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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4개만요!”
“...그래. 그럼 4개.”
“아싸! 저 이거 갖다 놓고 올게요!”
“아, 그건 제가 해드릴 테니 그냥 여기 두시면 돼요.”
“정말요!? 고마워요!”
줄이고 줄여서 4개. 그래도 말숙이는 기분 좋은 듯 팔짝팔짝 뛸 기세다.
“아빠~ 이거... 욕심 아니야?”
“응? 음... 여기 온 이유였잖아.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르긴 했지만.”
“응... 괜찮아? 애피, 안 해도 돼~”
당장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교육 차원에서 욕심부리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했던 게 오히려 애피를 소심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뭐든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된단 거겠지...
“여유에 안 맞게 사면 욕심이지만, 이 정돈 애피한테 아빠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괜찮아. 안 할 거도 아니고, 애피가 안 하더라도 언니들이 열심히 할 거고. 그렇지?”
“그렇습니다.”
“네! 맞아요!”
말숙이는 그저 신나서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보는 내가 다 민망하다.
“그러면... 보자, 여기 이거 다 결제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격이...”
열심히 바코드를 찍고 내게 가격을 불러줬다. 자그마치 2백 만에 가까운 액수. 그렇다고 해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생활 수준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액수...
하지만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결제를 마치고, 말숙이에게 북 하나, 내가 북 하나, 흑우가 조이스틱 두 개, 애피가 게임 타이틀이랑 카메라가 든 봉투를 들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어마어마하게 샀네.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다음 목적지는 삼각지 역으로 하겠습니다.”
“아, 응. 그렇지. 그쪽에 주차장이 별로 없었던가 아마... 그 근처에 전쟁 기념관이 있을 텐데, 그쪽으로 가면 될 거 같아.”
“전쟁 기념관이요? 그런 거도 있어요?”
“응. 왜? 가볼래?”
“어... 재미없을 거 같은데요?”
“뭐, 재밌는 곳이라곤 할 수 없겠지...”
.
.
.
어, 문 닫았다...
탕수육으로 유명한 중국집이 있어서 왔더니, 월요일은 쉬는 날이라고 쓰여있다. 아... 무턱대고 왔더니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이게 뭐예요... 문 닫았잖아요.”
그래도 아직 시간은 11시도 채 안 됐다. 돌아가서 먹으려면 뭐라도 먹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뭔가 더 찾아보는 게 좋겠다.
“기다려봐. 좀 찾아볼게.”
곧바로 폰을 꺼내 들어서 인터넷에 삼각지역 중국집을 쳤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먹을만한 중국집에 가서 원래 먹으려고 했던 메뉴를 꿩 대신 닭이란 느낌으로 먹으려고 검색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TV 프로그램, 생활의 고수에 나왔단 중국집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검색됐다. 게다가 오픈 시간도 원래 가려던 이곳과 같은 11시. 아주 좋다.
“가자. 찾았어.”
“또 문 닫은 건 아니죠?”
“여긴 월요일도 한대. 자, 애피는 아빠 손 잘 잡고.”
“응~ 아빠, 뭐 먹으러 가?”
“맛있는 중국 음식 먹으러 가.”
“중국 음식... 짜장면?”
“아니, 그거보다 더 맛있는 거.”
“짜장면 보다 더 맛있는 거?”
“응. 그러니까, 보자... 11번 출구로 내려가서...”
계단이 꽤 많구나.
“애피야, 아빠한테 업히자~”
.
.
.
13번 출구로 나와서 길을 따라 쭉.
온통 한자로 된 간판과 그 밑에 조사부라고 적혀있고, 위로 2층엔 중화요리 조 사 부 라고 한글로 적힌 간판이 떡하니 있다.
설마, 여기 2층 건물인가?
1층이랑 2층 둘 다라고 하기엔... 입구 바로 옆에 고깃집이 딱 붙어있어서 이렇다 할 공간이 없어 보인다.
“아빠~ 안 힘들어?”
“응? ...애피가 가벼워서 괜찮아.”
애피를 다시 땅에 내려줬다. 후우... 실은 좀 힘들긴 하다. 계단이... 많긴 하니까... 후우.
“다음엔 저도 업어주시면 안 돼요?”
“넌 또 왜?”
“어... 그냥요?”
으음...
“발목이라도 삐면 생각해볼게.”
“음~ 그래요?”
말숙이가 웃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자신의 발목을 보는 거 같다. 그러자, 옆에 있던 흑우가 한마디 건넨다.
“...도와드립니까?”
“돼, 됐어!”
“농담입니다만.”
“네가 하면 농담 같지 않단 말이야.”
“들어가기나 하자. 자, 애피는 아빠 손 잡고~”
“응!”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또 계단이 보인다. 아, 역시 그랬나...
“아빠! 애피, 올라갈 수 있어~ 괜찮아!”
내가 뭘 하기도 전에, 애피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착하게 잘 자라고 있구나. 우리 애피.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그래. 그래도 여기 꼭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잘 올라가야 해. 알았지?”
“응!”
말 안 해줘도 잘하겠지만, 여기 계단이 좀 가파른지라 말을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조심, 또 조심...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적당한 공간에 각져있는 나무 식탁과 함께 사방이 훤히 보이는 창가로 되어있다.
창문에는 생활의 고수에게 주는 명패와 새빨간 배경에 금색으로 써낸 한문이 붙어있는데,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손님은 아직 우리 말고는 없다.
자리에 앉자, 딱 보기에도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물통과 물컵, 단무지와 양파, 춘장 그리고 메뉴판을 내왔다.
어김없이 애피는 아주머니에게 환한 인사를 건넸고, 아주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드실 거예요? 저 짜장면 먹을래요.”
“짜장면! 아빠~ 짜장면보다 더 맛있는 거는?”
애피 말을 들은 말숙이가 헉하는 표정과 함께 두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아, 아니! 취소, 취소에요!”
“짜장면 먹는다면서.”
“저도 더 맛있는 거 먹을래요.”
뭐, 말숙이라면 굳이 짜장면을 취소하지 않아도 다 먹을 거 같지만... 그나저나, 조사부 특밥이라고 적힌 메뉴가 떡하니 벽에 붙어있다. 도대체 특밥이 뭐지?
도전해볼까? 아니면...
“특밥이 뭘까요?”
고민하는 사이, 말숙이가 말했다. 음...
“한번 물어보지그래.”
“알았어요. 저기, 특밥이 뭐예요~?”
그리고 돌아온 대답이 일품이다.
“처음 오시면 꼭 드셔봐야 하는 거예요.”
꼭 먹어봐야 하는 메뉴. 특밥.
“맵진 않아요? 아이가 먹을 수 있을까요?”
“음... 조금 매울 텐데.”
그러면 조금 매운 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니, 애피가 먹을 걸 따로 준비하는 게 좋겠다.
보자, 그러면 원래 먹으려 했던 탕수육하고 군만두에다가 특밥... 양이 얼마나 나오는 거지? 으음, 모르긴 몰라도 말숙이가 있으니까 2개 정도 시켜볼까.
“뭐 먹을래?”
“저, 특밥 먹어볼래요.”
“흑우는?”
“전 해물 짬뽕으로 하겠습니다.”
“어? 왜? 특밥 안 먹어? 꼭 먹어봐야 한다고...”
말숙이가 놀라선 흑우에게 말했지만, 흑우는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인다.
“해물 짬뽕으로 하겠습니다.”
“아빠~ 애피는?”
“음... 애피는 탕수육 먹을까?”
“헉. 저도요!”
말숙이가 하는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탕수육! 아빠가 말한 짜장면보다 더 맛있는 거야?”
“응. 맞아.”
“아하하~ 애피, 탕수육 먹어봤어~”
“응? 그랬었나?”
아마, 호텔 뷔페에서 먹어봤겠지...
애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긋 웃었다.
“탕수육 맛있었어~”
“그렇지?”
“응!”
“저도 탕수육 좋아해요!”
“알았으니까 좀 조용해... 어차피 다 같이 먹을 거니까.”
“어? 그걸 다 같이 먹어요?”
“그럼 그 많은 걸 혼자 먹게?”
“네? 그게 많아요?”
...아휴, 말을 말아야지.
“여기 주문이요~”
“네~”
“탕수육 대 하나랑 특밥 둘, 군만두 하나에 간짜장 하나, 해물 짬뽕 하나 주세요.”
아주머니가 메뉴를 한 번 더 말하면서 확인하고 주방으로 가져갔다.
“어? 방금 짜장면도 시킨 거죠?”
“시켰는데 왜?”
“저 주시려고 시키신 거예요? 히히~”
“너, 전에 살찌는 거 엄청 걱정하지 않았냐. 한숨 푹푹 쉬어가면서...”
“네? 아... 네. 한땐 그랬죠.”
“한땐? 지금은 아니야?”
“선아 언니 말이, 맛있게 먹으면 살 안 찐대요. 0칼로리라고.”
...뭐, 그렇게 믿게 놔두자. 언젠가 후회할 날이 찾아올 거다.
“맛있게 먹으면 살 안 찌는 거였구나~”
“저도 언제 한번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확인은 아직 해보지 않았습니다만, 확실히...”
흑우가 말숙이를 보면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애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는다. 아이고... 나중에 집에 가면 애피한텐 아니라고 따로 말해줘야겠다. 우선은 얌전히 있자.
기다리고 있다 보니, 코를 몹시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그러면서도 살짝 기름기 있는 냄새다.
“곧 나오려나 봐요.”
“가서 단무지나 받아와...”
짜지도 않나. 거의 말숙이 혼자서 양파랑 단무지, 춘장까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네~ ...엇!? 안 가도 될 거 같아요. 저기, 뭐 나오고 있어요.”
“특밥 나왔습니다. 어머, 배가 많이들 고프셨나 봐요. 단무지랑 양파 좀 많이 가져다 드려야겠네.”
“아, 네. 감사합니다... 혹시, 아기 덜어 먹을 접시도 좀...”
“네. 그럴게요. 아유, 귀여워라. 아가, 몇 살?”
“애피, 여섯 살~”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하니, 아주머니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질 않는다.
식탁 위에는 특밥과 함께 계란탕으로 보이는 국물이 올라왔다.
원래 이렇게 같이 주는 건가?
커다란 접시에 담겨나온 특밥은 새하얀 쌀밥을 가느다란 고기들과 함께 당근, 파, 버섯, 완두콩 등이 올라가 있는데 살짝 붉은 기와 함께 윤기가 반지르르하다. 그리고 어째 익숙한 향이 솔솔 풍겨온다.
어디서 맡아본 냄새인가 했더니, 이거... 깐풍기 냄새다.
애피도 꽤 관심이 생긴 듯, 옆에서 빤히 바라본다.
“잠시만~ 아빠가 먼저 먹어보고 나서, 먹을 수 있을 거 같으면 줄게.”
“응!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한껏 웃으면서 내가 먹기만을 기다린다.
좋아, 그럼 맛을 좀 볼까.
살살 비벼서...
음, 보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예상대로의 맛이다. 깐풍기 특유의 새콤달콤하면서 매콤한 맛이 살짝 감도는 자극적인 맛, 이 정도 맵기면 애피도 조금은 먹을 수 있을 거 같다.
“괜찮아?”
“응. 맛있네. 조금 매울지도 몰라. 괜찮을지 고기만 먼저 한번 먹어볼까?”
끄덕끄덕. 그리고 냠.
젓가락으로 고기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주니 잘 받아서 먹는다.
“어때? 매워?”
물어보니, 배시시 웃는다. 먹을만한 모양이다.
“아니! 더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자, 그러면 밥도 같이 먹어보자.”
“응!”
다행히, 애피도 잘 먹는다. 먹다 보니 매워진 모양인지 하아~ 하아~ 하고 입안을 부채질했고, 그럴 때면 같이 내온 계란탕을 한 모금 먹여줬다.
이 계란탕 역시 굉장히 진한 맛이 나는 게, 특밥과 굉장히 어울리는 조합이다.
거기다, 말숙이는 어쩐 일인지 혼자만 먹지 않고 흑우에게도 건네 보이며 같이 먹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탕수육이랑 군만두 나왔습니다.”
따로 덜어 먹을 수 있는 접시와 함께 기다렸던 두 요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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