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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江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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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쇠
작품등록일 :
2022.01.04 13:06
최근연재일 :
2023.02.21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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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168,486

작성
22.01.1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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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낭자회두浪子回頭

DUMMY

구와 구가 겹치는 중양절.

세상은 노란 국화로 덮이는데.

술 취한 나그네야.

고향이 어디고 어디로 가느냐.


중양절 아침. 등에 무거운 짐을 메고 작은 망아지를 이끈 채 비칠거리는 소년이 일지봉一指峰 기슭에 나타났다.


태원부 서북쪽에 위치한 일지봉은 높은 봉우리가 아니나 손가락처럼 곧게 솟아서 나름대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 낙화문이 있는데, 뿌리를 내린 지 몇 년 안 되었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한 거지?"


사흘 동안 술에 절어 살았던 구후영은 일지봉에 오르기 전에 정신을 차리려고 차가운 냇물로 세수하다 물에 비친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지난 며칠간의 행적이 떠오르며 후회가 밀물처럼 치고 들어왔다.


그날, 구후영과 청빈은 소림의 원경 스님과 술을 마셨고 술김에 의형제까지 맺었다.


주루에서 셋이 어깨동무를 하고 도불유 대통합이라며 고래고래 외쳤던 걸 떠올리니 지금도 낯이 뜨거웠다.


거기서 그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구후영은 청빈이 묶어둔 왕제상을 찾아 구출했다. 여기까지야 착한 일을 한 것이니 괜찮았는데, 나무에 묶인 채 그대로 죽는 줄 알고 오열하던 왕제상은 자신을 구한 구후영이 너무 고마워 술을 사겠다고 했다.


취기가 가시지 않은 구후영은 깊이 생각지 않고 받아들였고, 둘이 술판을 벌이는 과정에 원경과 청빈이 찾아왔다.


청빈을 본 왕제상이 기겁했으나 구후영이 강호의 의기와 세상의 정의를 운운하며 잘 풀었고, 왕제상도 청빈이 자신을 벗겨 먹으려던 매홍과 배후를 죽여 간접적으로 자신을 도왔음을 인정해 둘이 화해했다.


잘 해결된 듯했으나, 늘 술이 문제였다. 술을 미친 듯이 마신 넷은 왕제상까지 의형제에 껴서 도불유속 절대 통합을 이뤄냈다.


나이가 스물아홉으로 가장 많은 왕제상이 대형이 되고, 스물셋인 원경이 둘째, 열아홉인 청빈이 셋째, 열여섯인 구후영은 막내가 됐다.


'대형은 호색한에 한량, 이형은 주육화상酒肉和尙, 삼형은 사람 죽이는 자객.'


예전의 구후영이라면 절대 어울리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그나마 청빈은 회개하려는 기미를 보였지만, 왕제상은 여전히 여자가 좋고 원경도 술과 고기를 너무 좋아했다.


냇물로 얼굴을 시원하게 씻은 구후영은 사흘 동안 있었던 일을 칼이 목에 들어와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일지봉을 올랐다.


"어이구. 나 죽네."


매일 오르내리던 길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검 열다섯 자루에 천 두 필을 메고 산길이 힘겨운 혈총까지 돕느라 등산길이 지옥 길 같아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대사형이다."

"대사형이 뭐 들고 오신다."


다행히 구후영을 알아본 사제들이 달려와서 짐을 나눠 들었다.


"자룡은?"


"대사형 찾는다고 아침 일찍 나갔어요. 점심 먹을 시간이 돼야 돌아올 거예요."


"다들 수련은 열심히 했어?"


오랜만에 만난 사제들과 즐겁게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산 중턱에 이르렀다.


"대사형, 근데 이건 다 뭡니까?"


사제들이 검과 천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이들은 백 일가량 실종했던 대사형이 어떻게 이리 많은 물건을 들고 나타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너네 주려고 검 좀 사 왔다."


자신들을 준다는 말에 신이 난 어린 제자들이 만세를 거듭 불렀다. 그 소리에 안에서 회의하던 장문과 사숙들이 밖으로 나왔다.


"이놈. 어디서 뒈진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서 기어들어 왔구나!"


구후영을 본 임초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낙화문의 장문이자 유일하게 절정을 이룬 무인이자 구후영의 사부이며.


"사부님.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문파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빼면 시체인 사내다.


"잔말 말고 안으로 들어와."


사부의 성질을 아는 구후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부를 따라 문파의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갔다.


"사질,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화가 꼭두까지 치민 사부와 달리 사숙들은 구후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구후영은 감히 소리는 못 내고 그저 고개를 숙여 사숙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놈.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야?"


임초현은 다짜고짜 구후영을 무릎 꿇리고 문초했다. 사숙들도 구후영이 또래 아이들과 비교가 미안할 정도로 영민한 건 알지만, 빈손으로 나갔다가 고작 백 일 만에 이리 바리바리 싸 들고 돌아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는 눈치였다.


"자초지종을 말하거라. 처벌은 변명을 다 듣고 결정하마."


#


약 백 일 전. 구후영은 혼자서 일 보러 나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자주 있던 일이라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든 목마하를 찾으려 했다. 목마하를 따라 걷다 보면 일지봉이 보이고, 눈으로 보이는 데도 길을 헤맬 바보는 천하에 없다.


그런데 애타게 목마하를 찾던 중에 북원 기병들이 중원인을 잡아가는 걸 발견했다.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실력이 부족함을 알아 안타깝기만 하던 구후영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구후영은 어릴 때 임신한 어머니와 함께 북원 기병에게 끌려가 큰 부족에서 노예로 지낸 적 있다. 동생을 낳고 젖을 뗄 무렵 하여 용케 탈출해서 중원에 돌아왔는데, 중원에 오고 며칠 안 되어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어머니가 남긴 서신을 잃어버린 바람에 구후영은 어머니의 이름은 물론이고 자신과 동생 이름도 몰랐다.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는 더더구나 그랬다.


그때 함께 끌려간 사람 중에 자신의 사정을 아는 자가 한둘은 있지 싶은데, 탈출할 때 워낙 어린 나이여서 길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길을 기억한다고 쳐도 길치여서 찾아가기 힘든 구후영이다.


그런데 코앞에 그 부족으로 갈 가망이 생기자 일부러 옷과 얼굴을 더럽힌 후 포로 무리에 몰래 끼어들었다.


아침에 깨서 머릿수를 센 북원 기병들이 많아진 숫자에 의문을 품었지만, 누가 도망가서 준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 늘었기에 전에 잘못 세었으려니 하며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초원까지 갔고, 운 좋게 예전 부족을 찾아 그때 함께 끌려 온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구후영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의 이름도 모르지만, 구후영과 동생의 이름만큼은 용케 기억했다. 덕분에 이름을 찾은 구후영은 이 정도로도 대단한 성과라는 생각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구후영은 자신에게 이름을 알려준 사내에게 함께 탈출하자고 제안했으나, 남자가 이미 유목 생활에 적응했고 아내와 아이도 생겼다며 거절하는 바람에 혼자서 중원으로 향했다.


구후영은 남쪽으로 여겨지는 방향으로 걷던 중 백 명가량의 무리가 이동하는 걸 발견했고, 어디선가 일을 마치고 품삯을 받아 중원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임을 엿들어 알았다.


길치인 구후영은 저 무리에 끼면 중원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중에 몰래 끼어들었고, 대화하면서 태원부 근처로 가는 사람들과 안면을 터놓았다.


그러다 장방선생이 있는 곳에 도착해서 사람마다 은지 한 개씩 품삯으로 받았는데, 구후영은 치열하게 갈등하다가 은지 받으러 안 갔고, 덕분에 물을 마시지 않아 독에 죽는 횡액을 피했다.


처음 무리에 끼어들 때 공짜로 돈 받을 생각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행히 성현의 말씀을 떠올린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


구후영은 혹시나 장방선생이 몰래 지켜볼 것을 걱정해 소나기가 멈출 때까지 죽은 척 연기했고, 그다음엔 황무지에서 길을 헤매다가 청월을 만났고, 모용세가 소공자와 대공자도 만났고, 야효와 대결했고, 망아지와 마보를 얻었고, 태원부에서 청빈과 원경 그리고 왕제상을 차례로 만나 의형제를 세 번 맺었다.


#


구후영은 얘기해선 안 되는 부분을 빼고 북원 기병에 잡힌 것도 끌려가는 중원인을 구하려다가 그렇게 된 것으로 각색했고,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알아낸 사실도 숨겼다.


그러다 보니 안문도에서 있었던 일만 자세히 얘기할 수밖에 없었고, 구후영이 죽어가는 망아지를 구하다가 마보를 얻은 대목에선 사부를 뺀 모두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이 두 검은 명인의 솜씨인데 이사숙과 삼사숙을 떠올리며 샀습니다."


낙화문이 부유한 문파는 아니라지만, 사숙들의 검은 일반 야장이 만든 것보다 나았다. 낙화문은 용호龍虎표국을 중심으로 하는 표국 연합의 의뢰를 돕는 것으로 수익을 내는데, 목숨이 걸린 일이어서 없는 돈을 짜내서라도 사숙들의 무기는 좋은 거로 마련했다.


그러나 명인의 검보다는 훨씬 못했다.


"좋은 검이야."


"무게가 딱 좋고 날도 적당히 세웠어."


검을 뽑아 가볍게 휘두른 이사숙과 삼사숙이 연신 감탄했다.


"나는?"


사십 냥과 삼십 냥짜리 명인의 검을 들고 희희낙락하는 두 사제를 바라보던 임초현이 불쑥 말했다.


"사형은 좋은 검이 있잖소."


삼사숙의 태평한 말에 임초현이 버럭 화냈다.


"저번 달 전에 부러졌어."


"그거 말고도 장문검이 있잖소."


"야. 우리 문파가 천 년이 넘어. 그럼 장문검이 뭐겠어? 천 년도 더 전에 만든 검이야. 좋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리고 장문검을 실전에서 쓸 수 있니? 혹시 부러지거나 이가 나가면 네 이를 뽑아 메꿀까?"


무릇 절정이란 안으로는 정기신精氣神이 조화하고 겉으로는 신체의 육합이 조화로워야 하며, 안팎으로 내공과 무공의 조화까지 이뤄져야 한다.


절정에 이른 고수 사이에도 큰 차이가 존재하지만, 절정에 이른 무인과 그렇지 못한 무인 사이의 격차만큼 절대적이진 않다.


그렇기에 임초현이 화를 내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임초현이 비록 강호에 명성을 떨친 고수는 아니지만, 내외의 조화를 이룬 무인의 기세는 그렇지 못한 자들을 쉽게 압도했다.


"사부님. 제가 누구 제잡니까. 당연히 사부님 드리려고 제일 좋은 검을 몰래 숨겼죠. 사숙들이 섭섭할까 봐 이따 안 보는 데서 드리려고 했는데."


구후영은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허리의 검을 끌러 사부에게 진상했다.


"하하. 과연 내 제자답구나."


여든 냥짜리 검을 뽑아 이리저리 휘두르던 임초현이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사숙들은 철부지 장문의 행태에 고개를 저으며 참 안됐다는 얼굴로 구후영에게 심심한 위로의 눈빛을 보냈다.


아무리 고수라도 좋은 검을 쓰는 게 아닌 것보다 당연히 낫지만, 절정에 이른 무인은 무기를 크게 가리지 않는 편이다. 명인의 검은 차라리 검술은 뛰어나나 내공이 부족한 구후영이 쓰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그럼 이 검은 내가 쓰는 거로 정했다. 유저酉猪는 쓸 검이 없으니 일단 내 장문검으로 수련하거라."


"사형. 안 될 말씀이오."


이사숙이 대경실색해서 임초현을 말렸다. 낙화문에서 장문검이 갖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 이대로 구후영이 장문검을 쓰는 거로 결정 나면 다음 대 장문인은 십중팔구 구후영의 차지가 되고 만다.


"사형. 장문검은 함부로 내어주는 게 아니라고 배웠소."


다른 사숙들도 장문검을 구후영에게 주려는 임초현을 적극적으로 말렸다.


그런 사부와 사숙들을 지켜보는 구후영은 감회가 새로웠다.


'다들 철부지로 아는 사부가 사실은 능구렁이셨구나.'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도 달라진 덕분에 구후영은 그저 그러려니 하던 예전과 달리 사부의 생각이 눈에 훤히 보이고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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