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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16 18:10
연재수 :
3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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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10.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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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네가 돌아올 곳(3)

DUMMY

※※※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던 소년이 돌아온 것은 정말 금방이었다. 한식경(一食頃:30분) 정도나 지났을까.


헥헥거리며 문을 열고 돌아온 소년의 곁에 서 있는것은, 스물 중반이나 될까 싶은 한 여인이었다.


“여기, 이 도시에서 제일가는 의원이에요!”


뿌듯한 듯 가슴을 펴는 소년. 그러나 선화는 약간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의원이시라고요?”

“제일가는 의원은 아닙니다만, 의술을 배운 것은 맞습니다.”


침착하게 답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더없이 차분했다. 아래로 깔리는 음성이 고요했는데, 길게 내려입은 백색 의복만큼이나 정갈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방 안에 들어선 그녀에게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눈을 따라 칭칭 감겨져 있는 검은 천이었다. 그것을 본 백연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맹인?”


그러자 그녀의 시선이 백연을 향했다. 아니, 앞이 보이지 않으니 시선이라 하는것이 맞을까. 하지만 백연은 그리 느꼈다.


이윽고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러고도 진료를 할 수 있습니까?”


백연이 물었다.


중요한 문제였다. 급하긴 했지만, 아무 의원이나 데려왔다가 유성의 증세를 악화시켜서는 안된다. 목숨까지도 걸려있는 상황. 한시진 넘게 마교 단주의 공격을 받아낸 턱에 온몸의 내외상이 심했을 뿐더러, 몸속에 침투한 내가중수법의 기운이 강했다.


어지간한 의원으로는 치료를 시도하는 것 조차 어려울 일이다. 무림인들을 많이 다뤄보지 않았다면 더욱 꿈도 꿀 수 없는 일.


그러나 백연의 딱딱한 물음에도 여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믿기 어려우시다면, 손을 잠깐 줘보실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백연이 선선히 손을 내밀었다. 이윽고 맹인 여인이 그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손끝에 박힌 거친 굳은살과 딱딱한 감각에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리는 그때,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신공을 품으셨군요. 기원을 알기 어려운 힘입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신체에는 버거우니 전투를 한식경 이상 이어나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몸의 균형으로 보아 일전 오른팔과 왼다리가 큰 충격에 한번 손상되었군요. 사나흘 전쯤으로 보입니다만. 근맥 감각이 아직 균형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은데 신체 구조의 변화를 한번......?”


중얼거리던 그녀가 시선을 들어올렸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눈이 백연을 응시했다.


“환골탈태군요.”

“......당신.”

“그렇다 해도 환골탈태 이전에 입은 부상의 잔흔이 남아 있습니다. 하수오의 뿌리와 모과 열매가 근골에 좋으니 차로 끓여 드십시오. 무공 수련을 하고난 직후에는 독활(獨活)뿌리를 드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백연이 헛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그의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위험한 사람이군.’


방금 전의 대화로 실력에 대한 의구심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백연의 경계 또한 증가했다. 이런 재능이 외도에 떠돈다. 그의 몸 상태를 한번 만지는 것으로 즉각 파악하고 환골탈태 전에 입었던 부상의 흔적까지 찾아내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잔악한 사마의 종자들보다 위험한 이였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까?”

“충분히. 어쩌다가 맹인이 되었는지 궁금해질 정도군요.”


백연이 말했다.


짧은 말에 담긴 의미가 길었다. 그녀만한 의술을 지니고 새외에서 돌아다니는 일은 많은 고충이 있을 터.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도시에 머물고 있다 해도,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곳에서 여인의 몸으로 의원 일을 하는 것은 수많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하물며 맹인이니 더욱 그러할텐데.


다시 말하면, 그녀에겐 일신을 지켜낼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이다. 그것이 무공이든, 뒷배에 있는 누군가든.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본 대가였습니다. 이 이상은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말해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만. 감사합니다.”

“그럼 환자를 한번 살펴도 되겠습니까?”


백연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비켜주었다. 객잔에 자리한 가장 좋은 방. 안의 침상에 시체같이 창백한 외양의 유성이 누워 있었다.


천천히 유성에게 다가간 맹인 의원이 손을 뻗어 손목을 쥐었다. 잠시 가늠하듯 손목을 매만진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귀식대법을 쓸때 독을 사용하셨는지요.”

“그렇습니다.”

“그 독을 조금만 가져다 주십시오. 그리고 따뜻한 물과 천, 가능하다면 꿀도 조금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이랑, 천, 꿀은 제가 가져올게요!”


후다닥 달려나가는 소년.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선화가 그녀에게 다가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어 안에 있는 독을 살핀 의원이 천천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멀뚱히 선 백연이 선화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공자는 나가 있어도 될 것 같네요.”

“......그게 낫겠군요. 사람이 많이 있어봐야 방해만 될테니.”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객잔의 아래층으로 걸음하자 바삐 움직이며 무언가를 들고 올라오는 소년과, 의자 하나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있는 객잔 주인이 보였다.


“이놈아, 천은 그 안에 있는거 써라. 그게 새거다.”

“이거요? 감사합니다!”


맑게 외친 소년이 곧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대야와 천, 그리고 작은 단지를 들고 계단을 재빠르게 올라갔다. 그것을 보며 내려온 백연이 한켠의 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조용해지기를 잠깐.


“크흠, 무인분.”


객잔 주인이 입을 열었다. 그에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십니까.”

“거, 중원 어디에서 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청해 곤륜입니다.”


선선히 답하는 백연의 모습에 헛기침을 하며 일어난 객잔 주인이 백연의 앞에 와 앉았다. 일전 돈을 받으며 좋아하던 것과는 다르게 한층 진중해진 표정이었다. 본래 이런 사람인걸까.


“곤륜, 곤륜은 처음 들어봅니다만. 혹, 문파입니까?”

“그렇지요.”

“......그럼 문도를 받겠군요?”

“그야 장문인께서 재가(裁可)를 하신다면, 물론이지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전번에 곤륜이 문도를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신웅 사숙조가 말했던 이유는 아이들을 먹일 돈 한푼조차 없었기 때문일 뿐. 지금의 곤륜은 그렇지 않았다.


하오문과의 협력과 더불어 여러 상행을 도와주고 옥수가 번창하며 돈을 벌고 있는 지금이었다. 사파 무리가 가득한 청해에서 옥수는 상행들이 지나가기 가장 좋은 도시가 되었으니.


물론 한번씩 크게 문도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배분을 만들 시기는 아직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들어오겠다는 이를 굳이 말릴 일은 없었다. 장문인께서 그런 이들을 내치는 성정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연 이후로 문파에 새로 들어온 이는 야장 선아 한명 뿐이었지만 말이다.


“흠흠, 그럼 말입니다.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민하듯 손을 주무르며 물어오는 모습이 조심스러웠다. 백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들어보고 가능하다면요.”

“저희 해랑이 좀 데려가 주십시오.”

“......예?”

“아, 방금 전 올라간 녀석의 이름이 해랑입니다.”


이어진 말에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픈건지. 갑작스레 저 아이를 데려가라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지은 백연의 얼굴을 보았는지, 객잔 주인이 재차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꺼내서 죄송합니다. 왜 이런 부탁을 하는지도 궁금하시겠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며칠 전에 무인분이 이곳에 찾아오셨을때, 단검을 하나 주고 가셨지요.”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검의 값어치, 녀석은 모를테지만 저는 알아봤습니다. 과거에 병장기를 좀 다룬 적이 있었습죠. 그 단검을 보고 나서 몇가지 생각을 좀 했습니다. 이런 무기를 턱 건네주실 정파의 무인 분이라면 해랑이에게 조금이나마 베풀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갑자기 아이를 떠나보낼 이유가 됩니까? 가족은 어떡하고요.”

“아이는.”


객잔 주인이 슬쩍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위층에 올라간 소년이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가 말을 이었다.


“가족이 없습니다.”

“......”

“대협께서도 아시겠지만 새외는 아이가 자라기에 그리 녹록지 못한 환경입니다. 강자들의 각축장. 제 힘 하나만을 믿고 거니는 무인들이 즐비한 곳이지요. 명과 정파의 관할 아래 통제되는 중원과는 다릅니다. 당장 이 도시에서만도 하루에 죽어나가는 무인이 수십에 달하니.”


말을 하던 객잔 주인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일을 마쳤는지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걸어내려오는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이름이 해랑이라고 했나.


고민이 밀려왔다. 그런 그의 기분을 눈치챈 듯이 객잔 주인이 헛기침을 했다.


“아이와 한번 이야기를 하고 생각해주십시오. 이건 제 개인적인 부탁일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백연의 애매한 답에도 객잔 주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주방으로 향하며 외쳤다.


“드시고 싶은게 있으십니까? 제가 솜씨 한번 발휘 해보겠습니다요.”

“어라, 요리하시게요? 저는 과파육(鍋粑肉)이요!”

“이놈아, 너 말고 무인분께 물은거다.”

“에헤헷.”


맑은 웃음소리. 그것을 들으며 백연이 입을 열었다.


“과파육도 좋지요.”

“하하. 그럼 그걸로 하겠습니다요.”

“대협!”


쪼르르 달려온 소년이 그의 앞에 앉았다.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가 매우 인상적인 점소이 소년. 이제 와서 자세히 보니 언뜻 푸른 빛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색이라고 해야 할까.


“며칠이나 묵다 가실 생각이세요?”

“모르겠네요. 일행이 회복하고 또 준비해서 갈 것도 있으니. 적어도 닷새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닷새나요?”


해랑의 눈이 더욱 커졌다. 그 속에서 옅은 흥분과 기대감을 읽은 백연이 피식 미소지었다. 자신들이 신기한걸까, 이 아이는.


“그럼 혹시 그동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저것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그의 말에 해랑이 눈을 반짝이며 손을 모았다. 정말 동경의 대상이라도 보는 듯이.


‘맑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새외 무림에서 살아가는 아이. 죽음을 매일같이 코앞에서 접할 것임에도 그 천성이 티없이 맑고 밝다. 어려운 일이었다. 저맘때의 그는 어땠었는지 기억을 더듬으려던 백연이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길바닥에서 마도인들의 배에 검을 쑤시고 다녔던 것 같은데.’


검귀의 어릴적 기억을 재빨리 털어버린 백연이 해랑을 보았다.


“대협님, 정말 중원 무림에는 신선들이 있나요? 구름을 타고 다니고 요술을 부린다던데.”

“신선이요? 그런건 없지만 비슷한 건 있죠.”


백연이 하령을 떠올리며 답했다.


“당신보다 작은 덩치와 어린 외모의 사람인데, 자신보다 두 배는 큰 장포를 걸치고 돌아다니며 한 손으로 수십장의 종이와 붓을 허공에 띄워 수백가지 일을 한번에 적어내려가요. 그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중 요술에 가장 능하군요.”

“와아? 그게 누군가요?”

“하오문 성화방의 성화방주라는 사람으로, 별호는 암휘군(暗輝君)이에요.”

“나이도 저와 같나요?”


하령의 물음에 백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에요. 아마 나이는 엄청 많을텐데.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다시 어려지거나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성화방주의 나이는 저도 정확히 몰라요.”

“이게 중원......”

“또 저 동쪽에 검왕이라는 무인도 있어요.”


백연이 손을 뻗어 까딱였다. 일전 보았던 검왕의 무공을 흉내내듯이.


“남궁세가의 무인인데, 이렇게 손짓하면 하늘이 뜯겨나가듯 떨어진답니다.”

“하늘이요?”

“네. 정말로 하늘을 뜯어내 땅에 떨구는 것 같은 모습이에요. 중원 무림 전체에서도 손꼽힐만큼 강한 사람이죠. 그분은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지 않고 허공에 띄워놓고 다니세요.”


아직 그가 닿기에는 한참 먼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고보니 가주에서 물러나고 어떻게 되었는지 뒷일을 알지 못한다. 돌아가면 정보를 좀 찾아봐야 할련지.


‘북방으로 갔으려나.’


언제고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더해 검왕은 스스로에게 천형(天刑)에 가까운 병증이 있다 언급했다. 살 날이 많이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전에 한번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와아, 신기해요! 저도 무공을 수련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야 당연하죠.”

“정말요?”

“무학의 길에는 끝도 한계도 없으니까요. 다만 그 길을 끝까지 걸어나가기가 쉽지 않을 뿐.”


언제고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강함이 검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검이 강함에 앞서야 하는 것인데. 망각하는 이들이 많다.


정파의 검은 목적, 마도의 검은 수단, 사파의 검은 삶.


제각기의 의미를 지니고 병장기를 손에 쥐나, 그것을 끝까지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힘에 취해 선을 넘기 시작하면 검은 단순히 손에 들린 날붙이이자, 살육의 도구가 될 뿐이니.


“하지만, 저는 나이가 너무 많은게 아닐까요.”

“예?”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백연을 해랑의 목소리가 끌어올렸다. 소년을 쳐다보자 눈을 반짝이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일전에 어떤 무인들이 그랬거든요. 무림인들은 일곱살에 이르기도 전부터 무학을 수련한다고요.”

“확실히 그런 이들이 많긴 하죠.”


몸 구성의 문제이다. 성장하기 이전부터 무공을 연마하기 시작하면 몸이 최적의 구조로 짜여진다. 대방파와 세가들은 그렇기에 어릴적부터 무공을 몸에 새겨넣는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언제나 강한 무력을 거머쥘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못해요. 역사에 이름을 남긴 무인들 중에는 나이가 훌쩍 차고도 무공을 익혀 강성해진 이들이 많으니.”

“그런 사람이 있나요?”

“대표적으로.”


백연이 슬쩍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봤다. 중원 무림이 있는 방향.


“명을 건국한 태조가 그러했죠.”

“태조가요?”

“네. 알려진 바로는 열 일곱이 넘어 처음 무공을 접했다는 이야기가 많죠. 그럼에도 불과 칠년만에 태조는 원(元)을 대적할만큼 강해져 있었으니까요. 또 백년전 개방주는 서른 가까운 나이에 처음 무공을 배웠었고요.”

“와아......”


눈을 동그랗게 뜬 해랑. 그를 보며 백연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몇살인가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열 셋 정도에요.”

“충분히 빠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정도면 대방파에 입문하기에도 충분한 연배인데.”


백연의 답에 눈에 띄게 밝아지는 표정. 이윽고 해랑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럼 혹시 대협은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아마 지학(志學:열다섯)을 조금 넘었을겁니다.”

“정말로요?”


감탄과 부러움이 섞인 눈빛이 녹빛 눈동자에 떠올랐다. 열 다섯이라는 나이를 되뇌듯 입속에서 중얼거리던 해랑이 재차 물어왔다.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백연이라고 합니다.”

“백연 대협! 아참, 그러고 보니 제 이름도 말씀을 안드렸네요. 저는 해랑(海浪)이라고 해요. 성은 없고요.”

“그렇군요. 무슨 뜻인가요?”

“바다의 파도라는 뜻이래요. 저는 바다를 한번도 본 적 없지만. 이름을 지어주신 분이 그랬어요. 네 눈이 파도 같다고.”


그때 두 사람의 사이에 커다란 접시가 턱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과파육을 내려놓은 객잔 주인이 씩 웃었다.


“거 드시고 이야기들 나누십쇼. 그리고 이놈아, 넌 대협께 말버릇이 그게 뭐냐?”

“별말 안했는데......”

“괜찮습니다. 재밌는걸요.”

“하하.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무튼 해랑아, 너는 좀 쉬고 있거라. 어차피 객잔 문도 닫았고 더 들어올 사람도 없으니.”

“정말요? 감사합니다!”


밝게 답하는 해랑의 목소리에 백연과 객잔 주인이 웃었다. 이윽고 손을 탁탁 턴 객잔 주인이 주방으로 돌아가고, 두 사람의 곁에 다른 이들이 합류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내려와봤더니. 이런걸 혼자 먹고 있었나.”

“흑랑이 늦은거 아닙니까.”

“말도 안해준 놈이 입은 잘 놀리는군.”


백연의 곁에 털썩 주저앉는 흑랑. 냉막한 시선이 해랑을 슬쩍 보고는 살풋 풀어진다. 뒤이어 사형 셋이 내려와 합류했다.


“팔영은?”

“밖에 있으신대. 도시가 소란하니 경계를 해야한다고.”

“놈은 걱정할것 없다. 평생 그리 해온 노인이야.”


중얼거리는 흑랑을 신기한 눈치로 쳐다보는 해랑. 보통 방주 대리를 처음 본 사람은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거나 무서워하기 마련인데, 그런것도 없는 것이 신기했다.


‘새외에서 살아왔어서 그런가.’


자연스레 흑랑의 곁에서 대화를 나누는 해랑을 보며 백연이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새외의 험악한 무인을 한두번 본것이 아닐텐데 그럴법도 했다. 무릇 점소이란 언제 누구와도 붙임성 있게 대화를 나눌수 있어야 하니.


그렇게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훅 흘러가고.


밤이 깊을때가 되어서야 선화가 지친 얼굴로 내려왔다.


“끝났어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층으로 올라가자 유성의 곁에 앉은 맹인 의원이 보였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매만지며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괜찮은겁니까?”


백연의 물음에 의원이 일어나 몸을 돌렸다.


“와서 보시지요.”


천천히 유성의 곁에 다가간 백연이 그를 살폈다.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대자 느릿하게 흐르는 따스한 숨결이 느껴졌다. 아직도 창백하다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것은 맞았으나 뺨에 불그스레하게 일어난 혈색이 그가 한결 나아졌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귀식대법으로 굳혀놨던 혈맥을 복구시키고, 내가중수법으로 쌓인 기운을 걷었습니다. 목숨이나 무공 수위에 이제 지장은 없을겁니다.”

“......감사드려야겠군요.”

“아직입니다.”


의원이 손을 뻗어 유성의 어깨를 짚었다. 흰 천이 칭칭 감겨있는 왼 어깨.


“근맥의 손상이 심해 몸이 약화되었으니 한동안 정양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몇번 더 들려 약재를 드리고 상태를 살필테니 당장은 인사를 넣어두시지요.”

“그렇군요.”

“그럼 이만. 내일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살풋 까딱인 그녀가 밖으로 걸어나갔다. 침상에 걸터앉은 백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요. 정말로.”

“그러게요. 한시름 돌렸어요. 화산 장문인이 검룡을 그렇게 끔찍이 아낀다고 하던데.”

“한 팔을 못쓰기라도 하게 되었다면 그분에게 목이 떨어졌을지도 모르겠군요.”


백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태껏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밤에 검룡을 살피는 것은 제가 하지요. 루주께선 식사라도 하고 한숨 주무세요.”

“고맙네요.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올라오던데.”


생긋 웃은 루주가 아래층으로 걸음했다.


백연은 유성의 곁에 가만히 앉아 숨을 가다듬었다. 방 안을 따라 떠도는 달큰한 꿀과 약재의 향이 진했다.


‘닷새에서 칠주야 정도 머물러야 하려나.’


그 이후에는 이동해야 할 일이다. 신강쪽 마교의 추적이 있을지 모른다. 풍백께서 막아주시긴 했다지만 그것이 영원하긴 어렵다. 아예 무덤의 문을 닫아버렸으니 그들을 쫓아오긴 힘들겠다 하나, 모를 일이다.


“......고생했다.”


유성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넘겨준 백연이 중얼거렸다.


일렁이는 등불을 켜둔채 침상의 앞에 앉은 백연이 품에서 서책을 꺼내들었다. 청휘가 써놓은 비급. 밤새 유성을 지키며 이것을 탐독할 요량이었다. 백연이 가벼운 손짓으로 비급을 펼쳐들고.


이윽고 방 안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이따금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넘어가는 책장의 소리만이 울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바깥이 소란해졌다는 것을 느낀 백연이 고개를 드는 순간.


쾅!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린 백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린 객잔 주인이었다. 그 얼굴에서 문득 백연은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협!”


객잔 주인이 머리를 푹 숙였다.


“해랑이가 의원을 데려다준답시고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은것이 벌써 한시진(一時辰:두시간)이 넘었습니다.”

“......예?”

“제발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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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4,584 101 19쪽
112 네가 돌아올 곳(9) +7 23.11.01 4,535 92 20쪽
111 네가 돌아올 곳(8) +6 23.10.30 4,615 91 17쪽
110 네가 돌아올 곳(7) +7 23.10.27 4,744 91 20쪽
109 네가 돌아올 곳(6) +6 23.10.25 4,860 90 17쪽
108 네가 돌아올 곳(5) +7 23.10.23 4,935 99 16쪽
107 네가 돌아올 곳(4) +7 23.10.20 5,027 97 19쪽
» 네가 돌아올 곳(3) +9 23.10.18 4,989 101 20쪽
105 네가 돌아올 곳(2) +9 23.10.16 5,085 102 20쪽
104 네가 돌아올 곳 +6 23.10.13 5,253 105 16쪽
103 태청신공(太淸神功)(4) +8 23.10.11 5,321 102 18쪽
102 태청신공(太淸神功)(3) +8 23.10.09 5,111 111 16쪽
101 태청신공(太淸神功)(2) +8 23.10.06 5,188 116 16쪽
100 태청신공(太淸神功) +12 23.10.04 5,599 117 25쪽
99 네가 만든 마을(9) +7 23.10.02 5,268 108 24쪽
98 네가 만든 마을(8) +7 23.09.29 5,207 114 21쪽
97 네가 만든 마을(7) +7 23.09.27 5,192 108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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