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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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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3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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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Ep 1. 미운오리새끼(8)

DUMMY

세아크 공작령은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영지다. 세티아 왕국의 서쪽에 있는 이 나라는 넓게 펼쳐진 초원을 중심으로 8개의 영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3개의 도시와 5개의 성체로 이루어진 작은 나라였다.

그중 공작이 기거하는 리그니토 영지는 영지의 이름을 딴 넓은 호수가 유명했는데 웬만한 남작령보다 넓은 그 호수는 흡사 초원 위의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호수에 끼는 자욱한 안개는 묘한 신비감을 주었고, 또 저녁에는 반짝이는 하늘을 비추며 마치 하늘 위를 거니는 착각을 준다. 그 경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시사철 대륙의 관광객이 끊이지 않을 정도. 대륙에서도 세티아 왕국은 몰라도 리그니토 호수는 알고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대단하다.

그런 리그니토 호수에서 백미로 일컬어지는 절경은 다름 아닌 세아크 공작 저택이다.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섬에 세워진 그 저택은 흡사 호수 위에 세워진 작은 성곽도시를 보는 것 같다. 허름한 성벽 사이로 높게 솟아오른 세아크 공작 저택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맛이 있었다. 호수에서 육지까지 운치 있는 돌다리로 이어진 공작 저택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고성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경관이네.”


세아크 공작 저택 본관 응접실에서 세리스는 발코니 밖의 절경에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우리 공작령의 자랑이니까요.”


세리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세리스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였다. 그 모습에 세리스 역시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홍차의 뜨거움과 함께 이내 특유의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어떤가요?” 소녀의 물음에 세리스는 미소로 답하며 다시 한번 찻잔을 기울였다.


“우와, 그 뜨거운 걸 마시네?”


그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소년이 경박하게 말했다.


“조슈아.”


예법에 어긋난 동생의 추태 때문일까? 소녀-유리엘은 낮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 누이의 눈총에 동생 조슈아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렸다. 세리스는 그런 남매의 모습에 피식 실소를 지었다.

유리엘 세어러 폰 세아크. 세아크 공작가의 장녀인 그녀는 세리스의 실소에 부끄러운 듯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그러면서도 동생 조슈아를 찌릿 째려보았는데, 조슈아는 그런 누님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세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너 무지 예쁘다. 내 신부 안 할래?”


“······.”


조슈아의 무례함에 세리스의 눈꼬리가 살짝 경련했다. 올해로 열 살 되는 공작가의 서자, 조슈아 듀락 폰 세아크는 그런 세리스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방긋 웃었다. 유리엘은 그런 동생의 무례에 “죄송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사죄했다. 오랜 친우의 사죄 덕일까? 세리스는 손을 드는 것으로 용서를 표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매섭게 조슈아를 쏘아보는 것이 어지간히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그 모습에 유리엘은 뒤의 시녀들에게 살짝 눈짓을 준다. 그 눈짓을 받은 시녀는 유리엘에게 목례하곤 조용히 다가와 조슈아의 뒷덜미를 잡은 채 우악스럽게 끌고 나갔다. “뭐야? 자, 잠깐! 난 공작가 자제라고?!” 조슈아의 철없는 외침이 복도에서 메아리치고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해졌다.


“알펜시아 경과 약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조슈아가 퇴장되고 조용해진 분위기에 유리엘은 찻잔을 홀짝이며 “축하드립니다.” 조용히 운을 뗐다.


“···글쎄. 주변 사람들이 억지로 맺은 인연이라.”


그녀의 마음 없는 축하에 세리스는 쓴웃음으로 답했다.

세리스티나 리디아 폰 세티아. 올해로 11살이 된 세티아 왕국의 제 4왕녀인 그녀는 8살 때 나라 안의 모든 병서를 때고 9살에 재상을 도와 정치를 시작한, 그야말로 왕국 내에서 알아주는 천재 중의 천재다. 그런 그녀는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성으로 태어난 그녀는 왕위 계승권 50위 밖. 아무리 재능이 있고 노력해 봐도 주위에서 보는 눈은 결코 곱지 않았다. 요컨대 여자는 여자답게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도 수도 발키에 위치한 왕성이 아닌, 지금 이렇게 공작 저택에서 공작령의 호수를 만끽하고 있는 것도 오라버니들의 압력 때문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왕성에서 잠시 쫓겨났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세리스의 약혼 역시 그녀의 오라버니들이 모의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결혼 상대를 정하면 다른 여성들처럼 조신해지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모양이다.

세리스는 약혼 건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약혼 상대는 세티아 내에서도 강한 발언권을 지닌 알펜시아 백작가의 작은 영주, 레이 알펜시아였다. 왕국 역사상 최연소 기사위를 받은 그는 왕국 내에서 소년기사로 칭송받으며 영지뿐 아니라 왕실 많은 이들에게도 촉망받고 있었다. 세리스 역시 그런 레이와 약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공주의 몸으로 변변찮은 지지자조차 없는 그녀로서는 알펜시아 백작가는 매우 탐나는 권력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정치 생활을 끝내기 위한 약혼은 오히려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인 것이다.


‘정말로 멍청한 오라비들이니까······.’


세리스를 홍차를 홀짝이며 조소를 삼켰다. 애당초 일국의 왕녀를 타국과의 외교를 위한 정략결혼이 아닌 자국의 귀족자제와 약혼시킨다니, 왕국이 사용할 카드를 스스로 버리는 무능한 오라버니들의 모습이 이제는 안쓰러울 지경이다. 물론 그 덕에 세리스로선 자국에서 입지를 굳히고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으니, 세리스로서도 이번 약혼은 바라마지 않은 이벤트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


세티아의 귀부인이라면 세아크 공작 영애인 유리엘이 알펜시아 백작가의 장남 레이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함을 가장하여 자신을 축하해주는 친구의 모습에 세리스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세리스 역시 이번 약혼을 성사시키고 싶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유리엘과의 우정이 마음에 걸렸다.

정치보다 복잡한 남녀 관계에 세리스는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소식 들으셨나요?”


그런 세리스의 근심을 읽어낸 것일까? 유리엘은 화제를 바꾸며 부드럽게 운을 뗐다. 유리엘의 물음에 세리스는 고개를 갸웃, “무슨 소식?” 되물었다.


“루틴 자작이 결투에서 졌다고 하네요.”


“···루틴, 자작?”


유리엘의 이야기에 세리스는 미간을 좁히며 곰곰이 그 이름을 곱씹었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어쩐지 낯익은 이름에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 그에 맞춰 세리스의 긴 흑발이 부드럽게 찰랑였다.


“왜 있잖아요. 왕립 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위를 받은······.”


“아!”


루틴 머스턴 자작. 통칭 루틴 교수.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노력과 근성으로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 박사위를 취득해 아카데미에서 역사학 교수직을 맡고있는 명예 귀족이다. 전에 한 번 그의 강의를 들은 적 있던 세리스는 유리엘의 설명에 간신히 기억해내며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 이후로 그의 강의시간은 무조건 피해 다녔던 그녀로서 자작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할 만했다.

그런데, 그 자작이 결투에서 졌다? 다른 할 일 없는 귀부인이라면 모를까 세리스는 그런 사소한 일에 흥미가 일지 않았다. 그 엉터리 교수가 결투에서 이기건 지건, 세리스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자작의 강의는 제법 괜찮았지······.’


물론 교육받는 입장이 아닌 교육하는 입장에서지만. 마치 광신도마냥 국수주의를 설파하는 교수의 강의는 훌륭한 정신교육의 표본이자 세뇌 교육의 교과서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점을 높이 사 이례적으로 평민이었던 그에게 명예 작위를 하사한 것이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 논리가 빈약하여 논파할 가치도 못 한 정도라는 점일까······. 아마 이번 결투소동도 본인의 강의가 논파 되어 벌어진 해프닝이겠지. 애초에 평민 출신이라는 큰 콤플렉스를 가진 그라면 자신의 권위에 반발하는 사람을 그냥 두었을 리 없었다.

소문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결투 이야기에 흥미를 잃은 세리스는 홀짝 찻잔을 비웠다.


“그 결투 상대가 이제 열 살 된 어린아이라고 하네요.”


“······.”


그러나 뒤이은 유리엘의 이야기에 세리스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도 그럴게, 열 살이라고? 어린아이가 무슨 수로? 자신보다 한 살 어린 그 나이로 무슨 수를 써서 성인 남성과 결투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결투에서 이겼다는 사실이었다.

세리스는 유리엘의 이야기에 피식 실소하며 “농담도.” 작게 대꾸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아니 이 정도면 거의 판타지 수준이다. 생각해보라, 세상에 어느 바보가 미성년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또 그 미성년자에게 패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차라리 옛날 옛적 용사가 드래곤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


“······.”


“······.”


“···진짜로?”


그러나 유리엘의 진지한 표정에 세리스는 재차 되물었다. 유리엘은 그런 세리스의 의문에 “물론 주위에서는 비겁하다는 이야기가 많지만요.” 답변했다.

설마, 정말로 열 살 된 어린이가 서른 살 자작을 이겼단 말인가?

당사자인 자작이 결투의 결과에 승복한 이상 비겁함이고 나발이고 이긴 것은 이긴 거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유리엘은 결투의 내용보다는 그 결투의 당사자를 언급했다.


“제피란 알펜시아. 알펜시아 백작가의 서자라고 하네요.”


“···제피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재치가 있다면 이름 정도는 들었을 법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세리스는 의문의 소년에 흥미가 생겼다.


“마침 결투를 마치고 로렌시아 지방을 방문한다고 하네요. 아마 지금쯤이면 알펜시아 영지를 벗어났겠네요.”


“로렌시아?”


“네. 알펜시아 영지 서쪽에 있는 땅이죠.”


유리엘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겨 시녀를 불렀다. “지도를······.” 공녀님의 짧은 지시에 시녀는 목례로 답하곤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지도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여기가 우리 세아크 공작령이고 여기가 알펜시아 영지, 알세스 지방이에요.”


유리엘은 부채를 탁 접고선 시녀가 펼쳐놓은 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리고 산맥을 따라 쭉 올라가면 로렌시아 지방이 나오죠.”


지도를 보니 제법 가까운 영지다. 세티아의 수도-발키에서라면 모를까 서쪽에 있는 리그니토 영지에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흐음.” 세리스는 무언가 생각하듯 지도를 보며 작게 침음했다. 그러곤 이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좋아 레이나, 준비를.”


“알겠습니다. 공주님.”


짧은 명령이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보필해온 유능한 기사는 그녀의 명에 고개를 숙이곤 망설임 없이 응접실을 나섰다.


“제피란이란 말이지?”


비록 약혼식까지 시간이 남았지만, 미리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세리스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로렌시아 지방으로 출발한다.”


*


알펜시아 저택을 나선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태양이 9번 졌고 그만큼 알펜시아 저택에서 멀어졌다. 얼마나 걸었는지, 세영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일과 대부분이 걷고 자고 걷고 자고의 연속이었다.

멀쩡한 마차를 놔두고 귀족인 세영이 어째서 고용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걸어가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세영 본인이 바란 결과였다.

처음 마차를 타본 세영은 그 신기함도 잠시, 이내 그 지루함에 금방 질려버렸다. 어떻게 된 게 승차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터덜터덜, 속 터지게 굴러가는 마차에 세영 자신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말동무라곤 세실리아와 헬레나뿐이니 오죽 답답했으면 걸어가겠다고 했을까?

처음 며칠은 그럭저럭 사병들과 어울려 즐겁게 걸음을 옮겼지만 그것도 일주일이 넘어가니 어린 세영으로선 체력이 부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마차를 타면 되지 않나? 안타깝게도 세영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기에 자리가 없었다. 행렬 중 가장 어린 하녀가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까닭이다.


“하아, 정말 뒈지겠네.”


내리 쬐는 햇빛에 더욱 체력을 빼앗긴 세영은 오만상으로 불평을 뱉었다. 그런 세영의 불평을 들었을까? 옆의 병사는 “이제 곧 로렌시아에 도착해.” 어린 세영을 북돋아 주었다.

함께 동고동락했기 때문일까? 세영과 사병들은 상당히 친해졌다. 어린 몸으로 자신들과 함께 행군하며 같은 숙소, 같은 방을 사용하며 식사 또한 같은 자리에서 같이한다. 그런 세영은 병사들에게 있어 귀여운 남동생과 같았다. 그도 그럴게 스스로 귀족이라며 우쭐대지도 않았고 복잡한 예법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런 세영의 모습은 도저히 귀족 나리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일까? 하나둘 말을 팔을 편히 하는 사병들이 생겨났고 세영 역시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지금도 병사의 격려에 세영은 허탈하게 웃으며 무거운 발걸음을 애써 재촉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불평하는 것이 세영답다.

처음 알펜시아 저택을 나섰을 때 성묘 행렬은 구멍투성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행렬은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숙소가 없다니?”


“그게, 예약이 다 찼다고 해서······.”


그도 그럴게 하룻밤 사이에 결성된 행렬이다. 준비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다.

이를테면 숙박.

아무리 백작의 힘이 강하다 하더라도 하룻밤 사이에 로렌시아 영지까지 가는 길목의 여관을 전부 예약해 두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이제 곧 있을 공주마마 약혼식으로 들떠있는 영지다. 비록 약혼식까지는 시간이 남았지만 많은 귀족과 상인들, 여행자들이 알펜시아 영지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영지에 여관이 비어있을 리 없었다.

숙박을 할 수 없다면 노숙을 하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곤란한 문제다. 그도 그럴게 알펜시아 영지-알세스 지방은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영지의 서쪽 로렌시아 영지로 향하는 길목은 험준하기로 이름 높은 세이렌스 산맥이 똬리를 틀 듯 뻗어 있었다. 본격적인 산맥의 험준함은 로렌시아 지방부터지만 그곳을 향하는 길 역시 평지는 드물었다.

이런 까닭에 200여 명에 달하는 대인원이 야영할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자유로운 공터는 많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만한 공터는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영하다니, 밭을 초토화하지 않는 한 야영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숙소 배정을 담당하는 기사는 버럭 언성을 높이며 부하 기사를 나무랐다. 출발하고 하루도 안 돼서 찾아온 행렬의 위기에 기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기롭게 출발해서 하루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고 숙박을 무시한 채 마을을 통과하자니 뒤따르는 고용인과 사병들 사이에서 낙오자가 속출할 것이다.

“투숙객을 내쫓으면?” “밭에서 야영하면?” 나오는 것이라곤 현실성 없는 대안들뿐이다.

해도 산맥에 걸쳐 뉘엿뉘엿 지고 있는 시기. 차츰 어두워지는 하늘에 슬슬 숙박 준비를 해야 하건만 움직임은 없고 소란만 커지니 이상하게 생각한 세영은 기사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세영의 물음에 웅성거림이 멎은 기사들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이내 사정을 설명했다. 상황을 들은 세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쩔 수 없지. 마을 주민들에게 숙박을 부탁해봐.”


세영은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긁으며 행동만큼이나 짜증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그도 그럴게 명령권자도 아닌 세영의 참견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또한 기사위를 가진 그들은 준 귀족, 비록 영지는 없더라도 남작에 준하는 직위다. 그런 그들에게 평민들에게 부탁하다니? 차출이라면 모를까, 물론 자신의 영지가 아니기에 차출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부탁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있어?” 열 살 된 어린아이는 답지 않게 매서운 눈초리로 추궁했다. 뾰족한 수가 없는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꺾지 않고 세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의 세영은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됐어. 다 필요 없고, 그냥 윌리엄이나 불러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 잘난 자존심에 일 처리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 무능한 것들을 상대하자니 골이 지끈 아파온 세영은 미간을 좁히며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그런 그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출을 받은 윌리엄이 다가왔다.


“윌리엄. 지금 여관에 남아있는 방과 평수 확인해.”


“···알겠습니다.”


“또 애들 시켜서 행렬 중 남녀 직종 인원 파악시키고, 쟤는 가용한 모포 개수 파악, 또

살갑고 곱상한 병사 열 명 정도 추려오고.”


무뚝뚝한 기사장 윌리엄은 속사포 같은 세영의 지시에 짧게 답하며 자리를 나섰다. 기사들이 자신에게 반감이 있다고 해도 직속 상관인 윌리엄의 명령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윌리엄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알아 온 정보를 토대로 일차적으로 세실리아의 방을 배정, 나머지 빈방은 기사들이 나눠 사용하였다. 물론 50명을 전부 수용할 만큼 방이 많지 않았기에 세영은 “모포라도 깔고 자.” 욱여넣듯 억지로 방에 처넣은 것이다.

불만이 나올 법도 했지만, 평민의 집에서 병사들과 함께 기거하는 세영의 모습에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곱상한 사병들이 주민들에게 숙박 양해를 구하고, 부족한 모포를 빌리는 등 마을을 뛰어다녔다. 아까 기사들의 꼬락서니를 봐서 일을 시켜봐야 주민들과 기사들 양측 모두 감정만 상할 뿐이다.

그렇게 나머지 고용인과 사병들은 각각 마을 주민들의 집에 묵었고 그래도 남는 인원은 창고나 마차에서 모포 따위를 덮으며 바람을 피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알펜시아 저택에서 멀어질수록 숙박 여건이 나아져 크게 불평하는 이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덧 9일이 지나고 드디어 로렌시아 지방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피곤하다······.”


풀리지 않는 피로에 세영은 작게 탄식했다. 첫날 숙박을 지시한 세영은 이후 자연스럽게 숙소 배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어린 나이에 체력이 부침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 사병들과 고용인, 그리고 몇몇 기사들에게 지지를 얻은 세영은 반강제적으로 일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이 정도 일 처리는 알아서들 하란 말이야!’


갖은 아르바이트들로 단련된 세영은 소리 없이 불평했다.

그때였을까? “저, 도련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세영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낯익은 얼굴이 하나.


“···어?”


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택을 출발한 당일 아침, 세영의 뺨을 때렸던 어린 하녀. 어린 몸으로 과도한 행군에 쓰러졌던 그녀가 언제 다가왔는지 세영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뭘, 그럴 수도 있지······.”


하녀의 사과에 세영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태연한 세영과는 달리 하녀는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몸을 꼬는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능력 좋은데?” 세영을 향해 휘파람을 부는 병사도 있었다. 그런 사병들의 놀림은 세영의 피로에 한층 더 박차를 가했다.

“죄송해요.”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하는 하녀에 세영은 난감한 듯 볼을 긁적였다.

행렬 도중 그녀를 만났을 때 역시 하녀는 세영에게 “죄송해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마 세영의 뺨을 때린 것을 사과한 듯싶다. 그런 하녀의 사과에 세영은 “뭐가?”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하녀가 백작가의 자제에게 손을 대다니, 즉결처분되어도 할 말이 없다. 그도 그럴게 이는 백작가의 위신이 달린 문제로 세영의 바람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세영은 그 일을 없던 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알지 못한 어린 하녀는 “그, 아침에······.” 운을 떼곤 이내 부끄러워졌는지 화악 달아오른 얼굴로 도망쳐 버렸다.

······의미심장한 말만 남겨두고.


“······.”


그날 이후 어느 백작가의 어린 차남과 그 백작가의 어린 하녀의 이상야릇한 로맨스 이야기가 세영을 괴롭혀온 것이다.

다시금 생각난 지난날의 악몽에 하아, 세영은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면서 부끄러워하는 소녀를 보고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겠냐. 다 내 팔자지······.” 자포자기하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네.”


조신하게 대답하는 어린 하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왠지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아 세영은 난감하게 웃었다. 역시 어린애는 어린아이다워야 귀여운데······. 작게 속으로 불평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사랑하는 소녀의 모습에 다시 한번 주위에서 야유소리가 들렸다.

세영은 흥분한 사병들과 고용인들을 무시한 채 걱정스레 소녀에게 물었다.


“그래도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좋지 않아? 아직 묘소까지 제법 거리가 있는데.”


“아뇨! 이제 정말 괜찮아요!”


세영의 권유에 하녀는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내저었다. 그 과민반응에 세영은 무슨 일이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세영의 의문에 답하듯 하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세실리아 님이, 무서워서······.”


“······.”


어머니가 무서워? 어디가?

언제나 온화한 미소와 순진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세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서운 세실리아라,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 세영과는 달리 하녀는 작은 어깨를 떨며 새파랗게 겁에 질려있었다.


“······.”


그러고 보면 헬레나 역시 어머니를 무서워했었지. 제피란의 기억 속의 그녀 또한 어머니-세실리아에게 혼이 날까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데도 용케 같은 마차에서 버티고 있구나.


‘어쩌면 못 내리고 있는 걸지도······.’


전속하녀가 없는 세실리아의 수발을 위해 마차에 붙잡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세실리아의 의외의 면에 세영은 애써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네?”


세영의 말에 하녀는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 말이야. 어떻게 돼?”


“아, 저, 그게, 그······.”


금방이라도 삐익! 하얀 김을 뿜어낼 정도로 새빨개진 어린 하녀. 이상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하녀의 모습에 세영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설마, 또 고백이라든가 청혼 등 그런 이상한 풍습은 아니겠지? 다행히 세영의 걱정은 기우로 그쳤다.


“···엘레노어라고 해요.”


어린 하녀는 홍조를 띠며 수줍게 말했다.

세영은 듣기 좋은 어감에 “좋은 이름이네.” 별 뜻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 세영의 대답을 들은 엘레노어는 양 볼이 펑! 터지는 환청이 들릴 정도로 붉게 상기되었다. 그 모습에 주위의 웅성거림도 덩달아 켜졌다.

하하, 이제 아무래도 좋아······.

자포자기하며 중얼거린 세영은 소란을 무시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이 보입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누군가가 행렬 선두에서 큰 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 산골짜기 사이로 작은 목조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다.

그러한 마을 풍경에 엘레노어는 “아!” 작은 탄성을 질렀다. 로렌시아 지방의 북동쪽의 작은 산골 마을. 바로 그녀의 고향 마을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세영은 고개를 갸웃, 엘레노어에게 물었다. 세영의 질문에 엘레노어는 “제 고향이에요.” 작게 대답했다.


“···그래?”


그 사실이 의외였을까? 세영은 작게 놀라 되물었다. 마을에 다 도착해서 고향임을 깨닫다니,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세영은 이내 납득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지도를 본 것도 아니고 이제껏 마차 안에서 누워서 이동했으니, 뒤늦게 고향을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 도련님. 저는 저희 집에서 묵고 싶은데, 오랜만에 어머니도 뵐 겸······.”


소녀는 그리운 고향길에 세영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야.” 일정을 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엘레노어는 해맑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이 마치 귀여운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한 마음에 세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 자신의 실수를 자각하곤 헛바람을 들이쉬었다.

세영을 괴롭히는 로맨스 이야기에 한 구절이 더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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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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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막간 20.05.12 145 3 8쪽
6 Ep 1. 미운오리새끼(5) 20.05.11 164 4 22쪽
5 Ep 1. 미운오리새끼(4) 20.05.11 162 3 20쪽
4 Ep 1. 미운오리새끼(3) 20.05.11 202 5 23쪽
3 Ep 1. 미운오리새끼(2) +4 20.05.11 291 7 24쪽
2 Ep 1. 미운오리새끼(1) 20.05.11 449 10 18쪽
1 여는 글 +3 20.05.11 536 2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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