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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비의 서재

당신을 위한 무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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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빛
작품등록일 :
2021.05.13 11:19
최근연재일 :
2021.07.17 13:00
연재수 :
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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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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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글자수 :
441,567

작성
21.05.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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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4쪽

산맥의 거인

DUMMY

나는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들고 있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일이었다.

말은 그저 말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데 나는 왜 이토록 그것을 두려워 하는 거지?


탄캄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나를 가만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 배려가 고마움과 동시에 껄끄럽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을 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회피였다. 나는 그제 이 주제를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인가?


탄캄은 그저 조용히 답했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내 의도가 샅샅히 밝혀져버린 기분이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불현듯 떠오른 것을 입에 담았다.


"조금 전..내가 당신과 연결되려 했을 때..나를 깨워준 것은 당신이었습니까?"


간단한 이야기일 텐데도 불구하고 생각외로 대답이 늦었다.

아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명할 방법을 찾는다거나, 변명거리를 찾는것이 아니라 마치 그 역시도 모르는 것을 고심하는 있는 것처럼..


-나는 천리안이라는 것을 갖고 있네


한참 끝에 그가 꺼낸 것은 대답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나는 천리안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과는 다르게, 천리안은 단순히 멀리보는 것만은 아니지. 그 사람의 현재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과거..가끔은 미래까지도 보곤 한다네.


나는 그 말 속에서 그가 나를 로버트라 불렀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내가 세상 모든 일을 지켜보는 것은 아닐세. 내 눈은 두 개밖에 없는 만큼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나는 평소 내 제자인 마노를 지켜보고 있다네. 그러던 중 자네를..몹시 놀라운 것을 보게 된 거지.


"저의 과거인가요?"


-아니..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 피를 터트리는 제자의 모습 말일세.


어쩐지 가슴 한 켠이 무거워지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허공? 허공이라고?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인가? 그것이 내 이야기는 맞는 건가?

하지만 마노 백작의 손에 죽은 황태자나 내 친구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분명..


-정확히는, 마이크였던 자의 시체가 사라져버리는 광경이었지.


인간에 비하면 영원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며 그는 회고했다.


나는 무어라 입을 열기 힘들었다.

비현실적인 일이다. 아니, 내가 되살아나는 것도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나는 이렇듯 실재하고 있지 않은가.

보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지?


-내가 씨앗에 대해 떠올린 것은 그것 때문이었네..전능한 신들의 변덕이나 권능에 의해 마이크라는 인물이 씨앗이 되었다고 생각했거든.


"그 씨앗이라는 게 무슨 열매 같은 것의 씨앗이라는 겁니까?"


-식물이 아닌, 초월자의 씨앗일세. 물론, 아니라는 게 판명되었지만..


아니라니 뭔가 다행인 것 같기도, 섭섭한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대단해 보이는 이름이 나왔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된 건 조금 전의 일이고..나는 자네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했네. 그렇기에 이곳으로 부르려 한 것이고 말이야. 물론..오히려 내 실체가 보여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설마 그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게 당신이었던 겁니까?"


-음..거대하다니 말이 좀..


지금 거대하다는 말을 부끄러워 하는 건가? 거인(巨人)이?


"그것 때문에 죽을 뻔 했는데!"


-..그래서 끊으려고 했지. 그저 맨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내 힘의 근원을 보는 건 아크 메이지 정도는 되어야 감당이 가능하니까 말이야. 그런데..그러다가 보게 된 거야..자네의 과거를..그리고 죽음을.


나는 그 말에서 내 죽음을 거짓이라 말한 탄캄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그것마저도 보았단 말인가? 그런데도 그것을 거짓이라 한단 말인가? 진심으로? 혹여 나 이외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인가?


그러나 탄캄은 그런 내 심정을 모른 채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나에게 자네를 깨웠느냐고 물었나? 틀렸어..나는 오히려 자네의 기억에 삼켜질 뻔했었네..다른 죽음 역시 마찬가지지만..자네의 죽음은, 나에게도 버거운 기억이었거든.


"잠깐, 그 말은..!"


-그래, 그 말대로야.


나는 어쩐지 탄캄이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자네를 깨운 건, 내가 아닐세.


본 적 없는 거인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왜 저는 못 듣게 하신 거죠?"


마이크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방을 나서자, 뒤를 이어 탄캄을 찾은 것은 마노와 마리였다.

마리의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마노는 어딘지 모르게 불만이 가득 해 보였다.

마리는 어딘가 몹쓸 것을 본 듯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서른 살이나 먹은 사람이 아이처럼 말하다니..


-못 본 사이 제법 신경질적이 되었군..마노..그게 바로 인간의 사춘기인가?


마리는 탁자 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너머의 유리구슬처럼 빛나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보이지 않았어야 할 건너편의 모습.


아무도 볼 수 없어야할 그것이 마리에게 보이는 이유는, 당사자에게만 들리도록 한 탄캄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리는 이유와 상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마이크와 탄캄의 대화조차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리는 담담히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성난 백작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그도 아니면 옛날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건가? 자네가 아직 솜털 투성이의 어린아이였던 시절 말일세.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시죠. 당신이 제 스승이라 할지라도..제 계획을 방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당신을 존중해 그와 대화할 시간을 드렸지만 아쉽게도 무의미했던 것 같군요. 그가 쓸데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제 손에 죽어야만 할 테니까요"


무엇이 방해라는 것일까. 마리는 백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악의를 갖고 있다기엔, 건너편의 거인은 너무나도 슬픈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걸세.


"그는 밀수꾼입니다"


마노 백작은 모멸의 탈을 쓴 분노를 억누르며 짓씹었다.


-지금은 아니지.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그렇기에 그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호기심을 가진 게 아니던가? 껍데기만 같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나 그 분노는, 이어지는 탄캄의 물음에는 침묵하고 있었다.

허나 마리가 보기에, 탄캄의 말에 수긍하여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이크라는 사람은 미지 그 자체였다.

평소의 백작이라면 미지라는 것을 사랑하는 것에 조금의 주저도 없었을 테지만, 세상 어디에도 철저한 계획이라는 단어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엮는 바보는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백작은 지금의 마이크가 이전의 그와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있었지만 그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생명을 등에 짊어진 자의 의무이니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그를 저의 일행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많이 달라졌군..어릴 적의 자네는 모험심이 있었는데 말이야. 저런 사람이야 말로 자네가 그토록 궁금해 하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마노 백작은 그 말에 혀를 찼다.


"달라질 수밖에요"


-그렇기야 하지. 자네에게도 지켜야만 하는 것이 생겼으니까.


마리는 그 순간 탄캄이 자신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따스한 시선이다.

그녀는 본 적도 없는 거인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에게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이 될 걸세..한 사람이 짊어지기에는 더더욱.


"견딜 수 있습니다"


-내가 자네를 걱정한다고 생각하나? 그것이 자네의 결정인 이상..나는 자네를 염려하지 않아. 다만 자네에게 휘말릴 이들을 걱정할 뿐이지.


"..제 대답은 변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군..그렇지만 단호해..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망설이다니요?"


-나에게로 굳이 그를 데려오지 않았나. 이미 자네에게는 모든 계획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왜 그를 바로 죽이지 않았지? 내 가르침을 무시하면서까지 단련한 그 육체가 있는데도 말이야.


마노 백작은 그 질문에 잠시 숨을 삼켰다. 마리는 요 며칠 새 그의 새로운 면만을 보는 것 같았다. 진지한 모습도 드물지만 당황이라니?

그녀가 보는 마노 백작은..좋게 든 나쁘게 든 철혈이었는데..


"..그는 제 계획을 벗어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 계획이 잘못된 건 아닌가? 그는 이렇게 실재하고 있는데.


"..사람 하나로 틀어질 계획은 아닙니다. 뒤틀렸다면 바로잡으면 될 일이죠"


마리는 그것을 입에 담는 마노 백작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다고 생각했다. 단호한 목소리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탄캄보다는 아니었다.


-불가능한 일일세. 그를 처리하려 해봤자 죽일 수 없는 이를 상대로 원한만을 살 뿐이야. 애초에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힘든 건 마찬가지고 말이야.


"이유가 뭡니까?"


마노 백작이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으나, 탄캄은 오히려 낮은 목소리로 웃을 뿐이었다. 마리는 그 모습이 마치 아이의 투정을 받아주는 어른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운 말이군..어릴 적의 자네는 내게 많은 것을 물었지만 지금의 자네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게 되어버렸지..나에게 이유를 물었는가?


탄캄은 거울 너머의 마노 백작을 살피고 있었다. 아니..정확히는 그의 얼굴에 남은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그러나 그것은 찰나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은 마리밖에 없었다. 그립다 말하는 그의 눈빛에 깃든 공허함과 애틋함 그리고.


-자네는 신이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벌써부터 많은 것이 틀어지지 않았나.


알 수 없는 슬픔까지도..


"제가..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것을 알지 못하는 백작은 그저 담담히 질문할 뿐이다.


-자네의 잘못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알고 있나?


"무엇을 말입니까?"


-북쪽조차도 심상치 않아..자네의..자네들의, 마그나 왕국 말일세


마노 백작은 숨을 삼켰다. 마리는 잠시 그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모든 것이 끝났는데 말이다.

그곳은 그저 얼어붙어 있을 뿐인데..사람을 비롯해, 시간마저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나 역시 전부 본 건 아닐세..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자네가 부탁한 것들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탄캄은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조차 지극히 우연에 가깝다고 말했다.


"본 것 만이라도 알려주시죠"


-..재상의 그림자가 죽었다네. 모조리..


마리는 탄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죽었다고? 대체 어떻게?


그의 정적의 등에 칼을 꽂는, 최강의 암살자들..마그나 왕국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들이..진정 죽었단 말인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다. 차라리 재상이 죽었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그것이 왕국에 있어 최악의 결과라 할지라도..


"누가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알 수 없네..자네도 알다시피, 마그나에는 결계가 있어 내 시야가 제한되지 않는가.


마노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얼굴이다.

복잡하게 일그러졌지만,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 재상은 어떻습니까?"


-겁에 질려있다네. 지금의 그는 가시를 잃은 고슴도치나 마찬가지야. 아마 자네가 사라진 것도 금방 알게 되겠지. 왕국을 샅샅이 살필 테니까..그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자네도 짐작할 테지?


"그 얼간이라면, 모든 일을 그르치겠죠..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이 옳아요. 제 계획은 실패입니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말이죠.."


-화났군.


"기뻐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마노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마리는 그런 모습을 보며 그가 내내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망가졌기에 비로소 본질이 드러나 버린 것만 같았다.


-나의 대답은 하나라네..마이크를, 정체모를 그를 받아들이게.


"당신의 천리안이 미래를 보여주기라도 한 겁니까?"


-그의 미래는 볼 수 없네. 그저 오래 사는 자의 지혜라고 해두게나.


"결국, 확정된 것은 어디에도 없군요"


-우리에게 결정된 미래는 없다네. 오직 신의 뜻만이 있을 뿐이지"


콰광!


탄캄의 말이 끝난 순간, 거대한 폭발음이 거리를 가로질러 여관에 꽂혔다.

터져나간 유리창의 파편이 썰물처럼 쏟아진다.


마리는 너무나도 절묘한 순간인지라 무심코 마노 백작과 탄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다른 변수가 일어난 모양이군..자네들에게 좋은 일은 아니겠지. 이보게 마노..당연한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순간이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거야..우연과 운명, 인연 같은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네. 그러니 차라리 가장 큰 변수를 자네의 편으로 삼게.


"..마이크가 바로 그 변수라는 겁니까?


-그만큼 빠르게 변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말이야. 다시 한 번 말하겠네..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포기하지 말게. 내가 아는 마노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 그 시답지도 않은 진지한 연기는 때려치우게.


마노 백작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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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꼭두각시 황제 21.05.22 29 2 15쪽
15 꼭두각시 황제 21.05.21 31 3 16쪽
14 몰락한 영웅 21.05.20 30 2 13쪽
13 마리의 기억 21.05.19 31 1 14쪽
12 헤벨 21.05.18 31 0 15쪽
11 헤벨 21.05.17 32 2 13쪽
10 재의 마녀 21.05.16 38 2 8쪽
9 재의 마녀 21.05.16 37 1 7쪽
8 산맥의 거인 +2 21.05.15 52 3 15쪽
» 산맥의 거인 21.05.14 53 1 14쪽
6 산맥의 거인 +1 21.05.14 68 2 15쪽
5 황족 암살 21.05.13 76 1 15쪽
4 죽은 자의 회상 21.05.13 86 1 14쪽
3 죽은 자의 회상 21.05.13 111 3 17쪽
2 죽은 자의 회상 21.05.13 177 3 16쪽
1 시작 21.05.13 425 15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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