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이름으로 – 21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형제의 이름으로 – 21
“대형! 일초 형님이 누굴 위해서 그런다는 겁니까?”
그걸 태운이 즉시 낚아챈다.
“야! 뭐해? 시신들을 치우고 적마교 놈들도 처리해야지. 니들은 단전을 파괴하고, 일이랑 같이 촌장에게 넘겨라. 빨리!”
상황이 불리해진 일초는 즉시 입막음을 한다. 하지만 무진도 만만찮다.
“그건 니가 하고, 나머진 수련이다.”
“나만 빼고?”
“그럼 계속 얘기할까?”
“아..아니오. 니들 열심히 해라. 내 몫까지.”
일초는 혹시라도 무진이 자신의 연애사를 얘기할까봐 바로 꼬리를 내린다.
“저놈도 니가 맡아라. 뭘 해야 할지는 알지?”
무진은 적마교의 총사도 일초에게 넘긴다. 심문을 해서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라는 거다.
“씨발!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네.”
“씨발? 너무 해? 안 되겠다. 얘들아, 니들이 좀 해라. 수련은 니 형이랑 해야겠다. 도대체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요.”
“미쳤소? 내가 형이랑 수련하게. 난 병신 되기 싫소. 장가도 안 갔단 말이오. 얘들아, 난 간다.”
그렇게 일초는 피비린내 나는 현장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다음 사라진다.
“잘 들어라. 다소 어수선하지만 집중해야 한다. 다들 조금 전에 나와 저놈들이 하는 걸 봤지?”
“예.”
“실전과 수련의 차이가 뭐라 생각하느냐?”
“으음! 긴장감과 절박함입니다.”
가장 먼저 곤일이 대답한다.
“집중력의 차이.”
“낯섦.”
뒤이어 태민과 태운이 차례대로 대답한다.
“잘 봤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걸 하나로 묶으면 현장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현장감이 부족한 무사는 실력발휘를 할 수 없다. 비무할 땐 절정의 고수지만, 실전에선 초보가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으음!”
세 사람은 무진의 말을 들으면서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수련을 많이 해도 실전하곤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서 가끔 실컷 연습을 하고 실전에서 실수로 다치기도 한다.
“지금부터 그걸 극복하기 위한 수련을 한다. 단순히 수련이 아니라 실전처럼 해야 한다.”
“대형의 말씀에 동의하지만 막상 두 사람이 싸우다 보면 실전처럼 대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세 사람이 모두 적이고 한꺼번에 싸운다. 부상과 죽음 따윈 생각하지 마라. 그런 걸 버리지 못하면 자연무예는 물론이고, 생사무도 발전하기 어렵다.”
“버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요?”
곤일이 가장 핵심적이고 어려운 질문을 한다. 평소에 그도 고민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버린다는 건 비운다는 것이고, 비운다는 건 극복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을 맛보게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시작해라!”
무진은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곤 뒤로 물러난다. 이때부터 시작된 세 형제의 살벌한 싸움은 새벽이 되도록 계속된다. 일초의 지시로 싸움을 마쳤을 땐 세 사람 모두 크고 작은 부상으로 그 자리에 쓰러진다. 가장 부상이 심한 곤일은 이후 3개월 정도 치료를 받았다. 부상만큼이나 이들의 깨달음은 그 무게감이 엄청나다. 이들은 간단하게 상처를 지료한 다음 그때부터 무려 삼 일 간이나 명상에 들었다. 그 결과 한 걸음 더 자연무예와 생사무의 본질에 접근하게 되었다. 동생들의 성취를 보고 일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젠 동생들과 나의 수준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나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형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무공의 완성이란 머나난 여정은 평생을 노력해도 이루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선 이번 일이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최소한 시발점이 된 건 분명하다.
무진의 방이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다. 일초와 적마교의 총사인 운고이다. 분명히 운고는 일초에게 제압당했다. 그래서 무진의 지시에 따라 일초가 운고를 심문하고 있다. 근데 심문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우선 운고는 전혀 인신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앉아 있다. 그리고 얼굴이 편안하게 보인다. 마치 친구와 대화하듯이 말한다.
“낭인촌을 습격한 이유는?”
“호란을 차지하기 위해서요.”
“호란? 너 내가 우리 아가씨를 세상에서 세 번째로 좋아하는 거 모르지?”
“첫째와 두 번째는 누구요?”
“첫 번째는.... 비밀이다.”
“두 번째는 요?”
“당연히 우리 형님이지.”
“그게 어떻다는 거요?”
“너 평소 사람들한테 눈치 없단 소리 많이 듣지?”
“뭐... 그런 편이긴 합니다만.”
“말조심해라. 한 번만 더 아가씨 이름을 부르면 그땐....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아..알았소.”
일초가 인상을 찌푸리자 운고는 약간 긴장한다. 그는 누구보다 일초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적마교의 총사로서 그에 대한 조사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아가씨를 찾는 이유는?”
“그녀가 고금제일인 황룡이 남긴 유물의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래? 근데 그런 지도는 무림에 돌아다니고 있고, 돈만 있으면 쉽게 살 수도 있다.”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오.”
“어떻게?”
“우리 적마교가 지난 백 년 동안 지켜온 제일 보물 중의 보물이오.”
“그럼 그동안 유물을 왜 안 찾았냐?”
“사실 지난 백여 년 동안 지도의 가치를 몰랐소. 근데 그걸 확인하는 순간 호명이 가지고 도주해버렸소.”
“호명은 호란의 부친이자 당시 적마교의 총사였던 인물이다.”
“그걸 아가씨가 가지고 있다는 근거는 뭐냐?”
“본인에게 물어보면 알 거요.”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온다. 무진과 호란이다.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아가씨, 이놈의 말이 사실입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보여줄 수 있습니까?”
“정말 보고 싶으세요?”
“저야 필요가 없지만 이놈이 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도 될까요?”
호란은 무진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게 좋을 것 같소.”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그래야 다신 거론하지 않을 테니까.”
말을 하면서 호란은 돌아앉는다.
“설마?”
“그곳에...”
순간 일초와 총사는 거의 동시에 눈치를 챈다.
“너 이 새끼, 눈치 없다는 거 개뻥이지?”
“뭔 소리요? 이 정도도 눈치 못 채는 사람이 어딨겠소?”
“이 새끼가 입만 살아가지고.... 허억! 아..아가씨!”
호란이 돌아앉아 상의를 풀어 헤치자 일초는 물론이고, 운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천하제일미가 부럽지 않을 미녀가 아무리 등이라지만 맨살을 드러내니 어찌 당황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남편이 바로 옆에 앉아 있지 않는가? 두 사람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 등판에 그려진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다.
“대..대단하다. 대단해. 어떤 놈이 그렸는지 모르지만 아가씨와 너무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적마교엔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가 그렸으니 오죽하겠습니까?”
“형님, 이건 무너진 동굴이 아닙니까?”
“맞다.”
“근데 태양장이 뿌린 지도와 거의 유사합니다.”
“유사한 게 아니고, 같은 건데 몇 군데만 빼고 그린 것이다.”
“태양장이 형님의 수련장을 어떻게 알고 그랬을까요?”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곳은 나밖에 모른다.”
“태양장이 그곳을 도굴하지 않은 거로 봐선 놈들도 원본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그 말은 누군가가 태양장에 넘겼다는 건데.... 그것도 그렇지만 적마교는 이걸 어디서 얻었을까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어차피 폐쇄된 곳입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공개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게 좋겠다.”
두 사람은 한 동안 전음을 나누더니 결정을 내리고 시선을 총사에게 옮긴다.
“니가 보기엔 여기가 어딜 것 같니?”
“글쎄요? 익숙한 곳이긴 한데.... 혹시...”
“그래, 아까 우리가 들렀던 바로 그곳이다.”
총사도 직접 동굴을 눈으로 확인했다.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태양장의 소장주가 천붕검을 얻으려다 전체를 무너뜨린 것이지.”
“개자식!”
총사는 태양장의 소장주를 욕한다.
“부르셨습니까?”
이때 바깥에서 촌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불렀으니까 왔지. 빨랑 들어와.”
“일초는 버럭 화를 낸다.”
“미친놈, 대체 언제쯤 철들래?”
“이 양반이 화공이오?/ 촌장 뒤로 노인이 한 명 따라 들어온다. 그는 무진에게 목례를 한 다음 도구들을 내려놓는다.”
“촌장도 여기가 어딘지 알거요. 이걸 그려서 중원에 퍼뜨리시오.”
“얼마나 할까요?”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제일 먼저 태양장에 보내고, 개방의 도움을 받아서 입소문을 내주시오.”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금제일인자의 유물이 있는 지도는 태양장이 퍼뜨린 것이다. 가짜 지도로 중원 전역이 혼란에 빠진 사이 유물은 그들이 독차지했다. 이 정도면 될 거야.”
“좋군요. 멋진 복수극이 될 것 같습니다.”
“총사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무진은 화살을 총사 운고에게 돌린다.
“저야 뭐... 살려만 주신다면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적마교로 안 돌아가고?”
일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실 총사는 돌아가도 교주에게 야단이야 맞겠지만 그렇다고 쫓겨나거나 처벌받진 않을 것이다.
“돌아갔다가 다시 여러분에게 잡힐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취직을 해보는 건 어때?”
“무진이 엉뚱한 소릴 한다.”
“취직이라뇨?”
“돈벌이를 하는 거지.”
“그럴 만 한 곳이 있습니까?”
“많지. 상단도 있고, 왕부도 있지. 어때, 생각은 있나?”
“상단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왕부도 아는 곳이 있습니까?”
“진천왕부일세.”
“으음! 진천왕부와도 인연이 있으시군요. 근데 거기서 제가 할 일이 있을까요?”
“보아하니 자넨 싸움보단 조직 관리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
“그건 사실입니다. 전 무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진천왕부와 황실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떤가?”
“왕야와 얘기가 된 사항입니까?”
“최근에 왕야가 그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단 연락이 왔네. 교주도 자네가 왕부로 갔다고 하면 문제 삼진 못할 걸세.”
“으음! 그래서 절 살려주신 겁니까?”
“자네가 거부해도 죽이진 않을 걸세.”
“후후, 그 말씀이 마음에 드네요. 좋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웃긴 놈이네. 살려주고, 취직까지 시켜주는데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일초는 괜히 시비를 건다.
“이놈아, 그래서 넌 평생 주먹밖에 못 쓰는 거야.”
“형은 참 좋겠수. 주먹도 쓰고, 머리도 쓸 수 있어서. 난 워낙 무식해서 이 모양 이 꼴로 사니까 그냥 놔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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