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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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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477

작성
21.05.1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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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3. 마침내 돌아오다(1)

DUMMY

오후 늦은 시간, 산기슭으로 들어서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창현이었다. 그는 능선을 넘고 야트막한 계곡의 안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갔다. 사냥꾼들의 비막(秘幕)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직 마을과는 부지런히 걸어도 이틀이 넘는 거리였기에 어쩔 수 없이 유숙을 해야 했다.


마을 인근 산속엔 사냥꾼들이 만들어 놓은 비막이 수십 군데가 있었고, 지금 찾아가는 곳도 그중 한군데였다.


계곡 안쪽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눈에 띄었다. 장정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아도 다 감싸지 못할 만큼 뚱뚱했고 그것만큼 가지도 길게 뻗어있는 거목이었다. 창현이 나무 밑동 바로 아래를 들추자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그는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찰 중인가?`


창현은 맞은편 능선에 있는 비막으로 찾아가 볼까 하다가 생각을 접어버렸다. 페이트와의 싸움 이후 사흘을 내리달려온 탓에 피로감이 상당했던 탓이다. 창현은 바닥에 깔린 검불에 드러누워 돌아가면 무엇을 어떻게 보고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임무와 관련된 내용은 완벽히 머릿속에 정리되어있으니 걸릴 것이 없었다. 새로운 산들의 위치, 거리 및 그곳의 생태까지 더없이 꼼꼼히 기억해 놓았다. 안전한 동선(動線)을 확보하고 근처 페이트만 조심하면 당장 새로운 사냥터로써 마을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한 달 기한을 잡고 떠나온 임무였는데 벌써 석 달이 훌쩍 넘어갔다. 돌아가면 죽은 사람이 살아온 듯 반길 테고 이유 또한 묻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대로 말해봤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게 뻔했고 굳이 시시콜콜 설명하기도 싫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늦긴 했어도 어쨌든 그는 살아있고, 또한 돌아가고 있다. 몸도 괜찮다. 그렇다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 그냥 꿈을 꾸었다 생각하자. 고대인? 한백이라고? 그딴 것 내가 알게 뭐냐. 어쨌든 몸은 건사했으니 다행이야. 그나저나 뭐라고 둘러대지?"


창현은 한백에 대한 감정을 버리기로 했다. 용서의 개념은 아니었다. 한백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복수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복수의 대상이라 여기기 힘들었던 것이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돌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이제 마을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살면 되리라. 돌아오는 내내 고민도 많았고 마음이 번잡했지만, 결정을 내리니 이제야 가슴이 편안해졌다.


"뭐 어차피 별일도 아니었어. 아니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사냥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으니."


일부러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로들에게 보고할 말이 궁색한 건 여전히 고민거리였다. 석 달 동안 도대체 뭘 하면서 지냈다고 해야 하나.


"풍광이 좋아 어디 멀리 갔다 왔다고 해야겠군."


그것 말곤 딱히 떠오르는 핑곗거리도 없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반은 사실이지 않은가. 창현은 눈을 감고 몸에 힘을 풀었다. 마을까진 아직 거리가 남았으니 자세한 말은 천천히 생각해도 될 터였다. 곧 비막 안으로 코 고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 * *


우화산(宇花山)은 이가촌의 가산(家山)을 이르는 말이다. 어떤 산맥과 이어진 것도 아니고 봉우리가 있거나 산세가 험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야트막한 동산이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로 크기가 아담하고 수수하다.


하지만 너무 보잘것없어서 산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우화산은 이가촌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산이었다. 그들의 주거공간이 바로 우화산 지하에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 꽃들이 무더기로 많이 피고 여름의 초입이면 유난히 진달래꽃이 만발해서 사람들은 다른 말로 두견산(杜鵑山)이라고도 불렀다.


우화산의 나뭇잎이 누렇게 물들고 몇 장 남지 않은 꽃잎들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창현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젠 정말 집에 온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창현의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이상한 점을 느낀 건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아직은 이른 오후, 생계를 위해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화산 근처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틀간 영역을 지나오면서도 사람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부지런히 숲 속을 누비며 다가올 겨울에 대비에 식량을 비축하는 일은 모든 마을 사람들의 사명이다. 화전하는 농군들, 약초와 열매를 찾고 뱀 따위 작은 먹거리를 잡는 땅꾼들은 그래서 늘 바빠야 한다. 아니 그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영역을 경계하는 사냥꾼 한둘쯤은 만났어야 정상이다. 이런 적막감은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낮인데 모두 잠이라도 자나..?"


창현은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별일 아닐 거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발길이 조급해졌다. 개미굴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마음이 번잡하고 좀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주훈 형! 명모야!"


드디어 이가촌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창현은 우화산 앞으로 달리며 계속 소리쳐 이름을 불렀다.


"이 장로님! 준우 형님! 촌장님!"


누구에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붉은 눈이 부릅떠졌다. 죽음처럼 사위는 모두 침묵했다. 오랜 고독 속에서 여태껏 혼자 달려온 그였으나 지금 맞닥뜨린 이 거대한 적막과 고요는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창현은 우화산 내부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섰다.


아랫 경첩이 떨어져 나가 덜렁거리는 문은 이미 반 넘게 부서져 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겨우 붙어있는 나무판자 같은 문에는 피에 젖은 붉은 손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있고 주변 곳곳에 반쯤 타고 썩은 정체불명의 뼛조각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창현은 충격에 휩싸여 말을 잊었다.


문에 찍힌 절규하는 듯한 손자국들이 창현의 눈으로 날카롭게 박혀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은 그 일이 이제 현실이 되어 가슴을 찌른다.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그는 불길한 징조(徵兆)들을 애써 외면했었다. 그러나 지금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창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굳은 듯 그 이상의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석 달 전 어느 날, 오늘처럼 해가 쨍하던 날 이 문을 박차고 나왔었다. 그리고 돌아온 지금 다시 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너무도 두려워 턱을 세차게 떨고 있지만, 이 문을 열면 그보다 더욱 두려운 현실을 마주해야 하므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 문 뒤에 뭐가 있을까.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해야 할 행동은 명백했고 그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창현은 드디어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짙은 어둠으로 가리어진 낯익은 복도가 그를 맞았다.


흥분한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치고 있었다. 피가 전신을 빠르게 달리고 손발이 떨렸다. 그러나 반대로 머리는 점점 차가워지면서 조금씩 이성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무작정 어둠 속으로 뛰어들긴 했으나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고, 창현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길게 이어진 복도 초입에 서서 그는 잠시 생각했다. 벽에 걸린 유등의 심지를 손으로 비벼보았다. 평소라면 벽면에 띄엄띄엄 매달아 놓은 유등에 불을 밝혔을 테지만 지금은 모두 꺼진 상태였다. 기름을 못 먹은 지 한참이나 지난 듯 심지가 바싹 말라 있었다. 창현은 몸을 되돌려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곧장 겉옷을 둘둘 뭉쳐서 큼직한 횃불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대체 왜..?"


괴물이다. 괴물의 소행이 분명했다. 그렇지 아니하고선 문 표면에 깊숙이 새겨진 손톱 자국과 적나라한 파괴의 흔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수백 년을 내려온 마을이 괴물에게 습격받았다는 소리는 옛이야기에서조차 들어보지 못한 일이다.


이상하게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횃불을 만드는데 제법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양 볼이 쉴새 없이 꿈틀거리고 눈언저리가 붉어졌지만, 창현은 끝끝내 눈물을 비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횃대에 불을 댕겼다. 붉은 그의 두 눈도 횃불처럼 타올랐다. 다시 동굴 내부로 진입한 그는 이번엔 횃불을 앞장세우고 걸음을 옮겼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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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 마침내 돌아오다(2) +3 21.05.17 2,391 75 11쪽
» 3. 마침내 돌아오다(1) +2 21.05.17 2,557 77 9쪽
7 2. 과거의 유산遺産(5) +6 21.05.16 2,877 83 11쪽
6 2. 과거의 유산遺産(4) +3 21.05.16 2,958 86 9쪽
5 2. 과거의 유산遺産(3) +9 21.05.15 3,477 106 13쪽
4 2. 과거의 유산遺産(2) +4 21.05.14 3,629 112 11쪽
3 2. 과거의 유산遺産(1) +8 21.05.14 4,004 113 9쪽
2 1. 출행出行 +5 21.05.13 6,018 127 14쪽
1 0. prologue. +21 21.05.13 7,808 18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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