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솔직히 잘 던졌는데, 타자가 너무 잘 쳤지...
‘코리안 캡틴’시절의 이훈승은 유독 완투패가 많은 선수였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운드를 지키는 그의 모습은 처음에는 ‘승리 욕심이 많은 투수’ 정도로 비춰졌었지.
하지만 이훈승과 친하게 지냈던 몇몇 동료들의 증언과 더불어 패배를 떠안게 되더라도 타자들이 점수를 낼 때 까지 마운드 위를 지키는 그의 모습은 어느새 피츠버그 팬들의 눈에 ‘승리 욕심이 많은 투수’가 아닌 ‘책임감이 확실한 투수’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훈승의 메이저리그 진출 초창기, 피츠버그는 불펜이 상당히 부실한 팀이었다. 덕분에 이훈승이 마운드를 오래 지키고 서 있는 경기도 많아졌고, 완투패 1위라는 불명예를 떠안기도 하곤 했었지. 하지만 3년차 이후부터 그런 불펜의 문제들이 해결 되었는데, 그 때의 이훈승은 벤치의 지시에 따라 미련 없이 마운드를 내려오곤 했다.
이미 메이저리그 3년차 투수인 그가 130구 이상을 투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많은 관계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훈승의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에 대한 뇌피셜을 쏟아 냈었다. 하지만 연이은 원정 경기가 이어지던 어느 날. 긴 거리의 이동과 카디널스와의 이틀간의 혈전으로 불펜 투수들은 물론, 타자들까지 녹초가 되어 있었던 3연전의 마지막 경기.
그 경기에서 선발 등판 한 이훈승은 타자들이 겨우겨우 1점을 뽑아 낸 13회 전까지. 그러니까 12이닝을 무실점으로 투구했고, 13회에 점수가 남과 동시에 아이싱을 시작했다. 13회 말에 피츠버그의 마무리 투수가 등판해 1점차를 지키면서 경기는 승리.
12이닝 무실점 17K 181구를 기록했던 그 날의 이훈승은 피츠버그 선수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옥 같던 원정 일정 속에서 ‘코리안 캡틴’이라는 별명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훈승은 이렇게 많은 공을 던질 수 있는 비결로 ‘완급 조절’을 꼽았다. 당연히 신체적인 내구성이 받쳐줘야 하는 일이겠지만, 선수 본인이 생각 하기에는 완급 조절로 스스로의 한계 이상의 투구 수를 기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오늘 경기로 넘어 와 보자면, 오늘 경기는 이훈승이라는 투수가 처음 완급 조절을 이용하면서 투구를 하기 시작 한 경기. 당연히 그의 한계 투구 수는 우리의 생각보다 많을 수 밖에 없었고, 86구라는 투구 수는 이훈승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앙!-
8회 말, 선두 타자 김병철. 이훈승은 ‘조선의 4번 타자’ 김병철을 상대로 8회에도 158km/h의 패스트 볼을 꽂아 넣었다. 평소 김병철의 타격 스타일과 160km/h에 육박하는 패스트볼에 약하다는 점까지 미뤄 보았을 때, 초구는 지켜 볼 것이라는 저스티스 배터리의 판단.
‘이제는 위험 하겠죠?’
‘그렇지··· 김병철 선수니까.’
하지만 아무리 160km/h에 가까운 패스트볼에 약하다고 하더라도, 오늘 김병철이 본 158km/h의 패스트볼만 이제 8개. 직전 타석에서는 0-2 상황에서 하나를 건드려서 파울을 만들었다.
‘어떻게 갈까?’
‘이러나 저러나 정면 승부는 위험해요. 존 아래쪽을 공략하면서 체인지업과 커브를 적절히 섞어야겠죠.’
‘오케이. 우선 체인지업 어때?’
‘알겠습니다. 힘 쫙 빼서 하나 주세요. 타이밍 흔들어 놔야죠.’
‘오케이~’
158km/h의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잡은 이후, 저스티스 배터리가 선택 한 공은 130km/h 중반대의 떨어지는 체인지업. 김병철의 타이밍을 완전히 흔들어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슈우욱-
조금 전의 패스트볼과 똑 같은 궤적을 그리는 체인지업. 하지만 이훈승의 체인지업은 훨씬 느린 속도로 스트라이크 존 아래쪽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로케이션 완벽하네.’
그리고 그 체인지업이 존 바로 앞에서 변화를 시작하려는 순간, 김병철이라는 타자에게서는 보기 힘든 극단적인 어퍼 스윙이 나오기 시작했다.
‘설마···’
이미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한 개 정도 아래쪽을 노리고 돌아가는 스윙. 존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노리고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스윙이 돌아갔다.
-따아악!-
극단적인 어퍼스윙과 떨어지는 변화구가 등골이 서늘한 타격음을 내며 만났고, 배트를 쥐고 있는 타자는 9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세계 신기록을 가지고 있는 ‘조선의 4번 타자’ 김병철.
‘하아··· 이걸 치네··· 하하··· 하···’
“””
-따아악!-
“아아!!!!! 이 타구!!! 큽니다!!!!!”
“김병철!!!!!!!!!!!!!!!!”
“담장!!! 담장을!!! 이 타구는 담장을~~!!!!!!!! 넘어갑니다!!!!!!!!!”
“김병철 선수의 동점 솔로 홈런!!!”
“7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고 있던 이훈승 선수를 단 한 번의 스윙으로 무너뜨립니다!!!!”
“역시 김병철! 판다즈 팬들이 김병철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기대하고 있던 이유가 있습니다!!”
“””
현성은 김병철의 홈런이 나온 후, 걱정되는 마음으로 마운드를 방문했다.
“형, 더 던질 수 있어요?”
이미 벤치에서는 불펜이 준비 되었다는 사인이 나온 상태. 하지만 7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고 있던 투수가 승리마저 날아 갔으니, 곧바로 교체를 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기회를 줄 생각.
“와···”
하지만 이훈승은 짧은 감탄사를 뱉어내며 타구가 날아간 중앙 펜스를 바라봤다.
“형···?”
“현성아.”
“네?”
“방금 그 공. 솔직히 잘 던진 거 아니었냐?”
“아··· 좋은 공이었다고 생각 해요. 김병철 선수가 158km/h의 패스트볼을 보고도 130km/h 중반대의 떨어지는 변화구를 노릴 수 있는 타자라는 걸 깨닫게 해 준 공이랄까요.”
“흐흐··· 그러니까, 나는 타자가 노릴 리가 없는 공을 제대로 던졌다는 말이지?”
“음··· 네. 저는 김병철 선수가 그 공을 노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형의 공은 제가 생각한 것과 완벽히 똑같았어요.”
“솔직히 최세찬 잡으면서 내 공이랑 볼 배합이 진짜 기가 막힌다고 생각 했거든? 아직 멀었나보다.”
“그것도 맞지만 형은 더 먼 곳까지 성장할 수 있는 투수라니까요?”
“흐흐··· 그래. 좋네. 얼마나 성장 가능한지 한 번 보고싶네.”
“저두요.”
현성은 훈승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고는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오히려 더 좋은 자극이 된 것 같은데?’
“””
“스트라이잌, 아웃!!!!”
8회 말 노아웃 상황. 이훈승은 이닝의 두 번째 타자로 타석에 들어 선 최세찬에게 3-2 풀 카운트 상황에서 125km/h의 바깥쪽 커브로 헛스윙 삼진을 얻어 냈다.
“와···”
조금 전 공이 이훈승의 100구째 공. 최세찬은 앞선 두 타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힘도 좀 빠졌을테니 그에 맞춰 타이밍을 잡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힘을 쫙 뺀 커브. 생각하고 있던 공과 30km/h나 차이가 나는 구속, 30cm 가까이 차이 나는 히팅 포인트. 1군 합류 이후, 3경기밖에 뛰어보지 못 한 최세찬이라는 타자는 어쩔 도리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나이스 볼!! 좋아요!!!”
이훈승은 6, 7번 타자에게는 어렵지 않게 아웃 카운트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판다즈의 8회 말 공격이 끝나고, 저스티스의 9회 초 공격. 판다즈의 윤창운이 여전히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윤창운 선수, 계속해서 등판합니다?”
“네··· 그렇네요. 윤창운 선수 지금 투구 수가 101구거든요?”
“윤창운 선수는 작년 시즌 완봉승을 기록 할 때에 117구까지 던진 기록이 있습니다. 그 경기 이후에도 무너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만, 오늘은 완봉승도 날아간 시점에서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판다즈 벤치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
윤창운의 9회 등판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 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첫 번째는 오늘 윤창운이 이미 긴 이닝을 던질 생각으로 마운드에 올랐다는 것. 팀의 불펜 투수들이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윤창운은 오늘 아무리 못 해도 7이닝을 버틸 생각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경기가 진행 되면서 엄청난 투수전이 펼쳐졌고, ‘왕조’ 판다즈의 토종 1선발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던 윤창운은 지고 싶지 않았다. 작년에 기록했던 117구 완봉승. 그 이후 윤창운은 자신의 한계 투구 수가 120구 이상이라는 사실을 팀 닥터의 ‘문제 없음’ 소견과 함께 이후의 경기에서도 지치지 않는 모습으로 증명해 보였다.
불펜이 지쳐 있는 상황에서 긴 이닝을 염두에 두고 등판 한 토종 에이스. 윤창운은 120구 까지는 던질 수 있다는 말을 투수 코치에게 전달했고, 판다즈의 감독도 그의 의견을 존중 해 주었다.
그렇게 성사 된 윤창운의 9회 등판. 저스티스의 타선은 3, 4, 5. 선두 타자는 현성이었다.
‘우선은 출루. 이후는 병선이한테 맡긴다.’
첫 타석에서는 윤창운의 투심을 받아 쳐 2루타. 두 번째 타석에서는 싱커와 스플리터 조합에 삼진 아웃. 현성은 판다즈 배터리에서 두 번째 타석에서 사용했던 싱커와 스플리터 조합을 다시 사용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둘 중에 노려야 하는 건··· 스플리터.’
아무래도 우타자의 몸쪽으로 휘어 들어오는 싱커보다는 그나마 스플리터가 치기 편할 것 같다는 판단.
‘단, 싱커나 투심을 스플리터로 착각하고 타격을 시도했다가는 딱 죽기 좋지.’
우투수가 우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싱커성 무브먼트를 가진 공들은 땅볼을 유도하기 딱 좋은 공이다. 현성은 그것만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윤창운의 투구를 기다렸다.
‘어차피 좋은 공 줄 생각은 없을 거야. 초구는 기다린다.’
-슈우욱-
-팡!-
“볼!”
초구는 몸쪽에 바짝 붙이는 싱커.
‘볼이면 하나 더 봐야지.’
투수의 투구 수도 많은데, 빠르게 승부를 할 필요는 없다.
-슈우욱-
-팡!-
“스트라이잌!”
2구는 이번에도 몸쪽이지만 조금 더 낮은 투심 패스트볼.
‘두 개 모두 몸쪽이라···’
몸쪽에 타자가 시선을 두게 만들고, 바깥쪽을 공략하는 건 너무나도 정석적인 볼 배합. 현성은 조금 전 홈런을 때려냈던 김병철 선수의 타석을 떠올렸다.
‘타자의 시선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좋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좀···’
그 시도가 실패한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타자에게 똑 같은 수를 쓴다는 것은 그리 좋지 못 한 선택이 되었다.
-슈우욱-
‘역시!’
-따악!-
윤창운의 제 3구는 현성의 예상대로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 현성은 그 공에 배트를 갖대 댈 수 있었고, 가볍게 밀어 친 타구는 1루수의 키를 살짝 넘어서 떨어졌다.
‘후우··· 일단 출루는 성공했구만.’
9회 동점인 상황에서 선두 타자의 출루. 신범모 정도의 주력을 갖춘 대주자가 있다면, 보통은 대주자를 사용하는 게 맞는 판단이겠다. 상대 팀 배터리에게 신경이 쓰이는 상황을 만들고, 여차하면 도루까지 가능한 주자. 하지만 저스티스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어떻게든 점수를 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이 내가 나왔다고 해서 대주자를 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란 말이지···’
포수가 주자로 나가고, 좋은 대주자가 있다면 당연히 포수를 교체 할 것이다. 하지만 저스티스라는 팀에서 ‘박현성’의 존재감은 그런 당연한 작전을 꺼리게 만드는 정도가 되었고, 무엇보다 현성이 발이 느리지 않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신범모라는 훌륭한 대주자가 있지만, 대주자를 쓰고 포수 자리에 서준이 형을 앉히느니 그냥 날 계속 쓰는게 낫지···’
그런 고로 현성은 1루 주자로 계속해서 그라운드 위에 서 있게 되었고, 벤치에서는 대주자를 기용하는 대신 다른 작전을 전달했다.
- 작가의말
내 생에 첫 라이브 연재! 지금 시작합니다!!!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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