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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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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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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Ep 1. 미운오리새끼(3)

DUMMY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세영이 루틴 자작에게 결투 신청을 받은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알펜시아 저택은 모두 그 이야기로 쑥덕이고 있었다. 아마 입이 가벼운 루이가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닌 모양이다.

세영은 오늘 하루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 도련님? 결투 이야기, 정말인가요?”


그 소문이 얼마나 퍼졌는지 몰라도 백작가의 고용인들까지 찾아와 소문의 진위를 물어볼 정도다. 세영으로선 내일 있을 결투보다 현재 이 불편한 상황에 더욱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런 고용인들의 질문을 일일이 무시해가며 세영은 지친 몸을 이끌고 제피란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방안에는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헬레나가 있었다. 그 초조함이 어느 정도였냐면 내일 있을 결투가 세영이 아닌 그녀가 임하는 걸로 착각할 정도다.


“도련님!”


아니나 다를까 세영을 보자마자 대뜸 고함부터 지르는 헬레나. 산 넘어 산이라더니, 세영은 다시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세영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헬레나.


“결투 소문, 정말인가요?”


“······.”


어째선지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헬레나의 기세에 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런 세영의 모습에 헬레나는 재차 “도련님!” 세영을 재촉하듯 불러 새웠다.

오늘만 몇 번이고 받은 질문이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고용인들의 흥미위주의 질문에는 쉽게 말이 나왔건만, 어쩐지 그녀 앞에선 쉬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입을 벙긋거리기를 몇 번, 세영은 이내 인상을 구기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수가······.”


그런 세영의 대답에 헬레나는 허탈한 목소리로 넋이라고 나간 사람 마냥 바닥에 주저앉았다.

결투. 보통 원한이나 모욕 등을 갚기 위해 청하는 승부로 양자 간의 합의하에 특정한 룰 아래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말이 합의지 결투에 임하지 않을 경우 겁쟁이로 낙인찍히는 것이 이 결투란 시스템이다. 이는 명예를 중시 여기는 귀족들에게 목숨보다 더한 가치로 결투에 임하지 않은 상대는 귀족 사회에서 매장되는 반 강제적인 시스템이다.


“정말로, 결투에 나가시는 건가요?”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헬레나는 세영의 양 어깨를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세영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글쎄······.” 말끝을 흐렸다.


“글쎄가 아니에요, 글쎄가!!”


그런 세영의 태도가 답답했는지 헬레나는 다시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게 다름 아닌 결투다. 누구 하나 잘 못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 것이다. 또한 여기서의 결투는 보통 상대가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지 육신 멀쩡히 결투를 치렀을 경우 겁쟁이로 비난 받기 일쑤다. 더군다나 제피란은 이제 열 살. 태어나서 칼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꼬마가 서른을 넘긴 어른과 칼싸움에서 만에 하나라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봉건귀족의 결투에서 귀족의 재산으로 볼 수 있는 기사를 내세워 대리 결투하는 경우도 있지만, 세영이나 루틴 교수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없으므로 이 경우는 해당되지 않았다.


“도련님. 이번 결투, 나가지 마세요!”


헬레나는 붙잡은 세영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결투라고요, 결투!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꽈악, 하고 세영의 양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주위에서 겁쟁이다 뭐다 하겠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이잖아요?!”


“······.”


세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헬레나의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에 세영은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걱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세영은 작게 도리질 쳤다.


“도련님!”


다시 한 번 헬레나의 고함이 방안에 메아리쳤다.

애초에 자살을 시도했던 세영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사람으로 눈을 떴다. 삶의 이유를 잃고 자살했던 자신이 무슨 명목으로 다른 인생을 산단 말인가? 세영은 제피란이 아니다. 그래도······.

어쩐지 어머니에게 혼이라도 나는 것 마냥······. 그러고 보면 어릴 적 어머니에게 혼날 때도 어머니께선 자신의 양 어깨를 붙잡으시며 눈을 맞추셨지.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각 때문일까? 세영은 붙잡힌 어깨에 실소했다.


“지금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요?!”


진지하게 이야기하던 헬레나는 세영의 웃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헬레나의 모습 때문일까? 세영은 어쩐지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제피란이 아닌 세영으로, 마치 걱정 많으신 어머니께 잔소리 듣던 그 때로······.

그렇기 때문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쉬이 말이 나왔다.


“이미 백작님과 어머니께서도 승낙하신 일이야.”


그 답변이 결정적이었을까? 헬레나는 마치 사형이라도 선고받은 사람마냥 쩍! 굳어졌다.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저택에 있는 모두가 알게 된 결투다. 그 소문을 저택의 주인인 백작이 모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돼는 일이다. 실제 방에 들어오기 한 시간 전, 백작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온 세영이다.

어차피 로렌시아 영지를 위한 양자. 제피란은 백작의 입장에서 사라지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게 제피란이 성장하여 로렌시아 영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세영에게 이야기를 들은 백작은 짧게 말했다. “알펜시아 백작가에 어울리는 결투를 해라.” 라고.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의 입장에서 미리 세영이 결투에서 도망치는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옆의 세실리아 역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세영을 보기만 할 뿐 반대하지는 않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녀 나름대로 귀족으로 살아온 긍지가 있는가 보다.

자의가 어떻든 주변에서는 세영에게 결투를 강요하고 있었다. 백작가의 미운오리새끼인 제피란은 여기서 사라져 주는 것이 좋다고, 이곳에서 자신이 있을 곳은 아무데도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나는 마치 자기 일 인양 “그럼, 어떻게 하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맥이 풀렸는지 어깨를 붙잡던 양 손도 늘어놓은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세영을 바라보았다. 보는 사람이 더 가슴 아플 정도로, 헬레나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영은 그런 그녀의 가슴 아린 걱정에 애써 너스레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애써 삼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세영의 반응에 울컥한 헬레나. 그러나 세영은 그녀에게 활짝 웃으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기면 되잖아? 안 그래?”


능청스러운 세영의 대답에 헬레나는 기가 찼는지 “도련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영이 루틴 교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그 누가 생각하더라도 이제 열 살인 제피란이 서른에 접어든 루틴 자작을 이길 것이라 생각 할 수 없었다. 되레 루틴 자작의 칼에 꼬챙이마냥 꿰일 세영의 모습만 떠오를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괜찮아. 루틴 자작은 날 죽일 마음 따윈 없을 태니까.”


“무슨 근거로······.”


당당하게 말하는 세영의 말에 헬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영은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왜 고용인들이 루틴 교수가 아닌 내게 와서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겠어?”


“······.”


제피란은 백작령에서도 폭탄으로 취급받는 요주의 인물이다. 괜스레 제피란과 대화하는 꼴을 백작부인에게 보이다가 눈 밖에 나기라도 한다면 그들로서는 백작가를 떠나나는 것이 바람직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거리를 두는 제피란에게 직접 다가온다?


“루틴 교수가 결투를 신청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 아닐까? 이제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지적에 이성을 잃고 결투까지 신청한 자신의 경솔함이 부끄러워서?”


“······.”


“루틴 교수에게도 이번 결투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불필요한 싸움이야. 아니 오히려 다른 학자들에게 어린애에게 발끈해 결투를 신청한 머저리로 기억되겠지.”


어린아이와의 결투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자작에게 돌아오는 건 머저리라는 낙인뿐이다. 그렇게 말하며 세영은 대충 겉옷을 바닥에 던져두며 자신의 허리께 오는 침대위에 걸터앉는다.


“명색이 박사인데, 지금쯤 결투를 신청한 것에 후회하고 있겠지.”


“그, 그럼······.”


어쩐지 희망에 찬 헬레나는 그 희망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는 세영은 먼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답했다.


“교수 역시 귀족이야. 한 번 뱉은 결투 선언을 철회하지는 못 해. 자기가 결투를 신청하고 자기가 도망친다? 그것도 어린애에게? 그만큼 꼴사나운 짓도 없지.”


“그럴 수가······.”


세영의 확답에 헬레나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쩐지 놀리는 보람이 있는 아가씨다. 세영은 소리죽여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린애 지적에 발끈해 결투로 죽이는 것 역시 꼴사나울 태니까······. 또 백작가의 자제를 욱하는 심정에 죽이는 머저리는 아닐 거야.”


비록 제피란이 백작가의 미운오리새끼라 하지만 외부인인 루틴 교수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것은 루틴 자작의 명예 이전의 문제다. 왕국에서도 강력한 귀족인 알펜시아 백작의 어린 자제를 본인의 성급한 결투 신청으로 죽여 버린다니, 백작과 척을 질 것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영지도 없는 명예작위를 가진 자작이라면 감히 그런 생각은 못 하겠지······.


“아마 내일쯤이면 목검 같은 걸로 결투하자고 다치지 않는 선에서 원만히 해결할 수 있게.”


“정말요?!”


이제껏 진검승부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헬레나는 세영의 말에 반색하며 되물었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 모습에 세영은 씁쓸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헬레나는 그것만으로도 활짝 웃으며 방을 나섰다.


“······.”


헬레나가 나가자 적막함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분명 백여 명이 생활하고 있을 저택임에도 불구하고 그 객실만 떨어져 나온 것 마냥 너무나 고요했다. 그 적막함이 너무 서늘해 세영은 작게 몸을 떨었다.

실제 세영에게 있어서 결투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결투 뿐 아니라 모든 것들이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그도 그럴게 가족을 따라 투신했던 그로선 가족은커녕 자신 혼자 낯선 세계에 떨어진 것이다. 그런 세영에게 삶의 이유 따위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식당에서 무례한 행동으로 백작을 도발했고, 루틴 교수를 조소했다. 앞으로의 일 따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곳에 자신이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


아까 헬레나에겐 그럴싸하게 말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았다. 루틴 자작이 불쾌함을 참지 못 해 틀어박힌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고용인들이 저택의 손님인 루틴 교수보단 백작가의 자제인 제피란이 쉬웠기에 접근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일련의 소동을 들은 백작 역시 오히려 루틴 자작에게 눈에 가시인 제피란을 제거해달라고 사주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순진하게 세영의 말을 믿고 헬레나는 밝게 웃으며 방문을 나섰다. 비록 그 걱정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정말이지.”


깊게 한숨을 내쉰 세영은 풀썩 침대위로 가라앉듯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헬레나가 침대에 앉아서 자신을 기다린 탓일까? 서늘한 방 안, 몸을 뉘인 침대는 조금이나마 따뜻했다.


*


작은 새소리가 정겹게 울렸다. 날이 밝아오고 산맥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비친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어느덧 아침이 되었는지 주변에서 하나 둘 인기척이 되살아난다. 이내 일찍 일어난 고용인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귓가를 간질인다.


“하아, 하아, 하아······.”


세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더욱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봄기운치곤 제법 찬 아침공기에 하얀 숨결이 나올 정도다.

하얀 입김을 가르고, 부웅! 목검이 거칠게 휘둘러졌다. 마치 내던지듯 목검을 휘두르는 가느다란 팔은 혼자서 얼마나 연습을 했는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연습을 하고 있었을까? 온통 땀과 먼지투성이인 세영은 기사단 연병장에서 혼자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숨결이 아침햇살 속에 흩어졌다. 자세히 보면 세영의 몸에서 미약하게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제법 오랫동안 연습한 모양이다.

그런 세영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분주하게 움직이던 고용인들이 저마다 멈춰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린다. 세영은 그런 고용인들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목검을 휘둘렀다. 마치 고용인들의 웅성거리는 소음을 쫓듯, 부웅! 둔기를 휘두르는 둔탁한 소리가 연병장을 가득 채웠다.


“제피란 도련님.”


그리고 얼마나 더 지났을까? 때마침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세영은 휘두르는 목검을 멈췄다.

검을 거두고 돌아보니 낯설지만 낯익은,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아침 훈련을 나온 알펜시아의 기사일까? 남루한 바지 옆에 찬 철검의 손잡이 부분에 알펜시아 백작가를 상징하는 장미문양이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옷감 사이로 팽창한 근육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보는 것만으로도 중압감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세영은 그런 그를 기억에서 떠올리곤 반갑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윌리엄.”


그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그도 그럴게 제피란의 기억속 그는 옛 엔시스 남작가의 가신으로 기사장이었던 자다. 어릴 적 남작가에서 제피란의 군사학 교관으로 겁쟁이 제피란이 제일 무서워하던 사내였다. 지금은 그 남작가의 몰락으로 알펜시아 백작가의 기사위를 받은 알펜시아의 가신이었지만, 제피란과는 제법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였다.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윌리엄은 듣기만 해도 딱딱한, 사무적인 인사를 건넸다. 백작가의 가신이 되면서 제피란의 관계가 서먹해졌기 때문일까? 생각해 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피란의 기억속에서도 마지막으로 윌리엄과 대화를 나눈적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백작가로 입양된 후론 말할 것도 없고, 그 전 남작가에서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적이 없다. 언제나 일방적으로 필요한 지도만 하고 나가버린 윌리엄의 모습은 일부로 제피란을 피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남작가에서 온 사랑을 받고 자랐던 제피란은 그런 붙임성 없고 무뚝뚝한 윌리엄을 무서워했다.

세영은 그런 위리엄을 등지며 다시금 목검을 휘둘렀다.


“무탈했으면, 이번 결투 소동이 왜 일어났겠어?”


부웅! 다시 한 번 둔탁한 둔기가 포악하게 허공을 갈랐다.


“······많이 변하신 것 같군요.”


예상외의 세영의 반응에 윌리엄은 드물게 놀랐다.


“그래? 난 원래 이런 놈인데?”


세영은 윌리엄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목검을 휘둘렀다.

실제 세영과 제피란의 성경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항상 겁이 많고 소심해 권위에 굴복하는 제피란에 비해 세영은 당당하고 주관이 뚜렷해 특유의 반골기질을 가지고 있다. 본래 제피란이라면 루틴 교수의 수업에 토를 달기는커녕 다른 형제들처럼 열심히 필기하며 공부할 아이였다. 아니 굳이 루틴 교수 건까지 갈 필요 없이 지금처럼 윌리엄 앞에서 편히 이야기 할 성격이 못 된다.

세영은 적잖게 놀란 윌리엄을 무시하며 다시 한 번 목검을 휘두른다. 부웅! 그렇게 몇 번을 더 휘두르곤 이내 세영은 목검을 거두고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더럽게 힘드네.”


“잘 못된 수련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영의 불평에 옆의 윌리엄이 작게 충고했다. 그런 기사의 비평이 마음에 들지 않은 세영은 입술을 씰룩이며 “됐어. 어차피 내가 기사위를 가질 것도 아니고······.” 불평했다. 그러곤 목검과 나무방패를 연병장 구석에 건성으로 던져 놓았다. 어차피 놔두면 고용인들이 알아서 치우겠지. 짜증이 솟구치는 세영으로선 그런 잡일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오늘 결투를 준비하시는 것이라면 방패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윌리엄은 세영이 내던진 방패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결투의 룰은 여러 가지 있지만 방패를 사용하는 결투는 드물었다. 그도 그럴게 치욕을 갚기 위한 결투다. 거기서 방어구를 착용하는 것 자체가 겁쟁이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지 귀족들로선 선호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일까? 귀족들의 결투에서 단검을 드는 경우는 있어도 방패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요컨대 품위와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들의 결투에서 방패는 겁쟁이들의 산물인 것이다.

세영은 만사가 짜증난 사람마냥 “남이사!” 거칠게 외쳤다.


“아으, 쓰라려······.”


당연하면 당연하겠지만 제피란은 검술을 익혀 본적이 없다. 아니, 목검은커녕 그 비슷한 작대기 한 번 휘둘러본 적 없는 귀공자로 자라왔다. 그렇기에 손바닥이 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어쩐지 중간부터 목검 손잡이가 끈적끈적했던 것이 물집이 터져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투는 정오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긴 어쩐 일입니까?”


“지금 연습했잖아?”


가득이나 안하던 짓에 힘들어 짜증이 난 세영은 사무적인 윌리엄의 물음에 가시 돋친 억양으로 대답했다. 윌리엄은 그런 껄렁한 세영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마음가짐은 좋습니다만, 겨우 몇 시간 연습한다 해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


앞서 말했듯 제피란은 검술을 접한 적이 없다. 그것은 세영 역시 마찬가지다. 제법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남들 다 다녀본 태권도장도 다녀 본적 없는 세영이다. 이제와서 몇 시간 연습한다 해서 검술 실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무리한 운동에 지쳐 결투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 대 세영의 아침연습은 안하느니만 못 한 훈련인 것이다.

그런 윌리엄의 의견에 세영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까까지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확실히 효과가 있으니까.”


“······?”


확신에 찬 세영의 대답에 윌리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효과가 있다? 실력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겨우 몇 시간 목검 휘둘러서 검술 실력이 능숙해진다면 기사위라는 직위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옆에서 세영의 실력을 직접 본 윌리엄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세영의 검술 실력은 어린아이들 전쟁놀이라면 모를까 서른에 접어든 성인 남성과 결투를 할 실력은 아니다.

그럼 무엇을 보고 효과가 있다고 한 걸까? 윌리엄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고용인들 몇몇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하나둘 일어난 기사들이 아침 훈련을 위해 연병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다른 날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알펜시아 연병장의 아침풍경이다.


“윌리엄. 현재 기사단의 인원은 얼마나 돼?”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는 윌리엄에게 세영은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한 부대에 약 50명씩 제 1 부대에서 6부대까지 있습니다.”


그러한 윌리엄의 답변에 세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략 300명 이라, 그런 것 치곤 연병장으로 나오는 기사들이 적은 것 같은데······.


“다음 달 공주마마님의 방문으로 대부분 영지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대기하고 있는 부대는 3부대와 4부대 뿐입니다.”


“······.”


묻지도 않은 사실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윌리엄의 유능함에 세영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 윌리엄에게 물었다.


“윌리엄. 현재 기사단 내의 직책이 어떻게 돼?”


“제 3 기사장으로 평시에는 훈련 교관으로 있습니다.”


“한 달 간 예정된 훈련은?”


“딱히 없습니다.”


굳이 세영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도 없건만 꿋꿋이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고지식한 윌리엄 답다. 세영은 그런 윌리엄의 답변에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아주 좋아.” 짧게 말하곤,


“알펜시아 기사단, 3 부대는 나와 내 어머니, 세실리아 여사를 호위해 로렌시아 지방의 펠튼경의 묘소를 방문할거야.”


“······.”


“출발은, 글피가 좋을까? 갑작스럽겠지만 모레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해.”


알펜시아 백작가의 미운오리새끼인 제피란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당돌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다. 더군다나 백작가가 자랑하는 중장 랜서는 백작의 직속 기사단이다. 영주의 후계자인 레이라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명령할 권한이 없다.

그런 세영의 건방진 명령이 기가 찼을까? 윌리엄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도련님은 저희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습니다.”


“나도 알아.”


윌리엄의 대답에 태연스럽게 말하는 세영.


“내가 아니야.”


“······?”


“내가 아닌 백작님 말씀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세영의 모습에 윌리엄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인가는 받으신 겁니까?”


“아니.”


그 말에 윌리엄의 눈가가 씰룩였다. 인가도 없이 영주의 명령을 사칭하다니, 윌리엄의 무뚝뚝한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세영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받아야지. 아니, 받아내야지.”


언제나 소심하게 눈치를 살피던 소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자신 있게 말했다.


“늦어도 이번 주 중으로 출발할거야. 미리 준비해두면 수고가 덜어지니까.”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세영은 벌써부터 영주의 인가를 받은 것 마냥 당당히 이야기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세영의 부제를 눈치 챈 그의 전속 하녀가 연병장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세영은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소문은 정말 빠르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윌리엄?”


세영은 등 뒤의 윌리엄에게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모르는 제피란의 모습에 되레 질문을 하였다.


“무엇 때문에, 변하신 겁니까?”


도저히 예전의 심약하고 소심했던 제피란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세영의 모습에 윌리엄은 물었다. 그러나 그 어투나 어감이 낯간지러웠기 때문일까 세영은 볼을 긁적이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윌리엄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작게 대답했다.


“···살기 위해서?”


낯뜨거운 대답에 세영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다. 비록 그것이 세영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감상적인 생각에 닭살이 오른 세영은 실소하며 연병장으로 뛰어 들어오는 걱정거리 가득한 하녀를 마중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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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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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막간 20.05.12 145 3 8쪽
6 Ep 1. 미운오리새끼(5) 20.05.11 164 4 22쪽
5 Ep 1. 미운오리새끼(4) 20.05.11 161 3 20쪽
» Ep 1. 미운오리새끼(3) 20.05.11 200 5 23쪽
3 Ep 1. 미운오리새끼(2) +4 20.05.11 290 7 24쪽
2 Ep 1. 미운오리새끼(1) 20.05.11 448 10 18쪽
1 여는 글 +3 20.05.11 535 2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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