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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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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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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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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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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그날의 이야기

DUMMY

백연은 하령을 응시했다.


그 음성에 한치 거짓도 없다는 사실은 듣자마자 깨달았다. 그럼에도 멍하니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천마라 하셨습니까?”

“맞아. 그게 그의 이름이었지.”


고금제일을 논하던 괴력난신. 삼봉과 함께 태조를 도와 명을 건국한 무(武)의 정점. 동시에 태조를 배신한 마도(魔道)의 괴물.


그를 칭하는 별칭은 여러가지가 있다. 허나 그 누구도 천마를 이름으로 칭하지는 않는다. 백연 그 자신도 지금까지는 천마의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늘.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너무 멀게 느껴져서일지도 몰랐다.


천마라는 존재는 여러 별칭으로 불리며, 그만큼 아득한 인물이기도 하니까. 한때 이 땅을 거닐었던 설화와 같은 인물.


그러나 하령은 그런 이의 이름을 친근하게 입에 담는다. 한때 스쳐갔던 인연을 그리워하듯이.


그제서야 백연은 어렴풋이 실감할 수 있었다. 하령은 정말로 오랜 약속을 지키고자 살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천마 또한 실제로 이 땅을 거닐었던 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무연......”


백연이 중얼거렸다.


혀끝에서 이름을 굴리듯이 나직히 담아낸다. 부드러운 음절 속에서 백연은 문득 그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무당산에 무연봉이라는 장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말에 하령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답했다.


“그래? 한때 삼봉과 무연은 친우라 할 수 있는 사이였으니......적어도 명의 건국 당시까지는 그러했지. 그런 장소가 있다면 아마 우연은 아닐거야.”

“천마의 이름을 따서 말입니까?”

“천마가 아니라, 돌아오지 않을 친우의 이름을 새긴것이 아닐까.”


말하며 소매로 입을 가리고 후후-웃는다. 백연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암야서고의 안쪽을 응시했다.


“......그럼 이곳에 천마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소리군요.”

“맞아. 무연이 태조를 떠난 이후 황실에서는 대대적으로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소거시켰지만, 이곳까지 파헤치지는 못했지.”


하령이 손을 들어올렸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암야서고를 따라 흐릿한 불빛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허공을 누비며 서고를 밝히는 수없이 많은 불빛들. 별무리처럼 사방을 채운 불빛 사이에서 앳된 성화방주가 중얼거렸다.


“무연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예 사라지기를 원치는 않았어. 때문에 흔적을 남기고자 했는데, 누군가는 그것을 지켜야 했지.”

“그걸 하령에게 맡긴 것이군요.”

“평생 부탁하던게 없던 녀석이 어느날 그런 말을 하면 거절하기도 곤란하고. 내 나름대로 할일도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맡았다고 해야 할까.”


아득한 과거의 이야기를 태연히 입에 담는다.


“그렇게 나는 암야서고의 문지기가 된거지. 그 존재 자체가 이곳을 열고 닫는 열쇠이자, 죽지 않는 암휘군(暗輝君)으로써. 그리고-”


백연을 힐끗 돌아보며 짓는 미소가 더없이 상냥했다.


“당금 무림의 신성, 암화의 스승님으로써.”

“......스승이란 말에 집착하십니다 어째?”

“왜, 싫어?”

“싫은 것은 아니지만.”


맑게 웃은 하령이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우선 암야서고가 무연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는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무연이 남긴 것을 제외하고도 이곳은 천하에 손꼽힐 비고.”

“그렇지요.”

“때문에 무연의 물건을 전해주려면 꽤 많이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 하지만.”


하령이 소홍을 돌아보았다. 여태껏 말없이 따라오던 백연의 사형이 멈춰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전해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백연 혼자 뿐이야. 나조차도 그 내용은 몰라. 그것을 지키다가 전해주는 것이 내 역할의 끝이었으니까.”

“......기다리면 되는거야?”

“같이 기다리자는 거지. 소홍, 맞지? 기다리는 동안 암야서고의 비급을 마음대로 봐도 좋아.”


그 말에 소홍의 시선이 백연을 향했다. 이어 툭 내뱉는 말이 황당했다.


“백연, 좋은 스승님이네.”

“......하하.”


헛웃음을 지은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여튼 저 혼자 가야된다는 거군요. 어디로 가면 되는겁니까?”

“이리 손을 내밀어 볼래?”


백연이 손을 뻗자 하령이 그것을 쥐었다. 뒤이어 하령이 백연의 손바닥 위로 입술이 스칠듯 고개를 숙였고.


후우.


옅은 숨결과 함께였다. 찰나지간 하령의 몸을 타고 흐린 빛이 화악 일더니, 그가 뱉은 숨결이 한없이 짙은 색채를 띄고 방울방울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물방울이 허공에서 점점 커지는 듯한 형상.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연의 손 위에는 투명한 백색의 광채를 발하는 커다란 방울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그게 길을 안내해줄거야. 놓치지 않게 조심하고.”

“손에 힘을 주면 터진다거나 하는건 아니죠? 지금 조금 무서운데.”

“아마도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

“아마도?”

“혹시 만에 하나 빛이 꺼지면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나도 장담은 못하거든.”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것이 여간 신나보이는게 아니었다. 백연은 하령을 향해 미심쩍은 표정을 한번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가서 무연이 네게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보고 와.”


고개를 끄덕인 백연이 걸음을 떼었다. 손을 들어올리자 백색 방울이 둥실 떠올라 천천히 한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손바닥 위에 있음에도, 기운의 흐름으로 그를 한쪽 방향으로 이끄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걸음 가는대로 어둑한 암야서고의 사이를 따라 걷기를 한참.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감각이 서서히 무뎌질 때쯤이었다.


사박.


소년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이어 의문섞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문?”


끝없이 늘어선 서고 사이, 방울진 빛이 더 이상 그를 이끌지 않는 시점이었다. 백연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작은 문이었다. 암야서고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문을 잠시 응시하던 소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것을 열었다.


끼익.


옅은 신음소리와 함께 안에 들어선 순간, 낡은 종이의 향취가 코끝에 확 일어났다. 사방을 따라 가득 채워진 서적들과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종이 조각들. 빛바랜 과거의 시간 속에서 그대로 떼어다 놓은듯한 붓 몇개와 금방 전까지도 쓰다 나간듯한 작은 책상.


바닥에 앉아 쉴새없이 붓을 놀렸을까.


기백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아마 암야서고에 감도는 기운이 시간에 마모되어 부서지지 않게 보호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사용하던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바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


“무연.”


백연의 시선이 벽을 가득 채운 책과 종이에 가 닿았다가, 이내 저편 한 구석에 치워진 작은 찻잔과 찻물을 끓이는 주전자를 향했다.


천하를 오시하던 천마는 저런 취미가 있었던 것인가.


다분히 그의 취향이 묻어나는 장소였다. 모든것이 압도적인 영감의 해일로 다가오던 삼봉의 흔적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동시에 삼봉의 무흔만큼이나 백연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앞,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두 권의 비급.


아니었다.


“......이야기와 무공의 뿌리를 전해준다 했었지.”


비급은 한권. 나머지 하나는 달랐다. 가장 겉장에 담백하게 써져있는 글씨.


일기(日記).


아무런 미사여구도 없이 단정하게 써내려간 필체에서 언뜻 그 성정이 엿보이는 것도 같다. 이제 세상에는 남아있지 않은 한 사람의 이야기.


그 본인이 직접 남긴 삶의 궤적일 것이다.


“......무엇을 먼저?”


백연은 고민했다.


비급과 일기장. 천마가 남긴 두가지 흔적중에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마의 무학은 그 자체로써 천하를 뒤흔들 보물이었으나, 그보다 백연의 관심을 잡아당기는 것은 그의 이야기였다.


역사에서 지워진 과거. 천마 무연이 세월을 건너 남기고자 한 흔적에 담긴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


백연은 천천히 손을 뻗어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직후 길다란 손가락이 그 겉장을 가벼이 넘겼고-


다음 순간.


촤르르르르륵-!


한순간 손끝에서 겨울 바람처럼 시린 진기가 흩어져 나왔다. 동시에 일기장의 종이가 멋대로 넘어가기 시작. 백연의 의지와 관계없이 휙휙 넘어가는 종이 사이 사이로 새겨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쿵. 쿵.


단정한 필체로 빼곡히 써내려간 글씨를 인지할때마다 머릿속에 둔중한 울림 같은것이 스친다. 언뜻언뜻 보는 것 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일기장에 새겨진 기록이 그저 단순한 글자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슨 기운이......!’


문자 하나하나에 서린 영성이 한없이 짙었다. 빨려들것만 같은 정신을 붙잡으며 백연이 버티던 그 순간.


탁.


일기장의 종이가 넘어가는 것을 멈추었다.


동시에 소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유달리 흐트러진 필체로 적혀있는 문장이었다.


[홍무(洪武) 이십육년(二十六年). 소한(小寒)의 보름 뒤.]


[양국공(凉國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급히 황도로 복귀하여 덕유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직접 검을 들고 역도(逆徒)의 무리를 징죄하러 움직였다니. 왜 당신은......]


그 순간.


촤르르륵!


백연의 귓가에 종이가 흩날리는 소리가 스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얀 종이자락이 흩날리는 듯한 착각.


굽어지는 시야 속에서 백연은 심호흡과 함께 눈을 크게 감았다 떴고.


다음 순간.


“말해주십시오.”


눈을 뜬 백연의 앞에 펼쳐진 것은 화려하고 압도적인 전각의 기둥들. 그리고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며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늙수레한 노인이었다. 주름진 얼굴 너머로도 느껴지는 강인한 근골. 곰을 연상케 하는 외양과 은연중에도 흘러나오는 기세가 그가 뛰어난 무인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백연은 곧바로 깨달았다. 지금 이 노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은 그였으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부우덕(傅友德) 어르신. 덕유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무연.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으나.”

“어르신.”


사박.


한순간에 서리처럼 내리깔리는 음성이 짙었다. 시야 가장자리로 흔들리는 짙은 흑발이 보였다.


“말해주십시오. 덕유......아니, 오국공(吳國公) 주원장이 또 누구를 죽이러 갔는지.”


후일 천마라고 불리게 될 청년, 무연이 말했다.



※※※



모든 감각이 한없이 예리하게 살아난다. 오감은 물론이요 기의 흐름을 읽는 눈까지도. 외려 과다한 정보가 머리속으로 쏟아지는 탓에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무연의 몸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백연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


백연은 그리 생각했다. 놀라웠으나, 그렇게까지 경악할 일은 아니었다. 천마는 고금에 이름을 새길 절세의 무인.


그가 남긴 일기장이 법보 비슷한 것으로 변해있다 하더라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정도 절세고수의 영성이 조금이라도 스며들었다면 그 자체로써 왠만한 법보는 압도할 물건이 될테니까.


그러나 이런 형태는 생소했다. 마치 무연의 일기 속으로 그대로 들어온 느낌.


그날 그가 겪었던 일을, 그대로 무연의 눈으로 보면서 경험하고 있는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어째서......”


홀로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음이 빠르다. 길게 늘어져 흔들리는 흑발은 밤하늘을 그대로 녹여낸 것처럼 생겼는데, 백연은 그 형태가 익숙하다 느끼고 있었다.


‘그냥 내 몸에 들어온 것 같기도 한데?’


시야가 조금 더 높고, 팔다리 간합이 조금 더 길쭉한 것을 제외한다면 큰 차이가 없었다. 전체적인 외양은 거울을 볼 기회가 없어 알 수는 없었지만.


한편 지금의 상황은 꽤나 흥미로웠다.


직전 부우덕이라고 불린 노인. 아무래도 장수인 듯 했는데, 무연을 어려워 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지속된 추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넌저시 말끝으로 흘리는 것이 그랬다.


-궁에는 안계시네.


모호한 답이었다. 허나 그것만 듣고도 무연은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이 무연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오는 것이 눈에 띈다. 한눈에 보아도 무연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들의 눈에는 천마를 대하는 공포심이나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경외심과 존경만이 새겨져 있었다. 간간히 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인망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천마라는 이름은 존재하지도 않는건가.’


아니, 아마 있긴 할 터였다. 원(元)에서도 천마라 불렀다고 알고 있었다. 건국 전쟁동안의 그의 무위가 지나치게 압도적인 탓이었다.


허나 그것은 지금의 천마와는 다른 의미. 적어도 지금의 중원인들이 아는 천마는 아직 없다고 봐야겠지.


그때였다.


“무연!”


늙수레하면서도 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에 고개를 번쩍 돌린 무연의 시야에 한 풍채 좋은 노인이 들어왔다. 지저분하고 해진 옷을 입은것이 평범한 농사꾼이나 어부에 가까운 복식이었다. 허나 주변의 그 누구도 그 노인이 오가는 것을 말리지 않는 모습이 특이했다.


“탕화(湯和) 어르신! 은퇴하신 분이 어쩐 일로......”

“소식을 들었네. 남옥(藍玉)이 죽었다 하여.”

“저도 그래서 급히 황도로 돌아왔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요.”


옅은 물기마저 묻어나는 무연의 음성에 탕화라 불린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양국공 남옥이 모반을 저질렀다 들었네. 하지만 그것이 정말인지.”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자네야 그렇겠지. 아직도 원의 잔당과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 고생이 많네.”

“모두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없는 사이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군요. 그렇잖아도 이선장(李善長) 어르신이 죽은 이후로도.”

“무연.”


늙수레한 음성에 경고가 실렸다. 탕화가 무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자네라도 조심하는게 좋을걸세. 역모죄로 죽어나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야. 물론 황상께서 자네를 지극히 아끼는 것은 알고 있네만......”

“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옳은 것인지. 근 십여년간 죽어나간 사람의 피로 바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연의 음성이 흐릿하게 일렁였다. 그 속에 섞여든 고통이 진했다.


“처음에도 모반이었지요. 그때는 증거가 많았습니다. 이유가 있는 처분이었고, 과하더라도 뿌리를 뽑는 것이 그의 신조였기에 눈감았습니다. 그 뒤로 제가 바깥을 나돌때마다 반복입니다. 죽고, 또 죽고......”

“자네 탓은 아닐세.”

“정녕 그렇습니까? 그가 이 자리까지 온 것은......”


툭.


백연은 문득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따스하고 투명한 물이 턱을 타고 발치에 떨어져 내렸다.


직후 소매로 눈가를 훔친 무연이 입을 열었다. 한층 탁해진 음성이었다.


“......우선은 그를 찾아야겠습니다. 황궁에 없다 하더군요.”

“내 방금 들어오며 들었네. 군이 움직였다 했어. 북쪽의 벌판으로 갔다 하더군.”

“감사합니다.”


무연이 곧장 몸을 돌렸다. 이어 뒤에서 들려오는 늙수레한 음성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자네는 홀로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듯 하군. 미안하네.”


직후였다.


저벅.


무연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백연의 시야가 한차례 크게 기울었고.


콰아아아아-!


파도 같은 소리가 귓가를 휩쓸었다. 다음 순간 백연이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황궁의 안이 아니었다.


삽시간에 희게 물든 시야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이 눈에 들어온다.


허공을 따라 흩날리는 눈발이 부서졌다 합쳐지며 바람을 타고 춤춘다. 느릿하게 대기를 유영하는 눈보라 아래로 보이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인영들.


검창(劍槍)을 들고 갑옷을 입은 군문의 병사들이 수천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수배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맨발과 해진 옷으로 눈밭 위에 모여 떨고 있는 사람들.


“......어찌.”


그 위로 투명한 음성이 떨어졌다.


저 아래 펼쳐진 눈밭을 내려다보며 무연이 허망하게 중얼거린다.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백연에게도 전해지는 듯 했다.


본래 희었어야 할 눈밭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시야 아래 들어오는 드넓은 대지 위.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눈밭은 붉은빛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과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


그 앞에 선 한 사람이 있었다. 군의 가장 앞에 서서 검을 쥐고 있는 강골(强骨)의 사내.


한마리 범같은 외양의 무인을 눈에 담은 무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원장.”


명의 태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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