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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9.07 18:10
연재수 :
35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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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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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DUMMY

“꼴이 왜 그래?”


태연히도 물어오는 맑은 목소리에 당소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보다시피, 찔렸다.”

“거 천하의 독룡 체면이 말이 아니네.”


웃으며 다가온 백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직 옆구리에 꽂혀있는 검이 선명하게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백연이 미간을 살풋 찌푸렸다.


“뽑는다. 이 악물어.”

“그렇잖아도 이미......으윽!”


푹.


그의 옆구리를 타고 검이 쑥 뽑혀나왔다. 순간 아찔한 고통에 눈을 질끈 감은 당소하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지러이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백연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너 어차피 독 묻어있어도 면역이지? 그냥 지혈한다. 태워버릴꺼니까 한번 더 이 악물고.”

“네놈. 그렇게 무식하게......으으윽!”


치익.


달아오른 쇳덩이가 옆구리에 와 닿았다. 잇새로 신음소리를 뱉은 당소하가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백연이 한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이제 괜찮을거야.”

“출혈로 죽기 전에 고통으로 죽겠군.”


중얼거린 당소하가 옆구리를 더듬었다. 검이 찌르고 들어간 부위. 깔끔하게 박혀 오히려 안쪽 근맥의 손상이 적었다. 겉을 태워 지혈해버린 백연의 방법은 무식했지만 동시에 효과적이었다. 애시당초 일반적인 불로 태운 것도 아니었다.


백연이 사용하는 불꽃의 내공. 선명하게 피부에 감각이 남아 있었는데 그 기도가 티없이 맑았다. 잠시의 고통이 끝나자 확실히 몸이 편해졌다 느낄 정도로 융화가 빠르다.


그새 일어난 백연. 당소하가 시선을 들어올려 그를 응시했다. 새하얗던 궁장의 곳곳에 튄 피가 선명했다. 순백의 옷이 붉게 물들었는데, 전혀 개의치 않아 보이는 모습이다. 한두푼 해보이는 옷은 아니건만.


“그나저나 그런 옷은 어디서 찾아 입은거지.”


문득 드는 의문에 당소하가 물었다.


“아, 이거?”


자신의 옷차림을 힐끗 확인한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검왕을 좀 만나고 오느라.”


여상한 말투로 내뱉은 말. 그러나 내용은 당황스러웠다. 당소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검왕을 만나는 것과 여장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나중에 유진한테 물어봐. 여하간, 지금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야. 움직일 수 있어?”


당소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다.”

“무공은?”

“가능할 것 같군. 네가 대충 지혈해서 상처가 터지는 것만 아니라면.”

“한번 더 지져줄까?”

“......아니. 충분하군.”


몸 상태를 점검한 당소하가 몸을 일으켰다. 아찔한 어지럼이 몰려왔으나 내색하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백연을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당소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의 시선.


“무슨 일인지 알고 있나? 네가 경고했던 일이 터진 것 같은데.”

“맞아. 만금장의 습격이야. 그런데 가장 중요한건.”


입술을 살풋 깨문 백연이 말을 이었다.


표정에 서린 분노가 선연했다. 검파를 쥐는 것 만으로도 강렬한 기세가 몰아쳤다. 순간 당소하가 흠칫할 정도로 강한 기파.


‘원래 이리 강했었나?’


당소하는 문득 스치는 생각을 내색하지 않으며 백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놈들. 용봉지회의 무인으로 위장했다. 너도 방금 당해봤지?”

“그래.”

“아군을 구별할 수 없다. 확실하게 신원이 확인된게 아니면 전부 의심해야 해.”

“위장했다는 것이?”


백연의 기파가 가라앉았다. 딱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모습.


“이곳에 온 무인들 중 절반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고 했어. 처음부터 계획된 무덤이었던 거야. 여기는.”

“......그것 참. 듣던 중에 개같은 소리로군.”


당소하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협잡질과 모략에 익숙한 그로써도 이런 일은 들어본 적이 없다.


말도 안되는 일인 탓이다. 정파 후기지수들을 죽이고 그들로 위장해 용봉지회에 참여한다? 정파 전체가 눈이 뒤집어질 일이다. 그 수법이 마교의 것이라 봐도 좋을 정도. 이 일이 만약 새어나가면 만금장은 당장에 정파의 공적으로 선포될 일이다.


선산에 기거하는 절대자들조차 내려와 만금장을 토벌하려 들 일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당소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시당초 멸살(滅殺)을 생각하고 있었군. 여기 참여한 이들 모두를.”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 빨리 움직여야 해. 어느 정도로 강적이 등장할지 몰라.”


멸살을 생각하고 있었던 이상, 만금장은 전력을 다해 여기의 모두를 죽이려 들 터다. 적어도 살아나가 일의 진상을 알릴 수 있는 이들을 전부 죽이려 하겠지.


칠룡도 그 죽어야 할 인물들에 포함될 터. 그렇다 하면 아마 이들을 전부 상대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강자들이 이곳에 와 있을 것이다.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백연이 당소하를 힐끗 돌아보며 기파를 일으켰다.


“가자.”

“그 유명한 암화의 실력을 제대로 보겠군.”


중얼거린 당소하도 기파를 일으켰다. 동시에 두 소년이 가벼이 보법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우렁찬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천둥같은 기파가 연이어 터져나가는 소리가 대기를 찢고.


후우욱!


사방에 바람이 휘몰아치며 한 신형이 그들의 앞에 뚝 떨어졌다. 거대한 도를 등에 짊어진 청년. 압도적인 거구의 팽악이 당소하를 보곤 이를 드러냈다.


“거, 여기 있었군. 망할놈.”


쯧, 하고 혀를 찬 그의 시선이 이윽고 백연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한순간 흔들렸다. 백연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러시는지.”

“크흠. 네놈이 함께 있을줄은 몰랐군. 그나저나 옷차림이......?”

“일일이 설명해줄 시간 없습니다. 뭡니까.”

“쯧. 건방진 놈. 여기 이 멍청한 소가주가 혼자 사지로 뛰어든다 해서 쫓아왔다.”


스륵. 등 뒤에서 도를 뽑아든 팽악이 도신을 쓸었다. 강대한 기파가 서린 몸. 타고난 근골이 인외의 것이라는 팽가답게 대도를 나뭇가지 휘두르듯 다루는 모습. 강한 무인이다.


“같이 가지.”

“좋습니다.”


백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함께에요.”


그때 백연의 귓가를 스치는 숨결이 있었다. 소리없이 다가온 신형. 멀리서부터 느껴지던 기척이 한순간에 가까이 이르렀다. 지극히 쾌속한 신법.


찰나에 백연의 옆에 나타난 신형이 바람에 올라탄 번개 같았다. 밤을 배경으로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을 한손으로 지그시 잡아 누르는데, 등 뒤로 매인 창이 여러 자루였다.


“암화. 당신도 여기 있었군요. 기도가 조금 달라진 듯 한데......?”


백연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몸속에 자리잡은 적양공과 현음공. 스스로도 이전과 조금 달라지고 있다 느꼈는데 그것을 감지한 모양이다. 기감이 더없이 뛰어났다.


“반갑군요. 뇌룡께서 손을 보태주신다니.”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에요. 그런데......”


악예린의 몸이 훅 움직였다.


백연의 코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오는 모습. 하얀 손가락이 그의 눈가에 닿았다. 뻗은 손으로 눈매의 언저리를 스치듯 매만지는데,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렇게 간격을 내주는 것은 설령 상대가 아는 무인이라 해도 저어되는 일인 바.


하지만 백연은 이미 그녀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굳이 의식해서 반응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순수한 호의로 움직이는 듯 한 사람이었기에.


“눈이.”


그녀가 중얼거렸다.


“예?”

“......기파가 흔들려요. 바뀌고 있는데. 흐름이 복잡한 것이.”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백연을 응시했다. 표정 변화가 적은 그녀의 얼굴임에도 또렷이 나타나는 감정.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안법인가요?”

“네.”


담담히 답한 백연. 그가 말을 덧붙였다.


“아직 미완입니다. 조정중인데. 어디로 엮어낼지가 불확실한지라.”

“미완이라고요? 하지만, 직접 만든다는 건. 신공을 보고있는 줄 알았는데......?”


잠시 다채롭게 혼란스러운 표정이 악예린의 얼굴에 스치고, 이윽고 표정을 갈무리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대단하네요. 당신은. 저도 노력해야겠군요.”

“네놈들. 평생 여기 살 작정이냐?”


끼어드는 팽악의 목소리에 백연이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거구의 무인. 몸에 다친 곳이 많았다. 이곳저곳 피가 배어 있는데, 그럼에도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강렬했다.


그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백연이 입을 열었다.


“팽악. 당신의 전력. 어디까지입니까.”

“......잘 알지 않느냐? 나와 검도 맞대었으면서.”

“전부가 아닌걸 압니다. 건곤(乾坤). 쓸 수 있습니까?”


팽악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순간 스치는 표정이 다채로웠는데, 그것을 보며 백연은 잠자코 기다렸다.


본디 당소하와 단둘이 뛰어들 생각이었는데, 가용할 전력이 많아진 이상 달리 움직여야 했다. 그 혼자 무턱대고 몸을 던지기 어려운 전장이다. 수없이 많은 변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면 줄여야 한다.


팽악 같은 좋은 패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팽악이 입을 열었다.


“쓸 수 있다. 첫 두초식만. 하지만 네가 그걸 어찌 알지?”

“당신이 도를 잡는 파지법. 도식을 내칠때 새어나오는 기파 구결의 흐름. 설명하자면 끝이 없습니다만.”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


팽가의 신공이자 도법의 정점에 다다른 무공중 하나.


팽가의 가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신공중 하나인데, 그 특성탓에 익힐 수 있는 이가 별로 없다. 팽가의 대표적인 무공으로는 오호단문도가 가장 잘 알려져 있었으나, 백연이 익숙한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맞붙어본 적이 있기에.


“말이 되는......”

“몇번까지 내칠 수 있습니까? 중요합니다.”


팽악과 검을 맞댈때 봤던 것이다. 그의 오호단문도 구결 흐름이 독특하다는 것을. 익힌 심법과 도법이 다른 방향에 맞닿아 있었던 탓인데, 미세한 부분을 감각적으로 잡아냈다.


아마 근래 들어 수련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평시 쓰는 무공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겠지.


“아마 지금 몸 상태로는 세 번이겠군.”


잠시 턱을 매만진 팽악이 답을 내놓았다.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선봉입니다. 제가 지시할때 도법을 펼쳐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왜 네놈 말을.”

“첫 번째는.”


백연이 팽악의 눈을 응시했다. 또렷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이윽고 그가 픽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좋다. 네게 패배한 몸이니 한번 어울려 주지.”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써 주십시오. 하늘을 향해.”


건곤연환탈백도. 여러 공능이 있지만 가장 큰것은 지천을 울리는 그 거대한 소리이다. 음공과 비슷한 위력이 있는데, 마치 범이 포효하는 것과 같다. 위압적인 신공인 것이다.


“당신의 도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없는 전장. 첫 합을 효율적으로 쓸 생각이었다.


“전장의 북이 될겁니다.”



※※※



운연동공, 삼원검, 화신풍, 낙안권.


곤륜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기초 무공들이다. 한 문파의 일원으로써 익히고 있는 것이 당연했는데, 한순간도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보법 화신풍.


바람을 엮어낸 걸음이다. 여러 묘리가 섞여 있는데 그 깊이가 가볍지 않았다. 기초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해서 대충 만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시당초 뿌리가 깊어야 크게 자랄 수 있는 일이니.


한걸음에 스며든 묘리가 오묘한데, 아직 채 십분지 일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 단휘의 발끝에서 펼쳐지고 있는 화신풍은 성취가 드높았다.


“쥐새끼 같은 놈이!”


휘익!


좌상단에서부터 짓쳐오는 검격. 분명 어제까지 밥을 먹으며 인사했던 무인이다. 삽시간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돌변해 공격해 오는 것이 당황스러울 만도 하건만, 단휘는 담담하게 검을 휘둘렀다.


카앙!


잠시 검이 얽혀들며 불꽃이 튀고, 다음 순간 단휘는 걸음을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자연스레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던 검이 옆으로 스치며 그의 몸을 비껴 지나쳤다.


겁이 없는 움직임이다. 동시에 그가 자세를 비틀며 한발로 몸을 지탱했다.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낮게 짓쳐들며 회전한 순간.


피잇.


은빛 검신이 허공을 갈랐다. 횡격으로 지나친 검이 상대방의 늑골을 파고들었다. 예상키 어려운 일격에 상대의 얼굴이 일순 당황으로 비틀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풀썩 쓰러지는 시체를 뒤로하며 단휘가 걸음을 내딛었다.


발치에서 일어난 기파가 몸을 휘감으며 길쭉하게 이어진다. 기파가 유려하게 이어지는데, 백연의 보법과는 사뭇 달랐다.


언제나 연습해온 보법. 잠잘때를 빼면 항상 모든 걸음에 화신풍의 보법 구결을 담았다. 자연히 몸놀림 자체에 바람이 깃들 수 밖에 없었는데, 기파를 단타로 터트리듯 이용해 격렬한 가속을 선보이는 백연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람을 다룬다.


지금 이 움직임을 백연이 봤으면 칭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적했겠지. 이렇게 검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리라고.


“......언제 오냐. 사제야.”


중얼거리며 단휘가 검을 휘둘렀다.


사방이 불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 지옥도와 비슷했다. 불타는 전각들 사이 사방 골목에서 무인들이 검을 휘두르는데, 서로 얽혀 싸우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단휘 자신도 백연의 경고대로 깨어있지 않았다면 처음 그의 방을 침입한 습격자의 검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젠장.”


아는 얼굴이었다. 그를 습격한 무인은. 종종 수련중에 검을 맞대기도 했었는데, 그의 보법이 유려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호인이었다.


일지파의 소학이라 했던가. 습격하며 그를 공격하던 움직임에서 그의 보법을 파악하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평시 그와 손을 섞을때 알아둔 것이겠지.


“저놈부터 죽여라!”

“거참-.”


휘익!


단휘의 신형이 이지러졌다. 부드럽게 휘어진 바람결이 상대의 옆을 스쳤다. 자세를 낮추며 내친 검격. 삼원검 구결이 펼쳐지며 단휘의 검이 사선으로 뚝 낙하했다. 피가 허공에 분수처럼 튀어올랐다.


일검에 한명을 격살했는데, 동시에 짓쳐 들어오는 다른 검이 매서웠다. 옆에서 찔러들어오는 일격. 찰나에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몸을 비틀어 어깨를 검 앞에 내세웠다.


푸욱.


어깨를 찌르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단휘가 검을 휘둘렀다. 경악이 섞인 무인의 눈동자에서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어깨에 박혀든 검을 뽑아내며 단휘가 기침을 흘렸다.


“고향에 온 것 같구만.”


쿨럭. 옅은 기침 사이에 피가 섞여 나왔다. 연이은 전투에서 입은 내상이 가볍지 않았다. 어깨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핏물. 재빨리 허리끈을 풀어 자상 위로 질끈 동여맸다.


그때였다.


“거기, 곤륜의 무인분?”


단휘가 번쩍 시선을 돌렸다. 어지러운 전장 속에서 한 사람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칼이 핏물로 물들어 있는 여인. 아는 사람이었다.


“위 소저?”

“황산의 위소선입니다. 괜찮으신지요?”

“괜찮긴 한데.”


단휘가 검을 치켜들었다. 자연스레 그에게 다가오려던 위소선이 멈칫하며 물러났다.


“죄송합니다만, 간합에 들어오지 마십시오.”

“이해합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단휘는 경계를 놓지 않으면서 주변을 살폈다. 다가오는 다른 놈들은 없었다. 전각 사이사이 흐르는 피가 짙었는데, 이쪽 골목에서 덤벼오던 놈들은 그의 검에 전부 쓰러진 듯 했다.


“단휘 소협. 맞으시지요?”

“제 이름도 알고 있었습니까?”

“암화 소협과 같은 곤륜의 무인분인데,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저번 토벌도 함께 했지 않습니까.”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여태까지 덤벼오던 다른 무인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단휘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 토벌 당시 황산쪽의 녹림을 찾아 안내하던 무인이 이 사람이었다. 평시 백연에게 다가와 선물을 주고 가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근데, 혹 암화 소협은 괜찮은지......?”


단휘가 피식 웃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놈이 안 괜찮으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라.”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예측한 놈이다. 지금쯤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을 터.


“여하간 그놈이 올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하는데......적이 많군요.”


단휘가 짧게 중얼거리는 순간. 위소선의 신형이 갑작스레 움직였다. 그녀의 보법 기세가 거칠게 풀려나왔다. 들고 있는 검이 재빠르게 허공을 가르는데, 그 끝이 향한 방향이 단휘의 바로 옆이었다.


푸확!


핏물이 뿜어져 나오며 단휘의 뺨을 적셨다. 뜨끈한 혈향에 단휘가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닦아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검을 거두며 물러서는 위소선. 단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언제 튀어나왔는지 모를 검객의 목이 잘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상당한 무위의 검격. 용봉지회에 단신으로 참가한 만큼 뛰어난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였나.


아직 그보다 한참 강한 무인이었다. 힘의 격차를 느끼며 단휘가 한숨을 뱉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이제 다가가도 될련지요.”

“하하.”


짧게 웃음을 섞은 위소선과 단휘. 이윽고 두 사람이 검을 들고 주변을 응시했다. 사방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많았다.


“다른 무인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쉽지 않을진데.”


위소선의 말에 단휘가 머뭇거렸다.


사고가 달랐다. 정파 무인. 협의를 자신의 안위 앞에 놓고 움직인다. 지금의 전장에서 살아남는 것 보다 타인을 구하는 것을 우선시 하는건가.


현실적인 실익을 따지는 그와는 달랐다.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 섣불리 움직이다간 목숨을 내던지는 꼴이 될지 모른다. 당장 최선의 움직임은 전장을 벗어나는 것인데.


“최소한 세 분은 확실히 아군입니다. 현월검룡과 청운룡, 그리고 비룡께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이 워낙 많았던지라 가까이 가지는 못했습니다만.”


위소선이 담담히 말했다.


고민하던 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쪽으로 가죠.”


칠룡은 아마 위장하기 어려울 터. 정파 무인인 척 숨더라도 그 수준이 일정 이상으로 넘어가면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다. 뇌룡을 가장한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구파나 세가의 무인들도 왠만하면 아군일 확률이 높다.


그렇게 두 사람이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음?”


단휘가 시선을 들어올리는 순간. 대기가 비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순간 모여드는 기파의 흐름이 강렬했다. 피부로도 느껴질 만큼.


동시에, 전각 너머 저편에서 한 신형이 훌쩍 뛰어올랐다. 지붕을 밟고 뛰어오른 것인지. 구름 사이로 새어나온 달빛 아래 스친 거대한 도신이 번뜩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야차(夜叉)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잡-것-들-아!”


잔뜩 들이킨 호흡 속에서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내력으로 증폭된 거대한 고함소리가 귀를 찡하게 울리고.


“저 사람은.”

“도룡?”


그와 함께 거대한 도가 휘둘러졌다.


느릿하게 대기를 짓쳐가는 모습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는데, 종격으로 이루어진 도식에 담긴 기파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다중으로 엮여든 기파. 한순간 사방의 대기가 일제히 도신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듯한 감각이 몸을 뒤덮고.


쩌어어엉!


일순 거대한 도신을 따라 지천을 울리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우레와 같은 소리 속에 담긴 공력이 무지막지했다. 찰나에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충격이 연이어 짓쳐왔다. 속에서 울컥 토혈이 올라올 정도였다.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감각 속에서도 단휘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먼저 뛰어오른 팽악의 뒤로 보이는 세 개의 그림자. 날랜 몸짓으로 뛰어오르는 무인들의 모습을 보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위 소저. 저들이 왔......!”

“호오. 저게 도룡이오? 그 뒤는 암화고? 뇌룡에, 독룡까지.”


단휘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부릅뜬 위소선. 입가에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휘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무슨.”

“......단휘 소협. 도망을.”


그녀의 무복. 가슴팍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원형으로 둥그렇게 나 있는 구멍의 모습이 작았는데, 선명하게 관통한 자국이었다.


직후. 허공을 스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작은 무언가가 휘익 날아 펼쳐진 커다란 손바닥으로 회수되었다. 마치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듯 날아다니는 모습. 허공섭물 같은 기이한 기예를 보며 단휘가 눈을 들어올렸다.


위소선의 뒤, 골목의 가운데.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서서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뒤룩뒤룩 살이 찐 거대한 덩치. 입고 있는 옷이 더없이 화려했는데, 핏물 한 점 묻어있지 않은 것이 전장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쯔읏. 본 방주는 본래 밑지는 장사는 절대 안하는 주의오만.”


혀를 찬 사내가 손바닥에 회수된 물건을 자연스레 손가락에 끼워넣었다. 두툼한 손가락을 따라 반짝이는 여덟개의 반지. 손을 비비며 단휘를 응시하는 웃음이 날카로웠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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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영물 +7 23.11.08 4,547 94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4,377 9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4,524 101 19쪽
112 네가 돌아올 곳(9) +7 23.11.01 4,473 92 20쪽
111 네가 돌아올 곳(8) +6 23.10.30 4,561 91 17쪽
110 네가 돌아올 곳(7) +7 23.10.27 4,683 91 20쪽
109 네가 돌아올 곳(6) +6 23.10.25 4,803 90 17쪽
108 네가 돌아올 곳(5) +7 23.10.23 4,873 99 16쪽
107 네가 돌아올 곳(4) +7 23.10.20 4,965 97 19쪽
106 네가 돌아올 곳(3) +9 23.10.18 4,931 100 20쪽
105 네가 돌아올 곳(2) +9 23.10.16 5,028 102 20쪽
104 네가 돌아올 곳 +6 23.10.13 5,193 105 16쪽
103 태청신공(太淸神功)(4) +8 23.10.11 5,258 102 18쪽
102 태청신공(太淸神功)(3) +8 23.10.09 5,052 111 16쪽
101 태청신공(太淸神功)(2) +8 23.10.06 5,129 116 16쪽
100 태청신공(太淸神功) +12 23.10.04 5,534 117 25쪽
99 네가 만든 마을(9) +7 23.10.02 5,205 107 24쪽
98 네가 만든 마을(8) +7 23.09.29 5,147 114 21쪽
97 네가 만든 마을(7) +7 23.09.27 5,134 108 20쪽
96 네가 만든 마을(6) +10 23.09.25 5,203 114 22쪽
95 네가 만든 마을(5) +8 23.09.22 5,292 107 19쪽
94 네가 만든 마을(4) +8 23.09.20 5,283 107 20쪽
93 네가 만든 마을(3) +7 23.09.18 5,520 105 24쪽
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638 113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891 106 18쪽
90 신강(4) +6 23.09.11 6,082 114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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