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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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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작품등록일 :
2021.05.13 21:41
최근연재일 :
2022.11.1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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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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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477

작성
21.05.14 20:42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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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2. 과거의 유산遺産(1)

DUMMY

"세이프티 프로그램 가동. 생체 스캔 시작."


갑자기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에 전신이 휘감기는데도, 창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반응할 수가 없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거였다. 목적했던 산에 오른 뒤 다시 내려오던 길. 반쯤 무너져 내린 토굴이 눈에 띈 것이 시작이었다.


"아니?!"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람의 키만큼이나 큰 토굴은 확실히 특이할 만 하지만, 그 앞에 무너져내린 흙더미 사이로 사람의 팔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란 정말로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그것만 아니었다면 창현은 분명 그냥 지나쳤을 거였다.


그는 기겁하여 날듯이 굴 앞으로 달려가 토사를 파헤쳤다. 금방 어깨가 드러나고, 곧이어 얼굴도 나타났다. 창현은 이번에야말로 자지러질 뻔했다. 거진 녹아버린 피부와 살점. 안구는 아예 썩어버려 휑한 공동만 내놓고 있었다.


"페이트!"


비명처럼 그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놀라움에 반사적으로 한걸음 뒤로 물러날 때, 붉은빛이 그를 덮쳤던 것이다.


"바이탈 사인(vital sign) 확인 완료. 스캔 결과 인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입장을 허가합니다."


창현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사람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었다.


"뭘 허가한다고?"


빛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멍하니 중얼거리던 창현이 번쩍 고개를 들어 토굴을 노려보았다. 괴물의 시체가 나자빠져 있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동굴이지만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다.


미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하지만 그것을 상쇄하는 호기심이 마음속으로부터 강하게 일었다. 창현은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야 말았다.


토굴 안은 의외로 넓고 길었다. 그리고 생각만큼 어둡지 않았다. 밝은 달빛처럼 은은한 빛이 천장 어디에선가 새어 나와 통로를 비추고 있었다.


그 빛과 목소리는 무엇인가. 이 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단순히 먹이를 찾으러 온 것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일에 휘말려 버린 것 같았다.


창현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덧 굴의 끝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검은색 벽이 굴의 안쪽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창현은 그 벽이 통로를 이루고 있는 벽면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다른 벽면은 자연 상태의 돌이라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질감이 거친 데 반해, 통로의 끝을 막고 있는 벽은 온전히 검은색 일색에다 마치 갈아낸 것처럼 반질반질했다. 무의식적으로 벽을 쓰다듬자 반들반들하고, 차갑고, 단단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금속의 감촉이었다.


지이잉-. 철컥.


그 순간 쇠가 서로 비벼지며 나는 마찰음이 들렸다. 그리고 벽이 천천히 옆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뒤로는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창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와서 발을 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제 더는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몸을 집어넣었다. 창현이 지나가자 벽이 다시 밀려와 원래의 완전한 벽으로 되돌아갔다. 통로는 완만한 나선형의 경사면으로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무렵 점점 경사가 약해지더니, 이윽고 다른 문이 나타났다. 창현은 새삼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계속 긴장시켰던 근육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목덜미를 주물럭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을의 광장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욱 큰 것 같았다. 창현은 이렇게 넓은 실내를 처음 보는지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천장은 높았고 전체적으로 둥근 원형이었다. 벽을 따라 중간중간 몇 개의 문도 나 있었다.


그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 천장과 바닥을 연결하는 굵은 기둥이 하나 서 있을 뿐 집기라고 할만한 것도, 별다른 장식도 없었다.


"환영합니다. 저는 안드로이드 시스템 한백. 쉘터(shelter) 태산(太山)의 관리자입니다. 인간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갑자기 허공에 울려 퍼진 목소리에 창현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건대 입구에서 괴물의 시체를 보았을 때 빛과 동시에 들렸던 그 목소리였다. 넓은 공간 어디에서나 들릴 정도로 큰 음성이었으나 이상하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창현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누구십니까! 모습을 드러내시오!"


아무도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창현이 허공에 소리쳤다. 묘하게도 편안한 그 음성에서 적의(敵意)를 느낄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는 제가 관리하는 공간이고 당신은 외부인인데, 누구인지 먼저 밝혀야 하는 쪽은 당신 아닌가요? 이런 경우를 두고 주객전도라고 하나요?"


"그건..!"


그 말을 듣자 창현은 당장 불편해지고 말았다. 무어라 반박할 말이 궁색했던 것이다. 창현이 미처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와중에, 허공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했습니다. 놀라게 할 의도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오랜만에 농담을 하고 싶었어요. 제 모습은 조금 후에 보여드리죠."


여전히 목소리는 허공에서 퍼져 나왔다. 그 어조는 종전보다 충분히 조심스럽고 정중한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여기는 어디입니까? 당신은 대체 누구요?"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기엔 서로 적절한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네요. 조금 후에,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려드릴 테니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광장 가운데 기둥에서 놀랄만한 변화가 생겼다. 칙칙한 암청색이던 기둥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 안에서 돌연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창현의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사실 원래부터 그 안에 있었지만 빛이 뿜어지기 전까지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나체의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창현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와 대화하는 분이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묻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멍청히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이상한 질문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네 맞습니다. 민망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곧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입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오며 떠올렸던 의문은 수십 가지도 더 되었지만, 당장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뿐이었다. 기다리라고만 하니 당장 의문을 풀 수도 없다. 그는 미간을 모으며 기둥 속 여성을 다시 쳐다보았다.


은밀한 치부까지 모조리 드러낸 채 잠을 자는 듯한 그녀. 한동안 바라보던 창현은 그녀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고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 같았다. 그쪽으로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크릴 유리관 속에서 바이탈 워터로 신체를 보존하는 휴머노이드 기술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실전되었기 때문에 사실 그가 알 방법이란 없는 것이다. 창현은 물속에 유영하듯 편안히 떠 있는 그 여성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책했다.


아무리 사람 같지 않아도 여성의 알몸을 넋 놓고 보다니. 마을에서였다면 당장 치도곤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행동 아닌가.


명예로운 전(前) 태무의 손자가 밖에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게 마을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터였다. 창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 붉어진 얼굴을 저도 모르게 쓸어내렸다. 얼굴에 닿은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굳이 그렇게 양심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감사합니다."


다시 들어보니 완연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귀신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벌써 몇 마디째였지만 아직도 얼떨떨했다.


철커덩-. 철컥.


그때 갑자기 기계의 회전축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리관 속의 여인이 눈을 떴다. 여인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이내 물이 어디론가 빠져나가기 시작하고, 여인의 떨림은 점점 커져 갔다. 마침내 물이 완전히 빠졌다. 고개를 떨군 채 미동도 없이 주저앉은 모습. 바닥에 내려앉은 여인은 흡사 끈 떨어진 인형처럼 기괴해 보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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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45 드라쿠스
    작성일
    21.07.29 00:24
    No. 1

    작가님께서 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9 브랜드킴
    작성일
    21.07.29 18:52
    No. 2

    안녕하세요. 대부분의 동물은 야생의 것을 바로 먹고 보통 그것을 먹이라고 표현하죠.

    문명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자연에서 살아가는 상상을 하던 와중에, 먹이라는 표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위포식자의 위협에 시달리는 인간은 더이상 지구의 주인이 아니고,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하면 낮춰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에게 쓰는 먹이라는 표현을 차용한 것입니다. 인간도 야생에 내던져진 상태에서는 다른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한몫 했습니다.

    읽어주시고 고민해주신점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참좋은아침
    작성일
    21.07.29 11:11
    No. 3
  • 답글
    작성자
    Lv.19 브랜드킴
    작성일
    21.07.29 18:52
    No. 4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5 流顯(류현)
    작성일
    21.09.07 16:49
    No. 5

    10페이지 단어가 틀렸습니다 치부까지 들어낸(×)체 ➡ 드러낸(0)
    * 들어내다 :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 옮기다
    드러내다 : 감추어져 있던 사실이나 모습 등을 나타내 보여지게 하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9 브랜드킴
    작성일
    21.09.07 18:11
    No. 6

    류현님 지적 감사드립니다! 생각도 못하고 넘어간 부분인데 찾아주셨네요. 혹시 이런 부분이 있다면 또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ㅜ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7 서초동
    작성일
    21.10.06 18:25
    No. 7

    음 나중에 진짜 제가 시간이 많이 나고 사색이 가능한 정신상태일 때 읽을게요. 글이 빠르게 안 읽혀지는 답답함이 있네요. 제 정신상태와 지금은 맞지않는 글인 것 같아서요
    쉬운 글을 쓰시는 작가님이 아니시네 몰라뵈서 죄송하고 묵혀 놓을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9 브랜드킴
    작성일
    21.10.06 22:49
    No. 8

    죄송하다니 당치 않습니다. 부족한 글에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하시는 일 잘되길 바라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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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 과거의 유산遺産(4) +3 21.05.16 2,958 86 9쪽
5 2. 과거의 유산遺産(3) +9 21.05.15 3,477 106 13쪽
4 2. 과거의 유산遺産(2) +4 21.05.14 3,629 112 11쪽
» 2. 과거의 유산遺産(1) +8 21.05.14 4,005 11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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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prologue. +21 21.05.13 7,808 18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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