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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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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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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



“떠난다고?”

“가야지요. 청해까지 돌아가는 길이 또 한달입니다. 곤륜산에 이르면 눈이 내리고 있을 터인데. 올때는 여름을 등지고 떠나온 길입니다. 장문인께서 걱정하고 계실것이 눈에 훤한지라.”


천주산 언저리. 산중턱에 자리한 수련장이었다. 남궁세가의 장원 바깥으로 조금 비껴난 장소였는데, 그 넓이가 넓었다. 남궁세가 사람들이 올라와서 무공을 연습하는 장소라고.


가까운 자리를 따라 뚫린 공동들이 많았다. 언뜻 보면 산에 기거하는 문파들의 수련 장소와도 비슷해 보였다. 그 모습이 무공을 연마하기에 더없이 좋아 보였다.


“백의 운결이라 했나. 인사를 전해다오. 훌륭한 장문인의 아래 훌륭한 제자를 두셨다고. 여건이 된다면 차라도 한잔 나누고 싶구나.”


그 가운데에 선 백연. 그를 등지고 선 검왕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왕이 항상 길게 늘어지도록 걸치고 다니던 장포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더없이 수수한 회갈색의 무복을 걸친 검왕의 등이 가벼워 보였다.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유진이가 많이 아쉬워하겠구나.”

“......차기 가주가 말입니까?”


이미 알음알음 공표된 상황. 검왕이 가주에서 물러날 날이 머지않았다. 그로 인해 남궁유진은 요즘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했다. 집안 전체의 대소사를 총괄하고 물려받으며, 모두에게 스스로의 존재감을 각인 시켜야 하므로.


덕분에 다시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간간히 장원을 돌아다니다 스치듯 본것이 전부였다. 떠나기 전에 한번 정도 인사를 하고 가려 했는데. 가능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노라. 아이의 마음 속에 네가 크게 들어찼더구나.”

“하하......”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는 듯 하던데. 간간히 기별은 보내주거라. 곤륜파도 남궁의 가주와 연이 있어 나쁠 것은 없지 않느냐.”


검왕이 던지는 말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백연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하 남궁의 가주.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잘 해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유진의 자질이 작지 않았다. 혹 누군가가 어린 나이를 이용하려 한다 해도, 남궁유진의 뒷배에 자리잡은 것은 검왕이다.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압도적인 이름.


‘오히려 궁금한데.’


검왕이 남궁의 가주직을 내려놓았다. 겉으로 보면 실각한 것처럼 보이나 거꾸로 말하면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후 검왕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어디로 움직일 것인지.


일보(一步)가 강호를 뒤흔들 거물이다. 자연히 세상 사람들의 눈이 검왕에게 쏠릴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있으십니까?”


백연은 참지 않고 물었다. 궁금증을 묻어두는 편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검왕이 몸을 돌렸다. 드러난 얼굴에 옅은 미소를 건 채였다.


“계획이라. 그것을 결정하는건 내가 아닐듯 하구나.”

“말씀의 저의는?”


검왕이 북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저편에 앉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갈길 잃은 힘이 아무데나 흘러다니게 두지 않는다. 이 늙은이와 거래를 하려 들겠지.”

“......북경입니까? 황실?”

“아직까진 추측이다만. 이 나라가 휘두를 신검(神劍)은 언제나 부족하다. 조만간 북방 유람을 하고 올지도 모를 일이로다.”


백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의 검. 군문(軍門)은 사방 오랑캐들과 언제나 전쟁을 벌인다. 일선에서 죽어나가는 장수들이 수없이 많다. 시선이 중원을 벗어나 더욱 넓은 외지에도 닿아있는 탓이다. 장성을 수호하는 대명의 힘.


그곳에 검왕이라는 힘을 더할 수 있는 기회다. 다시 생각하면 황실 측에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장성 너머의 무공은 중원과는 아주 다르다 들었습니다만.”

“내 견식하고 돌아오면 알려주겠노라.”


검왕이 웃음을 흘렸다.


‘중원에는 좋지 않은 소식인데.’


검왕이 자리를 비우고 북방으로 간다면, 그만큼 날뛰는 세력이 늘어날 일이다. 가뜩이나 어지러운 강호 정세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사마외도의 무력 행사가 연일 심해지고 있는 것을. 용봉지회에 무인이 잔뜩 죽어나간 마당이다.


물론 검왕 본인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리 움직이는 것일 테지만.


‘조만간 정파의 거두들이 움직이겠군.’


예측되는 상황이 그랬다. 슬슬 그냥 보아 넘길 시점이 지나갔다. 본래 용봉지회가 끝나고 조만간 천하비무제전이 연이어 열릴 것이라 들었다. 용봉지회가 이렇게 끝나버려 어쩌면 연기될 수도 있다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더욱 강하게 열거야.’


정파의 위신을 떨쳐야 하는 시점이다. 외려 산중에 묻혀 살아가던 정파의 고매한 무인들이 지상에 발을 디딜지 모른다. 그들의 검이 아직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백연이 검왕을 응시했다.


“혹 전에 말씀 드린 것에 대해서 기억하십니까.”


검왕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 종이. 만금장 지부에서 발견했다 들었다.”

“맞습니다.”

“그래......”


검왕이 턱을 매만졌다. 그로써도 고민이 깊은 표정이었다.


“십여년이 넘게 지났다. 마지막으로 마교(魔敎)가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지.”

“그들과 직접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 과거의 대전쟁만큼 거대한 세력으로 발호한 적은 없으나, 언제나 정파와 지독한 싸움을 이어온 괴물들이다. 헌데 별안간 십여년 전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었느니.”


검왕이 어깨를 매만졌다. 무의식적인 행동인 듯 보였다. 그의 시선이 허공 너머,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천마라......”

“천마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백연이 불쑥 물었다.


“네가 아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내용 뿐이다. 마교가 추종하는 인물이지.”

“듣고 싶습니다.”


백연이 재차 물었다.


그로써는 궁금했다. 과연 정파 무림의 무인들이 천마를 어찌 생각하는지.


그와는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을 터이다. 그는 마도 출신의 검객이다. 100여년 전 당시 마도는 신교를 따르는 이들과, 아닌 이들로 나뉘어 있었다. 마도 무림은 단순히 신교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해석할 수 없을만큼 방대한 크기. 구파와 오대세가처럼 그때의 신교는 마도 무림에 속한 일개 조직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마도 무림이라는 영역 자체를 일궈낸 천마라는 이에 대해서도 각자 달리 해석했다. 그의 여정과 걸음. 어느 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니까.


“태조(太祖)를 배신한 인물이 아닌가. 일보에 수만의 사람을 죽이고, 걷는 길을 따라 핏물이 바다와 같이 흘렀다 들었으니. 더없이 강력한 무위를 이루어 원(元)을 몰아내는 것에 큰 역할을 했으나, 그 잔악함이 결국 태조와 갈라서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그렇습니까?”

“본디 순수했던 무인이 너무나 지고한 재능을 가진 탓에 정기신 합일(合一)이 부서져 주화입마에 빠져 그리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정확한 것은 없노라. 황실의 서고에나 그의 기록이 있을까.”


검왕이 중얼거렸다.


“태조의 명 아래 민간에 내려오는 천마의 기록은 전부 지워졌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확실한 것은, 그가 한때 태조와 함께 행동했다는 것 뿐이지. 그리고.”


검왕이 백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재능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지고한 무(武)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백연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 무인들의 시각.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그 자신과의 생각과는 다를지 몰라도, 딱히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그런 이의 호칭이 만금장의 서류에서 나왔다라. 작금의 무림에 와서는 마교가 아니면 잘 꺼내지 않는 이름이다. 만금장이 마교와 결탁했다 봐도 되지 않겠느냐.”

“그런 것 같습니다. 적어도 어떤 연결점이 있다 봐야지요.”

“내 힘 닿는 만큼 움직여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검왕의 손이 백연의 어깨를 짚었다. 묵직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검왕의 기세가 부드러웠다.


“너는 신경쓰지 말거라. 당장은 그쪽에 눈을 돌릴때가 아니니라.”


백연이 고개를 들어 검왕을 올려다보았다. 남궁산의 눈에서 번뜩이는 청광이 선연했다. 얼굴에 어린 표정이 부드럽다.


“곤륜의 아해야. 너는 일문의 검을 일굴 재능이다. 사마외도의 잡것들은 늙은이들이 처리할 터이니 수련에 매진하라.”

“......”


백연은 가만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검왕이 저리 말한다 해서 만금장과 마교를 신경쓰지 않을 순 없다. 앞으로도 그들과 자주 얽혀들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 자신의 기감이 더없이 예리하기 때문일까. 예지에 가까운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단순히 느낌에서 끝나지 않을 듯 했다.


“네 안법. 떠나기 전에 한번 보고 싶구나. 되겠느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이 눈가에 손을 가져가며 기파를 일으켰다. 말 없이 일으킨 내공 기파가 재빠르게 몸을 휘돌며 솟아올랐다. 현음공과 적양공을 동시에 일으켜 눈의 혈맥에 집중시킨다.


삽시간에 소년의 눈가를 따라 기파가 피어나며, 그의 눈동자를 짙은 색으로 물들인다. 흑색이었던 눈동자를 타고 보랏빛 안광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세상의 면선이 흐릿해지며 형태가 뭉개졌다. 동시에 시야 안의 모든 기파가 다채로운 음률로 인식된다. 춤추는 듯한 불빛의 세상 속에서 백연이 검왕을 올려다보았다.


“호오.”


나직한 감탄의 목소리. 이윽고 백연이 안법을 거둬들이자 그 자리에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검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도다. 네 천부적인 감각을 무공에 녹여냈구나.”

“이 무공을 익힌 모두가. 타고난 감각 없이도 닿을 수 있을겁니다.”


부러 그렇게 만들었다. 전장을 예측하고 최적의 수를 예지해 실행하는 그의 전투방식. 짧은 순간에 예리한 감각을 일으켜 싸우는 그의 싸움 방식을 타인들이 따라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안법을 만들며 그의 감각을 재현했다. 현음공과 적양공의 조화 속에서 엮어낸 안법.


“안법의 이름은 정했느냐?”

“자령안(紫玲眼)이라 하였습니다.”

“자색 기파를 본떠 자안이라 하였구나. 령은 무슨 의미인고.”

“안법 감각도가 그러합니다. 음률 속에서 움직이는 듯하니.”

“좋은 이름이다. 이리 긴 세월 끝에서야......”


검왕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굽어보는 눈길이 무언가를 추억하듯 깊었다. 천하 남궁의 절대자는 마음속에 여러 기억과 회한을 품고 사는 듯 했다.


바람이 휘도는 천주산 중턱에서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곤륜의 눈이 다시금 피어났구나.”



※※※



섬서 화산(華山) 연화봉(蓮花峰) 끝자락.


한 소년이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연이어 불며 그의 옷자락을 헤집었는데, 달빛 아래 휘날리는 새하얀 무복이 고아했다.


찬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올 법도 하건만, 소년은 앉은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날숨을 따라 흘러나오는 숨결이 허공에 뿌연 자욱을 남겼다.


검룡 유성.


내공 기파를 일절 끌어올리지 않은 채였다. 그의 내공이라면 능히 추위나 비바람 따위는 무시할 수 있을 것임에도. 수련의 일환인 것일까.


“그러다 몸 상한다.”


그때였다. 밤 공기 사이로 흘러오는 옅은 목소리에 유성이 눈을 떴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그가 뒤편을 슬쩍 쳐다보았다.


“장문인. 이 시간에 어쩐일로.”

“또, 또. 평소에는 편하게 부르라고 했잖니. 내 원. 제자한테 많은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유성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불초 제자가 스승님을 뵙습니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니. 그래 제자야.”


후욱.


공기가 부드러이 떨렸다. 그의 뒤편으로 자리한 집채만한 바위. 누군가 검으로 잘라낸 것 마냥 깨끗이 나뉜 바위 사이로 한 인영이 가벼이 걸어나왔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이 더없이 가벼웠는데, 검과 더불어 길게 늘어진 흰색 무복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수수한 옷차림의 여인이었다. 머리칼이나 얼굴에도 장식 하나 없는 모습이었는데, 그것이 미모를 감추지는 못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이 티없이 맑았다. 언뜻 소녀같다 생각될 정도로 순수한 미소가 유성을 향해 그려졌다. 생긋 휘어지는 눈매와 더불어 싱그러움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일로 여기까지 올라오셨습니까. 밤이 깊었는데.”

“그냥.”


살풋 미소를 지은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후욱.


일렁이는 대기속에 기파가 섞여들었다. 한순간 여름밤이라 착각될 정도로 진한 향취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유성의 곁으로 다가오는 걸음이 더없이 가벼웠다. 저잣거리에 놀러나온 어린 소년마냥 활발한 걸음이었는데, 그 끝에 걸린 기운은 그렇지 못했다.


사박.


연화봉 위. 바위틈으로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많았다. 이미 봄과 여름이 지난 터라 꽃잎이 매달려 있을 시기는 아니건만. 가을밤의 찬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연분홍빛 꽃잎이 유성의 눈앞을 스쳤다.


흰 무복 아래로 드러난 맨발. 그 발이 디디는 곳마다 옅은 녹빛의 풀이 바위틈 사이로 올라오고 있었다. 계절을 지나 낙엽이 가득 졌던 나뭇가지 끝자락마다 삽시간에 꽃망울이 움트며 피어오른다.


여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파의 영향이었다. 담고 있는 내공이 흘러나오는 것 만으로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경지의 무인.


“......스승님. 지금 가을입니다.”

“가을에도 꽃 좀 보면 좋잖니. 어때.”


운하검신(雲霞劍神) 서일화. 당대 화산의 장문인이자 검왕, 검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하 일절의 검수.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검룡 유성의 스승인 인물.


세간에서는 살아있는 도가의 신선이라 불리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 외양과 언행, 무공이 인세와 세속을 벗어난 신선처럼 보이는지라.


유성은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의 스승은 더없이 제멋대로이고, 즉흥적이면서 장난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마치 저번에 만났던 어느 누구처럼-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니? 요새 검법 연마도 거의 안한다더니. 야밤에 연화봉까지 올라와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고.”


문득 정신을 차린 유성이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선 서일화가 미소를 걸고 그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를 살풋 올려다보는 시선에 담긴 웃음이 가득했다.


“그냥. 정신을 좀 맑게 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검법 투로를 조금 고민하느라.”

“그래?”


서일화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또르르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에는 아닌데?”

“......예?”

“우리 제자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꿰뚫어 볼 수는 없지만.”


그녀가 손을 뻗었다. 가벼이 내뻗은 손끝에서 기파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삽시간에 피부를 거칠게 휩쓸던 찬바람이 잦아들며 산뜻한 산들바람이 휘돌았다. 마치 연화봉 위만 순간 봄바람이 찾아온 듯이.


“내 눈에는 바람을 부러워 하는 듯 보였는데.”

“......”


서일화가 웃었다. 그녀의 싱그러운 웃음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제자야. 귀신을 속이렴. 그래, 네 마음에 담긴 고민이 어디 보자......”

“스승님.”

“그 소년이니? 아하. 밤을 밝히는 불꽃이라.”


유성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유성아.”

“예. 스승님.”

“네 검은 정직하단다. 더없이 올곧지. 내가 검법의 일초식을 보여주면, 너는 곧장 그 일초식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을때까지 연습하는 아이니.”


수련에 있어 꾀를 부릴줄 모르는 제자였다. 더없이 정직한 검. 그 재능이 드높으면서도 결코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올곧은 길만 걸어온 화산의 검이었다.


“하지만.”


스륵


하얀 무복의 소매가 흔들렸다. 인식하는 순간 어느새 검을 손에 든 서일화가 연화봉의 끄트머리에 섰다. 유성은 조용히 자신의 스승을 쳐다보았다.


즉흥적인 스승. 그녀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고는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자 걸음한 것이었다.


“네 검이 목표해야 할 지향점은, 내가 아니란다.”

“......그건.”

“잘 보렴.”


유성이 뭐라 말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서일화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이 산들바람처럼 허공을 훑었다. 검이 팔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마치 몸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짙은 암청색으로 물들었던 밤하늘. 그 사이를 산뜻하게 서일화의 검끝이 가르는 순간.


화악.


유성의 시야가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었다. 일검에 하늘이 횡으로 갈라졌다. 암청색 하늘이 갈라지며 셀 수 없이 많은 색이 터져나왔다. 연화봉 아래 펼쳐진 드넓은 하늘. 일순 밤을 벗어났다. 한 호흡에 세상이 빛으로 물든다.


드넓은 구름의 바다 위로 펼쳐진 자하(紫霞).


한순간 세상을 노을로 칠한 것이다. 검끝을 붓 삼아.


그 광경 앞에서 서일화가 유성을 돌아보았다.


“이 검을, 네가 재현할 수 있겠니?”


유성이 머뭇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할 수는 있을거야. 네 오성은 나보다 훨씬 드높으니. 하지만 그것을, 네 노을이라 할 수 있을까?”

“......”

“전부터 말해주려 했던 이야기란다. 검이란 단순히 스승을 따라하고, 그 검을 이어받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되는 일이니. 너만의 노을을 찾아야 한단다.”


잠시간 밤하늘에 펼쳐진 노을. 그것을 응시하던 유성이 되물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앞을 바라봐. 나를 따라하는 것이 아닌, 네 앞에서 달려나가는 사람을 마음에 품으렴.”

“그것이 스승님을 지향점으로 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나를 지향점에 두고, 내 모든 것을 따라하면 내 아류(亞流)밖에는 될 수가 없는 법이란다. 내가 말한 것은 그런게 아니야.”


서일화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춤추는 기파가 유형화된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네 검끝을 담금질 시켜줄 상대를 담으라는 소리이지. 언제나 앞서 나가고, 네 전력을 받아줄 수 있는. 한발짝 앞서 있는 이. 그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그렇습니까.”

“다행히도 너는 이미 그런 사람이 생긴 듯 싶은데.”


서일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등뒤로 서서히 사그라드는 노을의 빛이 후광처럼 드리웠다.


그것을 보며 유성은 문득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저 노을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가장 앞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고. 분명 처음에는 저기에 닿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건만.


“암화라 했지. 그 아이에게 닿을 검을 닦아내렴. 그것이 네 노을이 될테니.”

“스승님은 그런 목표가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남궁산이라고, 알려나?”

“......검왕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서일화가 맑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성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하나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문득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자신의 생각 속에 자리를 잡은 것은 분명 백연이었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실린 검을 휘두르던 모습. 더없이 강렬했다. 그의 마음속에 본디 자리를 잡고 있던 스승의 노을을 몰아낼 만큼.


그런데 백연에게도 이런 심상이 마음속에 있을까. 그런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찌 될까.


“뭐가 궁금한데?”

“스스로가 가장 앞서 나가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 자신이 모두에게 한발짝 앞서 나간다 하면.”

“보통은 그것을 보고 오만이라 부르지. 스스로가 가장 뛰어난 줄 알고 자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만에 하나, 그 자신을 목표로 삼고도 오만이 아닌, 나아가 발전하는 이라 한다면.”


서일화가 검을 거두었다. 어느새 암청색으로 되돌아온 밤하늘을 응시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역사는 그들을 이렇게 불러. 대종사(大宗師)라고.”

“대종사......”

“달마가 그러했고. 삼봉 진인이 그러했으며, 세상을 오시하던 천마(天魔)가 그러했듯이.”


유성이 잠시간 서일화를 바라보았다. 검을 거둔 그녀의 곁으로 다시금 찬 가을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유성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래.”

“잠시 화산을 내려갔다 와야겠습니다.”

“다녀오렴. 노잣돈은 충분히 챙겨가고. 행낭은 미리 준비해 뒀으니까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


서일화의 말에 유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이런 말을 할줄 알았다는 듯이 미리 준비해놓은 스승. 여전했다. 그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행동하는 듯한 모습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가벼이 포권을 한 유성이 기파를 일으켰다. 삽시간에 암향표와 함께 그의 신형이 흩어지고.


이윽고 연화봉에 홀로 남은 서일화가 한숨을 뱉었다.


천천히 봉우리의 끝자락에 다가간 그녀가 자리에 걸터앉았다. 가라앉은 눈이 밤하늘을 훑었다. 침잠한 시선이 직전의 싱그러운 무인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깊었다.


시야 너머, 서편의 하늘. 별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수놓던 반짝임이 빛을 잃고 흩어진다. 그 속도가 느리다 할 수 없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구나.”


한참동안 하늘을 응시하던 그녀가 나직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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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네가 돌아올 곳(6) +6 23.10.25 4,803 90 17쪽
108 네가 돌아올 곳(5) +7 23.10.23 4,873 99 16쪽
107 네가 돌아올 곳(4) +7 23.10.20 4,965 97 19쪽
106 네가 돌아올 곳(3) +9 23.10.18 4,931 100 20쪽
105 네가 돌아올 곳(2) +9 23.10.16 5,028 102 20쪽
104 네가 돌아올 곳 +6 23.10.13 5,193 105 16쪽
103 태청신공(太淸神功)(4) +8 23.10.11 5,258 102 18쪽
102 태청신공(太淸神功)(3) +8 23.10.09 5,052 111 16쪽
101 태청신공(太淸神功)(2) +8 23.10.06 5,129 116 16쪽
100 태청신공(太淸神功) +12 23.10.04 5,534 117 25쪽
99 네가 만든 마을(9) +7 23.10.02 5,205 107 24쪽
98 네가 만든 마을(8) +7 23.09.29 5,147 114 21쪽
97 네가 만든 마을(7) +7 23.09.27 5,134 108 20쪽
96 네가 만든 마을(6) +10 23.09.25 5,203 114 22쪽
95 네가 만든 마을(5) +8 23.09.22 5,292 107 19쪽
94 네가 만든 마을(4) +8 23.09.20 5,283 107 20쪽
93 네가 만든 마을(3) +7 23.09.18 5,520 105 24쪽
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638 113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891 106 18쪽
90 신강(4) +6 23.09.11 6,082 114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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