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9 18:10
연재수 :
300 회
조회수 :
1,550,423
추천수 :
31,071
글자수 :
2,281,455

작성
24.04.10 18:30
조회
1,970
추천
64
글자
20쪽

난세(3)

DUMMY

※※※



방 안이었다. 작은 천 위에 물건을 놓고 묶던 백연이 그 사이에 떨어진 비급을 들어올렸다.


“......”


소년의 시선이 비급의 겉장을 훑었다.


일하곤륜 태청. 청휘의 비급.


원본은 아니었다. 청율 사숙은 그런것을 허투루 관리할 만큼 무딘 사람이 아니었고, 백연 본인도 원본을 여기까지 들고 오는 위험을 감수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필사본도 귀한 물건이었다. 청율의 노동이 듬뿍 들어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휘의 온갖 헛소리와 말도 안되는 이야기나 자그마한 낙서 하나까지 세세히 옮겨놨으니까. 때문에 함부로 다뤄서는 안된다.


즉, 들고 가는 것보단 청율 사숙을 통해 곤륜파에 돌려 보내는게 좋은 방향이겠지.


하지만......


“뭘 그리 고민하고 있나요?”


달칵.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힐끗 뒤를 돌아보자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걸고 있는 청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숙.”

“그건......아하.”


후후-웃음을 흘린 청율이 말했다.


“그냥 들고 가요. 쓸모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아깝잖습니까.”

“그깟 비급, 또 만들면 그만이죠. 원본도 아닌데.”

“괜찮을련지.”

“괜찮아요. 그리고 백연에게 훨씬 필요할 것 같고요.”


그 말을 듣고도 잠시 고민을 하던 백연은 이윽고 비급을 천 위에 올렸다. 소년의 길쭉한 손가락이 천을 꽉 묶고 그 표면을 가벼이 쓸어내렸다.


별것 담기지 않은 작은 행낭이었다. 천 안에 들어있는 비급과 옷가지 하나. 비도(飛刀) 몇자루와 하령이 준 물건들. 약간의 노잣돈과 검을 닦을때 쓰는 기름먹인 천.


행낭 외에는 비단 주머니 하나가 전부였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약초 조금과 제갈명에게서 받은 독초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행낭을 가볍게 걸치고 훌쩍 일어선 소년의 몸에는 검(劍) 두자루가 비스듬히 매여 있었고, 뒤편으로는 깨끗하게 손질된 백청색 장포 자락이 흘러내렸다.


문 밖으로 걸어나가자 청율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망설이다 입을 뗀 그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백연은 그런 것도 잘 어울리네요.”

“무슨 뜻이죠.”

“그리 가볍게 떠나는 모습도 익숙해 보여서, 왠지-”


청율은 입속에서 말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툭 내뱉었다.


“어느날 바람처럼 훌쩍 떠나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네요. 떠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의 등이라고 해야할까.”

“다 쓸데없는 걱정들이 많군요.”


백연이 픽 웃음을 흘렸다.


“금방 돌아올테니 걱정 마세요.”

“다치지 말아요.”

“사숙이야말로. 청해까지 가는 길이 험할겁니다. 일단 섬서 위로 지나 감숙을 거쳐 가는 방향이 좋겠죠. 가급적이면 패흑련주와 검제의 싸움에는 휘말리지 않게......”

“백연이야말로 걱정이 너무 많은 것 아니에요?”

“저도 천성이 그래서.”


희미하게 웃은 백연이 바깥으로 걸음했다. 시야 너머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형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형, 사저들.”

“음? 끝났냐?”

“장문인껜 이미 인사를 드렸으니까.”

“거 빠르구나.”


무진이 그의 머리를 푹 내리눌렀다. 점점 묵직해지는 손아귀에 담긴 힘이 강했으나 백연은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녀와라. 난 패흑련주 모가지를 따놓을테니까.”

“......뭐 그럼 난 궁주라도 잡으라고?”

“너한테는 쉬운 일 아니었냐?”


가벼운 농을 나누듯 대화를 던진다. 이어 다가온 사형들도 한마디씩을 건넨다.


“막내야. 올때 사천 술 한병만 사오지 않으련.”

“무리해서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다치지 마.”

“돌아올 때쯤 새로운 별호라도 생겨 있는거 아니야?”


연청과 단휘, 도현이었다. 뒤이어 다가온 이결이 그를 가볍게 안아주곤 씩 웃었다.


“곤륜산에서 봐.”


마치 다음날 얼굴을 다시 마주할 듯이 태연한 인사. 하지만 그것이 아님은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알았다. 난세가 도래했고, 백연은 사도 육진의 일각에 날뛰는 전장으로 자진해서 가고자 한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을 수도 있는 일이다.


사형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터. 어제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다음날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일도 자주 겪은 이들이다. 그렇기에 외려 태연한 듯이 말한다.


“다녀오면 또 얼굴 못 알아보는건 아니지? 환골탈태는 한번이면 족해.”


생긋 웃은 연비도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검을 어깨에 걸친채로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는데, 언제나 활달해서 좋은 사저였다.


한편 자리에 없는 사람은 셋이었다. 선아와 설향, 그리고 소홍.


“선아는......”

“지금 안에서 일하고 있다. 마무리 지을게 있다던데.”

“아하.”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한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며칠간 뇌룡의 창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던 그녀다. 본래보다 다급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쉼없이 손을 놀리고 있을 터였다.


“어디에 있어?”

“방해하지 말라고 해서......”

“여깄어.”


터벅.


뒤편에서 발소리가 났다. 돌아보자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은 선아가 눈에 들어왔다. 적잖이 지친 기색인데, 날밤을 계속 샌 모양이었다. 피곤한 눈매 아래 묻어있는 여러가지 감정이 눈에 들어왔다.


“완성했어. 방금.”


그렇게 말하며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흰색 천을 내보인다. 흐린 웃음을 지은 그녀가 말했다.


“뇌룡한테 가져다 줘.”

“네가 주는게 더 낫지 않겠어?”


장인은 모름지기 자신의 물건을 목숨처럼 아끼기 마련. 그것을 쓸 무인에게 건네줄 권리는 응당 무구를 만든 본인에게 있다. 그런 의미에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선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는 듯이.


“괜찮아. 네가 주는 것도 난 좋은걸.”

“알았어, 그럼.”


백연은 다가가서 창을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잠깐만......”


후욱.


코끝에 머리카락이 스쳤다. 옅은 열기와 탄내, 금속의 향취와 더불어 은은한 봄 냄새가 감돈다. 선아의 팔이 그를 부드럽게 감싸 껴안았다.


“하아. 피곤해.”


가슴팍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뱉는게 여간 피곤해 보이는게 아니었다. 픽 웃은 백연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고생했어.”

“......위험한데 간다면서.”

“빨리 처리하고 곤륜산으로 돌아갈거야.”

“빨리 온다고 했다?”


슬쩍 물러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선아.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산에서 보자, 다들.”


사형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백연은 걸음을 돌렸다. 선아에게 받은 창을 어깨에 가볍게 짊어진 채로.


직후 소년의 발이 가볍게 땅을 박차 무당의 경내를 갈랐다.


평시라면 이리 보신경을 흩뿌리고 다니는 것은 저어되었겠지만 지금은 문제도 없었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결을 느끼는 것도 잠시.


화아악!


소년의 신형이 빠르게 바람을 가르고 전각들 사이에 착지했다. 무당파 경내 깊숙한 곳이었는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공간이었다. 제각기 병장기를 들고 선 무인들의 기세가 한없이 드높았다.


그들의 면면은 대부분 익숙한 얼굴이었다.


“늦었군.”


한켠에 걸터앉아 손 위로 비도를 빙빙 돌리던 당소하였다.


“인사를 하고 오느라.”

“......다들 무사히 움직이길 바라지.”

“사형들은 알아서 잘 할거야. 공동파와 철야방 일부도 같이 움직이고.”

“그러고 보니 현월검룡은 곧바로 공동산으로 향한다 했지. 공동의 검이면 지금의 관도를 주파하는것에 크게 무리는 없을거다.”


당소하의 말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곁에 서 있던 팽악은 미간을 좁히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네놈은 섬서로 간다고?”

“서안에 갔다가, 다시 사천으로 이동할겁니다. 중간에 길이 한번 갈라지겠죠.”

“......무엇을 얻으러 가는지는 몰라도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군.”

“그럴겁니다.”


백연이 답했다.


그는 하령을 믿었고, 그의 선택을 믿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럼 호북을 나갈때까지는 같이 동행이네요. 잘 부탁해요.”

“그렇죠. 아참, 예린. 당신의 무기입니다.”


백연이 건네든 흰 천을 받아든 악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완성했다 했으니 믿어도 좋을거에요. 선아니까.”

“그래도 이리 빠르게.”


천 뭉치를 쥔 악예린이 그것을 슬며시 풀어낸다. 사이로 비치는 서늘한 광채가 언뜻 백연의 눈에도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날에 서린 예기가 베일듯 예리했는데, 날을 확인한 악예린은 그것을 다시 덮었다.


뒤이어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사해요. 이건......신외지물이군요.”

“예린과 함께 성장할겁니다. 그런 물건이니까요.”

“소중하게 새길게요.”


그리 말하며 창을 꼭 쥐고 그것을 힐끔힐끔 응시하는 악예린. 새로운 병장기를 얻은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리 유독 아이같아 보였다.


한편 옆에서 무언가 빠르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도 백연을 향해 다가왔다.


“백연.”

“암화. 간만입니다.”


유성과 무영이었는데, 각기 검을 패용하고 무복을 늘어뜨린 모습이 만전이라 할만 했다.


“너는 화산파와 함께 가지 않고?”


백연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그에 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내 검은 스승님 곁보단 너희들 옆에 있는게 더 쓸모있을거야.”

“나야 언제나 환영이다만.”

“잘 부탁할게. 이번에도.”


생긋 웃는 유성. 연이어 무영도 손을 내밀었다.


“잠시 섬서를 다녀 온다 들었습니다. 또 어떤 검을 보여주려 그러는지 이젠 기대가 앞서는군요.”

“그 정도로 기대할 필요는......?”


가벼운 어조로 나누는 대화 속. 시야 한켠에는 익숙한 사람의 모습도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사천으로 향하는 맹의 별동대의 일원이었음에도 그랬다.


“사저.”

“응.”

“......진심으로 사천으로 갈거야?”

“응.”


설향이었다. 검을 매만지며 흐릿한 시선으로 백연을 응시하는 모습이 차분했다. 그 스스로가 맹의 별동대에 자원했고 받아들여진 것인데, 백연은 적잖이 걱정되는 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는 눈이 다 나았다 말하는데, 그가 보기에는 영 아닌 까닭이었다.


“위험한데.”

“뇌룡도 가잖아.”

“......그건 예린이니까?”

“너도 가고.”

“그건.”


백연이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는 설향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고집쟁이네.”

“너도 그렇고.”

“뭐......알았어.”


한숨을 푹 내쉰 백연이 말했다.


“그럼 사천에서 내 등은 사저한테 맡긴다?”

“그건-.”


무언가 말하려던 설향이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두고 보면 알거야.”


말하는 표정이 묘했다. 무언가를 기대라도 하는 듯이. 백연은 그것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암화. 준비는 끝났나?”


그때였다. 한켠에서 큼직한 기척이 감각을 점유했다. 한순간에 훅 나타난 기운이 짙었다. 늙수레한 현궁진인의 목소리였다. 수염 사이로 주름진 미소를 지은 그가 말했다.


“별동대는 오늘 오후. 지금부터 한시진 뒤에 출발할 것이네. 미리 알고 있는게 좋을듯 하여.”

“알겠습니다.”

“자네는 섬서에 가야 할 일이 있다 들었네. 이대로 호북을 주파해 잠시 갈라졌다가, 다시 사천에서 만나는 것으로 하지.”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현궁진인이 그의 편의를 많이 봐준 것이었다. 당장 호북조차도 사마외도의 무뢰배들이 물밀듯 넘쳐난다 들었다. 그 홀로 길을 뚫고 달려가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께 움직이면 그것이 훨씬 편하겠지.


하물며 그 선두에 무당검선이라는 괴물이 있는 마당에야.


“그럼 저는 먼저 운현에 내려가 있겠습니다. 철야방주와 논할 것이 있어.”

“그리하게. 운현에서 보지.”


옷자락을 갈무리한 백연이 발끝을 땅에 톡톡 두들겼다.


그와 함께 보신경 경파가 소년의 몸을 바람처럼 휘감았다. 직후 소년의 신형이 길쭉하게 늘어나며 무당파의 경내를 가로질렀고.


파아앙!


거대한 산문 앞에 멈춰선 백연이 호흡을 길게 뽑아내었다. 산문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장 운현으로 질주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거기서 뭐해? 그거 무당파 사람들한테 걸리면 크게 혼난다.”


스르륵.


산문 위에서 옅은 기척이 스치더니 위에서 한 인영이 툭 떨어져 내렸다. 언제나 졸려보이는 듯한 눈매의 사형이 백연을 지그시 응시했다.


소홍이었다.


걸쳐든 행낭과 비끄러맨 검. 그리고 무복까지 완전히 준비를 마친 복장이었는데, 한없이 또렷한 시선으로 백연을 쳐다보며 내뱉는 말투도 여지없이 단호했다.


“같이 가.”


백연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

“......빠르네.”

“왜, 안된다고 할줄 알았어?”

“아니.”

“안된다고 해도 따라올 생각이었으면서.”


백연이 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그에 소홍이 빠르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아?”

“그냥.”


비슷한 사람을 몇번 겪어봐서-라는 뒷말은 삼켜버린 백연이 기운을 일으켰다. 소홍이 함께 가는 것은 본인의 의지지만, 그렇다고 백연이 소홍의 걸음에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기에.


“따라올 수 있지? 우선은 운현이야.”

“걱정마.”


그와 함께 소홍의 발치에도 은은한 기파가 한껏 길게 피어올랐다.


직후 두 소년이 가볍게 땅을 박찼고.


파앙!


텅 빈 산문 위로 봄꽃이 비처럼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



비처럼 흩날리는 핏물이 시야를 가렸다. 어찌 보면 붉은 꽃놀이의 항연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생명을 담고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붉은 꽃잎의 춤사위.


쩌저정!


쇳소리가 귓가를 저몄다. 동시에 곳곳에서 쏟아지는 비명과 고함이 커다랬는데, 그것을 신경쓸 시간도 없었다.


“젠장, 끝이 없군......!”


후웅.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검이 허공을 갈랐다. 직후 휘둘러지는 검신에서 돌연 화염이 꽃처럼 연이어 터져나오며 급격하게 가속. 적화검류의 화려한 불꽃이 전장으로 떨어져 내리며 눈앞의 흑의인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청해 옥수.


곤륜산(崑崙山) 중턱이었다.


신웅은 핏물을 퉤 뱉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럴때마다 연이어 불꽃이 터져나오며 앞의 무인들을 베어내고 짓이겼지만, 끝이 없었다.


쉴새없이 밀려오는 무인들은 대체 어디서 그런 인원이 등장했는지 알 수도 없게 많았다.


신웅의 축기량은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소요전이 벌써 며칠째.


이미 육체는 한계를 넘어섰다. 온몸이 찢어질듯 아픈 단계는 진즉에 넘었고, 이제는 무아의 경지에 다다라 검을 휘두른다 봐도 좋았다.


“조심하시오!”


그 순간 허공을 가르며 묵빛 선율이 쇄도. 어느 순간 전장의 위로 뛰어오른 외팔의 노인이 손을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신웅의 뒤를 노리고 짓쳐 들어오던 무인이 푹 고꾸라졌다.


“고맙소!”

“안되겠소. 곤륜파 경내로 퇴각해 지키는 것이......!”


심후한 공력을 담아 외치는 팔영의 목소리가 신웅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산 아래는 어찌?”

“루주와 하오문도들이 공세를 끊으려 하고 있는데 수가......”


그리 말하던 팔영이 별안간 몸을 뒤틀었다. 직후 한순간 그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가 검을 휘둘렀고.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외팔의 노인의 신형이 수 장이 넘게 날아가 한 나무에 처박혔다.


“커헉......!”


팔영의 입가로 핏물이 한움큼 흘러나왔다. 내장을 진탕 뒤집어 놓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노인은 앞을 응시하며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다.


‘저자는......?’


오랜 기간 많은 정보를 다루며 살아온 그였다. 지금 이 순간 돌연 전장에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 쥐고 있는 검이 유독 거대했는데, 마치 두자루 검을 이어붙인 양 생기기도 했다.


거칠게 자라 넘긴 머리칼은 늑대나 야수의 그것과 닮았고, 거친 눈매 아래로 새겨진 거대한 흉터는 입 전체를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입을 흉으로써 봉한다는 듯이.


더없이 특징적인 외모.


“흑련삼검(黑聯三劍). 이형검마(異形劍魔)?”


패흑련의 삼검중 하나였다. 그것을 깨닫는 즉시 팔영은 모든 공력을 끌어모아 외쳤다.


“도망치시오! 저자는 상대할 수 없는......!”

“너.”


후욱.


쇳소리를 긁는 듯한 소음이 일었다. 동시에 팔영의 앞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어느 순간 성큼 다가온 이형검마가 그를 내려다보며 비틀린 음성을 뱉었다.


“적귀(寂鬼) 흑랑의 수하군.”

“......!”

“죽어라.”


그 순간이었다. 발치의 그림자가 꿀렁이듯 일어나며 문득 한 장신의 사내가 눈앞에 현현. 그림자를 녹여 만든것 같은 비도가 번뜩이며 허공을 갈랐고.


쩌어어엉!


굉음과 함께 이형검마의 거검(巨劍)이 우뚝 멈춰섰다.


“지금은 아니다.”


잇새를 악물며 뱉는 흑랑의 목소리. 뒤이어 뒤편을 힐끗한 그가 뱉었다.


“전부 데리고 물러나라. 산문을 기점으로 경내에서 막아.”

“존명.”


그와 함께 팔영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삽시간에 노인이 전투의 권역을 벗어났다. 뒤이어 울리는 목소리가 커다랬다.


“모두 산문 안으로 물러나시오!”


그것을 들으며 흑랑이 깊은 숨을 뱉었다. 손아귀를 눌러오는 공력이 무지막지했다. 눈앞의 괴물은 패흑련주 아래 패흑련의 가장 큰 전력중 하나인 삼검의 일인. 만전의 그로써도 상대하기 어려운 검객이다. 하물며 지금은 며칠간의 공세로 적잖은 부상을 입은 상황.


“......첩첩산중이군. 어디서 뭘 하고 있다가 이제 모습을 드러내선.”


며칠이나 지나고 나서야 이형검마가 전장에 뛰어들다니. 커다란 변수였다.


지난 며칠간 곤륜파와 무영방, 천라방은 옥수와 곤륜산을 지키며 패흑련의 공세에 대항하고 있었지만 점차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그 숫자가 끝도 없이 밀려오는 까닭에.


그런 상황에서 절세고수 하나가 나타났다. 재해라 봐도 좋았다.


그러나 흑랑의 말에 이형검마는 고개를 갸웃 기울일 뿐이었다.


“홀로 온것은 아니다만.”

“그 무슨......?”

[......!]


그 순간 산맥 어딘가에서 맹호(猛虎)와 같은 사자후가 별안간 터져나왔다. 또다른 흑련삼검중 하나의 현현을 의미하는 심후한 기파에 흑랑이 눈을 부릅떴고.


“하오문과 곤륜파의 잔당들. 전부 청소하고 가도록 하지. 우선은 적귀의 목부터......!”


흉진 입매를 비튼 이형검마가 검을 휘두르며 외치는 그 순간.


쏴아아아아아아-


별안간이었다.


사방의 시야가 돌연 어두워졌는데, 대낮임에도 그러했다. 곤륜산이라 해도 산중턱에 햇살이 가득 비치고 있던 날이다. 허나 지금 이 순간만은 그렇지 못했다.


“......음?”


시야 전체를 따라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가 일제히 늘어난다. 한없이 거대한 범위 아래 모든 것의 색채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짙게 잠식당한다. 마치 이 아래 허락된 색(色)은 끝없이 짙은 흑색(黑色)뿐이라는 듯이.


그것은 한 신공이 정점에 닿은 형태.


[흐음.]


별안간 허공을 적신것은 그림자처럼 늘어지는 한 무심한 음성이었다.


[대리가 저질러 놓은 일을 방관할 수 없어 왔더니.]


후욱.


허공이었다. 그러나 허공이 아니었다. 주욱 늘어진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마치 거대한 파도 마냥 나무 사이로 일어난 거대한 그림자 사이, 한 인영이 그것을 밟고 서서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몸을 따라 새까만 안개같은 것이 물결처럼 퍼져나온다. 그림자를 몸에 두른 양 길게 늘어진 장포는 발치의 그림자에 연결되어 그 끝이 구분이 가질 않았다.


[크게 날뛰고 있었군.]


얼굴을 가린 연기와 그림자 사이로 언뜻 한숨 비슷한게 흘러나온 직후. 사내가 손짓하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악!


사방 대지를 따라 늘어진 그림자가 실체화된 진기 파동이 되어 몸을 일으킨다. 산맥 중턱 전체를 휘감은 거대한 그림자를 손아귀에 쥔 채로 사내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전부, 죽어줘야겠다.]


무영방주(無影幫主)가 말했다.


작가의말

지각 죄송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44 푸른 별(2) +5 24.04.23 1,801 64 19쪽
243 푸른 별 +5 24.04.22 1,933 60 14쪽
242 약속(2) +8 24.04.20 1,959 57 22쪽
241 약속 +6 24.04.19 1,848 54 16쪽
240 북명(北冥) +7 24.04.18 1,881 61 18쪽
239 그날의 이야기(2) +8 24.04.17 1,839 61 18쪽
238 그날의 이야기 +5 24.04.16 1,856 58 17쪽
237 오랜 약속(2) +5 24.04.15 1,934 59 18쪽
236 오랜 약속 +4 24.04.13 2,035 58 20쪽
235 난세(5) +7 24.04.12 1,959 62 16쪽
234 난세(4) +6 24.04.11 1,952 66 15쪽
» 난세(3) +7 24.04.10 1,971 64 20쪽
232 난세(2) +4 24.04.09 2,042 64 16쪽
231 난세 +6 24.04.06 2,223 65 18쪽
230 흔적(6) +5 24.04.05 2,019 62 16쪽
229 흔적(5) +7 24.04.04 2,012 65 14쪽
228 흔적(4) +8 24.04.03 2,031 65 16쪽
227 흔적(3) +6 24.04.02 2,058 64 16쪽
226 흔적(2) +4 24.04.01 2,117 67 17쪽
225 흔적 +7 24.03.30 2,234 65 16쪽
224 결승(5) +7 24.03.29 2,138 60 16쪽
223 결승(4) +8 24.03.28 1,935 62 15쪽
222 결승(3) +6 24.03.27 2,031 62 16쪽
221 결승(2) +7 24.03.26 2,034 68 18쪽
220 결승 +7 24.03.25 2,105 63 15쪽
219 용의 머리(17) +6 24.03.23 2,132 64 18쪽
218 용의 머리(16) +8 24.03.22 2,048 67 17쪽
217 용의 머리(15) +8 24.03.21 2,094 66 19쪽
216 용의 머리(14) +8 24.03.20 2,069 65 12쪽
215 용의 머리(13) +8 24.03.19 2,068 58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