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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살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구선달
작품등록일 :
2012.09.01 22:09
최근연재일 :
2016.07.08 02:27
연재수 :
9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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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12.07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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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글자
18쪽

인연살해 6부: 미친 빌과 붉은 세계 - 10

DUMMY

근위대 간부들이 북부군의 손으로 살해된 다음, 태양궁은 신속히 근위대의 나머지 병력을 무장해제시켰다. 더는 아무도 사태를 의심하지 못했다. 태양궁의 여왕이 그 소중한 근위대를 내쳤다! 고대신의 이야기는 진짜다! 여신은 산맥요새에 있다! 사람들의 말은 바람보다 빨랐고, 순식간에 근위대의 머리 위까지 돌아왔다. 철혈의 벽이라던 근위대 병사들은 내외의 압박에 순식간에 붕괴했다.

세계의 종말이냐, 고향의 안위냐?

"다른 방법도 있었을 거에요." 세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 앞에는 무릎 꿇은 근위대 병사들이 있었다.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도망치려던 그들은 세나를 보자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녀가 소원검을 뽑아든 채 그들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근위대는 세나의 능력을 잘 알았다. 그녀의 소원검 앞에 선 것은 이미 무장해제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콩 튀듯 도망다니고, 어떤 이들은 바위처럼 뭉쳐 대항하는데, 그대가 하나하나 다 잡을 순 없잖나." 죽은 자의 왕이 말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곧 태양궁의 전령이 달려와 상황을 보고했다.

"라슐릭 연대도 제압되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죽은 자의 왕은 뒤에 선 해골에게 턱짓을 했다. 해골들은 들고 있던 포대의 주둥이를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검은 밧줄들이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뛰쳐나와 근위대원들을 얽어매었다. 죽은 자의 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기는 태양궁의 것으로 하고, 인신의 자유는 소원검사의 것으로 한다. 속박의 해제는 소원검사의 재결을 거쳐 태양궁이 승인한다. 이는 죽은 자의 왕이 북부 장로회의 규약에 의하여 보증한다."

세나 앞에 있는 자들은 운이 좋았다. 죽지는 않았으니까. 세나는 자신이 구하지 못한 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총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났으면 서두르죠. 쓸데 없는 싸움은 하나라도 더 줄여야 해요."

죽은 자의 왕은 언제나 그렇듯 부정적이었다.

"남은 건 네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소부대들이다. 네가 일일이 다 제압할 거라면, 날이 저물걸."

"도와줘요."

"할 일이 많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죽은 자의 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피를 묻히고 시작하는 일이 잘 풀려갈 거라고 생각하나요?"

"언제는 안 흘린 것처럼 말하는군."

"조금이라도 줄여야죠. 도와줘요. 그러면 회의실로 바로 돌아갈 수 있어요."

죽은 자의 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세나의 고집에 응하지 않겠단 뜻이었다. 세나는 설득을 포기했다. 그는 그녀가 쉽게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긴, 당신이 사람을 구하러 뛰어다니는 것도 웃긴 일이겠죠." 세나가 말했다.

"애써봐라." 죽은 자의 왕이 답했다.

세나는 소원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뛰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죽은 자의 왕에게 물어보았다.

"누군가는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요?"

죽은 자의 왕은 코웃음을 쳤다. "오직 죽음만이."

세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죽음은 아무 것도 돕지 않아요."


*

근위대의 숙청, 부족연맹의 이탈 등 새로운 현안을 정리하기 위한 마지막 회의는 해가 진 다음에야 열렸다. 아일 대공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참석했다. 그는 멀쩡한 왼손으로 검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장로회의 수호자들은 대공이 상처뿐만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팔에서 통증을 겪는다고 보고했다. 고통을 참느라 이를 부득부득 갈던 대공은 자신의 피가 묻은 헌 붕대를 세나에게 건넸다.

"내 명예는 회복했다. 그러나 아직 빚이 남았다. 여신은 이 고통의 값을 반드시 치뤄야 할 것이다."

세나는 질렸단 표정으로 그 붕대를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너 북부인 맞아."

그녀는 붕대를 보라에게 건넸다. 보라는 그 붕대를 자기 검집에 감으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만 정상인인 것 같아."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빌은 아일 대공이 전사의 숭고한 맹세를 소원검사와 나눈 것이라 귀띔해주었다. 하지만 소원검사들은 그 이야기엔 관심이 없었다. 그녀들이 보기엔 그게 그거였다. 빌은 소원검사들에게 처음으로 무시당했다.

빌은 맥이 빠진 채 첫 회의 때처럼 다시 입구를 막아섰다. 다른 게 있다면, 레페린이 의석 하나를 차지했다는 것. 그리고 이번엔 에릭슨, 시다크, 틸리가 빌의 옆에 있단 것이다.

"뭐 하나 말해봐도 됩니까?" 틸리가 빌을 향해 질문했다.

"좀 닥쳐." 빌이 대답했다.

"해보세요." 세나도 대답했다.

틸리는 당황했다. 그는 북부인 중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드 왕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허락으로 해석한 틸리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제 몰려가서 족치면 되는 겁니까?"

"고상하게 표현했으면 좋겠군. 병사." 태양궁의 여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가 옳소." 기드 왕도 말했다.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소. 어디에도. 여신은 스스로 개전을 선언한 셈이오."

"전술과 전략은요?" 여왕이 물었다.

기드 왕은 탁자 위의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산맥은 크지 않았지만 작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격할 곳은 몇 안 되는 관문요새였고, 가장 가까운 곳은 하나뿐이었다.

"연옥입구의 선례를 보아, 요새의 가장 깊은 우물이 있는 첫번째 요새 하이포를 노립시다. 어차피 그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산맥 전체를 장악할 수 없소. 첫발자국이나 마찬가지니까."

모든 성채와 요새에는 우물이 있다. 산악부족연맹의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죽은 자의 왕이 오염시킬 수 없는, 가장 깊은 곳의 우물에서 식수를 떴다. 그들의 지하저수조는 요새 못지 않은 웅장함으로 유명했다.

"하이포 요새의 우물에 없으면?" 죽은 자의 왕이 물었다. "요새마다 그런 저수조가 하나씩 있잖소. 산맥의 도로망과 요새 전체를 뒤질 거요?"

틸리는 마녀 레페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레페린은 답을 알았다.

"거기 있을 거야."

왕들과 영웅들의 눈이 레페린에게 향했다. 레페린은 주목 받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부족연맹이 그곳에서 최초의 우물을 발견해 요새를 만들었거든. 그 어떤 요새의 우물보다 깊고 거대하지. 그놈들은 알고 만든 게 아니지만, 첫번째 피조물들은 거기서 여신을 숭배했지. 그곳 외의 다른 우물은 그녀의 권능에 걸맞는 힘을 못 내. 그 우물을 뺏기면 도망도 못 치고 산맥 속에 처박힌 채 말라죽어갈 수 밖에 없지."

"젠장. 역시 네년은 다 알고 있었군." 롭스트릭 서기장이 투덜거렸다.

레페린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녀는 한 손에 쥔 자작나무 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여기서 그 시절부터 살아온 사람은 나 밖에 없잖아?"

죽은 자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모두는 숨을 죽였다. 그는 레페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새파란 눈빛이 그녀를 쏘아보자 레페린도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뭘 원하나?"

"왜? 상이라도 주게?"

"원한다면."

"필요 없어. 열심히 싸우기나 해. 내 새 남자친구가 그러는데, 시대가 바뀌고 여신이 죽는 걸 보면 뭔가 알게 될 거 같지 않냐 그러더라구."

빌은 틸리를 쳐다보았다. 틸리는 양팔을 번쩍 들어 과장된 몸짓을 하며 레페린을 비난했다.

"너무 축약했어! 제가 쏟아부은 말과 노력은 저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3일째 되던 날 자작나무 아래에서 승리자 렌델레프와 숲의 고대신 맹키의 전설부터······."

"네 공이 크다." 롭스트릭 서기장은 이죽거리며 틸리의 말을 잘랐다.

틸리의 턱을 박살내놓는 걸 고려하던 빌은 도끼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군웅들은 다시 레페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산더미 같은 숙제를 내놓은 채 강의를 끝낸 교수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해? 안 갈 거야?"

레페린의 기대와 달리 회의는 더 길게 이어졌다. 부족연맹의 최신 동향부터 군대를 움직일 자금까지, 알아보고 논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레페린은 이거저거 꼬치꼬치 캐묻는 왕들 앞에서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소원검사들은 이런 행정적이거나 군사적인 분야엔 비전문가였기 때문에, 자연히 소외되었다. 다행히 그녀들은 고통 속에서 이를 부득부득 가는 아일 대공을 구석으로 데려가 달래는 보다 편한 일을 맡았다. 마찬가지로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그녀와 아일 대공 주변에 모였다. 빌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그 무리의 가장 뒤에 섰다.

"마취제는 썼나요?" 보라가 처음으로 시빌라 퍼스워드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환자의 희망을 전했다.

"거부했어요. 자신은 나약한 자가 아니라고요."

보라는 아일 대공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짜악! 아일 대공은 비명도 못 질렀다. 에릭슨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분은 환자요."

"알면서 왜 그래, 진짜! 정신나간 북부 놈들!"

틸리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빌, 시다크, 에릭슨은 선왕의 옛 전사들 답게 아일 대공의 선택에 동의했다. 그들은 자신과 전우들의 사례를 꺼내들며 남자의 가치와 신령한 민간요법을 논했고, 보라는 소원검을 약간 뽑는 것으로 그들을 닥치게 만들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자의 왕도 그렇지만, 당신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족속들이네요."

"걱정마라. 우리도 다 그렇다."

빌이 대답했다. 실제로 그랬다. 죽은 자의 왕은 초월자다. 왕들은 서는 곳이 다른 인간들이다. 레페린은 3천년을 살았다. 시빌라 퍼스워드는 아예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 이 무리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젊은이군요." 틸리가 말했다.

시다크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녀의 새 좆이지."

소원검사들은 웃지 않았다. 아일 대공은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숙녀들 앞이다. 자중하라."

"당신 뜻대로, 대공 각하." 시다크는 순순히 물러섰다.

대공은 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노병을 향해 말했다.

"태양궁의 근위대는 명예를 아는 놈들이지. 아무리 충직한 사냥개도 죽을 땐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지만, 그들은 달랐다."

"실로 그러했습니다." 빌이 대답했다.

대공은 손을 들어 빌의 허리춤에 묶인 수건을 가리켰다.

"그것도 소원검사에게 넘겨라. 숙녀들이 남자들의 명예를 짊어지는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도다."

빌은 피 묻은 수건을 바라보았다. 근위대장의 피를 닦아낸 수건이었다. 빌은 보라의 검집에 묶인 붕대를 잠깐 보고는 수건을 세나에게 건넸다. 세나는 그 수건에서 으깨진 지렁이와 익사한 고양이 사이에 존재할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명예, 복수, 피. 매일매일 그런 이야기들 뿐이야. 정말 지겨워."

"왜요? 멋진 날들인데." 틸리가 말했다. 세나는 전혀 동의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세번째로 멍청한 남자로 인정해드리죠."

"첫번째와 두번째는 누굽니까?"

"기드 왕과 우리 친구 대공 나리요."

틸리는 하늘로 양 손을 뻗은 다음 왕에게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왕족 다음 가는 놈이다! 멋진 날이군!"

명백한 역효과였다. 아일 대공은 겨우 웃었다. 소원검사들은 틸리와 대화하는 것이 매우 비생산적인 일임을 깨달았다. 그녀들은 혈기 넘치는 젊은이 대신에 늙은이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늙은이들의 고집 또한 변하지 않았음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멍청하냐고 묻지 않았다.

"알아도 할 수 밖에 없는 게 있는 법이지." 빌이 중얼거렸다.

그는 수건을 세나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시커멓게 때가 탄 수건 위에 딱딱하게 굳은 피딱지들. 세나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말했다.

"가끔씩, 당신이 정말 미워요."

"상관 없다." 빌이 대답했다. "세상이 바뀌는데 그까짓 게 중요하겠냐?"

세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대신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빌은 그녀의 눈빛이 부담된 탓에 무리에서 이탈했다. 그는 도로 회의실 정문까지 걸어가 제자리에 섰다.

때맞춰 왕들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빌은 직접 회의실 문을 열었다. 빌은 곧 기드 왕에게 불려가 무언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왕들은 다 그렇게 움직였다. 죽은 자의 왕은 시빌라 퍼스워드와, 태양궁의 여왕은 누구보다 빠르게 회의실로 들어온 자신의 신하들과.

롭스트릭 서기장은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세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변화에 소외되고 희생되는 자들에게 너무 신경쓰지 마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서기장은 숱이 거의 남지 않은 자신의 머리통을 긁었다. 그는 빌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불쌍한 자는 아들이 이 군대에 있소. 그가 아들을 찾아 떠나도 아무도 탓할 수 없는데, 그는 왕들과 영웅들을 내버려두지 못했지. 왜 그랬을 것 같소?"

세나는 단번에 대답했다.

"그게 더 큰일이라고 생각했겠죠."

"바로 그거요. 그게 이 세상의 전환점이지."

"잘 모르겠는데요."

"충성에는 여러가지 대상이 있소. 왕, 귀족, 신 등등. 셀 수도 없어. 귀찮을 정도지. 여러 군주에 동시에 충성을 맹세하는 놈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중 으뜸으로 치는 것은 바로 가족이오."

세나는 그 설명을 이해했다. 혈연.

"빌은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상관 없는 사람인 거요. 하지만 그는 남았지. 시대가 변했소. 빌도 변한 셈이고."

"일리 있네요. 그런데 그게 왜요?"

"세나 양, 그대 충성의 대상은 평화요. 우리가 일찍이 바라보지 못한 것이지. 말했다시피, 우선순위가 바뀌는 건 세상이 바뀐단 의미요. 이제 이해가 가오?"

"전 충성이란 단어를 그렇게 쓰는 걸 이해 못하겠네요."

"그대다운 말이오."

롭트스릭 서기장은 낄낄 웃었다.

"우리 시대는 그대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소. 이 싸움의 끝이 어떻든 그대는 시대를 바꿀 수 없소. 아직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어요."

"무리는 하지 마시오."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전 결국 태양궁에 남을 텐데?"

"인간의 의향은 중요하지 않소. 결말이 문제가 될 뿐이오. 폭풍이 지나가고 연극의 막이 내리면, 남은 이들을 돌아보게 되잖소."

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북부 장로들의 말은 폭포 같았다.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리는 수수께끼들의 폭포.

그때 기드 왕이 무리에 다가왔다. 그는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먼저 서기장을 향해 말했다.

"이 사태를 알지 못하거나, 소집에 불응한 장로들에게 다시 연락을 취하시오. 연맹의 석벽은 굳건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일말의 도움이라도 필요하오. 대공은 죽은 자의 왕이 치료해주기로 했으니, 다시 전선에 설 수 있을 거요."

"그거 멀쩡한 치료법입니까?"

서기장의 질문에 소원검사들과 아일 대공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기드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요즘 시빌라 퍼스워드에게서 배우고 있다더군."

왕은 아일 대공의 신음소리를 무시했다. 그는 곧바로 소원검사들을 향해 말했다.

"사안이 급박하니, 태양궁은 지금 바로 여길 떠날 거다. 같이 가라. 다시 만나는 장소는 연맹의 석벽 앞이다. 서둘러야 한다. 시대를 따라잡아야 한다."

"당신들 시대요?"

기드 왕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세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드 왕의 대답은 세나의 예상 밖이었다.

"몇 번은 바뀔 테지."


*

귀신늑대 셀레스테는 본체로 돌아간 채 연맹요새 안을 걸었다. 요새 안은 비명과 피냄새로 가득했다. 비장의 한 수라기보단 깜짝선물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런 예고나 징조가 없었던.

여신이 명령한 순간 요새는 지옥으로 돌변했다. 변하지 않는 것의 상징이었던 연맹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움직이지 않아야 할 것들이 움직였고, 무너지지 않아야 할 것들이 무너졌다. 가장 깊은 우물에서 뛰쳐나온 괴물들이 연맹 병사들을 학살했다. 연맹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찔러죽이기 시작했다. 죽은 것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 것들을 죽였다.

"오래 전부터 타락시킨 거였네." 셀레스테는 사람의 형태도 유지 못한 괴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도 거기 대답해주지 못했다. 멀쩡한 자들은 후퇴하거나 고립되었다. 여신은 연맹을 중심으로 산맥 전체를 고대신의 요새로 바꿔놓는 중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응답한 권속들, 새로 만들어낸 괴수들, 타락한 인간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하나 있어야지."

셀레스테는 세심하게 고른 끝에, 벌거벗은 채 움직이던 시체 하나를 낼름 집어삼켰다. 질척거리는 붉은 액체가 이빨과 혓바닥을 적셨다. 여신은 장로회의 마법을 고대신화의 아류로 취급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들이 만드는 회백색의 비약이 좋은 예였다.

여신의 권속들은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

셀레스테는 자신의 눈 앞에 놓인 강철문짝을 바라보았다. 내부 요새 중 하나로 통하는 길이었다. 아직 이성을 유지한 연맹병사들이 배신자, 괴수, 감염자들을 막기 위해 닫아놓은 것이었다. 셀레스테는 숨을 들이마신 다음 힘껏 도약했다.

강철문짝의 경첩이 뜯기는 소리가 산맥 안에 울려퍼졌다. 잠시 뜸했던 비명과 총성, 괴성이 다시 시작되었다.

준비는 끝났다.

서로의 복수와 죽음만이 문제될 뿐.


작가의말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저한테 후원금을 보낸 분들이 계시더군요(...)

한분은 1년 전;;;;

이 작품은 어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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