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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 소나 빙의자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모타
작품등록일 :
2020.05.11 14:47
최근연재일 :
2020.08.09 23:23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792
추천수 :
19
글자수 :
58,414

작성
20.08.0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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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1화. 개나 소나 빙의자 (02)

DUMMY

 

세상일이란 게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건 나도 찬송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튀어나올 거라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나는 손 그늘을 만들며 찬송을 향해 물었다.

뜨거운 태양 빛이 정수리 위에서 내리쬈고, 숨을 내쉴 때마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폐 속 가득 들어찼다.


찬송이 땀을 훔치며 힘겹게 답했다.



“······뭔데?”

“이거 원작 내용 아니지?”

“······.”

“변수 없을 거라며.”

“······.”

“장담한 작가님 어디 가셨죠?”

“······그 작가님 절필했어.”



찬송이 씁쓸한 말을 내뱉으며 먼 모래 언덕을 쳐다봤다.

나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오아시스가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지금 우리는 프롤로그 시작 전과 마찬가지로 북쪽 오아시스에 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발을 담그진 않았다. 대신 오아시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모래보다 화사한 황금색 머리칼과 새카만 눈동자. 강직한 자하룬과는 다르게 커다란 대형 견처럼 순하고 수려한 외모. 그리고 등 뒤에 달린 커다란 날개까지.


페르치 인의 특징과 서브 남주의 묘사를 빼닮은 청년이 마치 눈 오는 날의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곧이어 그가 이쪽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이브락 님! 카야 님!”

“······.”

“······.”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일리아스만 바라봤다.

원작에선 없었던 내용.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 될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건의 발단은 오늘 오전으로 돌아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를 마친 난, 전날 찬송과 약속했던 데로 함께 일리아스를 맞이하러 갔다.


그 사이 무슨 일을 꾸민 건지 나는 이브락의 일일 호위가 되어있었다.

별다른 의심 없이 같이 다닐 수 있는 건 좋았으나 역시 많은 이들과 어울리는 건 아직 불편했다.


바싹 긴장한 나와 달리 찬송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역시 원작자는 원작자라고 찬송은 이브락이 했을 법한 대사를 내뱉었다.


이럴 땐 카야가 비중이 없는 캐릭터인 게 참 다행이었다. 캐해석이 틀려도 의심을 살 일이 없으니 말이다.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일리아스가 빨리 오길 기다릴 때, 커다란 마차 한 대와 호위들이 왕국의 성문을 열고 들어왔다.


길을 매끄럽게 달리던 마차가 모두의 앞에 멈췄다.

곧이어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내렸다.


일리아스 페르치. 페르치 인의 왕자이자 제집가의 서브 남주였다.

그는 자하룬에게 다가 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위대한 피에게 인사 올립니다.”



일리아스가 아퀼라 인의 예법으로 인사를 올렸고,



“심장의 상징께 인사 올립니다.”



자하룬 또한 페르치 인의 예법으로 인사를 받았다.

자하룬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일리아스에게 형식적인 말을 건넸다. 오느라 힘들지 않았냐, 연회를 준비해놨다,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라 등등.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일리아스의 등에 달린 커다란 황갈색 날게만 보였다.


페르치 인은 제집가의 다섯 종족 중 유일하게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다. 물론 비행도 가능했다.


그들에게 날개는 커다란 자부심이자 미의 기준이었고, 일리아스는 페르치 인 내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조류라곤 병아리와 비둘기가 전부인 나에게 일리아스의 날개는 내 상황을 잊게 할 만큼 환상적이었다.


나는 홀린 듯 일리아스만 쳐다봤다. 그때 갑자기 일리아스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어라?’



놀라 눈만 깜빡이자 이번엔 그의 시선이 자하룬과 이브락에게 향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퍽이나 다정해 나는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분 탓인가?’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일리아스만 바라봤다.

하지만 정말로 얼떨떨한 일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작은 부탁을 하나 해도 괜찮을까요?”



읽은 적 없는 대사가 일리아스의 입에서 나왔다.



“뭐든 편히 말씀하십시오.”



자하룬이 차분히 답했다.

자하룬의 목소리엔 불편함이나 곤란함 같은 건 들어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순수한 호의 그 자체였다.

일리아스도 그 사실을 느꼈는지 해맑게 말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왕도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안내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말과 함께 일리아스의 시선이 찬송에게 닿았다.

왜 찬송을 쳐다봤는지는 둘째치고, 나는 그의 말과 제안이 너무 당혹스러워 눈동자만 굴렸다.


지금 일리아스는 마치 타국으로 관광 온 여행객 같았다. 아니, 아예 틀린 비유는 아니지만 뭐랄까······ 원작과는 느낌이 다르달까?


적어도 내가 아는 일리아스는 여주를 만나기 전까진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의 캐릭터였다. 저렇게 가벼운 이미지도 발랄한 성격도 아니었다.

내가 캐해석을 잘 못 했나? 그도 아니면 원래부터 저런 성격이었나?


좀처럼 답을 모르겠어서 찬송을 흘끗 쳐다보니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게 보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느낀 위화감이 착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일리아스는 정말 이상해져 있었다. 그것도 원작자가 당황할 만큼.



“이브락 님, 괜찮으신가요?”



찬송이 좀처럼 답을 안 하자 일리아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제야 찬송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모처럼 연회도 준비되어 있는데······.”

“이브락.”



자하룬이 찬송의 말을 끊으며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



잠시 후 찬송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도록 하죠.”



승낙이 떨어지자 일리아스가 환히 웃었다. 떼 하나 묻지 않은 순박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그려졌다.


그 뒤, 이브락은 일리아스의 관광 안내를 하게 되었다.

일리아스는 사람이 있으면 불편하단 이유로 호위를 물렸지만, 찬송은 저 혼자 가기엔 감당이 안 되었는지 나를 동석시켰다.

아이러니한 건 내 동석에 일리아스가 더 할 수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는 왕도 이곳저곳을 쏘다녔고, 순수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잠깐 쉬기 위해 들른 이 오아시스에서도 그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발발 흔들며 뛰어다녔다.


그리고 현재, 나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오전 내내 품었던 의심을 입 밖으로 꺼냈다.



“저거 일리아스 맞지?”

“외관 설정은 맞아. 날개 색이 저렇게 밝은 사람은 일리아스밖에 없으니까.”

“근데 왜 저래? 원작하고 너무 다르잖아.”

“나도 몰라.”

“혹시 비슷한 사람으로 바꿔치기 당하거나 그런 거 아니야? 그래도 페르치 인의 왕자니까 보내기 아쉬워졌다든가, 뭐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그런가? 모르겠다.”



찬송이 원작자가 하기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다.



“네가 모르면 어떡해.”

“모를 수도 있지.”

“작가잖아.”

“작가라고 다 아나. 그리고 원래 작가는 자기 소설 내용 잘 기억 못 해.”



찬송은 다른 작가님들이 들었다면 대노할법한 이야길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난 어이가 없어졌다.



“전에는 작가인데 설정을 모르겠냐며 하지 않았어?”

“큰 설정만 알아. 세세한 건 기억 못 해.”

“네가 짠 건데?”

“원래 fin 찍은 순간 설정이나 내용 같은 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거야.”

“벼락치기 시험이야? 몇 달 넘게 쓴 걸 모르면 어떡해.”

“원래 그런거라니까. 어쨌든 저게 일리아스가 아닌 건 확실해. 내 일리아스는 저렇게 촐싹거리는 애가 아니라고.”

“······진짜 가짜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얼굴이야 그렇다 쳐도 날개 색은 어떻게 한 거지? 독보적이라 비슷한 게 없을 텐데.”

“염색한 걸 수도 있잖아.”



봉선화로 손톱을 물들이는 것처럼 이곳에도 식물을 활용한 염색이 있었다. 하지만 쉽게 색이 들지 않는데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가장 큰 단점은 물에 들어가면 색이 빠진다는 거였다.



“······.”

“······.”



나와 찬송은 아무 말 없이 오아시스를 쳐다봤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속으로 어떻게 할지 갈등할 때, 일리아스가 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두 분 다 뭐 하세요?”

“······아뇨, 뭐.”



찬송이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았다. 이브락의 흉내를 내야 한다는 사실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나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 더 큰 일리아스는 날개를 펴 우리의 앞에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막이라 그런지 날이 많이 덥네요.”



어투가 퍽이나 친근한 게 누가 보면 몇 년 알고 지낸 사람으로 착각할 것 같았다.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나는 대충 답하며 날개를 살폈다. 염색을 했다면 분명 어딘가에 티가 날 것이다.

내가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찬송은 일리아스를 떠봤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나랑 찬송은 정말 호흡이 잘 맞았다.



“일리아스 님은 괜찮으세요? 날개 때문에 많이 힘드실 텐데, 이렇게 밖을 오래 돌아다녀도 될지 걱정입니다.”

“덥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 더위 잘 안 타거든요.”



나와 찬송이 동시에 멈칫했다.

우리의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그러게. 진짜 가짠가 본데?”



우리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일리아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그게 무슨······.”

“너 누구야?”



찬송은 일리아스의 팔을 잡으며 직구로 물어봤다.



“누군데 일리아스 흉내를 내는 거야?”



일리아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누, 누구긴요. 일리아스 페르칩니다.”

“웃기시네.”



찬송이 비릿하게 웃었다.



“저, 정말이에요!”



그는 말까지 더듬으며 항변했지만, 우리에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일리아스 페르치는 더위에 약했다. 여주가 등장하기 전부터 더위를 호소했고, 이에 관련된 작은 에피소드도 하나 있었다.


다른 걸 다 떠나 일리아스는 누가 자신을 만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가 정말로 일리아스라면 찬송이 팔을 잡은 순간 거칠게 뿌리쳤을 것이다.



“목적이 뭔지 싸게 불어.”

“일리아스 아닌 거 다 아니까 자백하세요.”



찬송과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압박했다. 순간 찰박이는 물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리니 뒷걸음치던 일리아스의 오른쪽 다리가 오아시스에 들어간 거였다.

그걸 빤히 내려다보던 찬송이 짧게 말했다.



“담글까?”



익숙한 말, 그러나 전혀 다른 뜻의 질문이 귀에 닿았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을 들은 이래 처음으로 긍정의 답변을 뱉었다.



“담그자.”



나와 찬송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리아스를 오아시스로 밀어 넣었다.

일리아스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한참 동안 저항했지만, 힘의 상징인 아퀼라에다 전사로 길러진 우리 둘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잠시 후, 그가 우는 소릴 내며 소리쳤다.



“다 고백할게요! 그러니 제발 좀 놔주세요! 여긴 드라이기가 없어서 날개 말리려면 한참 걸린단 말이에요!”



나와 찬송이 행동을 딱 멈췄다.

드라이기, 그 네 음절의 단어가 우릴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는 멍하니 일리아스를 올려다봤다.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한 가지 의심. 그러나 차마 확인해 보지 못했던 의심이 현실이 되어 수면 밖으로 떠올랐다.


그렇다. 이곳에 우리 말고 또 다른 빙의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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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2화. 제1회 빙의자 대책 회의 (01) +1 20.08.06 36 2 12쪽
4 제1화. 개나 소나 빙의자 (03) 20.08.06 57 2 12쪽
» 제1화. 개나 소나 빙의자 (02) +1 20.08.05 88 2 12쪽
2 제1화. 개나 소나 빙의자 (01) 20.08.05 79 2 12쪽
1 프롤로그. 20.08.05 84 2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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