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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1142_kskdlxm 님의 서재입니다.

월타숲의 감시자들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추리

묵독
작품등록일 :
2018.06.15 12:41
최근연재일 :
2018.10.12 08:4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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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12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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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투구의 가치 (4)

DUMMY

프라우를 쫓은 일은 레피를 찾았던 것처럼 핏자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시원들은 레피는 떠들썩한 싸움이 일어났던 공터로 놀아가 이번에는 반대쪽 핏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감시원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서 레피를 보호하기 위해 카페르가 대열의 가장 앞에, 그 뒤를 레피가, 그리고 대열의 끝을 코르누와 팔코가 감싸는 모양으로 서서 걸음을 옮겼다.

“괜찮을까?”

코르누는 걸음을 옮기며 미심쩍은 얼굴로 선두에 선 카페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코르누는 평소 제멋대로 행동하던 카페르가 웬일로,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있으니 뭔가 큰일이 날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내가 한 번 가볼게.”

그런 마음은 곁에 있던 팔코도 마찬가지라, 그는 연신 카페르르 흘긋거리는 코르누를 안심시키며 대열의 앞에서 뒷사람들이 걷기 편하게 길을 다듬으며 걸어가는 카페르를 향해 다가갔다.

“이봐, 카페르······, 너 뭘 씹는 거야?”

“쩝, 우물. 여, 팔코!”

심각한 얼굴로 카페르에게 다가간 팔코는 카페르에게 말을 걸려다 그가 연신 무언가를 우물거리는 것을 알아채고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꿀꺽. 아, 배고파서.”

카페르는 얼이 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팔코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안에 든 것을 태연스레 삼켰다. 아마 걷다가 눈에 띄는 나무 열매 따위를 주워 먹은 듯했다.

“작작 좀 해라, 정말!”

팔코는 수십 명을 죽였을 수도 있는 살인자를 쫓는 상황에서까지 식탐이 샘솟는 카페르를 보며 질렸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동시에 평소와 다름없는 카페르의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한바탕 크게 윽박지른 팔코는 잠시 카페르의 낯을 살피다 슬며시 입을 열었다.

“너 왜 그러는 거야?”

“뭐가?”

팔코의 물음에 카페르가 길목을 막고 선 우거진 나뭇가지를 꺾으며 되물었다.

“몰라서 물어?”

“몰라서 물어.”

“왜 갑자기 착한 척이냐고. 너 여자라면 질색하잖아.”

“질색하기는······.”

팔코의 말에 카페르가 당황한 티를 팍팍 내며 말을 얼버무렸다. 확실히 싫어하지는 않았다. 카페르가 여자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싫음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팔코는 그것을 물어보려던 것이 아니었다. 팔코는 딴청을 피우는 카페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반했냐?”

“켁!”

팔코의 물음에 잘 걷던 카페르가 내딛던 발을 헛디디며 휘청거렸다. 꼴사납게 바닥을 구를 뻔하다가 겨우 중심을 잡은 카페르는 황당한 얼굴로 팔코를 쳐다보다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 푸하하. 너 정말 바······, 위험해!”

헛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던 카페르는 무언가 발견했는지 황급히 손을 들어 뒤따라오던 팔코를 막아섰다.

“뭐야?”

팔코는 갑작스럽게 뻗어 나온 카페르의 손에 뒷걸음질 쳤다. 카페르는 팔코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칼집 채로 칼을 뽑아 조심스럽게 수풀 위를 훑었다. 그러자 밧줄이 죄어드는 소리와 함께 둘의 코앞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갔다.

“이건······?”

그것을 바로 덫이었다. 보이지 않게 나뭇잎과 풀로 교묘하게 덮여져 있던 덫은 눈치 빠른 카페르 덕분에 무엇 하나 잡아채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그 녀석인가? 다쳤을 텐데?”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하마터면 덫을 밟을 뻔했던 팔코는 등줄기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달랑거리는 덫을 붙잡았다.

“미리 설치해뒀을 수도 있지. 쫓아올 걸 알았을 테니까.”

카페르는 꺼냈던 칼을 추스르며 놀랍지도 않은 듯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일부러 이쪽으로 달아난 건가?”

“그럴 수도······.”

프라우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용의주도한 자인 모양이었다. 상대가 다쳤다고 은연중에 긴장을 풀었던 팔코는 한숨과 함께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덫인가요?”

“놈의 짓인가?”

뒤따라온 레피와 코르누도 둘의 앞에 놓인 덫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팔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셋의 얼굴에는 진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뭐, 조심해서 가보자고, 읏차!”

하지만 카페르만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태연한 얼굴로 몸을 몇 번 풀더니, 기합을 내지르며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생각이 없는 건가?’

긴장이란 개념을 모르는 듯 덩치에 어울리는 소란스러운 발놀림으로 걸음을 옮기는 카페르를 보며 세 사람은 신기하게도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모두 구태여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세 사람은 잠시 얼이 빠진 얼굴로 카페르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이내 저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뒤를 따랐다.

잠깐의 소동을 뒤로하고 다시금 프라우를 쫓던 네 사람은 걸어가는 와중에 몇 개의 덫을 더 발견했지만, 대부분 처음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잡하기 짝이 없는 덫이었기에, 별다른 피해 없이 차분히 덫을 치우며 프라우를 쫓았다.

“이상하게 몸이 무거운데······.”

얼마나 걸었을까, 사방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던 코르누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왠지 몸이 좋지 않았다. 오래 걸어 몸이 지친 탓은 아니었다. 수년 동안 산림감시원으로서 월타숲을 걸어 다녔던 코르누는 이것보다 더한 시간 동안 몸을 혹사한 적도 있었다. 어지럽거나 통증이 있지는 않았지만, 마치 오랫동안 열병을 앓고 난 다음 날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렇지? 나도 그래.”

함께 걷던 팔코도 땀을 닦으며 코르누의 말에 동의했다. 팔코는 혹시 자신이 뭔가를 잘못 먹었나 싶었지만, 늦잠으로 아침밥을 거른 탓에 오늘 먹은 거라고는 레피가 나누어준 음식뿐이었고, 함께 먹은 레피와 카페르는 멀쩡했으므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음식 문제는 아닌 듯했다. 결국 코르누와 팔코는 재수 없게도 하필 지금 감기 기운이 도는 것이라 결론 내리고 한숨과 함께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몸이 조금 무겁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고, 또 지금은 아프다고 처져있을 새가 없었다. 찡찡거리며 동료들에게 업무를 덤터기 씌우는 일은 이따 감시소로 돌아간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쉿!”

두 사람이 서로 몸 상태를 확인하며 얼굴을 찌푸리던 그때, 갑자기 앞서 걷던 카페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재빨리 몸을 숙이고 동시에 뒤따르는 이들에게도 몸을 낮추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 손짓에 뒤따라 걷던 세 사람은 재빨리 몸을 낮춘 채 빠르게 카페르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 사람인 것 같은데?”

수풀에 몸을 숙이고 있던 카페르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카페르의 손끝이 향한 곳에 바위 위에 누워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프라우······.”

레피가 남자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예상대로 그가 프라우인 듯했다. 프라우는 감시원들이 발견했을 당시의 레피보다 상태가 더 심각해 보였다. 상처는 그녀보다 심하지 않았지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팔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위를 발갛게 물들였고, 피를 많이 흘려 의식이 없는지 주변을 경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가쁜 숨만 내쉬고 있었다.

“죽은 건가?”

“그건 아냐.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내리잖아.”

“바위에 묻은 피 양을 보니 곧 죽을, 엇······?!”

“레피 씨?!”

감시원들이 저마다 프라우를 살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프라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레피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던지, 성난 맹수처럼 일어나 프라우를 향해 뛰쳐나갔다.

“위허······!”

팔코는 레피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감시원들이 말릴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뒤늦게 자신을 발견하고 떨리는 몸을 일으키는 프라우의 목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아픈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깔끔한 몸놀림이었다.

툭. 데구루루.

몸에서 분리된 머리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러 금세 흙투성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감시원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그저 멍한 얼굴로 레피와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윽······!”

그때 레피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해 움직이더니, 뒤늦게 무리가 온 모양이었다. 감시원들은 그 모습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레피에게 다가갔다.

“어······, 저기?”

감시원들은 바닥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레피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레피는 감시원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얼굴을 보니까 참을 수가 없어서요.”

“아니, 그래도······.”

감시원들은 단칼에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는 레피의 모습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오싹했다.

“에고, 죽겠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네요. 괜찮으면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런 감시원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피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감시원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화끈하게 저질렀네요.”

코르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코르누의 물음에 레피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비릿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그쪽이야말로, 괜찮아요?”

“무슨······, 컥!”

레피의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코르누는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격통에 신음을 내뱉으며 무릎을 꿇었다. 철퇴로 얻어맞은 가슴이 욱신거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코르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코르누! 왜, 컥······!”

코르누만이 아니었다. 코르누의 갑작스러운 쓰러짐에 놀라 소리치며 다가오던 팔코도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틀더니 썩은 통나무처럼 고꾸라졌고, 카페르도 마찬가지로 가슴을 움켜잡고 휘청거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려졌다.

“휴, 약효가 빨리 돌거나 느리게 돌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딱 맞아떨어졌군. 운이 좋아.”

레피는 갑작스럽게 세 사람이 쓰러졌음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흙 묻은 바지를 털며 감시원들을 내려다보았다.

“······?!”

감시원들은 갑작스럽게 그들에게 들이닥친 상황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레피를 올려다보았다. 감시원들이 간신히 바라본 레피의 얼굴은 더는 전처럼 해맑지 않았다. 그녀는 조롱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은 채 감시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팔코는 말을 하려 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레피는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구는 팔코의 몸을 툭툭 차며 말했다.

“아까 네가 마신 게 무슨 차냐고 했지? 웨네말룸이란 독초의 잎을 말린 차야. 맛이 기가 막히지. 온몸을 마비시킬 만큼.”

감시원들은 레피의 말에 조금 전 그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레피는 겁먹은 듯 신음을 내뱉는 감시원들을 보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아, 걱정하지 마. 죽지 않을 정도로 양을 조절했으니까. 약간 마비만 올 거야.”

레피는 감시원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쾌활하게 말했지만, 감시원들은 전혀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가 했던 이야기는 거짓말이야. 아니, 따지고 보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저기 저 녀석과 나의 역할만 바꾸면 되니까. 맞아. 사실 프라우가 날 쫓고 있었고, 모두를 죽인 건 나야. 쉬운 일이었지. 저 녀석이 살아남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끈질긴 녀석. 퉤!”

감시원들은 경악스러운 레피의 고백에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피는 말을 하다 화가 솟구쳤는지, 굴러다니는 프라우의 머리에다 걸쭉한 침을 뱉었다. 그녀는 아주 신나 보였다. 몇 달간 끈질기게 쫓아다녔던 프라우를 마침내 처리했으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리라. 레피는 맞장구쳐줄 관객이 없음에도 수백 명을 앞에 둔 광대처럼 한껏 흥분해 말할 필요 없는 것까지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하지만 신은 역시 내 편이야. 결국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되었군. 후후. 아, 궁금하겠네. 왜 같은 차를 마시고도 나는 멀쩡한지.”

신나서 떠들어대던 레피는 문득 말을 멈추고 품속을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품에서 나온 것은 아까 레피가 수시로 씹어대던 약초였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웨네말룸의 해독제로는 이 사위 잎이 최고지. 그래서 괜찮은 거야. 뭐, 손끝이 조금 저릿저릿하긴 하지만.”

레피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이 저린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잠시 손을 풀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감시원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에게는 감사해. 덕분에 생명을 건졌고 골치 아픈 녀석도 죽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

연기하듯 과장된 동작으로 바닥에 쓰러진 감시원들에게 감사를 표하던 레피는 갑자기 표정을 지우고 오싹한 얼굴를 하더니 몸을 돌려 목 없는 시체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미안하지만 당신들은 이 녀석을 쫓다가 다 같이 죽은 거로 돼줘야겠어. 그걸 위해 당신들을 살려 둔 거니까.”

레피가 칼을 들고 음산하게 웃으며 감시원들에게 다가갔다.

“으······, 으······!”

감시원들은 날카로운 칼날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들의 몸은 다리를 잃은 벌레처럼 꿈틀거리기만 할 뿐, 도무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느 것을 고를까······.”

레피는 칼을 들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누구를 먼저 죽일지 고르다 금세 마음을 정했는지, 가장 먼저 코르누에게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 단칼에 죽여줄게. 이래 봬도 솜씨가 제법이라고.”

레피가 킬킬 웃으며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죽음이 칼날에 매달려 감시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그 순간.

“그러게. 정말 제법이군.”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되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뭣······?”

레피는 자신의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카페르였다. 놀랍게도 다른 두 감시원들과 달리 카페르는 멀쩡했다. 카페르는 말을 함과 동시에 빠르게 일어나더니, 그대로 칼을 뽑아 레피를 향해 휘둘렀다. 카페르의 물 흐르듯 빠르고 자연스러운 동작에 레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에 쥔 칼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카페르는 레피가 칼을 놓치자마자 재빨리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어 폼멜로 명치를 후려쳤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크억······?!”

급소를 맞은 레피는 컥컥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을 뒹굴었다. 그녀는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인 데다, 카페르의 공격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바닥을 몇 차례 뒹굴다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쯧, 생각대로 위험한 놈이었군.”

카페르는 바닥에 쓰러진 레피를 보고 혀를 차며 밧줄을 꺼내 그녀의 몸을 묶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상황을 일단락한 뒤, 카페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크어······, 카페······.”

바닥에 누워 모든 것을 바라본 코르누와 팔코는 카페르를 향해 괴물의 울음처럼 기괴한 소리를 냈다. 자칫하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가 동료의 기지로 살아난 그들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대, 대······.”

‘대단해!’

코르누와 팔코 온몸이 마비된 와중에도 카페르의 기지에 경탄했다. 두 사람은 오늘만큼 카페르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둘은 마비가 풀리기만 하면 카페르를 얼싸안아줘야겠다 생각하며 카페르가 얼른 그들을 일으켜 도와주기를 기다렸지만, 카페르는 실실 웃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으······?”

이상함을 느낀 코르누와 팔코는 눈을 홉뜨며 카페르를 올려다보았지만, 카페르는 웃음을 참으며 잘 걸렸다는 얼굴로 둘을 내려다보다가,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이기죽거렸다.

“잘 안 들리는데?”

“그······, 그겍······.”

팔코는 카페르의 행동에 화가 나 소리를 질렀지만, 반쯤 고꾸라진 그의 입으로는 모래만 더 들어갈 뿐, 제대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점잖은 코르누는 화를 삭이며 아무 말 없이 간절한 얼굴로 카페르를 올려다보았다.

“도와달라고?”

두 눈을 연거푸 깜빡이는 코르누와 팔코.

“쯧쯧, 그러게 진작 눈치를 챘어야지. ‘투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나도 진작 알아챘는데 말이야.”

카페르의 비아냥거림에 팔코와 코르누의 얼굴에 낭패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카페르는 감시원들이 가볍게 놀렸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감시원들 중 가장 속이 좁은 카페르는, 한 번 앙심을 마음에 담아두면 쉽게 푸는 법이 없었다. 카페르는 두 사람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어차피 죽지도 않으니까 고생 좀 하셔. 투구의 가치를 떨어뜨린 대가로 말이야. 푸하하하!”

카페르는 그 말을 다른 이에게 던진 것이 즐거운지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 쫌······.”

‘좀생이 새끼······.’

“하하하!”

감시원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카페르를 보며 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심한 욕을 내뱉었지만, 마비된 혀는 말이 되지 못한 무의미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월타숲에는 자신의 투구를 가치 있게 만든 한 감시원의 웃음과 투구의 가치를 떨어뜨린 두 감시원의 안타까운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


“대단한데요, 카페르? 어떻게 그녀가 수상한 걸 알았어요?”

며칠 뒤, 세 사람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엔케가 혀를 내두르며 카페르를 칭찬했다.

엔케, 카페르, 코르누, 그리고 팔코는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막사의 탁자에 앉아 위타 루디켈을 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코르누와 팔코 덕분에 멍과 상처로 엉망진창이 된 카페르의 얼굴과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동시에 인자한 카페르가 또 동료들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모조리 나누어 줄지에 대한 결과가 궁금해 그들을 둘러싼 감시원들이 전부였다.

“애초에 그렇게 향이 독특한 차에, 보란 듯이 약초를 씹어 대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있나. 혹시나 했는데 차를 먹자마자 웨네말룸 특유의 향이 입안에 진동하더라고. 그 때문인지 그 여자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독을 머금은 듯 위험해 보이더군.”

카페르가 별것 아니란 듯 퉁명스럽게, 하지만 말을 할 때마다 터진 입술이 따가운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 잘 알았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팔코는 아직도 카페르에게 앙금이 남았는지 험악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너희들이 그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서 헤실헤실하는데 내가 그때 말을 했어도 내 말을 믿었겠어? 눈치 못 챈 너희들이 바보지.”

“넘어가기는 자식이······.”

“크흠.”

정곡을 찌르는 카페르의 말에 코르누와 팔코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이 레피의 서글서글한 웃음과 매력적인 겉모습에 속아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긴장을 풀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자칫하면 큰일 날 수도 있었어.”

서너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둘보다 나이가 많아선지 일찍이 앙금을 털어낸 코르누가 비교적 점잖게 카페르에게 말했다. 그러자 카페르가 피식 웃으며 오른손 검지를 들어 좌우로 까닥거렸다.

“너희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만약에 대비해 차를 거의 안 마셨어. 혹시 몰라 사위 잎까지 씹어 먹기도 했고.”

“아, 혹시 그때 그거?!”

팔코는 카페르의 말에 프라우를 쫓던 중 무언가를 우물거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라 옅은 탄성을 뱉었다.

“그래, 그거. 우습게도 전혀 눈치 못 채더라? 이상한 이야기나 하고.”

그때를 떠올리며 이기죽거리는 카페르의 말에 눈치 없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코르누와 팔코는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때는 딱히 우릴 죽일 생각도 없어 보였고, 자세한 정황도 알 수 없었기에 그냥 있었던 거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카페르의 말에 엔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평소 카페르를 놀리던 두 사람과 카페르의 관계가 뒤바뀐 것이 재미있는지 맑은 갈색 눈으로 옅은 반달을 그렸다.

“그녀로서는 지금까지 프라우 씨에게 쫓기느라 시달렸는데 또 괜한 혹을 달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우린 국가에 소속된 군인들인데 만약 우리를 죽인다면 그녀는 남은 평생을 빛이 있는 곳에서 돌아다니지 못 했을걸?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처음에는 그냥 방해가 되는 우리를 간단히 마비시키고 프라우 씨를 죽이러 갈 생각이었겠지만, 우리가 눈치 없이 뒤따라가니 뒤늦게 생각을 바꾼 게 아닐까 싶어.”

“그럼 너 때문에 우리가 죽을 뻔했다는 거 아냐!”

카페르의 말을 듣던 팔코가 잘 걸렸다는 듯 그의 말을 트집 잡았다. 하지만 카페르는 평소처럼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한 눈빛으로 팔코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 여자가 프라우 씨를 죽이고 유유히 떠나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냐?

“그건 아니고······.”

카페르의 서슬 퍼런 말에 팔코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혼자 사건을 해결해 한껏 어깨가 올라간 덕분인지 팔코는 이상하게도 카페르에게 계속 지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넌 그녀가 그때 했던 이야기를 믿어?”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코르누가 카페르에게 물었다. 그는 레피가 그들에게 했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한 듯했다.

“물론이지. 우리를 죽일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상황에서 구태여 거짓말할 필요가 어디 있어. 게다가 처음 우리를 만났을 때 그 여자는 그만큼 정교한 거짓말을 꾸밀 시간도 없었잖아. 그때 했던 말대로 그녀는 그때 자신의 처지에서 역할만 바꾸어서 이야기했을 거야. 가장 훌륭한 창작은 모방 아니겠어?”

“근거는요?”

엔케의 물음에 카페르가 자신만만하게 검지와 중지를 펼친 뒤, 하나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하나, 똑똑한 용병은 드물다. 둘, 순식간에 그만한 이야기를 지어낼 정도면 진작 직업을 바꿨어야 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카페르의 말에 이야기를 듣던 감시원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머쓱해 하던 팔코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코르누도 마찬가지였다.

“일리가 있네.”

코르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결론은 모든 일은 내가 생각한 대로 흘렀고, 이 녀석들은 죽을 뻔했지만 이 몸 덕분에 살아났다는 거지.”

카페르는 자신이 자랑스러운 듯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만큼은 별달리 할 말이 없는 코르누와 팔코는 머쓱하게 헛기침하며 말없이 손에 쥔 카드만 바라보았다.

“여어~!”

그때 막사의 문이 열리며 라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막 몇몇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온 레피를 바깥에 호송하고, 덧붙여 프라우의 시체까지 수습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몇몇 대원들만이 있으리라 생각한 막사에 발 디디기 힘들 정도로 동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뭐야, 왜 이렇게 몰려 있어?”

“카페르가 이번 달 월급까지 잃어버리는 걸 보려고.”

“웃기지 마!”

누군가의 이기죽거림에 카페르가 평소처럼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고, 덕분에 막사에는 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보고는?”

“소릭이 하고 있어.”

팔코의 물음에 라이가 어깨너머로 식당 쪽을 손짓하며 말했다.

“잘 다녀왔어?”

“뭐 문제 있을 게 있나. 죄인을 호송하고 시체 수습한 게 다인데.”

“일은 어떻게 됐어?”

“레피라는 여자는 칼라스 영지의 경비대에 맡겼고, 마찬가지로 프라우란 사람도 부탁했는데, 아무래도 연고자를 찾기는 힘들 것 같아. 영지의 무덤에 묻히거나 하겠지.”

라이의 말에 프라우의 죽음을 목격했던 세 감시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 따로 밝혀진 건 없고?”

“아무래도 우리가 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일단 너희들이 들은 그대로 그쪽에 전했고, 나중에 밝혀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쪽에서 추후에 알려주기로 했어.”

라이의 말에 감시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 영지에서 온 이들의 수습을 며칠 사이에 끝내기에는 무리였으리라.

“뒷맛이 씁쓸하군.”

카페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타고난 운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어쩌면 살 수도 있었을 한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에 꽤 상심이 큰 듯했다.

“아, 그리고 거기서 재미있는 소식이 들리던데?”

그런 카페르의 모습을 본 라이는 분위기를 바꾸려 밝은 목소리로 재빨리 화재를 돌렸다.

“무슨?”

다른 감시원들도 옳다구나 하며 그의 말을 물었다.

“디아토 산 맞지? 이 사건에 연관되었다던 산적의 본거지가?”

“그렇게 들었어.”

라이의 물음에 팔코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지는 모르겠는데 얼마 전 그쪽에 있던 산적단이 깡그리 박살났다던데.”

“엥?!”

전혀 예상치 못한 라이의 말에 막사에 있던 모든 감시원들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어, 어쩌다?”

코르누가 당혹스러움에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재수 없게 신분을 숨기고 여행 중이던 귀족의 자제를 건드린 모양이야. 귀족이 사병은 물론이고 용병단까지 모조리 데려와서 산을 아예 갈아엎었다더라고.”

몇 년 동안 위세를 떨치던 산적단으로서는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었다. 엔케는 어쩌면 레피가 그들의 정보망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가 일단락된 뒤, 막사에 있던 감시원들은 라이를 붙잡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예 상관없는 이야기를 떠벌리거나, 그도 아니면 말없이 노름을 이어가는 동료들의 노름판을 바라보며 각자 할 일에 몰두했다.

“······.”

탁자 위로 오고가는 카드를 바라보며 엔케는 생각했다. 허무할 정도로 쉽사리 그 끝을 맞이한 산적들의 최후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뒤 조의를 표할 시체도 없어진 용병단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적어도 동료들의 명예를 위해 몇 달 동안 한 살인자를 쫓다 이 깊은 숲까지 들어와 죽음을 맞이한 프라우의 넋은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그들과 접점이 없는 엔케로서는 확신할 수 없는 희망사항이었다.

“으아악! 말도 안 돼!”

엔케가 그때 확신할 수 있던 것은 두 달 치 월급을 몽땅 동료들에게 나누어준 인자한 카페르가 한동안 동료들에게 빌붙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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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년의 얼굴 (3) 18.09.24 27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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