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26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26
“니들을 여기로 부른 놈이 누구냐?”
무진은 철기맹의 부맹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게... 동창의 부장관입니다.”
“동창의 부장관이면?”
“장천입니다.”
미홍에 대답한다.
“그래? 그럼 일단 그놈부터 만나보자. 니들은 이제 돌아가도 좋다.”
“예, 전하 그럼 저희들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렇게 세외오천의 대표자들은 힘든 시간을 끝내고 사라진다. 그때 무진의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가 있다.
‘대협! 궁주님께서 꼭 저희 궁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물총새가?’
‘예.’
‘고마운 말씀이나 보다시피 그럴 형편이 아니라고 전해라. 그리고 유체이탈법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하면 궁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 알았느냐?’
‘예.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천년신궁의 부궁주와 무진이 전음을 나누는 사이 호란이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본다.
“아..아무 것도 아니요.”
“누가 뭐라고 했나요?”
“그..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요. 저도 앞으로 멋진 남자를 만나면 정랑처럼 비밀 대화를 해봐야겠어요.”
“나 참, 그게 아니라니까.”
호란이 앞서가고 그 뒤를 무진이 변명을 하며 따라간다.
“그 참, 오라버니가 저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난리치던 사람은 어디 갔지?”
미홍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따라간다.
‘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어머, 들으셨어요? 제가 원래 하고픈 말을 속에 담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까불지 말고, 장천이란 놈이나 찾아. 한 시진 준다.’
‘한 시진이라고요? 동창의 부장관이에요.’
‘그럼 반 시진으로 하든가?’
‘아..알았어요. 한 시진 안에 보고드릴 게요.’
‘그럼 나중에 보자.’
“흥! 자기는 놀고, 동생은 일이나 시키고. 그게 무슨 오빠냐?”
미홍은 씩씩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정확하게 한 시진 후.
무진과 호란은 북경 뒷골목의 한 주루에서 만두를 먹고 있다. 만두가게에서 미홍이 두 명의 사내를 끌고 온다. 한 명은 멱살을 잡은 채로, 다른 한 명은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 멱살 잡힌 놈은 동창의 부장관인 장천이고, 뒤에 놈은 부하인 동창의 영주다.
“아니, 잡아오라고 했으면 찾기 쉬운 곳에 계셔야죠.”
“니가 알아서 찾아올 텐데 뭔 걱정이냐?”
“참 나, 그게 여동생한테 할 말이에요? 그리고 아가씨, 만두가 질리지도 않으세요?”
“괜찮아요. 전 평생 만두만 먹고 싶어요.”
“헐!”
미홍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넌 고작 내시 한 놈 잡고서 너무 유세 떠는 거 아니냐?”
“고작이라뇨? 한 시진 동안 뺑이 치면서 겨우 잡았는데.”
“야, 그렇다고 애를 이렇게 묵사발로 만들면 어떡하니?”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천의 상태를 살핀다. 근데 아무리 봐도 장천의 얼굴엔 맞은 흔적이 없다.
“예에? 제가 요?”
“그래. 한, 두 대만 때려도 충분할 걸 굳이 입이 돌아갈 정도로 패는 이유가 뭐냐? 너 혹시 변태냐? 아니, 너 지금 시집보내달라고 꼬장 부리는 거지?”
무진은 계속 시비를 건다. 그러자 미홍의 눈이 반짝인다. 뭔가 눈치를 챈 것이다.
‘이건 오라버니가 뭔가 신호를 보내는 건데, 뭐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다. 그러자 뭔가 느껴진다.
‘아니, 이 은밀하게 밀려오는 음산한 기운은 뭐지? 누군가가 기운을 숨기고 있다가 장천 얘기에 흥분해서 드러낸 것이다.’
“후후후, 그러니까 이 새끼가 세외오천을 앞세워 작품을 만들고 있단 말이지?”
무진이 장천의 멱살을 잡고 공중으로 들어올린다.
“컥! 컥! 저..전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그냥 시키는 대로... 으악!”
장천이 뭔가를 말하려다 비명을 지른다. 암기가 그의 목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휴우! 후우..웁!”
그는 한숨을 쉬며 크게 호흡을 한다. 다행히 암기는 무진의 손가락 사이에 꽂혀 있다. 그가 아니었으면 암기는 그대로 장천의 목을 관통했을 것이다.
“어느 놈이냐!”
미홍이 소리친다. 북쪽 구석 자리에 앉은 중년인이다.
‘특이하게 생겼다. 사람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강신가? 그렇다면 음식을 먹을 리는 없을 텐데.’
그녀는 범인이 누군지 알면서도 굳이 나서진 않는다. 그의 기운이 심상찮기도 하지만 무진이 소리쳤기 때문이다.
“모두 흩어져라! 어서!”
주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즉시 밖으로 몸을 날린다.
콰콰콰쾅쾅쾅!
곧이어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루의 중앙에 앉아 있던 범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며 다른 사람들을 덮친다.
치치치칙!
“아악! 도..독이다!”
“크아악!”
“으아악!”
순식간에 십여 명이 쓰러진다. 범인의 몸이 터지면서 독도 같이 퍼진 것이다. 만약 무진이 소리치지 않았다면 백 명 이상이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주루는 자그마하지만 장천과 영주가 끌려오자 구경꾼들로 꽉 찼다. 그걸 보고 장천은 벌벌 떤다.
덜덜덜덜덜...!
“네게 일을 시킨 놈들의 작품이냐?”
“저..전 말 못합니다. 제..제발!”
쫘악!
“아악!”
장천은 뺨을 맞고 피를 토한다. 그 덕분에 정신을 차린다.
“어차피 네 놈은 죽는다. 하지만 실토를 하면 네 가족들은 구해주마.”
“예에? 아..안 됩니다. 그 아인 살려주세요. 엄마 없이 외롭게 큰 아입니다. 제발!”
갑자기 장천의 태도가 달라진다. 그는 무릎을 꿇더니 무진의 다리를 잡고 애원한다.
“놈들이 미연이를 납치하기 전에 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우..우리 미연이를 아세요?”
“지금 그런 말을 할 정도로 한가하냐?”
“아, 예! 이걸 확인해보시면 될 겁니다.”
장천은 황급히 품속에서 작은 물체를 하나 꺼내 무진에게 건넨다.
“부디 그 아이는 구해주세요.”
그는 이 말을 끝으로 혀를 깨문다.
“커억!”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혀가 두 동강 나면서 쓰러져 피가 사방으로 튄다.
“왜 그냥 두셨어요?”
“지금 말린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저 놈은 자신이 죽어야만 딸이 산다는 걸 알기에 자결을 선택한 거다.”
“음!”
“넌 지금 즉시 저 놈 집으로 가서 미연이를 데려오너라.”
“알겠습니다. 앞장서라!”
미홍은 동창 영주를 앞세우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근데 잠시 후, 미홍의 전음이 들려온다.
‘오라버니, 미연이는 제가 키우도록 해주세요.’
‘야! 니 나이가 몇인데 아이를 키워?’
‘영주의 말에 따르면 아이가 열 살이래요. 제가 그 나이에 황실에 들어왔거든요. 부탁드릴 게요.’
‘미친 년, 알았다. 대신 황궁에선 안 된다.’
‘고마워요. 사가에서 키울 게요.’
‘쯧쯧, 엄마의 일이 얼마나 힘든 줄도 모르고....’
‘힘들어도 좋아요. 호호호! 제게 이런 기회가 오다니? 꿈만 같아요.’
미홍은 마치 애기 엄마라도 된 듯이 기뻐한다.
“언니가 그 동안 많이 외로웠나 봐요.”
“왜 안 그렇겠소? 50년이란 세월을 구중궁궐에서만 살았으니 병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오.”
호란은 찻집에서 한 가지 물건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이게 뭘까요?”
그 옆에는 무진은 물론이고 태민 사형제와 곤일의 모습도 보인다. 그녀가 보고 있는 물건은 장천이 준 것이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나무에 용 문양이 조각돼 있다.
“혹시 장천이 속임수를 쓴 건 아닐까요?”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딸을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자가 그런 짓을 할까?”
태운이 묻고 태민이 답한다.
“제 생각엔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재질도 언뜻 봐서는 나무 같지만 옥입니다.”
“이런 색깔의 옥도 있어?”
“밑 부분을 한 번 보십시오.”
곤일이 말한 물건의 밑 부분엔 표면이 살짝 벗겨져 있다.
“뭐야, 칠한 거였어?”
태운이 그 부분을 손톱으로 밀자 옥 고유의 빛깔이 드러난다.
“옥으로 만들어진 정밀하고 수준 높은 조각품이라....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용은 원래 황족들의 상징이고, 옥은 그 중에서도 여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건데.... 혹시 후궁들의 노리개가 아닐까요?”
태민이 핵심에 한 발 더 다가간다.
“현 황실에서 동창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후궁이 누구지?”
“그야 황후를 제외하면 황귀비뿐이죠.”
“황귀비라.. 으음!”
황귀비란 황후 바로 아래의 직급뿐이다. 이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닙니다.”
미홍이다. 그녀는 장천의 딸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놓고 달려온 것이다.
“누님, 어서 오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누님!”
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한다. 곤일은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긴다.
“호호호, 우리 일이는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 졌네. 이제 장가를 보내도 되겠다.”
“예에? 예.”
곤일은 멋있다는 말에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인다.
“장가는 내가 보낼 테니 걱정 말고, 갔던 일이나 말해봐라.”
무진이 핀잔을 준다.
“아, 예. 고것이 얼마나 영특한지... 제가 가니까 벌써 애비의 일을 알고는 울기 시작하는데...”
장천의 딸 얘기다.
“미연이란 아이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요.”
“아가씨도 보시면 흡족해 하실 거예요. 외모야 아가씨와 비교할 순 없지만, 절 닮은 것 같기도 하고요.”
“언니를 닮았으면 영민하고 예쁘겠네요.”
“호호호! 무엇보다 속이 깊고, 얼마나 똑똑한지 방안이 책으로 가득했어요.”
“이왕 결정했으니 네가 잘 키워봐라.”
“오라버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잘 키울 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냐?”
무진은 화제를 원래의 주제로 돌린다.
“아! 그거 말씀이군요. 후궁전에 관한 건 워낙 은밀해서 외부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진은 마음이 급한지 채근한다.
“아, 예. 후궁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은 촉귀비(蜀貴妃)이에요. 황후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황실 인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단 말이 있을 정도예요.”
“촉귀비라면 촉나라의 후손인가요?”
“그렇습니다. 황실에서도 그녀가 어떻게 귀비가 됐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촉나라 후손들과 손을 잡는 조건으로 그녀를 받아들인 모양이에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힘을 가지게 된 거죠?”
“그게 저도 의심스러워요.”
“모른다는 뜻이냐?”
“그게 아니라.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땐 방의(芳儀)로 귀비보다 두 단계나 더 아래였어요. 근데 불과 한 달 만에 두 단계를 뛰어넘어 귀비가 됐어요. 뿐만 아니라....”
미홍은 말을 끊더니 잠시 주위를 살핀 다음 계속한다.
“그때부터 완전히 딴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어떻게요?”
평소 말이 없던 호란이 귀비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보인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