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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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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용사
작품등록일 :
2022.02.17 13:58
최근연재일 :
2022.03.16 12:4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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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271

작성
22.02.1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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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글자
18쪽

1. 헬중세 이민(2)

DUMMY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사

“자비! 자비를! 승자는 자비를 베푸시오!”


태양이 환히 빛나는 정오, 모래사장으로 이뤄진 결투장 위에서 두 명의 사내가 서로를 마주보는 중이었다. 패자는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이고, 승자는 상대의 목에 검을 겨눈다.


승자가 힘겨운 목소리로 호소하듯 말한다.


“가리온 경! 부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칼라야 공주님인 걸 인정해주게. 그래야 우리 둘 다 살아나갈 수 있어.”


허나 패자는 완고한 목소리로 답한다.


“로드릭 경! 어찌 그대는 맹우에게 목숨 따위를 위해 불명예를 택하라고 하는가? 진정한 기사는 결코 자신의 말을 주워담지 않는다네.”


패배한 기사의 검은 부러졌고, 갑옷엔 금이 갔다. 몸 곳곳의 상처에선 붉은 피가 흐른다. 허나! 기사의 결의는 별처럼 빛나고, 심장은 철옹성처럼 버티고 서서 뜻을 굽히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은.”


모두의 이목이 패배한 기사, 가리온에게 집중된다. 그가 누구의 이름을 외치느냐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리라.


“이슈리트 여백작일세. 그녀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하이엘프 대공들의 아름다움조차, 태양 앞의 촛불에 불과할 정도지.”

“아······안 되네! 당장 말을 무르게!”


승자인 로드릭이 절규하는 순간.


“호오.”


귀빈석에 앉아있던 고귀한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황금관을 쓴 그녀의 모습은 사내들의 눈길을 한 눈에 끌만큼 아름다웠고, 기품이 넘쳐 실로 고귀해보였다. 그럼에도 눈빛은 날카롭고 목소리는 싸늘하다.


“그렇다면 우리(We)의 아름다움조차 백작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구려?”

“그렇지 않습니다. 공주님.”


패배한 기사는 공주를 올려다본다.

이제 기사가 뜻을 꺾으려는 것인가?


“칼라야 공주님께는 달빛과도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태양이 사라진 어둠 속을 비추는 유일한 길이시니까요.”


착!


칼라야는 부채를 걷어 분노로 시뻘개진 얼굴을 드러냈다. 굉장히 아름답지만, 무척이나 권위적이고 살벌한 태도였다.


“왕실기사단장 로드릭 경에게 고하오.”


공주의 목소리는 느릿하지만 선명하다.


“말씀하십시오. 나의 영원한 레이디시여.”

“그대는 공주의 손을 잡기로 약속하신 사내요. 이제 그대가 왕실의 명예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할 때가 되었소.”

“하지만 가리온 경은 제 맹우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정과 사랑 중에 택하셔야겠군.”


로드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평생을 기사로 살아온 사내, 혼약을 맹세한 여인의 명예를 지키는 일에 망설이지 않았다.


푸욱!


로드릭의 결단이 가리온의 가슴을 꿰뚫었다.


“미안하네. 맹우여.”


로드릭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지만, 가리온은 오히려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구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진정한 기사를 맹우로 두어 기쁘군.”

“······자네와 함께해서 영광이었어. 형제여.”

“태양의 전당에서 보세. 나의 영원한 형제여.”


풀썩!


가리온의 몸이 결투장 위로 쓰졌다. 여인네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고, 남정네들은 큰 목소리로 한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경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연인의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다!”

“오오! 저것이 진정한 기사의 사랑이다!”

“두 분께선 죽음 앞에서도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셨다! 이것이 참된 우정이다!”


한편 또다른 귀족 여인이 달려나와, 가리온 경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었다. 10대 후반의 소녀 정도로 보이는 여백작은, 약혼자의 눈을 감겨주고 식어가는 입가에 입을 맞췄다.


“가리온 경. 제 명예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만을 제 남편으로 섬기겠습니다.”


그 와중, 공주는 황금 의자에서 일어나 면사포를 휘날리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우리가 우슈르테툼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니라! 이에 의문을 품은 자는 지금 앞으로 나오라!”

“““칼라야 공주 만세! 그리폰하트 왕실만세!”””


공주는 승리를 선포하고, 청중들은 열렬한 환호로 답한다. 명예로운 기사의 피가 뿌려진 결투장 위에서 사람들은 기쁨의 춤을 추고 왕실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만백성은 그리폰하트 왕조에 고개를 조아려라! 그들의 남자들은 가장 강하고, 그들의 여자들은 가장 아름다울 터이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 아닙니까?”

“예?”


그냥 미친 놈들 같은데.


“막역한 사이이던 두 왕실 기사가, 각자가 모시는 페어 레이디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명예의 증명이 없겠지요.”


명예의 증명?

무슨 미친 소리야!


“······집사. 이게 이렇게까지 커질 일인가?”


결혼을 앞둔 왕실기사 두 명이, 술자리에서 신부 자랑을 하다가 칼부림으로 변해 한 명이 죽었다. 이게 사건의 진상이다.


근데 헬중세 집사놈은 무슨 숭고한 미담을 목격한 표정이다.


“우슈르테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왕실의 안주인입니다. 이에 도전한다면 칼로서 결판을 낼 수 밖에요.”


미모를 가리고 싶으면 미인 대회를 하던가 할 것이지, 굳이, 꼭, 반드시 칼부림을 해서 사람을 죽여야 직성이 풀리냐? 이 미친 놈들아.


‘술집 취객도 아니고 무려 왕실기사인데.’


지금 상황은 현대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장끼리 자기네 와이프가 진짜 미스코리아라고 주장하면서 현실 배틀그라운드를 떠버린 거다.


‘이건 대통령 탄핵감이지. 시발.’


하지만 헬중세인들이 모여든 까닭은 살인을 허가한 국왕탄핵이 아니라, 왕실 기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편을 갈라 응원하는 놈도 있고, 간식 팔고 다니는 행상인도 있었다. 이 새끼들은 대체 어느 세상 감성인거냐······


‘맞다. 여기선 내가 이세계인이지.’


우슈르테툼 인들은 명예나 신앙 같은 단어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아니꼬운 일이 생기면 칼부터 뽑는 게 사회인다운 행동이고, 이단자를 장작불에 태우는 건 찬양 받을 미덕이었다.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지만 이건 무린데.’


사람 목숨은 귀한 것이다.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 사람이 죽는다면 좀 그럴싸한 이유로 죽어야한다. 나는 그렇게 배우고 살아왔다. 근데 여기선 별 이상한 이유로 죽고 죽이더라.


‘천부인권 마렵다. 시발.’


톡톡.

누군가 내 어깨를 찌른다.


“키마누 왕자님.”

“으응?”

“결투 보증서에 서명해주셔야지요.”


대화를 나누던 백발노인이 빼곡히 글자가 적힌양피지와 깃털펜을 함께 내밀었다. 그는 왕실 집사의 지위에 있는데, 이번 결투의 참관인으로 날 초청한 장본인이었다.


“예. 아니. 어. 그래.”


나는 양피지를 받아들면서도 손을 떨었다. 여전히 머릿 속에는 왕실기사단장의 검이 가리온 경의 심장을 꿰뚫는 광경이 훤했으니까.


눈 앞에서 사람이 칼을 맞아죽는 건, 내게는 생소하고 두려운 광경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편찮으시다면 대신관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왕실 집사는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보다 왕실기사들끼리 이런 사적인 이유로 죽고 죽여도 돼? 국경도 안심할만한 상황이 아니잖아.”


우슈르테툼 왕국은 전시 국가다. 성지를 정복해 세워진 나라다보니 3면의 국경이 모두 적대 종교의 국가로 들어차있는 것이다.


쫄병 한 명이 귀한 판국인데 왕실기사같은 초인 병기의 중요성이야 논할 필요도 없다. 사춘기 소년스런 자존심 싸움에 최신형 스텔스 전투기가 터지게 놔둔 격이다.


왕실집사도 동감하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왕국에 다소 무책임한 행동을 하신 건 사실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국왕 폐하께서도 마지못해 재가하셨죠.”


그러니까 재가를 왜 해주냐고!


“허나 약혼녀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기사들의 결의를 막을 방법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쓰읍. 하기야 이곳 정서론 맞는 말이네.”

“키마누 왕자께서도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끄응.”


이곳 정서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남자가, 자기 여자가 모욕을 받았는데 칼을 뽑지 않으면 인간 실격이다. 기사가 목숨 따위를 걱정하면 그건 폐기물이다.


‘그래도 싫은 건 싫어.’


나는 지구에선 외국 문화에 적응을 잘하는 인간이었지만, 이세계에선 여전히 컬쳐쇼크를 받는다. 평생을 살아도 적응이 힘들 것 같다.


‘결투 보증서 내용에는 문제가 없네.’


그래도 확인해보는 게 좋겠지.

난 이곳 언어를 익힌지 얼마 안됐으니까.


“집사. 내가 제대로 읽었나 듣고 확인해줘.”

“말씀하시지요. 듣고 있습니다.”

“나, 서전트 키마누는 왕실기사단장 로드릭과 왕실부기사단장 가리온 간의 결투를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에 내 명예를 걸고 결투가 공정하게 치뤄진 것을 보증하는 바임.”


보증서를 모두 읽어내자 왕실집사가 입가가 씰룩이더니, 대단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을 익힌 지 반 년만에 막힘 없이 복잡한 문장을 읽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역시 왕족의 피는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닙니다!”


아아. 이것이 고등교육이란 것이다.


헬중세에 와보니 현대 한국은 학력만큼은 기이할 정도로 발달한 세상이었다. 인구 모두가 모국어를 읽고 쓸 줄 알고, 다양한 과목에 대한 시험을 쳐본 경험이 있으며, 사칙연산은 문제 없이 할 수 있다.


그게 별거냐 싶지만, 이곳에선 석사급 학력이다. 대부분의 우슈르테툼 인들은 문맹이며 자기 이름도 읽을 줄 모른다. 농노만 그런 게 아니고, 귀족들 사이에도 간혹 까막눈이 있다.


‘일반인들은 글을 배워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귀족들은 근육뇌라서 글은 사람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문화니까 말이야.’


그나마 여유 있는 귀족 계급마저 저러니, 왕국의 평균 학력은 정말 처참했다. 사칙 연산만 잘해도 회계사가 될 수 있고, 글을 제대로 읽고 쓸 수 있으면 필경사가 될 수 있다.


‘여기서도 사(士)자 붙은 직업을 지니면 전문직 대우를 받으면서 살 수 있지.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이런 배경 때문에 우슈르테툼 인들은 외국인이 현지 글자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걸 대단한 능력이라고 여긴다. 나는 영어 공부하던 경험을 살렸을 뿐이지만 말이다.


‘여기선 현대의 초등교육 과정만 밟았어도 전문직으로 살 수 있고, 중고교 과정을 이수하면 굉장한 고학력이지.’


그런데 나는 수능준비에 대학교 생활 4년, 취업준비기간도 거친 터라, 내 지식의 총량은 평생을 학문에 전념한 학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내가 ‘귀한집 출신’으로 여겨질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다.


‘아무튼 이번 결투는 아주 공정했다. 명백한 상호 동의하에 치러졌고, 준비시간도 충분했지. 마법이나 독 같은 부정 행위도 없었다.’


법적, 도덕적으로 완벽한 결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투 입회서에 사인을 하는 건 왠지 꺼려졌는데, 결국 이것도 ‘보증’이기 때문이다.


‘보증은 부모님한테도 서드리는 거 아닌데.’


하물며 재산 보증도 아니고 명예 보증이다. 이곳에선 명예가 없으면 사회 생활이 불가능하기에, 명예를 건 약속은 매우 조심해야한다.


아무리 헬중세도 ‘결투’와 ‘살인’은 엄격히 구분한다. 결투는 신성한 의식이자, 일종의 재판이라 따라야 할 규정이 많다. 이런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는 지 관찰하는 게 입회인들의 역할이다.


‘그런데 결투 끝나고 나중에 결투의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가 있거든. 그러면 영상 자료가 있는 시대가 아니다보니 진위를 가릴 수가 없다. 이 때 나서는 게 입회인들이지.’


만약 누군가 이 결투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면, 내가 명예를 걸고 약속한 결과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된다. 내 명예에 대한 모욕이 되는 것이다.


‘그럼 내가 그 새끼를 칼로 담궈야 되는데, 이 결투는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잖아.’


하지만, 그런 결점에도 우슈르테툼의 사고 방식으로 보자면, 이건 좋은 기회였다. 여기에 사인하게 되면 나는 ‘거물급 결투에 보증을 선 명예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일이 편해진다.


쓱싹쓱싹.


깃털펜을 들어 두루마리 하단의 네모난 칸에 ‘Kim’을 필기체로 늘려썼다. 마법 각인이 푸른 빛을 내며 사인을 감싸서 영구화시켰다. 이제 나는 결투결과를 보증하게 된 거다.


“입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왕자님.”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외지인에게 명예를 쌓을 기회를 줘서 고마워. 집사.”


내 고맙다는 말에 집사의 눈꼬리가 당황한 듯 크게 올라갔다. 당혹감을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방금·········감사라고 하셨습니까?”

“당연하지. 우슈르테툼이 관용적인 곳이지만, 이런 거물들의 결투 입회를 이방인에게 맡기진 않잖아? 집사가 힘 써준 거 아니야?”

“······분명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는 평민이고 키마누 왕자님께서는 왕족이시잖습니까.”

“신원불명의 이교도 망명자일 뿐이지.”

“물론 공식적으론 그렇습니다만.”


백발의 노인은 안경을 벗어 쓱쓱 문지르는 와중에 온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좀처럼 감정표현이 없는 사람인 걸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아랫사람을 인정해주시는 모습이 키마누 왕자님만의 장점이 되실지도 모르겠군요.”


노인이 도로 안경을 쓰자 인자한 할아버지에서 왕실집사로 돌아갔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냉정한 인상이다.


“키마누 왕자님. 지금과 같은 태도를 고수하신다면 분명히 재기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그쪽에선 나를 ‘고향을 잃고 도망친 망명 왕자’ 정도로 보고 있으니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다.


“그럼 나는 출근하러 가볼게. 더 늦으면 근위대 사령관이 분명히 뭐라고 할 거야.”

“하하. 이곳 상황을 말씀드리면 별 말 못하실 겁니다. 키마누 왕자님, 오늘도 왕국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수고해주십시오.”


왕실집사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지만, 나는 고개만 까딱이고 자리를 떴다. 이곳은 혈통에 대한 존중이 강한 세상이라, 외국 왕족도 그래도 왕족 대우를 해주는 게 매너였다. 공식적으로 왕족 신분을 내세우지 않아도, 혈통에 걸맞는 예우는 해줘한다고 믿는 것이다.


‘덕분에 내가 비교적 쉽게 녹아들었지.’


속이는 것 같아서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살아남는 데 필요하다면 뭐든 해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맨 몸으로 헬중세판타지에 떨어진 이민자니까.


‘나도 상태창 하나만 있었으면 상황이 달랐지. 왕자라고 불리는 것도 비공식적인 신분일 뿐, 공식적으로는 신원불명의 외노자 신세라고.’


언어도, 풍경도, 정서도 낯선 이곳에서, 내가 가진 힘은 현대인의 몸뚱이와 두뇌가 전부다.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활용하며 버텨나갈 수 밖에 없다.


‘아. 푹신한 침대랑 수세식 화장실이 그립다.’


이곳은 우슈르테툼 왕국! 아프가니스탄의 윤리 수준, 소말리아의 치안, 부카니스탄의 빈곤이 합쳐진 헬중세판타지다.


그럼에도 정 붙이고 살다보니, 괜찮은 사람들도 만나고 이곳만이 가진 매력이 보이기는 했다. 어떤 면에선 현대인들이 잃은 뭔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까.


‘그래도 와이파이 안 터지는 건 선 넘었지.’


시발. 인터넷 하고 싶다.


* * *

왕실 집사는 떠나가는 키마누의 뒷통수를 쳐다보았다.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담긴 눈길이다.


“키마누는 벌써 근무지로 떠났나?”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농땡이도 부리지 않고, 성실한 녀석이로군.”


집사의 뒤편에서 황금갑옷을 입은 기사가 불쑥 나타났다. 빛나는 왕관과 당당한 풍채로 인해 국왕다운 위엄을 뿜어져나오는 중년인이었다.


“녀석이 수도근위대 임무를 잘 해내던가?”

“너무 잘해서 문제지요. 승진이 너무 빨라서 근위대원들 사이에 불만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동료들과 적응을 못하는 건가?‘

“단순한 시기입니다. 우리말에 익숙해지고는 동료 병사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고 하더군요. 근무 태도도 성실하고 모범적이라 상관들의 평가도 무척 좋습니다.”

“라스칼이 성실하다고 평가했단 말이지.”

“네. 그 깐깐한 분께서요.”

“흐음.”


국왕이 키마누를 바라보는 눈길에 흥미가 깃들었다. 지금은 전란이 끊이지 않는 혼돈의 시대다. 이런 시기에 고향을 잃고 떠도는 왕족들은 흔하다.


허나 새로운 처지에 적응하는 왕족은 드물다. 대부분은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서서히 시들어갈 뿐이다. 동정은 가지만, 과거에만 안주하려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없다.


하지만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하려는 왕족이라면 다르다. 저런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면, 분명히 더욱 크게 성장 할 것이다.


“저 청년은 계속 눈여겨보게. 티내진 말고.”

“알겠습니다. 헌데 폐하, 질문이 있습니다.”

“왜 저런 신원도 불분명한 자에게 왕실 결투의 입회인을 맡겼냐는 거지?”

“이번 결투 입회는 왕국에서 가장 명예롭고 강인한 이들에게만 맡겼어야 할 일입니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에게 맡기긴 좀······”


집사의 말에 국왕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우슈르테툼 시내 전체를 향해있었다.


“우리도 한때는 떠돌이가 아니었는가.”

“·········”

“젊은 시절의 우리도 마음을 둘 곳이 없었고 이룬 것도 없었네. 하지만 결국은 고향을 만들고야 말았지. 우리들의 손으로.”


두 중년인은 번영하는 우슈르테툼의 풍경을 쳐다보았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무역항이자 동방 대륙 최대의 도시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먼지만 날리던 땅이었지만.


“우슈르테툼은 떠돌이들이 만들고 발전시킨 나라지. 이곳은 앞으로도 떠돌이들을 위한 땅으로 남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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