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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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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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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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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귀의 검, 곤륜의 검(3)

DUMMY

※※※



청성파(靑城派).


사천 청성산에 자리잡은 도가 문파이다. 그 기원이 공동과 함께 가장 오래된 도가 문파인데, 건곤(乾坤)을 바탕으로 한 무공이 더없이 드높다 했다.


풍(風)기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검법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어 바람을 타고 다니는 도사들이라는 인식이 짙다. 그 검이 운연동공의 풍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싶어 백연 자신도 살펴본 적이 있기에 더욱 잘 알고 있다.


특히 청운적하검법(靑雲赤霞劍法)의 이름이 천하에 드높다. 청성의 장문인이 그 검으로 사마외도를 수없이 격살한지라.


공동과 더불어 강호 정파의 벽인 것이다. 서쪽 신강의 마교를 막아내는 방파제와 같은 검문.


그 위업이 마땅히 존경 받을만 하다.


청성파를 사칭한 지금 눈앞의 검객과는 다르게.


“너희, 청성파의 무인들을 어떻게 한거지?”


카가각!


여휘검이 허공을 가르며 대기에 시뻘건 자욱을 남겼다. 검끝에 매달린 불꽃이 어둠속에 감춰져 있던 상대방의 얼굴을 비춰내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검을 막기에도 급급해 입을 벌리지 못하는 모습. 숨결에서 새어나오는 사이한 내공이 짙었다.


“죽어라!”


동시에 사방에서 연푸른 무복을 휘날리며 검을 찔러 들어오는 인영들이 있었다. 제각기 뻗어내는 검격이 살의를 짙게 담고 있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근본없는 검이다. 그 일격이 살수의 검과 닮았다.


직전까지 맑은 기도를 위장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한순간 백연 자신의 기감에도 잡히지 않는 위장술. 그가 공격하고 난 이후에야 진신 무공을 드러냈다. 사파의 사이한 살검이다.


그 검격이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백연은 짧게 호흡을 끊으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후욱.


호흡 마디 사이에 불꽃이 갇혔다. 적양공의 날뛰는 기운을 의식적으로 통제하에 두었는데, 그 관리가 전보다 쉬웠다. 검왕과의 대화에서 얻어낸 깨달음이 불꽃을 다스리는 것에 영향이라도 주었는지.


하단전에 품어낸 불꽃이 아래 혈도를 타고 뻗어나갔다. 그의 발치에 이른 불꽃. 터지듯 흩어져 나오는 내공을 담아 보법을 일으켰다.


“너네한테 손속의 여유를 두고 있는 건.”


보법 화신풍.


공간을 장악하고 간합을 가져오는 걸음이다. 그 가능성이 깊었는데, 그저 보법으로만 쓰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무공에 제한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제왕검형의 권역을 활용하는 방법이 인상 깊었다. 전혀 다른 무공이라 하나 그를 통해 얻어낸 감각도를 통해 활용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안법을 알려주던 검왕.


사이에 몇마디 말을 가볍게 덧붙였다. 넌지시 흘러가듯 던진 말이나 때로 초월자들의 말 한마디는 수백의 영감보다 더 확실하게 본질을 꿰뚫어본다.


-네 무공은,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무공이로구나. 아직은 용(龍)이 되지 못했으나 그 끝은 어떠할고.


백연은 그 말을 허투루 흘려듣지 않았다. 자신의 무의식에 담긴 의념은 무공을 창조하던 순간에 새겨져 들어간 것이다. 그 의념의 본질을 파고드는 것 만으로도 무공의 기세 자체가 뒤바뀐다.


언제나 제왕의 길을 추구하던 남궁처럼, 하늘에 이르려 하는 길을 추구하는 무공.


“청성파의 무인들이 어찌 되었는지 알기 위해서일 뿐.”


화르륵.


혈맥을 따라 일어난 불꽃이 발바닥 용천혈을 따라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추진 경파로 삼지 않았다. 동시에 그의 허벅다리를 타고 짙은 바람이 솟구치며 사방을 휘감았다. 걸음 하나에 담아낸 묘리가 여럿이었다.


백연의 걸음 끝에 휘감긴 불꽃. 짧게 낙하하는 모습이 일순 별이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걸음이 진각을 밟는 순간.


쿠웅-!


바람을 휘감은 화염의 폭풍이 주변을 휘감았다. 일보(一步)에 담긴 기파가 주변을 찢으며 휘몰아쳤다. 한순간 그에게 달려들던 무인들이 전부 불꽃에 휘감기며 검을 떨구었다. 백연의 주변 공간이 일순 화끈하게 달아오르며 작열하는 열기로 진동하고.


“적화검류.”


권역 안에 들어선 무인들을 향해 새빨간 불꽃의 검신이 수십의 검로를 그어냈다. 찰나에 뻗어나간 검격이 꽃잎처럼 흩어지며 살점을 찢고 뼈를 잘라냈다. 허공에 비산하는 핏물은 삽시간에 열기에 말라 증발했다.


단 일합(一合).


청성의 무인으로 위장한 살수 여섯이 바닥을 나뒹군다. 하나같이 팔다리가 잘려나간 모습. 열기로 익어버려 오히려 피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모습이 처참했다. 그럼에도 비명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를 노려보는 모습에 백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같잖게 검이나 섞으려고 봐주고 있던 것이 아닌데. 착각하고 있나봐.”


저벅.


한걸음을 내딛은 백연이 무릎을 꿇으며 살수중 하나와 눈을 맞췄다. 반쯤 불타버린 무복 사이로 은회색으로 일렁이는 비도 한자루가 보였다.


청성파 도위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놈.


만금장의 하수인이 분명한 놈을 보며 백연이 여휘검을 치켜들어 그대로 내리꽂았다.


“끄윽......!”


찰나지간 다물린 잇새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응시하며 백연이 기운을 일으켰다. 흐르는 불꽃이 검신을 타고 검에 관통된 놈의 허벅다리에 스며들어갔다. 불타는 쇳덩이가 살을 파고드는 상황에서도 부서질듯 이를 악물고 참는 놈의 모습.


“청성파. 어찌 된거지. 말해.”


백연의 말에 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이러십니까, 소저? 무고한 청성의 무인을 죽이다니......하하!”

“하나.”

“끄악!”


중얼거린 백연의 손이 움직였다. 찰나에 허공을 스치고 제자리로 돌아온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놈의 손가락 하나였다.


“......하, 하. 여긴 무덤이다. 무덤.”

“둘.”

“끄아아악!”

“말해.”

“그런다고 내가 순순히......”

“다섯.”


우드득.


한번에 남은 손가락을 전부 뜯어낸 백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강한 충격에 떡 벌어진 놈의 입 사이로 소리없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한순간 눈빛에서 공포가 엿보였다.


그럼에도 이윽고 숨을 가다듬은 놈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흐......흐하. 이제는 뜯어낼게 없군.”

“베어낼건 있지.”


여휘검을 꽂아둔채로 손을 뻗은 백연이 백철 비도를 놈의 품에서 꺼내었다. 가볍게 그것을 손으로 돌린 백연이 그대로 비도를 놈의 팔뚝에 꽂아넣었다.


“지금부터 네 가죽을 벗겨버릴 생각인데, 절대 입 열지 마. 알았지?”

“무슨......흐아악!”


주욱. 비도가 살갗을 가르자 놈의 동공이 수축했다. 찰나에 스치는 고민의 눈빛. 이윽고 그가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려는 순간 백연의 손이 빠르게 움직여 놈의 입을 파고들었다.


우득.


어금니에 숨겨져 있던 독약. 통째로 이빨을 뽑아버렸다. 줄줄 새어나오는 핏물을 뱉어내며 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살수들의 자살 수법. 진부하기 짝이 없다. 한두번 상대해본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놈이 결국 입을 열었다. 팔뚝 전체를 찢어놓기 직전이었다.


“마, 말하겠다. 제발 그만......!”


백연이 무감한 시선으로 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청성파의 무인들. 어떻게 했지?”

“죽였다. 산채로 인피면구를 만들었지. 하하!”


백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순간 짙은 살의가 그의 머리를 헤집었으나 억눌렀다.


“언제.”

“......처음부터.”

“처음부터라 함은?”


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용봉지회에 도착하기 전. 애초에 청성파는 천주산에 온 적이 없다. 이미 죽었으니까.”

“청성파만 그랬나?”

“아니. 말했잖나. 여긴 무덤이라고.”


그의 눈이 희번득거리며 백연을 응시했다.


“시체들이 가득한 무덤이다. 이곳에 모여든 무인의 절반은 말이야.”


백연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의 시야 너머로 불타는 전각들이 보였다. 저 멀리 자리한 전각. 정파 무인들이 단체로 모여있는 곳. 그런줄만 알았는데.


애초에 정파 무인들의 절반 가까이는 이곳에 오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한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백연의 귓가로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걸어다니는 시체지. 나머지 절반도 곧 그리 될테고.”



※※※



“후우.”


숨결을 따라 흩어지는 독무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길게 흩날리는 장포 너머로 손을 휘두르자 한줄기 선이 그어졌다. 실체화 된 독물. 사방으로 펴져나가는 것이 평범한 움직임이 아니다. 독물 자체에 내공을 담아 흩뿌리는 것이다.


“만독. 청린마화(靑燐魔火).”


화악!


한순간 손끝에서 터져나온 독물이 푸른 빛을 띄었다. 쾌속하게 대기를 가른 독이 살수 셋을 덮치고.


“삼켜라.”


당소하의 기파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짙은 청색 화염이 살수를 집어삼켰다. 상대방의 몸을 파고들어가, 체내의 내공을 전부 푸른 염화(炎火)로 바꿔버리는 극독. 적이 강할수록 강력해지는 독이다. 그야말로 마화라는 이름에 걸맞는 악랄한 무공.


그 여파가 가볍지 않았다. 당소하 본인도 한순간 아찔하게 밀려오는 어지럼에 머리를 짚었다. 잠깐의 휘청임이 그의 기세에 빈틈을 만들었다.


살수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사방에서 그를 향해 날아오는 신형들. 찰나의 틈새를 노릴만큼 잘 훈련된 살수들이다. 뛰어난 움직임. 그러나 당소하는 무심히 그들을 힐끗 응시할 뿐이었다.


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회천. 찰(扎). 일섬(一閃).”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이다. 잡것들아!”


콰아앙!


일순 눈이 멀듯이 번쩍이는 창술이 한줄기 선이 되어 시야를 가르고, 직후 귀를 찢는 우레같은 소리가 뒤따랐다. 각기 악가와 팽가의 무공들. 울리는 이름이 드높았다. 삽시간에 그를 향해 짓쳐오던 살수들이 꿰뚫리고 터져나갔다.


한호흡을 벌어주는 움직임. 당소하가 뿌린 독무를 들이마시면서도 자유로이 움직인다. 해독제를 먹은것과 더불어 그들의 내력이 고강하기에 가능한 상황.


그가 청린마화를 쓴 직후 흔들리는 것을 보고 들어온 것이다. 말없이 이어지는 연계가 오랜 기간 손발을 맞춘 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내가 앞이다, 계집!”

“여전히 시끄럽군요. 광룡 주제에.”


우웅.


장법을 내친 손을 회수하며 반바퀴 몸을 돌리는 움직임이 거칠었다. 팽악의 거대한 도가 허공을 향해 지켜져 올라갔는데, 도신을 따라 휘감기는 기파가 여러 줄기였다.


“오호단문도. 백호산군(白虎山君)!”


콰앙!


한순간 모여든 기파가 다섯 갈래로 나뉘며 제각기 뛰쳐나갔다. 그 모습이 더없이 무질서해 보였는데, 사이사이 섞여든 움직임이 그렇지 않았다. 거대한 범이 긁어낸 것 마냥 깊게 패인 대지. 앞에 서 있던 살수들의 몸 또한 마찬가지로 찢겨나갔다.


뒤이어 허공을 격하는 창끝이 매서웠다. 어둠속에 녹아든 악예린의 신형이 바람처럼 짓쳐 나가며 창을 내뻗었다. 한순간 흘러나온 목소리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회천. 찰. 뇌우(雷雨).”


피잇-!


푸른 빛이 일고, 대기를 가른 창격이 분열하며 시야를 가렸다. 번뜩이는 빛줄기 하나하나가 전부 창격이었는데, 그 속도가 거의 동시에 내지른 것 처럼 보였다. 극한의 쾌속에 달한 수십의 창격이 살수들을 향해 쏟아지며 오호단문도를 받아낸 이들의 숨통을 끊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소하가 숨을 들이쉬었다.


악예린과 팽악이 세 호흡을 더 벌어주었는데, 그 사이 모아낸 기파가 대기에 진득하게 내려앉았다.


여전히 그의 사방을 둘러싼 살수들. 수십에 달하는 숫자가 적지 않았다. 당장 팽악의 모습만 해도 부상을 달고 싸우는 움직임. 소모전으로 가는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만독.”


들어올린 당소하의 손바닥을 타고 기파가 휘몰아쳤다. 흡착과 발산을 반복하는 그의 기파가 대기에 퍼진 기운을 그러모았다. 혈맥에서 흐르는 내공이 얽혀들며 더없이 강력한 독성으로 조합되고.


“혈화(血花).”


짧은 중얼거림과 동시에 강렬한 내공 기파가 독성을 품고 터져나갔다. 찰나에 그것을 느낀 악예린과 팽악이 그대로 양쪽으로 몸을 날렸다. 살수들은 그러지 못했다. 대기를 가득 채워나간 당소하의 기파가 살수들의 몸을 타고 달라붙으며 끈적하게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푸화악!


살수들의 몸에서 일제히 핏물이 터져나왔다. 일순 시야가 전부 붉게 물들 정도의 혈액이 휘몰아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핏물이 마치 꽃잎과 같은 형상이었다.


칠공분혈(七孔噴血).


피를 격렬하게 쏟아낸 살수들이 일제히 목각인형처럼 쓰러져내렸다.


전부 즉살이었다.


아찔한 어지러움이 당소하의 머리를 강타했다. 잠시 비틀거리며 무릎을 짚은 그의 곁으로 두 사람의 인영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독룡!”

“무식한 놈. 그런 위험한 기술을 쓸때는 예고라도 하고 써라. 나까지 죽을뻔 했군.”

“후......네 녀석한테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은데.”


손등으로 턱을 닦아낸 당소하가 몸을 바로 세웠다.


신공 만독을 거둬들인 후에도 여전히 그 여파가 남아 몸안에 감돌았다. 아직 유지할 여력은 꽤 남아있었으나, 당장은 체력을 아껴야 했다. 이곳에 있는 적들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따라올 놈은 따라와라.”

“저기로 간다고?”

“독룡.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잠시 운공이라도 하고 가는 것이 어떤지요.”


당소하가 기파를 일으켰다. 그의 발끝을 따라 퍼져나온 기운. 악예린과 팽악을 힐끗 쳐다본 그가 그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뒤편에 들려오는 팽악의 욕지거리를 무시하면서였다.


“망할놈. 굳이 걸어서 사지로 들어가는......”


휘익.


주변의 풍경이 흐려지며 당소하의 신형이 질주했다. 경공 기파가 뒤편으로 길게 늘어졌다. 전각을 향해 달려나가는 걸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도착하면 만독은 일단 봉인이군.’


저기에 있는 무인들 모두가 그의 독을 버티고 살아남기는 어렵다. 암기로 싸우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으면 아군을 죽일지 모르는 일이니.


재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이 바빴다. 지금 이곳을 습격한 이들. 아군과 적군이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의 절기인 만독마저 봉인하고 싸워 살아남아야 한다. 다른 정파 무인들을 지키면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문득 생각하던 당소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어느때보다도 죽을 위험이 높다. 당가의 소가주로써 싸워서는 안되는 전장에 뛰어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발을 빼고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옳거늘. 어째서인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쯧, 하고 혀를 찬 당소하가 질주하며 중얼거렸다.


“빨리 와라, 백연. 내 목숨값은 비싸단 말이다.”


그때였다.


그의 시야 한켠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침없이 달려나가던 당소하가 기파를 거두며 멈춰섰다. 언젠가 스치듯 본 무인의 형상. 용봉지회에 참여한 정파 무인들 중 하나다.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모습이 위급해 보였다.


“거기. 현가의 현오라 했던가. 괜찮나?”

“......으, 독룡님?”

“말을 아껴라. 부상이 심하군.”


빠르게 달려간 당소하가 품에서 짧은 침을 꺼내들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옳은 일. 부상당한 무인을 버려두고 가기는 어려웠다. 지혈만이라도 해두고 가면, 뒤에 따라오고 있을 뇌룡이 무엇이라도 해줄터.


“지혈을 할테니......”


중얼거리며 침을 꽂아넣으려던 당소하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의 복부 근처에 느껴진 차가운 감촉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옆구리를 따라 튀어나온 은빛 검신의 모습이 선연했다.


기척과 살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단단히 훈련받은 살수의 수법.


‘방심을.’


그가 현오라고 알고 있던 무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며 입가를 찢었다. 섬뜩한 표정을 보며 당소하가 기침을 뱉었다. 입가를 따라 흘러내리는 핏물의 향이 더없이 진했다.


“......내 가문에서 암습을 당했을때도 이리 칼침을 맞아본 적은 없는데 말이지.”

“독룡이 제발로 와서 검에 찔려줄 줄이야. 그러게 도망을 갔어야지. 안 그래?”


킬킬 흘러나오는 웃음 소리가 귀를 찢었다. 기분 나쁜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며 당소하가 기파를 일으키려 시도했다. 하지만 검상이 너무 깊었다. 당장 체내 혈맥을 붙들어 기절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여기가.”


스릉.


한자루의 단검이 무인의 뒤에서 뽑혀나왔다. 단검을 치켜든 무인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네 무덤이다. 독룡.”


피잇-!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검이 대기를 갈랐다. 번뜩이는 검광을 보며 당소하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 생각하고 살았지만, 그것이 여기였을 줄은 몰랐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당소하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 용봉지회에 출발하기 직전에 사천에서 보았던 붉은 불꽃. 객잔을 점하던 소년의 화려한 검격이 머리속을 채웠다. 그 연배에 나올 수 없는 실력. 자신감. 감각과 언행.


탁월했다. 보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거짓과 음모, 협잡으로 점철된 가문 내에서 살아가는 그의 입장에서 소년의 시원시원한 걸음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유독 호의를 가지고 대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소하는 소년을 믿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이 죽더라도 소년이 있어서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그것 때문일까. 마지막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이 불꽃인 이유는.


아니면......


“빨리 오라면서-!”


화르륵!


대기를 가르는 강렬한 열기가 그의 정신을 화악 일깨웠다. 시야 저편에서 낙하하는 불꽃이 그대로 그의 앞으로 떨어지며 수십으로 분열했다. 별 조각이 땅에 낙하하는 듯한 화려한 움직임.


그와 함께 흩어진 불꽃의 검격이 제각기의 검로를 그려내며 눈앞에 짓쳐오던 단검을 하늘 높이 쳐내고.


“정신 안 차려?”


휘익!


산들바람을 휘감은 소년이 그의 앞에 착지했다.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불꽃의 검격이 횡으로 번뜩였다.


일격에 무인의 목이 허공으로 날았다. 비산하는 핏물을 등지고 선 모습.


대체 언제 저런걸 구해 입은건지 모를 새하얀 궁장을 걸친 소년. 언제나와 같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연다.


“목숨값, 비싸다고 했지. 이건 얼마로 쳐줄래?”


그야말로.


“......늦은 놈이 말이 많군”


암화(暗火)였다.


작가의말

연재 주기가 주 3일, 월수금으로 변경 되었습니다. 혹 공지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작가의 말에 추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지를 확인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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