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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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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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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검흔(2)

DUMMY

※※※



천마 무연. 그에 대한 설화나 소문은 더없이 무성하고 수도 없이 많지만, 실제로 전해지는 명확한 사실은 없다시피 했다.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은 신교. 교는 천마를 숭배하고 우상화하는 종교의 일종인 까닭에 그의 기록을 철저히 숨기고 은폐하며 자신들만의 보배로 삼는다. 백연은 그들이 천마의 일생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해도 자신들이 숨기고 알리지 않을 이들이다.


신교가 이야기하는 것은 실제 인물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낸 천마라는 하나의 상징에 대한 설화. 그렇기에 마도에서도 천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전해지며 어느것이 진실인지조차 알 수 없다.


반면 중원 무림은 좀 달랐다. 중원 무림에서 천마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기백년 전의 악인이었다.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라는 칭호답게.


그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하나다.


‘황실이 은폐시켰으니까.’


태조의 명 아래 천마에 관한 모든 기록은 역사에서 철저히 지워졌다. 남아있는 것은 역시 황실에서 알리고자 하는 작은 내용 뿐. 그들이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잔재와, 건국 과정에서 천마가 일조하였기에 필연적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기록만이 중원 무림에서 천마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해서 벌어진 일이 있었다.


호사가들이 흔히 논하는 주제.


천하 무당의 장삼봉은 장법과 검법의 대가였다. 그 흔적은 지금까지도 무당파의 절기들에 남아 흘러내려온다.


그렇다면 동시대에 이 땅을 거닐었던 천마는?


“본래는 적수공권(赤手空拳)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


백연이 중얼거렸다.


곁에서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며 전진하는 백사를 따라 걸으면서였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간혹가다 전해지는 그의 무공에 대한 묘사에 병장기가 나온적이 없어서가 가장 크고.”

[......]

“하늘을 구부려 원(元)의 일천 기마군세를 일격에 절멸시켰다......이걸 듣고 누가 검법을 떠올리겠어.”


그렇게 말한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는 보았다. 하령이 건넨 일기장 속에서.


“물론 십팔반병기를 비롯한 기문병기나 적수공권조차도 절세지경이었을 테니 무엇이 그의 진신 무기냐는 의미 없을 괴물이지만.”

[......]

“그래도 그 기반은......”


소년이 손에 쥔 백색 검신을 내려다보았다.


검(劍).


결국 검이었다. 왠지 모르게 기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검귀는 검 한자루에 오롯이 삶을 바쳤으니까.


그런 까닭이었다. 지금 걸어가는 소년이 묘하게 들떠 있는 것은.


“우선은 선란을 채취하려 했지만.”


이리 된 이상 일의 순서를 바꿀 생각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연 본인의 검흔. 그 형세를 다시 한번 눈에 담고 익혀낼 수만 있다면 커다란 수확일테니까.


그렇게 걷기를 잠깐이었다. 좁은 동굴을 지나 커다란 공동에 도착한 백사는 똬리를 틀며 거체를 들어올렸고, 공동의 기둥이라도 된 양 몸을 일으킨 채 백연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 번뜩이는 두개의 붉은 동공이 휘영청 떠오른 적월(赤月)마냥 선명했다. 그것을 힐끗 올려다본 백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잘 지키고 있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니까.”

[......]


그의 음성에 반응한 두개의 붉은 달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픽 웃은 백연이 중얼거렸다.


“살다살다 영물한테 호법을 받아보는건 처음이네.”


말을 던지고 걸음을 옮겼다. 소년의 발끝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어느새 그 눈은 자령안 기파로 형형하게 빛나는 중이었다. 선란이 있을 방향과 다른 쪽으로.


한번 갔던 길은 이미 소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저 보는 것 만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울 길에 들어서자마자 주변 사방의 시야가 어둠을 이끌고 가라앉는다.


흡사 무영방주의 월영신공 그림자에 휩싸인 것 마냥.


‘아니,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이야.’


자령안의 음률 바깥으로 휘도는 동굴의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인지된다. 일전에 왔을 적보다 더욱 감각이 예민해졌기 때문일까.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이곳의 구조가 독특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비단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길 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들어오는 길부터, 백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공동, 그리고 선란이 있는 장소와 이곳저곳을 뻗어나간 길들까지도.


‘생각보다도 더-’


훨씬 넓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길들이 일정한 형태와 구조를 띄고 연결되어 있다. 분명 불규칙하고 자연적인 공간임에도, 소년은 그 형태에서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맥이라도 되는 듯이......?’


선란이 그렇게 잘 자라는 이유를 알법도 했다. 허나 그것이 전부는 아닐 터. 백연은 점차로 기감을 넓혀가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를 한참.


돌연 소년이 우뚝 멈춰섰고.


“여긴가.”


발끝에 닿아오는 돌바닥의 감촉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가 기감을 거뒀다. 광대하게 펼쳐졌던 소년의 감각이 삽시간에 수축하며 끌어당겨진다.


그러자 곧바로 느껴진다. 호흡하는 공기마저 다른 기운을 품고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내려앉는 장소.


한껏 일으킨 자령안의 시야가 춤추듯 이지러진다. 어둠 속의 반구(半球)형 천장이 끝없이 올라가며 어둠을 품에 안고 아래를 굽어본다. 묵빛 밤하늘처럼.


희미하게 일렁이는 검은 천장 아래에서 백연은 고개를 꺾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령안으로 인해 춤추듯 이지러진 시야에서도 언뜻언뜻 일렁이는 기운들의 흐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허나 소년은 알고 있었다. 저 위에 새겨진 것들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인지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


누군가가 남긴 무흔(武痕). 그 누군가가 무연이라고 이제는 반쯤 확신하고 있다. 그만큼 상리와 이해를 아득히 넘어선 무학은 아무나 쉬이 남길 수 없는 것인 까닭에.


설령 초월에 닿은 무인이라도 그러하긴 어렵다. 백연의 눈은 언제나 스스로보다 높은 것만을 좇아왔고, 그로써 발전을 거듭해왔다. 단지 초월의 무학을 본다고 몸이 상할 계제는 아니다.


삼봉이 무당산에 남긴 무흔은 인지하는 것 만으로 해일같은 자연지기를 그의 몸에 찰나 동화시켰고, 자칫하면 쏟아지는 진기 여파에 잡아먹힐 위기를 초래했다. 그 스스로가 기운을 이끄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아마 쉬이 잡아먹혔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곳의 어둠에 가린 흔적은 과연 어떠할까.


일전에는 그에게 주화입마를 불러 일으킬 뻔 했던 무학.


허나 소년은 이제 달라졌다. 일신의 무위도, 익힌 무학의 수준도.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무연.’


그의 눈으로, 아주 잠깐이나마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천금의 보화와도, 천하제일의 무공과도 바꿀 수 없는 천고의 기연.


소년이 가냘픈 청년의 기억에 깃든 한순간, 백연은 곧 무연이었고.


그로써 백연은 찰나 이해와 상리를 초월해 무연의 경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이해에 앞선 경험. 본래라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펼칠 수 없는 무공을 몸으로 펼치는 감각을 어떻게 느낀단 말인가. 허나 백연은 그런 모순됨을 겪었다. 그 덕분에 청성산에서 잠시나마 천마의 무공의 편린을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니.


결과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체득하고, 그로써 이해를 역으로 끌어낸다면.


‘이곳의 검흔도.’


그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연은 그리 생각했다.


“뭐, 시도하다가 주화입마에 걸려 폐인이 되는 수도 있지만......?”


긴장된 웃음을 뱉은 소년이 허리춤의 여휘를 뽑아들려다가 멈칫하곤 천마의 검을 쥐었다. 길다란 손가락이 검파를 휘감았다.


이것이 천마의 흔적이라면, 모든것을 그에 맞게.


잠시나마 다시금 일기장 속의 그를 떠올리며.


백연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조금 더 가냘픈 자안(紫眼)의 청년.


숨을 들이키는 순간, 소년은 누군가의 손을 잡듯 검파를 부드럽게 쥐며 꿈결같은 일보(一步)를 내딛었고.


비스듬히 사선으로 그어올린 검끝에 어느새 눈부신 화염의 꽃비가 매달려 비상하는 그 찰나. 그 자리에는 더 길다란 머리칼을 나풀거리는 청년의 그림자가 춤추고 있었다. 비상하는 검로로 어둠을 그러안은 천장에 다시 한번 검흔을 새기기라도 할 듯이.



※※※



깡! 까앙!


곤륜파의 전각들과 조금 떨어진 산자락. 연이어 울려퍼지는 망치 소리가 둔중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조금 더 힘을 주세요. 망치를 잡은 손에 화염을.”

“후우......!”

“불꽃은 호흡이에요. 숨결로 조절하는 것인데, 육체를 풀무로 삼아 휘두른다고 생각하시면 좋아요.”

“호오. 이렇게인가.”


화르르르륵!


짙은 적색의 화염이 거한의 한팔을 휘감으며 떨어진다. 휘몰아치는 화염을 두르고도 망치를 거침없이 내리치는 철야방주. 여간 즐거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그 곁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선아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좀 더 균일하게.”

“힘은 균일하네만.”

“불의 세기가 문제에요......잠깐. 그건 망쳤어요. 가백금이 되었으니 다시 처음부터 하죠.”


쿵.


망치를 내려놓은 철야방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왼손으로 쥐었다. 찰나지간 치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주변 사람의 시야를 가린다. 직후 식어버린 가백금 덩이를 내던진 철야방주가 새로운 백철 덩이를 집어 올려놓던 그때-


“왔다는 소식만 듣고 어딜 갔나 했더니, 이곳에서 배우고 계셨군요. 천하의 철야방주가 제자라는 구도는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노래하는 듯한 맑은 소년의 미성.


빗방울이 툭 굴러 떨어지는 듯한 음색에 선아의 눈이 화악 커지더니 이윽고 만면에 미소를 활짝 지은 그녀가 외쳤다.


“백연!”


그리고는 달려가 몸을 던지기까지가 한순간이었다. 뒤늦게 찾아온 보법 여파에 수증기가 훅 흩어지며 철야방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돌아왔구나!”

“당연하지. 너희는 별일 없었고?”


날듯이 돌진한 선아를 가볍게 받아낸 백연이 물었다. 선아와 철야방주가 다친곳은 없는지 힐끗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그에 철야방주가 씩 웃으며 답했다.


“아무일 없었네. 헌데 자네는......더 강해졌군.”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어.”


철야방주가 탄식을 흘렸다. 진심으로 감탄과 경악이 섞인 음성이었다.


“무당산에서 본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스무날은 좀 넘은 것 같은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군요.”

“더럽게 짧다네. 완벽한 검 하나를 만들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야. 그 사이에 무공에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고? 허.”

“하나......?”


곁에서 흘리는 선아의 말을 철야방주는 무시했다. 스무날이면 명검 따위는 스무자루도 찍어낼 저 천재와 방주 자신같은 범인들의 기준은 다른 법이기에


“여하간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수라궁이 괴멸했다는 소문은 들었네. 바로 며칠 전에.”

“당가주, 현궁진인과 함께 수라궁주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뿐이지요.”

“궁주가 수라궁의 전부는 아닐 터인데?”

“천독께서 수라궁 군세를 단신으로 절멸시켰습니다.”


그 말에 철야방주는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백연은 잠자코 기다렸다. 철야방주 또한 뛰어난 경지의 무인이니 저만한 이적(異蹟)이 불러올 대가를 알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은 음성의 철야방주가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최대로 잡으면 반년에서 일년 정도일겁니다. 그가 원한다면.”

“당가주가 바뀌겠군.”

“소하가 폐관에 들어갔습니다. 돌아오면 당가주의 자리에는 독룡이 앉아있겠지요.”

“큰 별이 지는가.”


중얼거린 철야방주가 짧게 묵념하고는 이내 거칠게 자란 수염을 매만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솥뚜껑 같은 손이 치익-하는 소리를 수시로 내는데, 그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


“여하간 이해했네. 여러모로 격동의 시대야. 칠방주중 셋이 한곳에 모인것도 그렇고......”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별일은 없었나봅니다.”

“공동의 검객들과 철야방, 곤륜파가 함께 이동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나. 감숙의 근처에서 한바탕 한것 빼면 별일 없었네.”

“남 걱정하지 말고 너부터 걱정해. 어디 다친데는 없어?”


매달려 있다가 이내 백연의 팔다리를 살피는 선아였다.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어찌 대장간에서 검을 손질할때를 보는 것 같기도 한데, 그 사이에 두 사람을 바라보는 철야방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백연은 뒤늦게 알아챘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헌데 자네 그건 뭔가?”


백연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를 바라보며 던지는 질문. 백연은 그것을 들어올려 끈을 풀었다. 안에서 투명한 향기가 후욱 풍겨져 나왔다. 그에 철야방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호오. 상품의 영약이군. 그런걸 대체 어디서?”

“군락지가 근처에 있습니다.”

“곤륜산은 천혜의 보고군. 보니 귀한 쇳덩이도 많이 나던데......”

“그건 저도 금시초문입니다만?”

“내 야장으로써 좋은 재료를 찾는 잔재주가 좀 있으니. 만년한철 검은 관심없나?”


씨익 웃는 철야방주. 백연은 어깨를 으쓱이곤 허리춤의 검 두자루를 톡톡 두들겼다.


“아직은 이거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하긴, 소중한 검이라고 듣긴 했네. 저건 비무제전때 받은거고......자네의 본래 검은 선아가 처음으로 만들어준거라 했지?”

“헤헤.”


생글거리는 선아의 얼굴에 철야방주가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삼켰다.


“보기 좋군.”

“그렇죠?”

“헌데 암화는 모르는......”

“쉿.”

“둘이 무슨 대화를 그리 하십니까?”

“별것 아니네. 헌데 그 선란은 어디 쓸 생각인가?”

“약선객에게 부탁해 약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영단이 아니고?”


선아가 되물었고,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선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눈을 크게 뜬 그녀가 입술을 베어물었다.


“......또 어디 가?”


백연은 흐리게 웃었다.


미안할 따름이었다. 사형들이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럼에도 가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고, 그렇기에 소년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응. 기련산으로 갈 것 같아.”

“기련산? 혈교?”

“왠만하면 싸울 생각은 없어. 다만 그쪽에서 전해져온 소식이 있는데, 내가 찾아가봐야 할 일이라서.”

“......”


그를 올려다본 선아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언제 가는데.”

“아마 사흘쯤 뒤? 그 전에 여기서 이것저것 하고 출발해야지.”

“흠, 그럼 시간이 별로 없군 그래. 나는 혼자 배운걸 수련하고 있을테니 시간들 잘 보내게나.”


그리 말한 철야방주가 망치를 집어들고 다시금 화덕으로 향했고, 그를 힐끗 쳐다본 선아는 백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약선객한테 간다고 했지? 같이 가도 돼?”

“물론이지.”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산맥의 나무들 사이로 떨어지며 춤추듯 허공을 물들였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뭐......잔치를 연다고?”

“그럴거야. 장문인께서 움직이고 계시니까.”

“너를 위한? 좋은걸. 하긴, 비무대회 우승자니까.”


그리 말하며 생글거리는 선아는 언제나처럼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백연은 속으로 그에 감사를 표했다. 오자마자 또 떠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가벼이 대해주는 것이 좋았다. 그가 편하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무당산에서 헤어진 뒤, 그가 겪은 일들과 여기에 돌아와 마주한 것들까지도.


“해서 새로운 신공을 익혀왔는데, 동굴 안의 흔적도 같은 사람이 남긴게 아닐까 했거든.”

“정말 그랬어?”


선아가 물었고,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가 의심했던대로 동굴 안의 검흔은 천마 무연의 것이 맞았다. 그 형태와 형세, 바닥에 찍힌 보법 흔적들까지도 전부 무연의 것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남길 수 없는 무공.


상리를 초월한 아득한 경지의 흔적.


“본래는 처음 본 것 만으로도 죽을 뻔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어?”

“적어도 바로 피를 토하진 않았지.”


백연이 웃었다.


정말로 그랬다. 불빛으로 비춰낸 거대한 천장 아래에서 소년은 검흔을 인지했고, 뇌리에 새겼다. 화인(火印)처럼 뇌리에 박힌 무공의 흔적은 지금 이 순간도 생생하게 머릿속을 수놓고 있다.


허나.


“한가지 문제가 있어.”

“뭔데?”

“그 무공 자체가 이해가 안되서.”


압도적인 영성이 서린 검흔을 보자마자 피를 토하는 것은 이제 넘어섰다. 한순간 비틀리는 몸의 진기를 태허무극결 묘리로써 붙잡은 소년은 천마의 검흔을 인지하는 것 자체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검로는 있을 수가 없는 형태야. 예를 들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검을 긋는다고 하자.”


백연이 손짓하며 검로를 그어낸다. 허공을 따라 그어낸 손짓이 빛을 쪼개며 흩어진다.


“그러면 시작과 끝이 있어. 아무리 초월적인 검법이라 해도, 어딘가에서 시작해 어딘가에서 끝나지. 헌데 그 흔적에는......”


시작과 끝이 없었다. 선후가 없고, 전후좌우를 가르는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검로가 이어질 경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뚝뚝 끊어져 분절된 편린들.


그것은 검흔이라기보단 차라리 부서진 검법의 조각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해가 불가능했지. 무언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 계속 되새기고는 있는데.”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에 잠시 고민하듯 머리칼을 매만진 선아가 물었다.


“그 검흔, 어떤 형태인지 느낌만 좀 알려줄 수 있을까? 혹시 내가 뭐라도 좋은 생각이 날 수도 있잖아.”

“아하하. 당연하지.”


백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하게나마 검흔을 재현한 형태를 선아에게 보여주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그러길 잠시.


“......어, 음. 내가 검법을 잘 아는건 아니라서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선아가 말했다.


“너무 평면적으로 보고 있는거 아니야?”


그녀가 말했고, 백연이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그게......무슨 소리야?”

“음, 그러니까......검을 만들때 야장들은 여러가지를 보거든. 균형이라는 건 단순히 앞뒤만 맞춰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느 자세로, 어떤 방향으로 검을 휘둘러도 똑같은 힘을 실을 수 있어야 해.”


어쩌면 그것은 선아가 검객이 아니었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인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무인으로써 큰게 아닌, 야장이었기에.


“검 한자루는 길다란 직선의 형태를 지니지만, 그 무게중심은 구형(球形)을 기반으로 구상해야 해.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완벽한 검은 만들 수 없어. 할아버지는 언제나 검을 평면적으로 보지 말라고 하셨지.”

“......네 말은. 이 검법도.”

“응. 이거 그냥......날아다니면서 휘두르면 가능한거 아니야? 이 위의 검로부터, 저편 옆까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으면 이어지잖아.”


단순하면서 동시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발상. 검객들이 들었다면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길 말도 안되는 소리였으나. 그렇기에 백연은 이것이 선아가 아니라면 하기 어려운 생각임을 곧바로 이해했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다면.”


소년의 머릿속에서 찰나 모든것이 부서지고 재구축된다. 대지에 발을 딛고 보법을 펼친다는 기본적인 전제부터 지워버리고, 새하얗고 둥그런 공간 속에 한 검객과 천마의 검흔만을 남긴다.


밤하늘 천구(天球)에 휘도는 별무리를 검로로 삼기라도 하는 양.


그 속에서 검객은 여상히 검을 휘둘렀고.


“......!”


백연은, 이해했다.


작가의말

5/25일 토요일은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한 휴재입니다. 곤륜환생을 봐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5/27일 월요일 6시 10분에 다음 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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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검흔(3) +7 24.05.27 1,496 51 16쪽
» 검흔(2) +8 24.05.24 1,626 57 20쪽
269 검흔 +7 24.05.23 1,525 57 15쪽
268 천라방(2) +6 24.05.22 1,549 51 16쪽
267 천라방 +6 24.05.21 1,527 53 15쪽
266 천독(3) +6 24.05.20 1,486 52 15쪽
265 천독(2) +7 24.05.18 1,648 52 18쪽
264 천독 +7 24.05.17 1,519 55 15쪽
263 무극(無極)(3) +10 24.05.16 1,555 56 19쪽
262 무극(無極)(2) +6 24.05.15 1,564 54 22쪽
261 무극(無極) +9 24.05.14 1,592 58 20쪽
260 권마(拳魔)(5) +8 24.05.13 1,576 55 17쪽
259 권마(拳魔)(4) +9 24.05.11 1,692 56 18쪽
258 권마(拳魔)(3) +8 24.05.10 1,555 55 15쪽
257 권마(拳魔)(2) +6 24.05.09 1,573 54 16쪽
256 권마(拳魔) +6 24.05.08 1,641 58 16쪽
255 서주(4) +6 24.05.07 1,656 57 16쪽
254 서주(3) +7 24.05.06 1,658 57 14쪽
253 서주(2) +7 24.05.03 1,930 58 17쪽
252 서주 +6 24.05.02 1,864 55 17쪽
251 푸른 별(9) +7 24.05.01 1,715 61 16쪽
250 푸른 별(8) +5 24.04.30 1,747 56 16쪽
249 푸른 별(7) +8 24.04.29 1,747 60 20쪽
248 푸른 별(6) +6 24.04.27 1,843 57 20쪽
247 푸른 별(5) +5 24.04.26 1,701 55 18쪽
246 푸른 별(4) +6 24.04.25 1,767 56 18쪽
245 푸른 별(3) +7 24.04.24 1,730 63 14쪽
244 푸른 별(2) +5 24.04.23 1,798 63 19쪽
243 푸른 별 +5 24.04.22 1,928 5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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