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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 소나 빙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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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타
작품등록일 :
2020.05.11 14:47
최근연재일 :
2020.08.0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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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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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제4화. D-5 (03)

DUMMY

 

 

“무슨 일 있었어?”



내 질문에 찬송은 침음을 삼키며 미간을 좁혔다.



“음······ 말하기 좀 곤란한데······.”

“아, 진짜? 그럼 말 안 해도 돼.”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무안하고······.”



찬송은 고개를 푹 숙이며 뒷목을 쓸었다. 제법 취기가 올라왔는지 평소보다 행동이 느릿했다.



“실은 계약할 당시에 문제가 좀 많았거든.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하나······ 음······ 내용을 좀 갈아엎어야 했달까.”

“그럼 안 쓰면 되잖아.”

“너는 배우라는 새끼가 설정 별로라고 작품 안 하냐? 심지어 돈도 없고 무명인데?”



재호는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쓰다 찬송의 뒷말을 듣고서야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잔을 채웠다.



“시발.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나도 얼추 알 것 같았다.

세상은 우리의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고, 그 속에서 버티려면 수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다.

아마 찬송이 말하는 것도 이 ‘타협’ 중 하나일 것이다.

찬송은 술을 물처럼 한숨에 들이켰다.



“거기다 출간 후엔 타 작품이랑 설정이 비슷하단 글도 들었어. 악녀가 질투에 타락한다든가, 악남이 주인공의 배다른 남자 형제라던가.”

“그 정도는 흔한 클리셰잖아.”

“그건 그런데 사람이란 게 막상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우울해지고. 어쨌든 이래저래 하다 보니 안 보게 되더라고. 고집을 부려서라도 원 설정을 유지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고갤 끄덕이며 작게 수긍했다. 찬송은 그새 잔을 비우고 술병을 들었다.



“나는 작가가 되면 그래도 글만큼은 내가 쓰고 싶은 거 쓸 수 있을 줄 알았어. 작가잖아. 근데 염병, 내가 쓰고 싶은 건 돈이 안 돼. 그래서 정작 쓰고 싶은 건 자꾸 미루게 된다니까.”



찬송의 말에 재호는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아마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는 듯했다.



“원래 창작 계통은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돈 버는 거?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와! 완전 공감! 근데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렇다고 또 놓지는 못 한다는 거야.”

“안정이냐, 꿈이냐. 늘 이게 문제지.”

“맞아. 현실이랑 타협해도 문제야. 솔직히 이 나이에 어디에 취업해. 나 경력도 없어. 이력서 넣어봤자 나이에서 까이고, 면접까지 간다 해도 꼭 물어본다? ‘이 나이 되도록 뭐하셨어요?’”



스물일곱.

절대 많지 않은 나이. 하지만 사회에서 경력 없는 스물일곱은 한심한 취급을 받기가 부지기수다.



“그럼 원래 제집가는 이런 설정이 아니었어요?”



황의 질문에 찬송이 고갤 꾸뻑 숙였다.



“네, 아닙니다. 아예 장르부터 다릅니다.”



얘 취했나 보다.

집까지 데려가는 건 무리인 것 같아 누일만한 곳을 찾을 때 황이 물었다.



“원래는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등장인물 다 죽는 내용.”

“······.”

“······.”

“······.”



우리는 반쯤 경악한 채로 찬송만 바라봤다.

지금만 해도 엄청 죽는데 그보다 더 죽는 내용이었다고?

이 와중에도 찬송은 태연히 술잔을 비우며 부연 설명을 붙였다.



“차원이동자들 개고생하고, 전쟁나고, 그러다 자하룬도 뒤지고 아퀼라도 다 뒤지는 내용이었습니다.”

“······.”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편집부가 왜 반려했는지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확실히 그런 내용은 비주류지······. 뭣보다 주인공이 죽는 소설 안 좋아하기도 하고······.



“······까딱하다간 정말 무서운 곳으로 빙의할 뻔했네요.”

“세계관 거지 같다고 욕했는데, 처음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 만약 얘가 원 설정을 지켰으면······.”



재호가 이마를 짚었다. 그토록 놓지 않던 술잔도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나는 의미 없는 가설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하룬과 아퀼라가 다 죽는 세계관? 심지어 카야가 죽을지도 모르는 세계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근데 왜 갑자기 현실 타임 된 거야?”



찬송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갤 들었다.



“여기 판타지잖아. 우리 빙의했잖아. 그럼 빙의자들 답게 건전한 이야기를 해 보자.”

“빙의자들 다운 건전한 이야기는 뭔데?”

“······그러게. 그게 뭐지? 빙의 소설에서 나올 법한 일들을 해볼까?”



나는 내가 출퇴근 때마다 읽었던 빙의 소설들을 떠올렸다. 빙의물도 하도 많다 보니 온갖 유형이 있었다.

원작을 비트는 건 기본이고, 조연이나 악역하고 연애하는 것도 많았다. 아예 범죄 쪽으로 흘러가는 것도 있었고, 대신 복수해주는 이야기도 있었다.



“문뜩 든 생각인데, 빙의자들 엄청 열심히 사는구나.”



나는 카야의 하루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겨우인데, 걔들은 어떻게 그 많은 걸 다 하지? 심지어 썸도 타고 연애도 한다.

왜 누가 취미도 체력이 돼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반쯤 이해가 갔다.



“이런 거 보면 빙의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닌가 봐.”

“원래 소설은 다 뻥이야. 나도 너희 만났으니까 이러지 만약 이대로 더 살았다? 한 달도 안 돼서 정신병 왔을걸.”



나는 재호의 말에 진지하게 고갤 끄덕이며 잔을 부딪쳤다. 차가운 물이 정신을 일깨워주듯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아, 맞다. 형님 늑대는 어디 있어요?”



황이 육포를 씹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못 본 거 같았다. 어디 갔어? 우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재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놀고 온다고만 했어.”

“그렇게밖에 내보내도 돼?”



불안전한 영혼은 한 쌍이 하나로 움직였기에,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목숨을 잃거나 큰 타격을 입었다. 때문에 나일을 죽이려는 암살 세력은 나일 뿐 아니라 늑대도 노렸고, 나일은 이를 지키기 위해 늑대를 집에 가둬두다시피 했다.


그 행동을 옳다 생각하는 건 아니었으나 대책 없이 내보내는 것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재호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뚱하니 답했다.



“야. 강아지도 집에서만 키우면 우울증 걸려. 하물며 늑대는 야생동물인데 오죽 하겄냐. 걔한테도 자유는 줘야지.”

“그러다 위험해지면?”

“걱정하지 마. 걔가 나보다 더 강해.”



재호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리고 황이 즉각 수긍했다.



“그거야 당연하죠.”



흠칫 떨며 재호의 눈치를 보는 나와 달리 황은 뻔뻔하게 뒷말을 이었다.



“형님 무능력자잖아요.”

“야······ 내가 물 관련 능력을 못 쓸 뿐이지 무능력자는 아니거든?”

“그런 걸 무능력자라고 해요.”

“야······!”



재호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황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게 재호를 더 열 받게 했다. 아무래도 신이 황을 만들 때 눈치 대신 순수함만 집어넣었나 보다.

이대로 있다간 재호가 테이블을 엎을 것 같았기에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근데 늑대한테는 네가 빙의자인 거 들킨 거지?”

“빙의하자마자 들켰지. 혼이 다르단 걸 바로 알더라고. 덕분에 걔가 암살자도 잡고, 전갈도 대신 처리해줬어. 아까 그 뱀도 걔가 잡아준거고.”



그랬구나. 하긴. 단순히 운만 가지고 살아남기엔 나일의 환경이 좀 많이 험하긴 하지.



“늑대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없어도 안전한 게 가장 좋지만.”



재호가 찬송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얘 잔다.”

“어? 진짜?”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찬송이 턱을 괸 채 졸고 있었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찬송이 이렇게 빨리, 또 얌전히 자는 건 처음 봤다.

나는 꾸벅꾸벅 조는 찬송의 손에서 잔을 빼냈다.



“얘 눕혀야겠다. 남는 이불 있어?”

“응, 있어.”

“황이 씨는 늦게 가도 괜찮아요?”

“저도 그냥 여기서 자고 가게요.”

“그래요, 그럼.”

“왜 내 방이 여관이 됐지?”

“MT왔다고 생각해.”

“그니까 왜 그 장소가 우리 집이냐고.”

“엄밀하게 말하면 너희 집이 아니라 나일의 집이지. 그리고 우리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성에서 자봐.”



별궁이긴 하지만 성은 성. 원체 하인이 적긴 했으나, 그마저도 물린 지금만큼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날도 없었다.

나는 찬송을 가뿐히 둘러업었다. 황과 재호가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이게 뭐라고 저러는지. 아, 뭐라고 맞구나. 원래의 나는 다 큰 성인은 못 둘러업으니까.



“집에 돌아가면 헬스부터 끊어야겠다.”



나는 찬송이를 뒤쪽 긴 소파에 뉘어주었다. 그리고 재호가 건넨 이불을 받아 흘러내리지 않도록 잘 덮어주었다.

황은 빈 술병과 다 먹은 안주 그릇을 주섬주섬 치우고 있었다. 나와 재호는 황을 거들며 함께 상을 치웠다.



“예상보다 좀 빨리 끝났네요. 찬송이가 먼저 자는 것도 신기하고.”

“아마 피곤하셔서 그런 걸 거예요. 찬송 누님 오늘 저 때문에 종일 사막 투어했거든요.”



아아~ 어쩐지 찬송이가 평소보다 일찍 취한다 했다.

세 쌍의 손이 움직이자 난장판 같던 테이블이 금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재호는 안쪽 장에서 여분의 이불과 베개를 꺼내왔다.



“황이 넌 앞쪽 방 카펫에서 자라. 그거 오늘 깐 거라 그냥 누워도 될 거야.”



날개 때문에 소파에서 자는 건 무리니, 조금 궁상맞더라도 바닥에서 자라며 재호가 친히 일러주었다.

나는 거기서 독사가 참수당했단 사실을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이규리 넌 어디서 잘 거냐?”

“난 보초 서야지.”

“진짜 안 자게?”

“응.”

“괜찮겠냐?”

“카야 몸 완전 튼튼해서 하루 정도 날 새도 문제없어. 그니까 내 걱정하지 말고 너나 어여 자.”



재호는 뒷목을 쓸며 입을 달싹이더니 알겠다며 고갤 끄덕였다.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나온 재호는 그대로 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는 방의 모든 불을 끈 뒤, 작은 등불 하나만 가지고 창틀 아래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책 읽게?”

“응. 눈부시면 말해.”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낮은 소파 테이블에 다리를 쭉 펴 걸친 채, 책을 펼쳤다. 은은한 불빛에 달빛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딱히 눈이 아프거나 침침하진 않았다.


시린 공기에 담요를 꺼내 어깨에 두를 때, 재호가 불쑥 날 불렀다.



“이규리.”

“응?”

“덕분에 편히 잔다, 고마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나는 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 있어 고른 숨소리가 방안에 퍼졌다.


나와 찬송 그리고 황이에게는 당연했을 밤. 하지만 재호에겐 두 달 만에 맞이하는 밤이겠지.


독사만 해도 그렇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었으면 여길 떠나고 싶은 걸 넘어 신경 쇠약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혼자 이 외로운 세계에 떨어지지 않았고, 빙의는 하나의 동질감이 되어 유대를 만들었다.


우리의 이상한 여행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면 큰 문제 없이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켠 후,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새카만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박혀 있었다.

평화롭고 고요했다.


여주가 등장하기까지 앞으로 닷새.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나흘인가?

나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평화롭고 한적하길 빌며 밤을 새웠다.


그러나 이런 나의 소박한 바람과 달리 이 세계는 우리의 평온함을 바라지 않았다.

여명이 찾아오며 기온이 높아지고 대지가 다시 황금빛으로 물들 때였다. 뿔피리처럼 크고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재호와 찬송 또한 퍼뜩 고갤 들며 일어났다. 오직 이 소리의 정체를 모르는 황만이 반쯤 뜬눈으로 멍하니 머리만 들 뿐이었다.



“······이게 뭐야?”



누가 그 말을 내뱉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한마디에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틀에 매달렸다.

연이어 이어지는 호각과 성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



“밖에 뭔 일 났어요?”



황이 눈을 비비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아무런 답도 못했다. 그저 멍하니 앞만 가리켰다. 저 멀리서 한 명의 전사가 새하얀 백색의 깃을 든 채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제야 황 또한 딱딱하게 굳어갔다.


분명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꿈을 이루어줄 존재, 여주가 오는 날의 묘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나흘이나 빨리 발생하고 말았다. 아퀼라와 루에르의 2차 국경 전쟁이.


 

 

 

 

.


작가의말

이제 모든 떡밥도 던졌겠다, 본격적인 스토리로 들어갑니다.....

근데 제가 3주간 갑자기 추가적인 일을 하게 되었어요 ㅠㅠ 중요한 시기에 왜 하필 ㅠㅠㅠ 연주가 뜸해도 이해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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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3화. 능력 좀 확인하겠습니다. (02) 20.08.07 146 2 13쪽
7 제3화. 능력 좀 확인하겠습니다. (01) 20.08.07 32 2 13쪽
6 제2화. 제1회 빙의자 대책 회의 (02) 20.08.06 149 0 12쪽
5 제2화. 제1회 빙의자 대책 회의 (01) +1 20.08.06 36 2 12쪽
4 제1화. 개나 소나 빙의자 (03) 20.08.06 57 2 12쪽
3 제1화. 개나 소나 빙의자 (02) +1 20.08.05 87 2 12쪽
2 제1화. 개나 소나 빙의자 (01) 20.08.05 79 2 12쪽
1 프롤로그. 20.08.05 84 2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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