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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a 님의 서재입니다.

세티아 왕국의 작은 영주님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렌시아a
작품등록일 :
2020.05.11 22:43
최근연재일 :
2020.05.27 21: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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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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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Ep 1. 미운오리새끼(2)

DUMMY

세상에는 판타지라는 것이 있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허황된 이야기부터 21세기의 초능력자, 미래 과학을 바탕으로 한 공상 소설까지 그 분야가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사람의 몸에 발화나 방전 등 이상한 능력이 있거나 죽은 사람이 윤회설에 따라 환생 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평소라면 웃어넘겼겠지만······.


“···이건 대체 무슨 판타지냐.”


세영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듯 푸념했다.


“제피란? 식사가 입에 맞니 않니?”


식탁 앞 스프를 휘적거리는 세영의 푸념을 듣지 못 했는지 맞은편의 여성은 세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한 여성의 물음에 세영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러나 눈앞의 스프를 떠먹을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세영으로서는 이 모든 것이 불쾌하기만 했다.

제피란 알펜시아. 알펜시아 백작가의 차남인 열 살배기 소년이며, 현재 세영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요컨대 세영은 이미 죽고 이곳의 제피란으로 환생한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판타지다.

세영이 모를 터인 기억. 아마도 아까부터 계속 떠오른 생각들은 아마 제피란의 기억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곳의 대화는 한국어와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영어도 아니고 귀동냥으로 들어본 불어나 독일어도 아닌 것 같았다. 영어 회화도 그리 잘하지 못했던 자신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구지···?”


세영은 반투명한 스프를 속에 비친 자신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제피란에 대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마치 세영 자신의 정체성을 덧씌우듯······. 혼란스러운 머리에 세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세영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피란의 기억은 둑이 무너진 것 마냥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백작가의 양자 제피란. 본래 제피란은 남작가의 자손으로 민중 봉기로 몰락한 엔시스 남작을 대신하여 제피란의 후견인을 자청한 알펜시아 백작에게 몸을 의탁하였으나 어머니 세실리아 여사가 백작의 측실이 되면서 제피란 역시 자연스레 양자가 되었다. 그렇게 몸을 의탁하여 양자가 된 지도 달포가량 되지 않았기에 제피란의 기억을 가진 세영으로서도 백작가의 분위기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여기 생활은 좀 익숙해 졌니?”


아니나 다를까 세영에게 어머니, 세실리아 여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세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대답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실리아는 만족하는지 자상하게 웃었다. 그것이 묘한 죄책감이 되어 세영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세영은 불편한 마음을 환기시키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소년의 몸이라서 더욱 거대해 보이는 대리석 홀과 금장식, 거대한 식당은 20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긴 식탁을 중심으로 붉은 비단위로 금실로 수놓은 장미 문양까지, 흡사 연회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이는 백작과 세실리아, 그리고 세영 이렇게 셋뿐이다. 넓은 식당과 식탁에 무색할 정도로 조촐하게 식사하는 모습에 세영의 불편한 기분이 더욱 언짢아졌다.

어린 제피란이야 몰랐겠지만 세영으로서는 이 상황이 매우 불쾌했다. 그도 그럴게 백작의 홀대가 너무 노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백작가의 자제가 본 저택의 별관, 그것도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방을 임시 객실로 만든 방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방은 그렇다 치고 가구 자체야 고급에 속하는 편이지만 어린 제피란이 사용하기에는 크기가 맞지 않았다. 이를테면 쓸려면 써보라는 듯 빈정대는 것 마냥······. 그나마 전속하녀가 한 명 있다는 사실만이 백작가의 자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보다도 어머니, 세실리아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고용인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갈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 어린 제피란의 귀에도 들릴 정도다. 이미 몰락한 남작가를 등지고 백작에게 다리를 벌리는 기회주의자라는 평판은 어린 제피란이 듣기에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가에서 그들을 고려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정실인 백작부인이 측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애당초 제피란 역시 백작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이지 않은가? 가신들 역시 제피란과 세실리아에게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적의로 가득한 백작가에서 적응하는 것은 어지간히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백작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마치 잔잔한 클레식의 선율마냥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고있는 그 모습이 세영에게는 매우 아니꼽게 보였다. 솔직히 세실리아 모자가 이렇게 홀대를 받고 있는 것도 백작의 저런 태도에 의한 영향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두 모자에게는 관심 없다는 듯 백작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야속하게 식사만 계속할 뿐이다.

그런 백작이 어째서 세실리아를 측실로 들인 것일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민중 봉기로 인한 엔시스 남작가의 몰락. 졸지에 영주가 없는 엔시스 남작가의 영지, 로렌시아 지역에 대한 정통성이 바로 남작가의 유일한 혈육인 제피란인 것이다. 세실리아를 측실로 들임으로서 알펜시아 백작은 제피란에 대한 후견인이자 양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더러운 정치판 한 가운데 놓인 사실이 아니꼬워서일까? 세영은 미간을 구기며 작게 혀를 찼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니까.”


세영은 가족들을 따라 자살을 결심했다. 솔직히 사후세계를 믿지 않은 그로서는 일련 모든 상황이 불쾌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게 삶의 이유를 잃고 자살한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불편한 식사가 한층 더 불편해졌기 때문일까? 세영은 탕! 성을 내듯 거칠게 식기를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곧 역사 수업이 있어서요.”


파르르 떨리는 입 꼬리를 애써 말아 올리며 세영은 웃음지어 말했다. 그런 세영의 사나운 행동에 놀란 탓일까? 세실리아는 작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공부 열심히 하렴.” 자상하게 말했다.

그런 그녀의 자상한 목소리에 가슴이 아려왔다. 마치 예전 자신을 걱정해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라 목이메일 것 같았다. 세영은 서둘러 그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제피란.”


그 때, 이제까지 묵묵히 식사만 하던 백작이 낮은 목소리로 세영을 불러 새웠다. 그 목소리에 끊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세영은 발걸음을 멈추곤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이제 곧 펠튼 경의 기일이구나.”


“······.”


펠튼 엔시스 루 로렌시아.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것으로도 모자라 기사들에게 영지민 약탈을 시킨 로렌시아의 영주. 이후 민중봉기로 인해 몰락과 동시에 영지민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귀족.

아니야, 아버지는······.

···제피란의 친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세영은 까득,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다음 달 경 공주마마께서 알펜시아 영지를 방문하시니 그 전에 펠튼 경의 묘소를 들리도록 하려무나.”


“······.”


“이제는 알펜시아의 이름을 받았지만, 자식의 도리로서 친아비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좋지 않겠니.”


백작의 말에 세영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일국의 왕녀가 영지를 방문한다. 왕위 서열이 끝자락인 공주라지만 왕족은 왕족. 그에 따라 많은 중신들이 알펜시아 영지를 찾아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로렌시아 지방의 묘소를 방문하라? 알펜시아 저택에서 로렌시아 지방의 묘소까지 약 보름 정도 거리를 감안한다면 제피란을 때어놓을 심산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게 애써 확보한 정통성이 다른 중신들의 눈에 들기라도 한다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알겠습니다.”


세영은 쥐어짜낸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세영의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일까? 백작은 흡족하게 웃었다. 세영은 “···그럼.” 목례하곤 몸을 돌려 서둘러 식당 밖으로 나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실리아를 속이고 자신의 앞에서 아버지 흉내를 내는 백작의 모습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도련님!”


식당 문을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헬레나가 세영을 불렀다. 가득이나 불쾌한 기분에 세영은 쏘아보듯 헬레나를 보았다. 어째선지 홍조를 띈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두 손가락을 배배 꼬더니 이내 결심한 듯, 헬레나는 입을 열었다.


“저, 아침일은, 그, 죄송해요···. 뭐랄까 그건 남자로서 매우 당연한 현상으로, 그, 부끄러워할만한 일이, 아닌가?”


“자, 잠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름 위로라도 하고 싶었는지 불안하게 말을 꺼내는 헬레나.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세영은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빨갛게 익은 채 소리쳤다.

갑자기 나타나 무슨 말을 하는가 싶더니, 왜 잊고 싶은 지난 일을 들추는 거냐! 더군다나 마지막의 그 의문문은 뭐야?!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건데?!

세영은 홍조로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어째선지 자포자기하고 싶은 기분이다.


“그, 도련님? 그러니까 화 푸세요.”


“···응?”


“아까부터 계속 인상만 쓰시고······.”


“······.”


헬레나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는 눈으로 세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티를 냈나? 세영은 무안해져 뒷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미안, 아침일 때문은 아니니까······.”


물론 죽을 만큼 수치스럽지만······.

세영은 넘어오는 뒷말을 삼켰다.

세영의 대답에 헬레나는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긴 몰라도 세영이 백작에게 고자질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마음 졸였던 모양이다.


“어? 그럼 무슨 일로 그러시는 거예요?”


자신의 안위가 확보되었기 때문일까? 헬레나는 세영에게 물었다.


“···별거 아니야.”


세영은 자기를 내려다보는 헬레나에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세영은 제피란이 될 수 없었다.

단지 그 뿐인 이야기였다.


*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이곳은 세영이 알고 있는 지구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세영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세계 지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세영이 알고 있는 세계지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옛 판게아 대륙과 같은 그 세계 지도에는 세영이 모르는 나라들만 빼곡이 적혀있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지역 등 전혀 알 수 없는 것 천지였다.

과연, 이맘때쯤 아이가 공부를 싫어하듯 이제 열 살인 제피란의 기억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 했다.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배워나갈 단계다.

세영은 그 사실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륙에는 3개의 제국과 25개의 왕국 17개의 공화국이 있으며······.”


세영의 맞은편 역사를 지도하는 교수로 초빙된 루틴 자작은 탐스럽게 기른 자신의 콧수염을 쓸어 만지며 강의를 계속했다.


“우리 대 세티아 왕국은 바로 이 곳, 대륙 남단에서부터······.”


말하면서 루틴 자작은 세계 지도를 짚으며 장황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세계지도는 비록 한국에서 본 지도처럼 정밀한 지도는 아니었지만 나름 국경선을 구분해 놓은 것이 제법 공을 들인 지도였다. 그 국경선 사이로 루틴 자작이 가리킨 작은 왕국이 보였다.

많은 왕국과 공화국들로 둘러싸여있는 작은 왕국은 그 국경만큼이나 작은 글씨로 ‘세티아’라 멋들어지게 적혀있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대(大)라는 글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라였다.


“과거 우리 대 세티아 왕국은 제국과 비견될 정도로 큰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으로······”


구체적인 연도조차 언급치 않은 자작은 계속해서 자국의 업적을 장황하게 찬양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세영은 하아, 다시금 넘어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게 어떻게 된게 역사수업이란 것이 ‘아주아주 먼 옛날’로 시작해 ‘우리가 킹왕짱이었음’으로 끝난단 말인가? 이게 무슨 전래동화 영웅 스토리도 아니고······. 역사적 고증은 둘째치고 구체적인 연도조차 언급하지 않다니, 세영으로선 기가 찰뿐이다.


“제피란. 수업에 집중해라.”


세영의 불성실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옆에서 같이 수업을 받고 있던 소년이 세영을 다그쳤다. 자기보다 어린 소년의 지적에 빈정상한 세영은 “뉘예뉘예.” 건성으로 대꾸했다.

알펜시아 백작가의 장남이자 제피란의 형인, 레이 알펜시아 역시 세영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 뿐. 레이는 다시 루틴 자작의 수업에 집중했다. 왕국 내에서도 소년 기사로 이름 높은 레이 알펜시아. 올해로 16살인 그는 바른 몸가짐으로 수업에 임한다. 상대를 무시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교수를 존중하는 레이의 성실한 태도에 세영은 내심 감탄했다. 물론 그렇다고 저 국수주의 광신도의 세뇌교육을 들을 생각은 추후도 없지만.

그런 마음이 행동에 배어나오는지 세영은 지겨운 자작의 연설에 턱을 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앞의 레이와 비교하면 매우 불손한 처신이었지만 세영으로선 아무래도 좋았다.


“제피란, 형님께서 말씀하시잖아!”


그런 세영의 태도에 옆에 앉아있던 루이 알펜시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세영을 나무랐다. 알펜시아 백작가의 서자인 루이는 올해 아홉 살로, 제피란보다 어린 소년이다. 당연히 제피란의 동생이다.

그 동생의 발칙한 태도에 세영은 콧방귀를 뀌며 루이를 무시했다.


“너!”


루이는 세영에게 무시당하자 작게 이를 갈며 세영을 노려보았다.


“크흠!”


그 덕에 루이와 세영의 불성실한 수업자세를 깨달은 루틴 자작은 크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 소리에 루이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자작의 수업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세영은 계속해서 불손한 자세를 고수하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다시 크게 하품을 하였다.


“크흠! 크흠, 흠!”


몇 번 헛기침을 하던 루틴 자작은 고쳐지지 않는 세영의 태도에 이내 포기했는지 수업을 계속했다. 지루해진 세영이 슬쩍 옆을 보니 레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이 보였다. 옆의 루이 역시 레이처럼 받아 적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입으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마도 강의의 요점을 외우는 듯하다. 잘도 이런 수업을 용케 듣는 구나······. 세영은 내심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서재, 심란한 마음을 환기시킬 요량으로 둘러본 서재는 몸이 작아져서 그런지 더욱 크게 보였다. 벽면을 장식하는 책장은 그 높이가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그 안에는 세영의 몸통만한 책들이 꼽혀있었다. 중앙에 놓인 하나뿐인 책상은 상당히 넓어 세영을 포함한 알펜시아 자제들이 옆으로 늘어앉아 사용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실제 앉아있는 의자 역시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지 않은 가구의 크기에 세영은 눈살을 찡그렸다.

그렇게 서재 안을 둘러보던 세영은 루이 옆에 앉아서 수업을 듣던 엘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


이제 일곱 살 된 귀여운 소녀는 세영과 눈이 마주치자 홱! 고개를 돌렸다.

엘리스 알펜시아. 알펜시아 백작의 하나뿐인 딸로 백작가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제피란의 여동생이다. 알펜시아 백작가에서 헬레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제페란에게 적의가 없는 사람이다. 다만 백작부인의 교육 때문인지 오빠들의 충고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 역시 제피란을 멀리하지만······.


“······.”


어쩐지 왕따를 당하는 기분이다. 세영은 답답한 마음에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세티아 왕국은 우수한 문화를 주변국에 전해주었으며······.”


앞에서 떠드는 루틴 자작을 무시하곤 세영은 세계지도를 쭉 훑어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어린 제피란은 글자를 공부한 적이 있었는지 글을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대륙 남단에 위치한 세티아 왕국의 알세스 지방. 바로 알펜시아 백작가의 영지다. 인접한 엔티아 영지의 두 배나 될 법한 기름지고 광대한 토지를 가진 알펜시아 백작은 웬만한 후작가보다 발언권이 강했다. 그도 그럴게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있는 알펜시아 백작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강한 사병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다음 달 세티아의 4 왕녀가 손수 알펜시아의 영지를 방문하는 까닭은 다름아닌 알펜시아의 작은 영주, 레이 알펜시아와의 약혼식을 올리기 위한 것이다.

비록 제피란 모자에게는 탐탁지 않은 백작이었지만, 세티아 왕국 내에서 알펜시아 백작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그 현실이 못 마땅한 세영은 눈을 찡긋거렸다. 그도 그럴게 세영으로선 제피란의 상황이 불쾌하기만 했다. 애초부터 세영 자신은 제피란이 아니다.


“이에 주변국들은 우리 세티아가 전해준 문명으로 한 층 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생각해 보면 제피란은 세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인종과 연령은 그렇다 쳐도 제피란의 기억을 살펴보면 세영과 가치관이나 성격 자체가 전혀 다른 타인이었다. 만약 제피란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세영은 지금 현실을 믿지 못 했을 것이다. 아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지금도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죽음 뒤에 눈을 떠보니 타인이 되어 있었다. 그걸 단순히 ‘환생’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지금도 제피란의 기억과 감정은 생생히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세영 자신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자신이었다면 반드시 느꼈을 감정, 이 모든 것들이 어긋나 있었다. 설령 기억과 감정을 끄집어내더라도 그것이 과연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었을까?

만약 세영 자신이 정말로 제피란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라면 어째서 열 살배기 어린아이로 깨어났단 말인가? 아니면 환생으로 여태 제피란으로 살다가 이제 와서 전생이었던 세영의 기억을 떠올린 건가? 아니 애초에 세영은 제피란으로 ‘환생’한 것이 맞을까? 어떠한 계기로 귀신이 되어 제피란이란 소년에게 빙의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과 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자신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가지만, 그 관계가 자신의 것이 아닐 때, 누군가가 말했던 거처럼 생각함으로서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자신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다시 한 번 죽는다면.


“젠장.”


감상적인 생각에 세영은 작게 욕지기를 뱉어냈다.

그런 세영의 목소리에 레이는 “제피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듯 경고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한국말로 중얼거린 세영의 욕지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불손한 태도는 서재 안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위를 취득하신 교수님의 수업이다. 좀 더 성실히 수업에 임할 수는 없는 거냐?”


안타깝지만 저 엉터리 수업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세영은 다시 한 번 레이의 주의에 건성으로 대답해며 불량하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재수 없는 새끼. 아버지께 말해서 호적에서 파버리라고 할 거야.”


이번에도 세영의 불손한 태도에 아니나 다를까 옆의 루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러는 너 새끼도 싸가지 없긴 매한가지잖아.”


세영이 한국말로 중얼거린 그 말에 루이는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갸웃.


“지금 뭐라고 그랬어?!”


“아니, 아무것도.”


되묻는 루이에게 세영은 다시 한 번 대충 얼버무렸다.


“크흠! 크흠!”


다시 한 번 루틴 자작의 헛기침 소리가 서재에 메아리쳤다. 아니나 다를까 루틴교수의 주의를 받은 두 형제는 잠자코 역사서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세영은 조소하며 책을 뒤적였다.

다시 서재가 조용해지자 루틴 자작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더니 다시 수업을 재개하였다. 그럼에도 칠판을 휘갈기는 분필의 움직임이 사나운 것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 모습이 얼마나 과격한지 칠판 밑의 분필가루가 휘날릴 정도다.


“엣취!”


휘날리는 분필가루 탓일까? 세영은 크게 재채기를 하였다. 그러자 그 소리와 함께 빠직, 루틴 교수가 들고있던 분필이 그의 손에서 맥없이 꺾여 부러졌다.


“제피란 군? 지금 수업에 무슨 불만이라도?”


루틴 자작은 경직된 웃음과 함께 그 웃음만큼이나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도 수업을 방해하고자 세영이 일부로 재채기를 했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그러나 잔뜩 불만이 쌓여있던 세영은 오해를 풀기보단 되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영의 당돌한 대답에 루틴 교수는 힘줄이 돋아난 표정으로 “질문해 보세요.” 짐짓 여유롭게 말했다.


“세티아가 개국한 구체적인 연도가 어떻게 되나요?”


“연도는 중요치 않아요. 중요한 건 예로부터 대 세티아 왕국이 부흥해왔던 것이니까.”


세영의 대답에 루틴 자작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

······건국 이래로 부흥을 거듭했던 왕국의 국토가 왜 저리 작은지 잘 모르겠지만, 세영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세티아가 타국에 전해준 문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우리 대 세티아 왕국은 타 문명과 비교해 고도로 발달된 기술과 지식을 지니고 있죠. 그것은 천문학, 지리학, 역사학, 수학, 건축학 등을 비롯한 모든 방면에서 뛰어납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라는 듯 루틴 자작은 왜인지 가슴을 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세티아와 인접한 말틴 공화국의 경우 세티아와 비교하면 건축 양식이 매우 다르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건축 역사상 처음으로 석제를 사용한 것은 우리 세티아입니다. 이는 우리의 석조 기술을 바탕으로 건설했다고 할 수 있죠.”


이어지는 세영의 질문에도 루틴 교수는 이번에도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그 모습에 세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게 무슨 개소린가요?”


“······.”


순간 서제가 통제로 얼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가 넘겨준 기술이니까 우리 문화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문화는 생활양식으로 다양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 지역의 전통 사상이나 기온과 기후 등,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를 원래 우리 문화니 우리 것이란 주장은 그 지역 특색과 문화를 무시하는 발언이다.

아니 그 이전에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더군다나 세티아가 석조기술을 전해주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있는 겁니까? 아니, 그 이전에 세티아 왕국이 세계 최초로 석조기술을 사용했다는 고증은 있습니까?”


“······.”


“적어도 사람을 가르치려면 고증이 되는 근거 자료라도 제시하고 강의하라고 이 엉터리 교수야!!”


세영은 이제까지 참아왔던 짜증을 폭발시키듯 루틴자작을 쏘아붙였다. 적어도 대학교에서는 학점이나 이미지 등으로 고개를 숙였겠지만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다. 잃을 것 없는 세영으로선 무서울 것 하나 없었다.

그런 세영의 폭언에 루틴 교수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양 어께가 부르르 떨렸다.


“···겨.”


분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문 루틴 교수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세영으로선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 세영을 향해 루틴 교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결투다!!”


“······.”


아무리 자신을 무시했기로서니, 이제 막 열 살 된 어린아이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루틴 교수. 그 모습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서제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잃고 잔뜩 흥분한 루틴 교수만 올려다보았다. 오죽했으면 존경어린 눈빛을 보내던 레이마저 한심하다는 듯 루틴 자작을 바라보겠는가.

그러나 루틴 교수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일 정오! 알펜시아 기사단 연병장!”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통보하곤 홱! 몸을 돌려 서재를 나갔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납게 문이 닫히며 그 여파로 책장 몇몇이 작게 흔들렸다.


“······.”


그렇게 왕립 아카데미 역사학 박사 루틴 교수의 강의는 막을 내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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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9 codeno1.
    작성일
    20.05.17 21:39
    No. 1

    아무리 적응이 안됐다고 해도 전생에 대학까지 다닌 사람이 행동하는거나 사고가 너무 철부지 아닌가?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nh****
    작성일
    20.05.17 23:22
    No. 2

    아니 가족이 떠났다고 자살하는거 자체부터 철부지같은거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nh****
    작성일
    20.05.17 23:23
    No. 3

    그리고 솔직히 대학간거도 다행인듯 자기일 아니라고 먼져 포기하는거 자체가 중학생이 공부해도 못한다고 공부안하고 피방가는거같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nh****
    작성일
    20.05.17 23:27
    No. 4

    솔직히 말하면 웹소설이란게 프롤로그로 암울함을 많이 주고 그후 내용으로 극복해나가거나 성장하는 그런 소설이 많은데 이 소설은 내용만 긴게 고구마만 먹이는 그런소설임;;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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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막간 20.05.12 144 3 8쪽
6 Ep 1. 미운오리새끼(5) 20.05.11 162 4 22쪽
5 Ep 1. 미운오리새끼(4) 20.05.11 159 3 20쪽
4 Ep 1. 미운오리새끼(3) 20.05.11 199 5 23쪽
» Ep 1. 미운오리새끼(2) +4 20.05.11 290 7 24쪽
2 Ep 1. 미운오리새끼(1) 20.05.11 448 10 18쪽
1 여는 글 +3 20.05.11 535 2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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