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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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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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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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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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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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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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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4쪽

마리의 기억

DUMMY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북을 실은 수레가 전진한다.


거대한 북의 가죽이 여운을 남기며 파르르 떨렸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윽고 북채를 든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 북을 내리친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진군하는 것은 왕의 군대.


마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수십 번의 전투를 치뤄 피에 젖었음에도, 여전히 번들거리는 창날이 진군하는 병사들의 걸음에 맞춰 흔들린다.

호흡이 거칠다.

태양은 뜨겁고 달아오른 지면에 땀이 흐른다.

전신을 뒤덮은 체인메일과 그 위를 교차하는 철판들을 당장에라도 집어던지고만 싶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수십, 수백이 아닌 수십 만의 병사들이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포기를 내뱉지 않았다.


철판 위로 그려진 것은 통일되지 않은 제각각의 상징들이다.

어느 변방의 귀족이나 명망높은 학자가문의 문양, 혹은 여럿 왕가의 것들이다.

본래라면 서로를 향해 창날을 겨누었을 이들..그러나 이 순간, 그들은 오히려 서로를 향한 전우애를 과시하고 있었다.


쿵, 쿵, 쿵..북채를 든 이는 무아지경으로 북을 두드린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는 그것만이 자신의 모든 것인 양 이를 악물며 병력의 사기를 북돋는다.


누구하나 약한 자가 없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딛고 나아가고 있음에도, 아직 남아있는 것을 지키려는 그들은 더없이 질기고 강했다.


"정지!"


선두에 서 있던 말을 탄 기사가 소리쳤다.

그 말과 동시에 병사들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기사의 말을 들은 북 채를 든 남자가 연달아 세번을 내리친 까닭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정지신호였다.


참혹하기까지 한 행군이 끝을 맞이하였으나 그 누구도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피폐함에 지쳐 이미 모종의 각오를 마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바라봤다. 공포는 숨길 수 없었다.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두렵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피할 수 없고, 이미 정해진 일이라면, 그저 담담히 준비할 뿐.


"크르르.."


사람의 성대로는 낼 수 없는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친 호흡이다. 거칠다 못해 헐떡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지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체 구조상 호흡이 부족한 그들은 늘 거센 숨을 내쉬었고, 평소보다 거친 호흡은 오직 먹잇감의 냄새를 맡은 까닭이었다.


진녹빛의 피부, 3미터를 훌쩍 넘기는 키, 거대한 체구, 요정의 아종 오크.

그 뒤를 잇는 것은 드물기로 소문난 트롤들이다.

오러의 기사들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난적들..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홀로 서있는 황동빛의 오거였다.


"빌어먹을 요정놈들.."


괴물들을 마주하며 말했다기에는 기묘한 이야기였으나, 그들 모두가 요정의 아종이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산산이 깨트리는 듯한 흉측한 모습이지만, 그것은 요정족들조차 인정하고 있는 진실이었다.


"준비..!"


쿵!


기사의 말을 뱉어진 순간, 다시 한 번 북을 두드린다. 적막을 부수며 울려퍼진 거대한 소리가 병사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괴물들의 병력은 그 끝이 보이질 않았지만 기사는 대충이나마 그 수를 가늠했다.

아군의 병력과 얼추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괴물과 인간은 병사로서의 수준 자체가 달랐던 까닭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왕자님"


기사는 결의에 찬 얼굴로 북을 치는 사람을 돌아보았다.

한쪽 다리를 잃은 채, 끊임없이 북을 두드리던 그는 놀랍게도 일국의 왕자였다. 본래라면 이 전장에 서는 것 자체가 이상한..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왕국의 후예.


"..영웅들은 무사히 도착했는가?"

"..네"


왕자는 기사의 대답에 환한 웃음을 터트린다.


왕국에 있을 나의 동생아. 보아라. 역시 전장에 선 보람이 있지 않느냐.

비록 우리가 저들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수도를 잃고, 신하들을 잃었을 지언정. 여전히 우리의 희망은 환히 불타며 저 어두운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두드려야지..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면.."


기사는 스스로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왕자의 모습에 경의를 표했다.

설령 전장의 선봉에 선 채 적에게 당당히 맞서던 육신의 일부를 잃고, 이제는 검 대신 북채를 든 망국의 왕자가 되었을 지언정..

그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주인이었다.


"돌격!"


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앞을 향해 쉼없이 말을 몰았다.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내며 그 용맹을 흩뿌렸다. 후방에서 병사들을 재촉하는 귀족들이 이를 악물며 마법을 준비한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명령하는 것은 당당한 풍채의 왕.

자줏빛의 망토, 백은의 갑옷, 여명의 왕관을 쓴 피나르의 왕이 새하얀 백마를 몰아나가며 거대한 보검을 적에게 겨눈다.


마리는 그 모든 빛나는 순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곧 사그라들어, 적들과 함게 동귀어진할 이들의 모습을..


그것은 분명, 그들의 병력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결과였으나...결코 아름답지는 않았다.

결국, 그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없었으니까.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리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건..꿈인가요?"


특유의 성격 탓에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지금의 광경은 마리에게도 놀라움을 주는 것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금껏 상상치 못했던 모습들이 가득했고, 그 선명함은 그녀로 하여금 거북함을 느끼게 한 까닭이다.


"현실은 아니지"


목소리는 마리의 질문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리는 그 목소리에게서 어딘지 모를 낯익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올가의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리움이나, 거북함 따위의 것이 아닌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와 연결된 실타래가, 다름아닌 그녀의 피부 아래에서 선명히 흐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어라? 벌써 내가 누군지 눈치채버린 거야? 이건 또 무척이나 빠르군"


눈치채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있을 수 없는..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계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날 만날 수 있게 된 걸 보면 분명 재능은 밑바닥인데 말이야..머리는 좋은것 같군"

"여기는 어디죠?"


마리는 그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와의 대화는 어딘지 모르게 불쾌했다. 태어나서부터 화를 낸 적이 별로 없는 그녀가 욱하는 심정이 들었을 정도로..


"글쎄..어디라고 생각해?"

"알려주실 마음은 없는 것 같군요"

"그럴리가. 난 네 편이야"


마리는 그 대답에 헛웃음을 터트리는 자신이 놀라웠다. 자신의 감정이 이토록 풍부한 것이던가?


"웃으니 보기 좋군"

"당신에게 잘 보일 마음은 없지만요"

"상관없어. 그리고 말해두자면..나도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몰라. 정확히는 본 적이 없다고 해야겠지"


마리는 그 말의 내용을 곱씹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누가 본 광경이지?


"방랑 정령..들어본 적 있나?"

"정령이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지..같은 종족이라 하기에도 애매해"

"애초에 정령이 종족이던가요?"

"그렇지는 않지"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유롭거든"


그녀? 방랑 정령이라는 것은 여자라는 뜻인가?


"물론, 아니야. 그녀는 성별이 없거든. 내가 멋대로 그렇게 부르는 거야"


마리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놀라지는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애초부터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자신은 연결되어 있지 않던가.


"수긍이 빠른 것은 좋지만 불쾌감조차 느끼지 않는 것은 또 처음이군"

"본론만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마리의 까칠한 태도에 웃어버렸다.


"지금 말하는 게 본론이야. 이곳이 방랑 정령이 보았던 풍경이라는 거지"

"..저와 그녀와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던가요?"

"음..직접적으로는 없군"

"그럼 왜 이런 걸 보여주는 거죠?"

"간접적으로는 있으니까 그렇지. 그녀는 나와 연결되었던 적이 있거든"


마리는 그 말에 무심코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지만 어딘가가 다르다. 낯설고 꺼림칙하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리는 어디선가 문이 열린 듯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전투는 끝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죽어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기사는 옛적에 물어 뜯겨버리고, 그 최후를 담담히 지켜보던 왕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피나르의 왕만이 홀로 부러진 대검을 간신히 짚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나 그런 그 역시도, 전신에 가득하던 오러는 이미 힘을 다한 지 오래..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은 마리가 알고 있는 광경이었다.

성에서 쏟아진 광풍이 단숨에 도달하여 황야를 휩쓴다. 피나르 왕은 무언가를 직감한듯 절망한 표정으로 쓰러진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겠지.


"아.."


마그나 왕국. 그녀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조국.


이곳은 400년 전의 전장이었다.




*





마리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있는 것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유라였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무기를 빼앗긴 채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무언의 항의를 던지고 있었다.

항의를 받고 있는 것은 검청색의 단발을 하나로 묶은 청년이었다.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유라와 시선을 마주하다 이내 마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청록 빛의 눈동자다.

마리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였다. 어디선가 독한 소독약의 냄새가 났다. 이곳은 병원인가?


"..."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마리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유라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마리의 상태를 살피고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마리는 그 알 수 없는 행동에 의하해하다 어쩐지 시야가 뿌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는 감사히 그것을 받아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러나 어째서 슬픈 기분이 들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 좋은 꿈을 꾼 모양이군"

"..그럴까요?"


그것이 자신에게 안 좋은 꿈이었던가?


마리는 쉽게 단정하기 힘들어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죽음 자체의 수를 말하자면 그보다 많은 죽음을 보기는 힘드리라는 사실은 분명하겠지만 그들을 동정 하냐하면 그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 없었으니까.


"..누구시죠?"

"내 이름은 반 폰 쿠르. 치안청의 수사관일세. 이번에 테러리스트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분을 보호 및 감시하고 있다네"

"..감시라구요?"


반 수사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불특정 다수나 자신을 목격한 이에게만 공격을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좀 달랐거든요"

"..저희를 노리고 왔다는 뜻이군요"

"맞네"


반 수사관은 올가와 그들 사이에 무언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래서 유라의 무기를 빼앗으신 건가요?"

"원래 병원은 무기 반입이 금지되어 있소. 툴카 왕국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던데..맞나?"


마리는 한 때 마이크가 건네주었던 위조된 신분증의 내용을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로는 치안청에 붙잡혀도 3일은 버틸 거라 했지만 그것을 만들어준 이가 황태자였으니 조금 더 버틸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묻지"


그러나 마리는 알아야만 했다. 눈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지.


"당신들의 신분증..최종 승인자가 황태자 저하시더군"


마리는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넋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리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에서 맴도는 꿈 속의 광경을 지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황태자 저하와는 무슨 사이인거지? 어제부터 그분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과 연관이 있나?"


마리는 자신의 눈동자를 직시하는 청록빛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시에 들어온 질문에 마음이 동요를 일으켰다.

분명 테러 관련의 질문이 날아오리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질문이 찾아든 까닭이다.


"..아니요"


마리는 최대한 의심받지 않을 듯한 억양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반 수사관에게는 무언가 단서가 보였던 듯 하다. 그의 눈에 빛이 어린다. 그가 질문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반 수사관 님"


노크음과 함께 창백한 얼굴의 엠버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영웅의 동상이..불타고 있습니다"


반 수사관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침묵이 이어진다. 마리는 그 어색한 분위기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차마 눈을 마주하기 힘든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던 탓이다.


'어라?'


그리고 마리는 그제서야 엠버의 뒤를 따라 들어온 헤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딘가 살짝 놀란 듯 한 표정의 남자다. 마리에게는 그 이름도, 얼굴도 처음보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의 정체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이크?'


그 괴리감에 동요하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리는 알지 못했다. 반 수사관은 그러한 모습까지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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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꼭두각시 황제 21.05.22 29 2 15쪽
15 꼭두각시 황제 21.05.21 31 3 16쪽
14 몰락한 영웅 21.05.20 30 2 13쪽
» 마리의 기억 21.05.19 31 1 14쪽
12 헤벨 21.05.18 31 0 15쪽
11 헤벨 21.05.17 32 2 13쪽
10 재의 마녀 21.05.16 38 2 8쪽
9 재의 마녀 21.05.16 37 1 7쪽
8 산맥의 거인 +2 21.05.15 52 3 15쪽
7 산맥의 거인 21.05.14 52 1 14쪽
6 산맥의 거인 +1 21.05.14 68 2 15쪽
5 황족 암살 21.05.13 76 1 15쪽
4 죽은 자의 회상 21.05.13 86 1 14쪽
3 죽은 자의 회상 21.05.13 111 3 17쪽
2 죽은 자의 회상 21.05.13 177 3 16쪽
1 시작 21.05.13 425 1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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