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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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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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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5.18 19:55
조회
2,189
추천
68
글자
11쪽

3. 마침내 돌아오다(4)

DUMMY

"아니 이게 뭐 하는 행태들인가!"


정신을 잃은 사람을 앞에 두고 보살피지는 못할망정 방치해두다니. 준우는 얼굴을 굳히며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그런 준우를 곱지 않은 눈으로, 사실은 죽일 듯이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다른 말 없이 비켜섰다. 준우도 그런 시선들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었다. 준우는 얼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창현을 반듯이 눕혔다. 그리고 그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창현의 옷까지 들춰가며 면밀히 부상의 흔적과 그 상세를 찾았다.


희미한 멍 자국이나 나뭇가지에 긁힌 듯한 찰과상은 두어 군데 있었지만 그런 것을 제외한다면 깨끗했다. 그가 진단한 예후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어쨌든 눈에 보이는 이상이 없으니 곧 회복할 테고 그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기에 준우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가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몇몇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바짝 다가왔다.


"어떻습니까?"


"형님 사람 애 좀 그만 태우고 무슨 말 좀 해보시오."


"아니 어디 머리라도 크게 다친 거 아니우?"


머리와 꼬리를 다 잘라 먹은 말들이 무차별적으로 준우에게 쏟아졌다. 명모를 포함한 창현의 친구들이 다급하게 그를 졸라댄 것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이 되어 허리를 펴던 준우가 그 말들에 밀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송충이같이 굵고 진한 눈썹이 꿈틀했다.


"이 녀석들이..! 안 그래도 말하려던 참이었어!"


주변으로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공간, 대피소는 뻥 뚫린 하나의 광장과 같은 공간이었다. 벽으로 구획된 곳이 딱히 없고, 사방이 탁 트여있기 때문에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거였다.


"일단은..."


많은 시선을 받자 준우는 괜스레 헛기침을 흠흠 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자네 그새 입이 많이 굼떠졌구먼."


사람들 사이에서 새하얀 머리의 노인 한 명이 슬쩍 나오며 준우를 재촉했다. 말은 준우에게 하였지만 노인의 시선은 정신을 잃은 창현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사실 저도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니 곧 일어날 테지요."


말끝을 흐리며 준우가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왠지 모르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흰머리의 노인은 별달리 동요하지 않고 창현에게 다가가 조용히 그를 쓸어보았다. 창현의 손목에 매달린 작은 나침반이 노인의 눈으로 크게 들어왔다. 노인은 창현이 떠나가던 날 토방 안에 있던 육인의 장로 중 한 명이었다. 돌연 노인의 입에서 긴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세상일이란 참으로 별나구나. 마을을 위해 창현이를 밖으로 내보냈으나 오히려 마을은 화를 입고 그는 긴 시간 후에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다니.. 과연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잠시 말을 끊은 그는 한숨을 두어 번 내쉬었다. 진한 감회가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모든 일에는 인과(因果)가 있다지만 이것이 어찌 우리의 탓이라 하겠느냐? 또 이 녀석 탓이라 하겠느냐? 하늘의 이치란 오묘해서 알고자 해서 안다는 법이 없고 원하지 않아도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는 법이니, 준우 자네가 모른다고 흉이 아닐세."


준우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 후, 이번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장로님의 말씀은 항상 옳습니다만, 어째 방금 전까지 재촉하던 모습은 간데없군요? 오래 살려면 관리하셔야겠습니다, 오락가락하는 건 좋지 않거든요."


흰머리의 노인, 이박헌은 이가촌의 살아남은 이들 중 하나였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을의 장로였다. 다행스럽게도, 또 비참하게도 그들은 살아남았던 것이다.


대피소에 생존자가 있을 거라던 창현의 생각은 옳았다. 기식이 엄엄한 마을의 촌장을 대신하여 장로 이박헌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에도 이박헌은 전혀 기분이 상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늙은이 주책이라고 생각하게. 준우 자네도 나이를 먹더니 넉살이 제법 늘었군그래? 사내는 모름지기 어떤 상황에서도 농담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이지. 암."


"장로님도 참.. 저도 나이 먹은 지 한참이나 됐구만요."


준우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일 때 명모를 비롯한 몇 명이 다시 다가와 추근거렸다. 장로가 나서자 차마 말을 끊지 못하고 물러섰던 것이다.


"아니 형님 답답하게 이러기우? 그래서 창현이가 어찌 된단 말이오?"


옆에서 명모가 준우의 팔소매를 붙들고 흔들거렸다. 홱 돌아보며 쏘는듯한 준우의 시선에도 명모는 그저 애타게 창현을 바라봤다가 준우를 보고, 다시 창현에게 시선을 옮길 따름이었다. 누가 그 시선에 담긴 심정을 모르랴.


"인석아, 놓고 말해라! 혈행(血行)이 왕성하고 호흡도 거칠 것이 없으니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 게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놈도 고생이 많았을 거야. 조금 지친 것뿐이니 오래지 않아 깨어날 거란 걸 장담하지. 아니 네놈도 눈이 있으면 좀 봐라! 저게 어디 아픈 놈 얼굴이냐?"


확실히 창현의 얼굴은 기절해 있는 사람답지 않게 혈색이 완연했다. 마치 자는 것처럼 숨소리도 안정적이었다. 어디 한군데 다치거나 아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명모들도 그런 창현의 상태를 얼추 짐작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던 것이다. 준우가 확실히 장담해주자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명모였다.


"진작 그렇게 말해주면 오죽 좋은 걸 왜 그렇게 뜸 들이고 그러우. 형님은 가끔 뭉그적거리는 데가 있다니까."


서른 후반인 준우는 사실 형이라기보다 삼촌이라고 불리우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로 명모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이십 대 중반인 명모와 십 년 이상의 격차가 둘에게 존재하지만, 명모뿐 아니라 준우마저도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자식이 요즘 덜 맞았지?"


준우가 큼지막한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준우는 명모 또래뿐 아니라 그 위나 더 아래의 젊은이들에게까지도 인기가 많았다. 다소 다혈질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흠이 되지 못했다.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뛰어난 사냥 실력, 나이가 더 들어서부터는 또 그만큼의 경륜이 쌓여서 뭇사람들에게 두루 인정받았던 것이다. 준우, 그가 바로 당대의 태무(太武)였다. 준우가 흔들던 주먹으로 끝내 명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요놈아! 그렇게 네 친구 놈이 걱정되면 얼른 가서 자리라도 보살펴주는 게 어떠냐? 하여튼 입만 살아서."


명모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발 뒤로 비켜섰다. 장난이라지만 태무의 손맛은 역시 남다른 데가 있는 것이다.


"아이고 형님, 그렇다고 손까지 쓸 건 또 뭐요. 녀석들아, 가자."


주변에 몰려있던 몇몇 인물들이 명모를 따라 구석으로 가서 한동안 법석을 떨었다. 짐승 가죽으로 된 자리를 펴고 창현을 옮겨 눕힌다, 물이라도 줘야겠다, 잔다는데 어떻게 줄 것이냐, 네놈 잘 때는 내가 잘 먹였다 하며 조용하던 대피소가 잠시 벅적한 모양이 되었다. 대충 자리가 정리되어 사람들도 각자 원래 있던 구석으로 되돌아갔다. 그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박헌이 조용히 다가왔다.


"자네, 뭐 짐작하는 거라도 있는 겐가?"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준우가 장로를 돌아보았다.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마저 지운 진지한 얼굴이었다.


"일단 저 녀석이 깨어난 후에 그간의 사정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혀 짐작되는 바가 없군요."


이박헌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얼마나 남았는가?"


"아껴 먹는다면 이삼일은 더 견딜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서로 알고 있는 이야기를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겠지. 자네도 생각했겠지만 창현이 왔다는 것은 그만큼 안전해졌다는 게 아니겠는가?"


이미 주변엔 사람이 없었으나 장로의 말소리는 갈수록 낮아졌다. 준우의 얼굴에 순간 고통스러운 빛이 스쳤다.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확실히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요. 창현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계획을 짤 여유가 없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하루만 더 여유를 두시지요. 그 안에 깨어난다면 혹시 주변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음... 자네 의견이 합당해 보이는군. 그래도 미리 준비는 해 놓아야 할 게야."


준우가 고개를 숙이며 그러마 하고 대답하자 이박헌은 회한 섞인 얼굴로 본인의 자리를 찾아갔다. 사실 그들은 심각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육십여 명에 달하는 이가촌 사람들이 생활한 지 벌써 한 달여가 지났다. 미리 저장되어있던 식량과 대피하면서 가져온 약간의 먹거리가 그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최소한의 근거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다해가고 있었다. 삶의 터전을 점거한 괴물들로 인해 몇 번의 탈출 시도가 무산되기도 했다. 그 과정은 또다시 몇몇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참담함이기도 했다. 괴물들이 언제까지 있을지, 혹은 아직까지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창현의 귀환은 정말 천만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장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혹시 밖에 괴물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을 준우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준우는 그저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생사가 아닌, 마을 전체의 목숨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정이기 때문에 재삼재사 숙고해도 많다고 하지 못할 거였다. 그래도 결단을 피할 순 없었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도 못할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아있을 때 기회를 잡아야 했다.


데꾼하게 들어간 눈두덩이에 힘없이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준우의 시야에 크게 확대되어 왔다. 하나같이 제대로 먹지 못해 수척한 모습들이었다. 도피처로 들어온 삼 층의 공동이, 지금 준우의 눈에는 거대한 무덤으로 비춰졌다.


희망이 말살된 삭막한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창현은 돌아왔지만, 상황은 여전히 참담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참담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준우를 더욱 괴롭게 하고 있었다.


`또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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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과거의 유산遺産(1) +8 21.05.14 4,004 11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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