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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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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1
추천수 :
73
글자수 :
303,156

작성
20.05.1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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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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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Ep 1. 미운오리새끼(7)

DUMMY

“도련님 따위, 이제 몰라요!!”


아직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빽! 앙칼진 고함이 저택 별관에 메아리쳤다.

윌리엄은 소란스러운 아침에 고개를 한 번 갸웃하는 것으로 관심을 끊고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발걸음을 옮겼다. 본래라면 기사단 연병장에서 아침훈련을 하고 있을 그였지만 어제 갑작스럽게 일정이 변경되었다.

로렌시아 지방의 펠튼 경의 묘소 방문.

영지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휘하 기사들에게 영지 약탈을 주모. 결국 민중봉기로 인해 영지민들의 손에 처형된 엔시스 남작. 분노에 찬 영지민들에게 단두대에 올라간 거로도 모자라 산짐승에게 던져준 시신을 알펜시아 백작이 그의 유골을 수습하여 묘소를 지어준 것이다.

그 고귀한 행동에 주변 영주들은 알펜시아 백작에게 경의를 표할 정도다.


“······.”


윌리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엔시스 남작가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가신 중 한 명인 그는 엔시스 남작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만큼 알펜시아 백작 역시 알고 있다.

본래 알펜시아 백작과 엔시스 남작은 소위 말하는 죽마고우로 제법 두터운 친구 사이였다. 고위 귀족인 백작과 하급 귀족인 남작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면 놀랍다. 그렇기에 죽마고우인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이도 매우 드물었다. 그도 그럴게 체면을 중시하는 백작은 이를 애써 숨겼으며 남작 역시 그런 친구의 바람을 신의로 보답하였다.

윌리엄이 엔시스 기사장으로 있을 때도 몇 번이나 알펜시아 백작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곤경에 빠졌을 때 언제나 엔시스 남작을 찾았다. 비록 힘이 없는 남작이라 하더라도 몰래 술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남작은 백작에게 그러한 친구였다.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 윌리엄은 펠튼 경 묘소를 지어준 알펜시아 백작에게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배신감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가 느끼는 감정은 남작에 대한 죄책감인지도 몰랐다.


“······.”


윌리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백작의 호출에 본관에 들렀다 오는 길. 백작의 명령을 받은 그는 복잡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피란을 죽여라.”


“······예?”


아침 일찍 윌리엄을 소환한 백작은 짧게 명령했다. 그 명령이 너무나 단순했기 때문일까? 윌리엄은 그답지 않게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백작은 그런 기사의 모습에 시선을 주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피란을 죽이라 했다.”


백작은 한때 남작가의 가신이었던 윌리엄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렸다.

백작의 명에 윌리엄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윌리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째서, 입니까?”


윌리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말인가?”


그런 윌리엄과는 다르게 백작은 태연하게 입을 열어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마치 거리낄 것 하나 없다는 듯, 백작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 모습에 윌리엄은 낮은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어째서 지난 결투에서 죽이지 않으신 겁니까?”


원망이 섞인 목소리. 그도 그럴게 윌리엄은 옛 엔시스 남작가의 가신이었다. 또한, 제피란에게 군사학을 가르친 이는 다름 아닌 윌리엄 자신이지 않은가?! 옛 주인의 아들을, 자기 제자를 자신 손으로 죽이라고 백작은 명령하고 있었다.

그 소극적인 항명이 우스웠던 것일까? 백작은 피식 실소하며 처음으로 표정을 드러냈다.


“거기서 죽는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나.”


당연하다는 듯 백작은 간단하게 답변했다.


“엔시스 남작가는 로렌시아 영지민들의 손에 몰락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윌리엄 경?”


비웃음 가득한 백작이 동의를 구해온다. 그런 백작의 조소에 “···이미 몰락했습니다.” 고지식한 기사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네 답했다. 그러나 그런 윌리엄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백작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의 아들이 남아있지 않나.”


“하지만, 이제 알펜시아의 사람입니다.”


“아니, 그들은 나를 이용할 뿐이야. 틈이 생긴다면 언제든 돌아설 녀석들이지.”


“······.”


“그래서 나 역시 그들을 이용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이용가치가 없어졌으니 처리하는 수밖에.”


차갑게 웃으며 백작은 그 웃음만큼이나 차갑게 말했다. 윌리엄은 그런 백작의 말에 이를 굳게 악물었다.


“공주마마가 오시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


모든 건 그 때문이다.

본래라면 제피란 역시 세실리아와 같이 미량의 독극물로 서서히 병사시킬 예정이었다. 시기적절하게 제피란 모자가 병사한다면 저택 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겠지만, 백작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음을 굳힌 듯 작은 각오마저 엿보일 정도다.

그런 백작의 각오에도 불구하고 다 죽어가는 세실리아와 달리 정작 가장 중요한 제피란은 나날이 건강해지고 있었다. 실제 어제만 하더라도 태연히 결투에 임할 정도였으니······.

뭔가 잘못되었나? 생각하기 이전에 백작에게는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제피란을 제거할 차선책 말이다.


“공주마마가 오신 뒤에는 일이 복잡해져.”


왕족이 영지를 방문함으로써 수많은 귀족이 그에 따라붙는다. 그중 만에 하나라도 제피란을 눈여겨본 귀족이 그를 고용인으로 요구하게 된다면 일은 더욱 골치 아파진다. 모르긴 몰라도 세실리아 그 여우 같은 계집이 어떻게 해서든 제피란을 백작가 밖으로 내보내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백작으로선 제피란을 제거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결국, 제피란이란 위험요소의 싹을 방관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


이번 묘소 방문은 모두 그걸 위해서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막을 올리는 시기 역시 적절하다. 잠시 예상외의 결투소동에 당황하긴 했지만 제피란은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주었다. 계획에 지장은 없다. 백작은 침묵으로 말했다.

그런 백작의 모습에 윌리엄은 작게 어깨를 떨었다. 다시 한번 남작가를 배신하라고 명령하는 백작의 모습에 옛 엔시스의 기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어째서 내 침대 위에 네가 자고 있었던 거야?”


세영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쏘아붙이듯 헬레나를 질책했다. 그도 그럴게 그녀 덕분에 요란한 아침 소동으로 하녀에게 뺨까지 얻어맞은 세영이다. 고운 말이 나올 리 만무했다.

잔뜩 화가나 언성을 높이는 세영의 앞에 헬레나는 정좌로 꿇어앉자 머리 위로 번적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세영이 강제로 시킨 이 기괴한 자세는 의외로 매우 힘들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다리는 다리대로 저리고, 머리 위로 치켜든 팔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헬레나는 잔뜩 울먹이는 얼굴로 세영을 올려다보았지만, 찌릿 소년의 사나운 눈빛에 꼬리 내린 강아지마냥 고개를 숙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헬레나는 변명하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게, 술김에 랄까, 왜 있잖아요? 과도한 알코올에 갑자기 졸려졌다는 뭐 그런······.”


“그걸 말이라고 해!”


버럭! 고함에 헬레나는 흠칫 놀라며 어깨들 떨었다.

헬레나의 무신경함에 세영은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기운이 가시고 어느덧 냉정함을 되찾은 세영은 찬찬히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늦은 밤, 똑똑하고 울린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헬레나가 식사 카트를 밀며 찾아왔다. 뭐라고 했더라? 승리를 기념한 조촐한 파티, 였나?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곤 혼자서 능숙하게 상을 차리더니 혼자서 멋대로 파티를 시작해버렸다.

이미 저녁 식사를 가졌던 세영으로선 입맛이 없었으나 성의를 봐서 와인이나 몇 잔 받아 마시려는데······. 찰싹! 하고, 와인잔을 집으려는 세영의 손을 떼려 제지하는 헬레나.


“아직 미성년이시니까 술은 안돼요.”


“······.”


결국, 세영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파티에 지쳐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지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세영의 큰 실책이었다.

세영은 터져 나오는 한숨에 얼굴을 감싸며 진심으로 탄식했다. 무신경한 여자라곤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다 큰 처자가 남정네가 자고 있는 침대에 올라 잠을 청할 생각을 하다니······.

세영으로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히잉, 자고있는 도련님은 귀여웠는데······.”


울먹이는 소리로 중얼거리는 헬레나. 세영은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에게 있어서 제피란은 이제 갓 열 살 된 귀여운 남동생 정도다. 어린 동생과 같이 한 자리에서 잠을 청한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헬레나는 생각했지만, 세영은 불같이 화를 내며 버럭! 다시 한번 언성을 높였다.

흠칫, 큰 소리에 놀라며 헬레나의 양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도 저렇게 화를 내는 제피란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뭘 잘 못 했다는 거지? 곰곰이 생각해본 헬레나지만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다. 애초에 남자와 나란히 잠을 청한 자각이 없는 그녀가 어째서 세영이 화를 내는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때였을까? 똑똑하고,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렌시아 지방 출발준비로 찾아온 고용인일까? 아침 소동으로 아직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세영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들어오세요.”


헬레나를 대할 때와 다른 부드러운 어조로 문밖에 말했다. 그런 세영의 이중성에 불만을 가진 것일까? 헬레나는 양 볼을 부풀리며 귀엽게 세영을 쏘아보았다.


“실례하지.”


문밖의 인영은 끼익, 경첩 소리와 함께 사무적인 말투로 문을 열었다. 딱딱한 성격의 집사일까? 세영은 생각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세영도 익히 알고 있는,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형님?”


알펜시아의 작은 영주로 불리며 소년기사로 칭송받는 레이 알펜시아는 “흐음.” 작게 침음하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왕국에서도 촉망받는 소년기사가 미운오리새끼인 제피란을 찾아오다니? 세영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것은 헬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놀란 눈으로 레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펜시아의 차남이 기거하기에는 상당히 누추한 곳이군.”


방안을 둘러보고 짧게 감상을 이야기하는 레이는 고개를 돌려 세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릎을 꿇고 팔을 높게 쳐든 하녀가 한 명······.


“······.”


레이의 눈썹이 살짝 말려 올랐다. 처음 보는 체벌 자세에 마치 ‘뭣들 하고 있었냐?’라는 눈초리로 세영을 바라보았다. “하하···.” 무안해진 세영은 마른 웃음과 함께 볼을 긁적이며 레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도 그럴게 자기 동생뻘 되는 아이에게 여자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고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하, 하아······.” 마른 웃음은 이내 긴 한숨으로 변했다.


“로렌시아 지방으로 출발준비가 끝났다. 어서 준비하고 나오도록.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지 않나.”


자괴감에 허우적대는 세영에게 레이는 사무적인 어투로 용건을 말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또 의외였을까? 세영은 고개를 갸웃, 레이에게 물었다.


“그 때문에 오신 겁니까?”


어떻게 들으면 상당히 무례한 발언일 수 있겠지만 세영으로선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는 상당히 불쾌한 표정으로 세영에게 되물었다.


“내가 여기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요. 그, 상당히 예상 밖이라······.”


레이의 질책 어린 질문에 세영은 즉시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궁금증이 가시지 않아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 레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소년기사로 칭송받는 백작가의 장남이, 그것도 양자인 차남에게, 단지 전달사항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 세영으로선 감히 생각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세영의 뒤로 헬레나 역시 레이의 등장에 쫑긋 귀를 기울였다.


“문 앞에 어린 하녀가 어째선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있어서 대신 들어왔다.”


“······.”


아침 소동으로 세영의 뺨을 후려친 어린 하녀. 레이의 말에 세영은 어린 하녀를 떠올리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마음만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어제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에 뭔가 크나큰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눈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린 소녀를 보니 뭐라 말을 꺼내기가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사랑할 만큼 세영은 변태가 아니지만······.

세영은 다시 한번 올라오는 한숨을 토해내듯 뱉었다. 그런 한숨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예의 무뚝뚝이 배어 나오는 표정으로 돌아와 사무적으로 말했다.


“채비를 서두르도록.”


“알겠습니다.”


세영은 잔뜩 피로해진 마음에 늘어진 목소리고 대답했다. 뭐랄까? 루틴 교수와의 결투소동의 배는 더 피곤한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 레이는 분명 방문 앞을 서성이는 하녀를 대신해 들어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레이가 하녀를 문 앞에서 만났다는 이야기인데······.

레이의 답변에는 모순이 있었다. 애초에 백작가의 장남이 무슨 일로 별관에 발을 들인단 말인가? 애초에 별관 2층 복도에서 하녀를 만날 상황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세영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런 세영의 눈빛을 느꼈을까? 레이는 붉게 상기된 볼로 “흠흠.”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번 결투, 훌륭했다.”


“······.”


전혀 예상외의 대답에 세영의 동작이 멈췄다. 그뿐만 아니라 헬레나 역시 세영 몰래 팔을 내리고 주무르는 모습 그대로 굳어 레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레이를 제외하고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분위기에 무안해진 그는 다시 한번 “크흠.” 크게 헛기침하였다.

그제 사고가 돌아온 세영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레이가 칭찬을? 그것도 제피란에게? 더군다나 백작가 사람들 대부분이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결투를 두고 훌륭하다고?

어쩐지 미덥지 못한 칭찬에 세영은 레이가 자신을 비꼬는 건가 생각하고 레이를 살폈다. 그러나 자신의 발언을 부끄러워하는 레이의 모습이 비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레이의 반응에 세영은 다시 한번 결투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비겁한 결투다. 응! 당사자인 본인이 장담하는데 사기나 다름없는 결투다.


“비겁, 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결투한 당사자가 조심스럽게 레이에게 물었다. 그런 세영의 소심한 질문에 레이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비겁하다니? 그건 분명 사전 합을 통한 결투였다!”


“······.”


“너의 재치와 노력으로 성년인 자작을 이긴 것이다. 이를 두고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결투가 훌륭하단 말이냐!”


“······.”


어쩐지 당사자보다 더 열변을 토하며 자신을 변호하는 레이의 모습에 세영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세영에게는 속사포마냥 이야기하는 레이의 말을 차마 끊을 용기가 없었다. 잔뜩 흥분해서 역설하는 레이의 말을 끊는다니, 모르긴 몰라도 다시 한번 결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세영은 소름 돋는 생각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건 그렇고 세영의 결투에 잔뜩 흥분하여 칭찬하다니······. 아마도 왕국 역사상 최연소 기사위를 받은 레이 역시 나름대로 나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듯하다. 그 콤플렉스를 증명이라도 하듯 “비겁하다면 이제 갓 열 살 된 어린아이에게 결투를 신청한 자작 쪽이 더 비겁하다!” 목소리를 높이는 레이의 모습에 세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투가 끝나고 어째선지 피로가 더 늘어난 것만 같다. 물론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레이의 마음은 고맙지만, 지지와 찬양은 엄연히 다른 의미였다.


“감사, 합니다.”


레이한테서 묻어나오는 부담감에 세영은 딱딱한 감사를 표했다. 그런 세영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일까? 레이는 드물게 함박웃음을 지은 채 세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처음 보는 레이의 호의가 부담스럽기만 한 세영은 “그럼, 채비를 서둘러야 해서······.”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준비할 테니 나가 달라. 정중히 돌려 부탁한 세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레이는 꿈적도 하지 않은 채 “정말로 알펜시아 백작가에 어울리는 결투였다.” 찬양을 계속했다. 그런 레이의 찬양이 계속 이어지자 “맞아요. 도련님 만세!” 이에 질세라 헬레나 역시 합류했다.

복잡한 머리에 두통이 일었다. 세영은 지끈거리는 골에 미간을 찡그리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러 자극했다.

이제는 뭐가 뭔지, 세영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세영이 채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 이미 로렌시아로 출발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알펜시아 기사단의 연병장. 어제에도 몇 번 찾아왔던 곳이지만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 그도 그럴게 200여 명이 모인 사람들과 마차를 비롯한 수많은 물자에도 불구하고 여백을 보이는 공터에 세영은 새삼 혀를 내둘렀다.

50명에 달하는 기사들이 좌우로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있었고 그 뒤로 제법 큼직한 마차와 고용인들, 마지막으로 창으로 무장한 사병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영은 난생처음 보는 장관에 놀랄 틈도 없이, “어서요!” 헬레나의 손에 이끌리듯 마차에 올랐다. 언제부터 계셨던 걸까? 마차 안에서 어머니 세실리아가 부드러운 미소로 세영을 반겼다.

갑작스러운 묘소 방문에도 하룻밤 사이에 편성된 성묘객 행렬에 세영은 새삼 알펜시아 백작의 힘을 느꼈다.


“조심해라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것 같다.”


방문을 나서기 전, 레이의 충고가 세영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윌리엄의 우렁찬 목소리가 그 충고를 지워나갔다.


“출발!”


성묘객을 통솔하는 윌리엄의 외침에 출발을 알리는 나팔이 우렁차게 울렸다. 알펜시아를 상징하는 금장 장미가 수 놓인 깃발이 하늘 위로 올라간다. 그 옆으로 나란히 엔시스를 상징하는 세 자루의 검이 수 놓인 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알펜시아의 연병장에 모인 성묘 행렬이 로렌시아 지방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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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p 1. 미운오리새끼(5) 20.05.11 164 4 22쪽
5 Ep 1. 미운오리새끼(4) 20.05.11 161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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