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연재수 :
98 회
조회수 :
92,344
추천수 :
2,887
글자수 :
580,477

작성
21.05.17 19:11
조회
2,391
추천
75
글자
11쪽

3. 마침내 돌아오다(2)

DUMMY

괴괴한 어둠에 싸여있는 복도가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는 곧게 뻗어 있었다. 중간에 울퉁불퉁 굴곡이 지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죽 곧은 구조였고, 복도를 기준하여 양옆으로는 일정 간격마다 하나씩 문이 달려있었다. 이 문들이 각각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가촌 사람들의 실질적인 집이었다.


"아..!"


그중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득 창현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이 문 역시 처음의 그것처럼 반 이상 파괴되어 문으로써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현은 다 부서진 채 간신히 벽에 매달린 문 아래로 그것을 보았다. 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이었다. 창현이 느끼던 불길함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상천 아저씨!"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문. 그 집의 주인은 창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 해 전, 산으로 열매를 따러 간 부인이 돌아오지 않은 이후로 그는 급격히 말수가 줄었더랬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정다감하고, 사람들에게 친절한 이였다.


뼈가 잘고 잔병치레가 많아 사냥꾼이 되는 것은 포기했지만, 흙을 다루는 재주가 좋아서 마을에 그가 만든 그릇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은 손에서 흙이 마를 날이 없는 그를 두고 흙장군이라며 별명을 붙여주고는 이름보다 그 별명을 더 많이 불렀었다. 머릿속에 그런 흙장군 아저씨의 고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으아아아!"


아득한 정신에 애써 추슬러놓았던 가슴이 다시금 급격히 뛰었다. 어그러진 감정의 파편이 그의 마음속에서 사금파리처럼 깨어져 상처를 입혔다. 횃불이 크게 일렁이고 그림자도 그와 같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두개골에서 흘러나온 피와 뇌수가 바닥에 오물같이 누런 형상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저 해골이 상천아저씨의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혹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화(禍)를 당한 다른 사람의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누구일까.


결국에 창현은 분노했을 터였다. 이가촌에서 그와 관계되지 않은 사람은 없고, 그중 누구도 저렇게 무가치한 해골이 되어 바닥을 뒹굴어도 좋을 사람 또한 없기 때문이다.


비척비척 걸어간 창현이 문을 열었다. 간신히 문과 벽을 연결해주던 경첩이 떨어져 나가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방안은 처참했다. 온통 난장판에 집기 따위는 죄다 부서져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퀴퀴하게 썩은 냄새마저 풍겼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곳은 마치 짐승을 도살(屠殺)하는 도축장 같았다. 창현은 그 참담한 모습을 차마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망연히 고개를 돌리고야 말았다.


눈앞의 참상이 쉽사리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라리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오고 싶어 하던 고향이던가.


달 높은 밤, 괴물의 숲에서 잠 못 이루며 창을 휘두르고 그 피를 뒤집어쓰면서도 오로지 귀환 하나만을 바라보며 버텼던 그였다. 한백으로 인한 번민(煩悶)과 긴 여정에 오랫동안을 홀로 고독했어도 그는 인내했던 것이다. 보장된 상(賞)이 있었기에, 밥 먹듯이 끼니를 굶으며 낯선 땅에서 한뎃잠을 자도 그는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경주(競走)해 온 것인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결코 이런 모습은 아닐 거였다. 창현은 그 순간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한가지 생각이 점차 커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저도 모르게 그 생각을 인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창현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유달리 초연해서가 아니었다. 남다른 정력(定力)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이리라. 이미 바싹 타버린 숯처럼 텅 비어버린 탓이리라.


폐허가 된 방 앞에 홀로 서서 창현은 쓸쓸히 횃불을 바라보았다. 불꽃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불꽃이 흔들리는지 그 자신이 흔들리는지, 순간 창현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곧 그는 미련없이 방 앞을 떠났다. 그리고 더 깊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공기가 변한 것은 금방 느껴졌다. 일 층을 모두 둘러보고 복도 끝의 계단을 통해 지하 이 층으로 내려선 순간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약간은 텁텁한 지하의 공기 속에 이질적인 뭔가가 섞여 있었다.


마치 맑은 물속에 먹물 한 방울이 튀어 풀어진 것처럼 알 듯하면서도 구체적인 실체는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창현이 인접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 층으로 내려서던 순간부터 경고를 발하던 그의 오감이 예리하게 연마된 칼날처럼 잔뜩 날을 세웠다. 공기가 파동치고 그에 따라 횃불도 크게 한번 꿈틀할 때, 갑자기 바로 앞에서 문이 터져나가며 검은 그림자가 창현을 덮쳤다.


꽝!!


창현은 뒤로 몸을 굴리면서 공기 속에 섞여 있던 묘한 이질감의 정체에 대해서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또 생각하기도 싫은 노린내, 바로 페이트의 체향(體香)이었던 것이다.


페이트는 각 개체가 인간을 수배 상회하는 육체 능력을 보유함으로 지상에서 먹이사슬 최상위에 서게 되었다. 그들의 강한 뼈와 질긴 근육은 지상의 그 어떤 생물도 가지지 못한 그들만의 이빨이요, 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매우 빠른 신진대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것은 페이트에게 막대한 힘과 강인한 육체를 제공함과 동시에 몸에서 항상 짐승의 그것처럼 역겨운 냄새와 분비물을 흘리는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문을 부수고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는 바닥에 몸을 납작 붙이고 고개만 들어 창현을 노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광채를 발하는 그것의 눈이 보였다. 불순물이 많이 섞인 유리알처럼 혼탁한 빛이었으나 괴물이 가진 강렬한 적의와 살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창현도 자세를 낮추고 그 눈을 마주 노려봤다. 지금까지 봐 왔던 괴물보다 훨씬 덩치가 큰 놈이었다. 그러나 기죽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왼손으로 바꿔 들고 오른손을 천천히 허리춤으로 내렸다. 그리고 번개같이 단도를 빼 들어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괴물을 상대할 땐 대개의 경우 선공(先攻)이 유리하다는 것을 그는 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근래 들어 괴물과 잦은 싸움을 벌이고 그들을 모두 도륙함으로 창현은 완전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창현은 달려드는 기세 그대로 괴물의 얼굴을 향해 팔을 뻗었다. 단도는 역수(逆手)로 쥐어져 칼날 부분이 손 아래쪽으로 이빨처럼 삐죽이 돋아나 있었고, 두툼한 도신(刀身)과 30 cm에 이르는 칼날은 단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거대한 뿔을 연상케 했다. 그 칼날이 손의 궤적을 따라 날으며 시퍼런 광망을 토해냈다.


스칵!


달려드는 창현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는지 괴물은 민첩하게 몸을 뒤로 뺐으나, 창현의 공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은색 궤적이 괴물의 허벅지 부근을 훑고 지나갔다.


"크으윽!"


창현은 의외라는 낯빛이 되었다. 낮게 숙인 괴물의 머리를 노리고 칼을 날렸으나 괴물이 몸을 튕겨 뒤로 빠지는 바람에 허벅지를 베는 데 그친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바닥에 번진 괴물의 검붉은 피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창현은 기다리지 않고 다시금 발을 내질렀다. 몸을 돌리며 괴물의 상단으로 쾌속하게 뻗어 나간 창현의 발차기에서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칼을 날렸던 것은 이 한 수의 돌려차기를 위한 예비 동작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고, 또 위력적이었다.


퍽!


도끼로 장작개비를 내려치는 듯한 소리였다. 창현은 발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것으로 녀석을 끝장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불그스름한 횃불의 빛을 받으며, 녀석은 역시나 앞에 서 있었다. 번개가 무색할 만큼 빠른 연속공격을 받고도 움츠러들기는커녕 괴물은 투지와 살기를 더욱 크게 키우고 창현을 노려보았다.


"..."


허벅지의 상처가 제법 심했는지 놈은 다리를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창현이 다시 뛰어들 찰나, 괴물은 돌연 절룩거리는 다리로 뒤로 물러났다. 다쳤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놈은 빛이 닿지 않는 복도 저편으로 금세 사라져버렸다.


창현은 조금 전 상황을 생각했다. 놈의 움직임은 유달리 빨랐고 광기에 휩싸여 죽을 때까지 달려드는 다른 괴물에 비해 아주 냉정해 보였다. 물러나면서도 녀석은 투지를 잃지 않았다. 겁에 질려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이성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괴물이 이성적이라니, 창현은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일축했다.


먼저 다리에 한칼을 먹인 것도 이유지만 어쨌든 계속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만 자신의 칼이 목표에서 빗나가고 이어진 연속된 발차기도 녀석이 막아 냈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순간 놈은 양팔을 교차해서 타격을 방어하고, 몸을 뒤로 날려서 대부분의 충격마저 흡수했던 것이다. 격돌의 순간 창현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태백산 인근 작은 산에서 마주쳤던 괴물들이 창현의 일격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도망친 놈은 상당히 강력한 놈이라고 봐야 했다. 창현은 칼날에 반사되는 횃불과 거기에 흐르는 한줄기 피를 슬쩍 훑어보고는 괴물이 물러난 어둠 저편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놈이 움직일 동선이나 숨을 만한 곳은 뻔할 수밖에 없다. 놈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랜만에 불같은 살심(殺心)에 사로잡혔다.


본래 창현은 천성적으로 살기가 짙거나 호전적인 성격이 되지 못했다. 페이트에 맞서서 그 자신이 피를 흘리고, 또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은 결코 그의 기분을 유쾌하게 하지 않았다. 단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할 뿐.


그러나 지금은 칼끝에 맺힌 괴물의 피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괴물의 심장에 칼을 꽂고 그 역겨운 피 냄새를 한껏 들이키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구천을 떠도는 이가촌 사람들의 원혼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또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창현은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 지금 이 순간 괴물의 피에 굳은 맹서(盟誓)를 한 것이다. 이 피 흘림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생존이 아닌 복수에 그 목적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을 위하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3. 마침내 돌아오다(4) +1 21.05.18 2,189 68 11쪽
10 3. 마침내 돌아오다(3) +1 21.05.18 2,313 73 13쪽
» 3. 마침내 돌아오다(2) +3 21.05.17 2,392 75 11쪽
8 3. 마침내 돌아오다(1) +2 21.05.17 2,557 77 9쪽
7 2. 과거의 유산遺産(5) +6 21.05.16 2,877 83 11쪽
6 2. 과거의 유산遺産(4) +3 21.05.16 2,958 86 9쪽
5 2. 과거의 유산遺産(3) +9 21.05.15 3,477 106 13쪽
4 2. 과거의 유산遺産(2) +4 21.05.14 3,629 112 11쪽
3 2. 과거의 유산遺産(1) +8 21.05.14 4,004 113 9쪽
2 1. 출행出行 +5 21.05.13 6,018 127 14쪽
1 0. prologue. +21 21.05.13 7,808 181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