 셋은 각기 뇌룡, 도룡, 암화로 추정. 나머지 한 무인은 관아에 진입 직후 사라짐. 전투의 원인은 불명(不明)......”

“아니지, 아니지. 원인은 간단하오. 내 알려드릴까?”


멈칫.


빠르게 글을 적어가던 종무득의 손이 굳어들었다. 곁에서 들린 낮선 목소리. 늙수그레한 음성이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지금 이곳에서 들릴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그가 걸터앉은 나뭇가지 끝자락. 휘어진 가지 위로 웅크리고 앉은 노인이 있었다. 허허로운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데 그 자세가 더없이 여유로웠다.


“하오문의 내분. 그 속에서 금원방주가 도박수를 던졌소. 딴에는 많은 것을 노리고 움직였을 터인데. 암야서고의 문지기를 꺾을 수 있는 비책을 얻어내고자 한다더군.”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 주제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린 것이지.”

“......암휘군. 성화방주를 말하는 거요?”

“그렇소. 길게는 하오문주의 자리까지 노리는 듯 보였는데. 그 속내는 정확히 알려준 적이 없으니 말이오.”


침을 꿀꺽 삼킨 종무득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눈앞의 노인. 앉아있는 자세가 고강했다. 지금 저 나뭇가지의 끝자락은 분명 사람의 무게를 견딜 정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노인이 웅크리고 앉은 가지는 살풋 아래로 휘어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아닌 가벼운 새 한마리가 앉은 것 마냥.


“그러면 칠룡과 암화가 금원방주와 저리 싸우고 있는 이유는?”

“그야 금원방주가 만금장과 손잡고 용봉지회에 참가한 모든 무인들을 죽이려 들었으니 그렇지 않겠소. 나아가 검왕의 목숨까지 노렸지.”

“그 무슨......”


노인이 수염을 쓸며 전각 내의 장원에 시선을 던졌다. 그가 시선에 피어나는 불꽃을 가득 담으며 입맛을 다셨다.


“완성되고 있구려. 보시오. 저 무위와 그릇을. 아름답지 않소?”

“만금장과 손을 잡았다? 그 무슨 소리요. 용봉지회의 무인들을 노렸다니......!”

“한마디로 금원방주는 우리 만금장의 손에 이용당했단 말이오. 대외적으로 만금장은 이 천주산 근처에도 온 적이 없소이다. 저들의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종무득이 걸터앉아 있던 나뭇가지가 살풋 흔들렸다.


찰나 길쭉하게 늘어지는 종무득의 신형. 선풍신법의 기파가 줄기줄기 뻗어나가며 종무득이 도주하려는 순간.


“어이쿠. 성질이 급한 개방도이시오.”


푸확!


허공을 따라 핏물이 점점이 날아올랐다. 소리없이 죽 그어진 기파. 정확히 노인이 앉은 나뭇가지 밑동부터 그 아래 굵은 나무의 몸통까지 일직선으로 그어진 자국이 새겨졌다.


끄트머리가 잘려나간 나뭇잎이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노인이 품에 안은 검을 매만지며 장원 안을 응시했다.


“흐음. 헌데 언제쯤 터트려야 할지 모르겠구려. 지금은 전부 휘말릴테니......아무래도 반각(半刻:7~8분) 후가 좋지 않겠소?”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나무 위에서 노인이 혼자 킬킬 웃음을 흘렸다.


“그때쯤 되면 저 금원방주도 기력을 소진했을 듯 보이는데. 확실히 보낼 수 있겠소이다.”


뇌까린 노인이 퍽이나 기분 좋은듯 휘파람을 길게 뽑았다. 그 아래 고요한 바람이 스쳤다. 나무 밑동을 따라 나뒹구는 종무득의 시체가 달빛 아래 선명했다. 반으로 갈라진 시체의 몸을 따라서 수백에 달하는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검으로 된 폭풍에 난도질 당한 듯이.



※※※



일그러진 혈향이 코를 찔렀다. 짙은 농도와 핏물의 색으로 보아 그려진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말인즉슨.


“이곳으로 올걸 알고......!”


단휘가 침을 삼켰다. 천장에 가득 매달린 시체는 여러 참혹한 광경을 자주 본 그로써도 차마 눈에 담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제대로 붙어있는 것이 없었다. 시체들의 팔 다리는 물론이요, 머리와 몸통도 사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더욱 끔찍한 것은 그것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묶어 매달아 놓은 것. 대체 누가 어떤 정신으로 행한 일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침착하자.”


후우.


심호흡한 단휘가 천천히 천장을 훑었다. 시야에 보이는 핏물로 그어진 선. 복잡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그 위에 새겨진 것은 글자였다. 그로써도 알아보기 어려운 고문자.


거기에 더해 늘어진 시체들은 굵은 밧줄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위를 따라서 붙어있는 종이 조각들이 있었다.


“......부적?”


단휘가 중얼거렸다.


술법무공에 자주 사용되는 괴황지. 새빨간 글씨가 새겨진 괴황지가 줄마다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젠장.”


단휘가 이를 갈았다.


이렇게 정교하게 준비해놓은 것은 애초부터 파놓은 함정이라는 소리. 만금장은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오는 이들을 위한 함정을.


그들을 노린 것일까.


‘아니.’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금원방주였다. 아까 전 대화를 들은 바, 만금장은 금원방주를 일부러 이곳으로 보냈다. 그렇다면 이곳의 함정도 금원방주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을 터.


단휘 자신이 술법무공에 깊은 조예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일 서안에서 성화방주 하령과 만났을때 그가 흘러가듯 뱉은 이야기는 귀담아 들은적이 있다.


-술법무공의 위력은 술자의 수준과 능력에도 영향을 받지만, 그 재료와 준비, 설계에도 크게 영향을 받아.

-정확히 이야기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준비는 자신만의 환경과 영역을 구축하는 것, 설계는 진법을 응용할때 그 구조와 내용이 얼마나 정교한가. 그리고 재료는......


그 자체로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들. 괴황지가 그러했다. 자체로써 술법무공의 씨앗이 될 힘을 품고 있는 종이. 그리고 그것 외에도 귀한 철이나 보석, 법보 등등 수많은 것이 있다 했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하는 재료 중 하나는 단연코.


“인신공양(人身供犧).”


이만한 수의 사람을 바쳤다. 언뜻 보이는 팔다리의 개수만 세어도 십여명이 넘는 인원. 심지어 이들이 다가 아닌듯 했다. 천장에 이어진 핏물이 방 안에서 끝나지 않고 밖으로 이어져 있다.


가히 수십의 사람을 갈아 만든 거대한 술법진이었다. 그 위력은 아마 금원방주를 끝장내기 위한 정도의 수준.


‘당장 나가야 한다.’


여전히 바깥에서 연이어 들려오는 충돌 소리가 요란했다. 단휘는 황급히 달려가 뽑아든 금원방의 장부를 품에 안았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때 단휘의 시선이 옆으로 떨어졌다.


“......젠장할.”


여전히 자리위에 놓여있는 청해일지. 어떤 내용의 장부인지 알기 어려웠다. 아니, 일지라 쓰여 있으니 무언가 사건의 기록일터.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저것은 분명 그의 아버지가 관리한 물건이다.


그 사실이 단휘의 걸음을 못 박힌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저것마저 들고 나갈 수가 없었다. 금원방의 장부 하나도 엄청난 두께와 무게를 자랑했다. 한손에 검을 들고 장부를 끼고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청해일지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저걸 들고 나가면 말 그대로 손이 없다. 빠르게 탈출하는 것은 커녕 내공을 끌어다 일지를 드는데 힘을 써야할 터.


그 와중에 금원방주와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챙길 물건이 아닌 것이다.


“못해먹겠네.”


단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찰나 눈을 질끈 감은 그가 이윽고 책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금원방의 장부를 내려놓은 단휘가 그대로 청해일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공 기파를 끌어올리면서였다.



※※※



적양공과 현음공의 조화.


검왕과의 대화 이후 끌어올리는 기운의 균형이 달라진 참이다. 적양공의 힘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현음공의 힘이 올라왔다. 체내에 담긴 두 기운이 비슷한 양으로 서로를 억누르는데, 찰나 기운의 전환이 용이해졌다.


지금 이 순간 불꽃이 매달려 있던 검끝이, 반바퀴 돌며 권격을 막는 순간 수기를 담고 휘몰아칠 만큼.


‘무거워.’


받아내는 권격의 무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검. 여휘검에 매달린 기운이 무거웠다. 현음공의 수기가 흐르며 검격 방향을 다르게 바꾼다.


쾌, 환, 예의 묘리를 담은 적화검류와는 정반대. 단순히 현음공을 끌어올리는 것 만으로 검의 기세가 뒤바뀐다. 그 스스로가 최적의 검격 묘리를 찾으려 매 순간 다시 감각을 정립하고 있기 때문일까.


‘부드럽고.’


후욱.


검이 비틀렸다. 분절되듯 사방을 격하며 춤추던 적화검류와 달리 기본적으로 검격의 형태가 끊어지지 않는다. 좌중간에서 우상단까지. 검식이 항상 곡선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일순 무당의 면면부절(綿綿不絕)이 생각날 정도로.


그러면서도 하나 다른점이 있었다.


쩌엉!


금원방주의 권격과 맞서는 검끝에서 굉음이 터져나왔다. 힘을 흘리면서 동시에 공격하는 것. 일격이 강맹했다.


중, 유, 강. 기본 형식이 수세를 취하나 일격을 도외시 하지 않는다. 찰나에 상대를 노리고 들어오는 묵직한 검격은 어찌 보면 팽가의 도법이 엿보이는 면모도 있었다.


면면부절 이어져 상대를 압도적인 내공의 양으로 찍어누르는 무당의 검법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자신의 축기량이 그렇지 못했기에.


한순간 그의 검격이 금원방주의 주먹을 흘리고, 방주의 뒤편에서 불쑥 나타난 악예린이 창을 휘두르는 순간.


콰아앙!


금원방주가 그대로 진각을 찍어내렸다. 찰나 흩어지는 세 무인들. 합격을 버티지 못하고 잠시 호흡을 버는 동작이다. 알고 있음에도 정면으로 맞으면 위험하다. 그랬기에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빠르게 보법을 밟으며 거리를 벌린 세 무인이 금원방주와 대치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습니까?”

“후우. 괜찮다. 네놈이나 신경써라.”


힐끗 팽악을 응시하자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허리께를 붙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당하게 위를 향해 치켜들고 있던 도의 끄트머리가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지쳤군.’


내공을 미친듯이 끌어쓴 참이다. 만전이어도 버거울텐데, 일전 부상을 입고 온 팽악이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더해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가 적지 않았다. 언제 다쳤는지 왼손 손가락의 한마디가 날아가 있는 모습.


“아직 할만해요.”


그의 왼편에 선 악예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외양이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그녀의 흑색창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장포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축 늘어진 오른편 어깻죽지를 따라서는 핏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연이은 싸움 속에서 어깨에 권격을 맞은것이다. 아마 바스라졌겠지. 그녀 정도의 무인이 아니었다면 팔 한짝이 통째로 증발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백연 자신도 마찬가지다. 이미 기운을 막대하게 끌어다 쓴 상태. 온몸에 탈진이 왔다. 팔다리가 무거웠다. 축축 늘어지는 것이 앞으로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을지 알기 어려웠다. 지금 당장도 아찔하게 눈앞이 어지러워 온다.


그때였다.


“백연!”


외치는 커다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틀어박혔다. 그와 동시에 백연의 기감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시야 끄트머리 저편. 전각 장원 바깥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다.


찰나 그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저 멀리 흐릿한 연기같은 잔영이 눈을 스치고.


“여기 함정이야! 당장......!”


일순 보인 잔영을 쫓기 위해 즉시 안법을 풀며 기감을 넓게 펼친 백연의 감각도에 무언가가 잡혀들었다.


드넓은 장원을 둘러싼 전각들. 그 안을 따라 일제히 새겨져 있는 선들이 전부 느껴졌다. 그때까지 금원방주를 상대하기 위해 기감을 전부 눈앞에 집중하고 있어 눈치채지 못했던 기운. 전각의 위아래를 따라 그려진 선에 담긴 내공 흐름이 짙었다.


“함정이라......?”


금원방주가 뇌까리는 목소리가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백연의 사고가 가속했다. 한순간 세상의 시간이 분절되며 쪼개졌다. 간극에 진입하며 확장된 사고와 기감. 그 너머에서 피어나는 파문이 느껴졌다.


전각 내에 새겨진 선들을 따라 일제히 타오르는 강렬한 기파. 저 끝에서부터 들불이 밀려오듯 번져온다.


‘술법진. 폭(爆)이다.’


그 속에서 백연은 암야서고의 천장에 새겨져 있던것과 비슷한 류의 진법 형태를 읽어냈다. 쉬이 잊어버리지 않는 그의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기억.


이곳이 곧 터진다는 사실을 알아챔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움직였다.


“예린!”


찰나 옆을 돌아보자 그를 응시하고 있는 악예린이 보였다. 그가 간극에 진입한 직후 마찬가지로 따라 들어온 것이다.


“팽악을......!”


그 말을 듣는 즉시 악예린이 움직였다. 동시에 백연은 도약했다. 단휘가 있는 방향이었다. 팔다리에 휘감은 기파가 일제히 터져나가며 그의 몸을 가속시켰다. 세맥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머리 한켠으로 흘리며 단휘의 앞에 도달한 백연.


사형의 품에 안긴 장부와 손에 쥐고 있는 종이뭉치가 보였다.


자연스레 단휘를 끌어안은 백연이 그대로 장원을 벗어나려 보법을 펼치려는 순간.


“어림없다!”


후욱.


그의 뒤편에서 짓쳐오는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도망가지 않고 그를 향해 가속하는 금원방주. 찰나 몸을 비틀어 금원방주를 응시하는 순간 알아챘다. 그의 눈이 단휘의 품에 안긴 장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먹을 내뻗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늦었어.’


단휘를 데리고 피할수가 없었다. 선택해야 했다. 혼자 몸을 빼거나, 아니면.


백연은 더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단휘를 끌어안던 동작에서 그대로 손을 뻗어 사형을 밀쳐냈다. 동시에 발걸음에 기파를 이끌어냈다. 직전 연달아 터트린 내공 기파의 잔향이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전부 휘감아 한쪽 발에 실었다. 그의 왼발에 실린 묵직한 기운. 동시에 금원방주의 뒤편에서부터 연달아 번져오는 술법진의 기파가 느껴졌다.


‘물러섬 없이.’


쿠웅.


그의 왼발이 그대로 땅에 틀어박혔다. 내딛은 진각이 태산처럼 그의 하반신을 대지에 고정시켰다. 복부 하단전에서 휘몰아치는 파도가 뻗어나오며 그의 세맥을 가득 채웠다.


몸을 반쯤 낮춘 자세. 검끝을 좌하단에 비스듬히 두었다. 짓쳐오는 권격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였다.


‘대해는.’


시야가 흐릿하게 뭉개졌다. 극도의 집중 속에서 백연은 호흡을 가두었다. 눈앞의 금원방주가 내뻗는 권격만 막아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그의 방어초. 현음공의 검법. 하나의 벽이 되어야 했다. 그가 발딛고 선 이 자리에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모든것을 집어삼키는 흐름이니.’


스륵.


그의 검이 소리없이 흘렀다. 부드러이 이어진 검끝을 타고 짙디 짙은 수기가 펼쳐지며 공간을 장악했다. 검이 지나친 궤적을 따라 펼쳐지는 기파가 허공에 그대로 남았다. 마치 검으로 막을 생성하듯이.


허리의 회전을 동반한 검격이었다. 몸에 실은 힘이 일제히 검끝을 타고 흘렀다. 검이 그린 선은 그의 몸 전체가 그려낸 궤적이었다.


검끝이 주먹과 마주치는 순간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짓쳐오는 권격의 파괴력이 막대했는데, 그의 검을 정면으로 찍어누르지 못했다. 사선으로 흐르는 검격을 타고 비껴나가는 주먹.


이어져오는 공격은 금원방주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뒷편에서 짓쳐오는 거대한 폭발. 시야를 가득 메우는 불꽃을 보며 백연이 검을 비틀었다. 자연히 이어진 검이 그대로 원형을 그리며 시야 앞을 베어내고.


직후.


콰아아앙!


귀가 먹먹해지는 강렬한 폭음과 함께 일어난 화염의 파도가 전각 전체를 집어삼켰다. 한순간 밤으로 덮인 회녕부 일대가 환히 밝아질 정도였다.


찰나 지상을 휩쓸듯이 몰아친 강렬한 폭발.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지상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탐욕스럽게 사방을 휘감은 화염의 폭풍이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더 이상 먹어치울 것이 없어진 화염의 몸뚱아리가 서서히 사그라들었을 때,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검끝을 허공에 뻗은채로 기파를 잠재우는 소년. 가볍게 감은 눈매를 타고 머리칼이 휘날렸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전각의 한가운데 휘몰아치는 바람이 잿더미를 흩어놓았다.


그리고 그 소년을 중심으로, 부채꼴 형태의 불타지 않은 공간이 있었다. 스스로의 검을 방파제 삼아 세운 벽. 느릿하게 눈을 뜬 백연의 시선이 맑았다.


그의 뒤편에서 헛웃음 섞인 단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냐? 그거?”

“창명류수검(滄溟流水劍).”


백연이 중얼거렸다.


자연히 떠오른 이름이었다. 그의 검은 끊어지지 않는 흐름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모든것을 막아내야 하는 검인 것이다.


“완성했어.”


느릿하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는 시선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 맑게 휘어지는 눈매가 평소보다 풀려 있다.


“......이제 다시 천주산으로 가야.”


중얼거리던 소년의 신형이 풀썩 쓰러져내렸다. 황급히 일어난 단휘가 장부를 옆에 떨구며 백연을 받아냈다. 힘없이 기대오는 소년을 보며 단휘가 고개를 저었다.


“좀 자라.”


단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란해진 주변.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악예린과 팽악의 모습. 그리고 그 뒤편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빨리 벗어나야 할 분위기였지만.


“쉬어도 되겠네.”


단휘의 시야 저편.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새파란 창공의 빛이 있었다. 온몸에 기파를 휘감은 인영이 질주하는 속도가 거침없다. 천주산의 일을 전부 정리하자마자 달려온 것인지. 그 형상을 확인한 그가 품으로 시선을 내렸다.


눈을 감고 자신에게 기댄 사제를 응시하며 단휘가 중얼거렸다.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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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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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영물(5) +7 23.11.17 4,306 96 19쪽
118 영물(4) +6 23.11.15 4,168 99 15쪽
117 영물(3) +7 23.11.13 4,201 97 15쪽
116 영물(2) +7 23.11.10 4,364 96 18쪽
115 영물 +7 23.11.08 4,547 94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4,377 9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4,524 101 19쪽
112 네가 돌아올 곳(9) +7 23.11.01 4,473 92 20쪽
111 네가 돌아올 곳(8) +6 23.10.30 4,561 91 17쪽
110 네가 돌아올 곳(7) +7 23.10.27 4,683 91 20쪽
109 네가 돌아올 곳(6) +6 23.10.25 4,803 90 17쪽
108 네가 돌아올 곳(5) +7 23.10.23 4,873 99 16쪽
107 네가 돌아올 곳(4) +7 23.10.20 4,965 97 19쪽
106 네가 돌아올 곳(3) +9 23.10.18 4,931 100 20쪽
105 네가 돌아올 곳(2) +9 23.10.16 5,028 102 20쪽
104 네가 돌아올 곳 +6 23.10.13 5,193 105 16쪽
103 태청신공(太淸神功)(4) +8 23.10.11 5,258 102 18쪽
102 태청신공(太淸神功)(3) +8 23.10.09 5,052 111 16쪽
101 태청신공(太淸神功)(2) +8 23.10.06 5,129 116 16쪽
100 태청신공(太淸神功) +12 23.10.04 5,534 117 25쪽
99 네가 만든 마을(9) +7 23.10.02 5,205 107 24쪽
98 네가 만든 마을(8) +7 23.09.29 5,147 114 21쪽
97 네가 만든 마을(7) +7 23.09.27 5,134 108 20쪽
96 네가 만든 마을(6) +10 23.09.25 5,203 114 22쪽
95 네가 만든 마을(5) +8 23.09.22 5,292 107 19쪽
94 네가 만든 마을(4) +8 23.09.20 5,283 107 20쪽
93 네가 만든 마을(3) +7 23.09.18 5,520 105 24쪽
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638 113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892 106 18쪽
90 신강(4) +6 23.09.11 6,083 114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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