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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江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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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쇠
작품등록일 :
2022.01.04 13:06
최근연재일 :
2023.02.21 18:00
연재수 :
227 회
조회수 :
799,640
추천수 :
23,080
글자수 :
1,168,486

작성
22.01.06 23:00
조회
13,886
추천
210
글자
11쪽

독설여검毒舌如劍

DUMMY

검게 물든 하늘은 어느새 난쟁이 잡목보다 낮아지고, 냇물에 비쳐 흐느적거리는 달은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산중의 화전 마을에서 흰 연기가 외롭게 타올라 조각 난 노을과 어울리고, 가을이 일찍 왔는지 풀은 하얗고 잎은 빨갛고 꽃은 노랗다.


"이거 맛있어."


걱정했던 것과 달리 태원부로 향하는 십수 일의 여정에 추격자는 없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저 매는 어쩔 생각이오?"


천뇌응은 추격자가 있는지 확인하러 하루에 두세 번 하늘을 날 때를 빼곤 늘 걷는다. 추격자가 천뇌응을 보고 오히려 이쪽을 찾아낼 걸 걱정해서다.


작은 매처럼 어깨나 팔뚝에 태워 이동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크고 무거운 놈이라 어려웠다.

차라리 같은 무게의 돌멩이면 천에 싸서 아무렇게나 메면 상관없는데, 숨 쉬는 놈이어서 들고 다니기가 너무 불편했다.


그 탓에 여정이 길어지고 있지만, 구후영도 소녀도 이 부분엔 별 불만이 없었다.


"입소문이 정말 빠른데."


원나라가 들면서 중원에도 매사냥이 유행한 적 있고, 이쪽은 북방이어서 더욱더 매에 관심이 많다. 좋은 매 한 마리 구해서 팔면 작은 마을 하나가 팔자를 펴기에 전문 매 둥지를 털어 새끼를 잡아 키우는 매 사냥꾼이 생길 지경이다.


천뇌응은 그냥 매도 아니고 으뜸 매인 해동청이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치기로 했던 데는 해마다 해동청을 바치라는 요 황실의 강압이 큰 몫을 차지했을 정도다.

그러니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당연히 눈에 띄고, 소문이 퍼지면 추격자들이 금세 따라붙을 게 확실하다.


"여긴 중원에 가깝고 넌 중원 사람이니 해결책도 네가 마련해야 하는 거 아냐?"


산계山鷄(꿩) 다리를 맛있게 뜯던 소녀가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 일인데도 설마 하늘이 무너지랴는 태평스러운 얼굴로, 처음 만났을 때 걱정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던 모습과 지극히 대조적이었다.


'성현께서 왜 소인과 여인이 유독 어울리기 어렵다고 했는지 알 것 같구나.'


말 바꾸기는 기본이고, 책임 전가에도 일가견이 있다. 물처럼 담백하고 순수한 교우 관계를 추구하는 군자에겐 상대하기 정말 어려운 부류가 분명했다.


"새장을 만든 다음 큰 마을에서 천을 사 새장을 가리는 건 어떻소?"


"'여기 은자 삼백 냥 없습니다'하고 아예 편액도 달지?"


옛날에 어떤 부자가 있는데 도둑을 걱정해 은자를 땅에 묻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여기 은자 삼백 냥 없습니다'라고 글자를 적은 팻말을 박은 후에야 비로소 발 뻗고 편히 잤다고 한다.


"숯으로 더럽게 만드는 건 어떻소?"


"우리 천뇌응이 얼마나 청결한 앤데 그래. 그리고 이 덩치를 좀 봐라. 그깟 숯칠 좀 한다고 소문이 안 나겠냐고."


이쯤 되자 구후영은 혹시 천뇌응이 자신의 매고, 도주하는 사람도 자신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른 방향으로 날아서 추격자들을 유인한 다음, 사람이 많은 태원부에서 만나는 건 어떻소?"


"그걸 얘한테 어떻게 얘기해 줘? 말 못 하는 짐승한테."


'그럼 왜 맨날 언니 어쩌고 하면서 말 못 하는 짐승이랑 대화하는 건데?'


속으로 울컥했으나, 구후영은 성현의 말씀에 따라 너그러운 아량으로 애써 참아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소. 때가 되면 무엇이든 방도가 떠오를 거요."


그러나 더는 버틸 자신이 없어 급히 대화를 종료했다.


#


하늘이 무너지지 않은 탓에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둘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야산과 황야를 골라 움직였다.


"저기 누가 싸우는 거 같은데? 구경하러 가자."


모습이 보이는 건 아니고, 기합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성현께선 지붕 아래선 시비를 만들지 말고 문을 나서면 시비를 피하라고 했소. 그대도 쫓기는 몸인데 괜한 분란에 휘말리지 않는 게 좋겠소."


"장의행협仗義行俠 몰라?"


의기로 무장하여 올바름을 행한다. 말은 좋은 말이나, 강호에서 협을 입에 올리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약이면 삼 푼 독성이 있고, 독이면 삼 푼 약효가 있다는 말이 있소."


"그것도 성현이 말한 거야?"


"아니요. 의원들이 자주 하는 말이요. 사람 병을 치료하는 약은 기운이 세서 어떤 의미론 인간에게 독이 되오. 사람을 죽이는 독도 기운이 세서 잘만 쓰면 병을 치료하기도 하오."


"그게 장의행협이랑 무슨 상관인데?"


"누군가를 돕는 게 옳기만 한 일이 아니란 것이오. 당신이 나섬으로써 무고한 자가 구원받을 수도 있소. 하지만, 당신의 어떠한 협행으로 누군가는 손해를 볼지도 모르오. 그러니 협행을 하기 전에 반드시 전후 사정을 모조리 헤아려서 출수할지 말지를 신중히 결정해야 하오."


"그럼 무슨 사정인지 헤아리러 가자."


소녀는 구후영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성현들 말씀 그른 게 하나 없구나.'


문파에서 사부와 사숙들은 구후영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사제들은 구후영의 말에 곧잘 따른다. 그러나 성현들이 유달리 어울리기 어렵다고 평가한 여자와 소인에서 여자에 속하는 소녀는 아무리 맞는 말이어도 자기 기분에 따라 곧잘 무시했다.


딱히 말릴 방도가 떠오르지 않은 구후영은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는 소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둘이 백화림白樺林(자작나무숲)의 공터에 접근했을 때 쌍방은 이미 소강상태에 빠졌다.


구후영은 공연히 입맛을 다시는 소녀의 모습에, 장의행협이 아니라 그저 싸움 구경을 하고 싶어서였음을 십분 확신했다.


"이제라도 물러가면 옛정을 봐서 살초는 펼치지 않겠다."


추위가 급작스럽게 오면 냇가에 얇디얇은 살얼음이 낀다. 이 살얼음을 박빙이라고 부르는데, 검을 든 약관 정도로 보이는 청년의 목소리는 박빙을 뜯어 입에 넣었을 때 느끼는 청량감을 연상케 했다.


청년 옆에는 작은 마차가 있었다. 두 사람이 타기엔 조금 비좁을 것 같은, 넓이가 삼 척 정도밖에 안 되고 창도 없이 달랑 작은 문 하나 달린 허름한 마차였다.


마차를 끄는 것도 말이 아닌 산나귀였다. 이름에 나귀가 들었지만, 검은 털에 멋진 뿔이 달린 산양의 한 종류로, 적게 먹고 오래 달리나 길들이기 어려워서 가축 취급을 못 받는 짐승이다.


"소공자를 돌려주면 속하들도 곱게 물러나겠습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인이 말했다.


이들은 똑같이 검은 무사복을 입었고 노루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머리에는 똑같이 검은 천을 감았는데, 아무래도 중요한 사람이 죽어서 상을 치르는 중인 것 같았다.


그때 천뇌응이 뒤뚱거리며 뒤늦게 도착했다. 천적의 냄새를 맡은 산나귀가 애달프게 울며 도망치려고 심하게 발버둥 쳤다.


"놈. 가만히 있지 못할까?"


흔들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호통쳤다. 천뇌응의 냄새에 발광하던 산나귀가 순식간에 얌전해졌다.


"날 죽일 작정인가?"


흔들림을 멈춘 마차에서 내린 아이가 무사들을 쏘아보며 추궁했다.


"속하가 어찌 감히. 그저 대공자의 명에 따라 소공자를 세가로 모시려는 것뿐입니다. 불충을 저지를 생각은 일말도 없습니다."


"날 세가로 데려갈 자신은 있고?"


아이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호위의 무공이 만만치 않아 목숨 걸고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


"날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이대로 돌아가라. 실력이 부족해 모시지 못했다고 하면 대공자도 어쩔 수 없을 것이야. 아직은 인심을 얻어야 하는 때니까."


"대공자의 엄명이 있어 속하도 진퇴양난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천 리 넘은 거리를 쫓아왔는데 말 몇 마디에 물러날 무사들이 아니었다.


"아니. 이해 안 할 건데? 내가 오늘 여기를 무사히 벗어난다면 절치부심하여 무공을 익혀 십 년 혹은 이십 년 뒤에 돌아가 복수할 거야. 그땐 너희뿐이 아니라 너희 가족과 친척은 물론 친우까지 다 죽일 생각이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로 악독한 내용이었다.


"오늘 너희가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건 주검 두 개 혹은 주검 하나와 나다. 주검 두 개를 가져가면 대공자가 어쩔 수 없이 너희를 죽여야겠지. 작고한 가주의 혈육을 죽인 무사를 그대로 두면 가문의 기강이 무너질 테니까. 날 살려서 데려간다고 해도 세가 직계에 검을 겨눈 너희를 중용하진 않을 거야. 나도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검을 잡은 무사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왜 수많은 추격대 중에 너희만 우릴 따라잡은 거 같아? 너희가 제일 멍청해서야. 똑똑한 놈들은 일부러 틀린 방향으로 가거나 온갖 핑계로 발걸음을 늦췄겠지."


무사들이 아이의 말에 휘둘려 갈팡질팡하던 그때.


"하하."


귀청을 찢는 거북한 웃음소리가 소공자의 말을 끊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웃음소리가 끝나며 나타난 건 약관에서 이립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청년이었다. 어깨가 넓고 팔이 굵어 헌앙한 느낌이 나지만, 눈알이 작고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 야박한 인상을 풍겼다.


"대공자를 뵙습니다."


무사들이 양손으로 검 끝이 아래로 향하게 잡은 채 청년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소공자는 산나귀가 갑자기 발광하여 이끄는 마차가 절벽에 추락하는 바람에 안타깝게 세상을 뜬 거다. 다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속하가 직접 눈으로 봤습니다."

"속하도 직접 봤습니다."


사내들이 확 풀린 얼굴로 앞다투어 말했다.


이들은 눈치 없이 소공자를 찾아내는 바람에 출셋길은 물론 목숨까지 위험하게 생겼는데, 갑자기 나타난 대공자가 벼랑 끝에서 손을 내밀었다. 이들은 이제부터 대공자와 비밀을 공유하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당연히 중용을 받을 거고, 어쩌면 세가의 고강한 무공을 배울지도 모른다.


"흥. 소공자 몸에 손을 대려면 내 주검을 밟고 지나라."


목소리가 시원한 청년이 말했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쭉 눈에 거슬렸다."


말을 마친 대공자가 허리에서 장군검을 연상케 하는 거검을 뽑아 휘둘렀다.


전력으로 휘두르지 않아 언제든 변초를 펼칠 여력을 남긴, 꽤 대단한 중검술이었다. 검의 무게에 대공자로 불리는 청년의 힘까지 얹어 호리호리한 체형의 청년이 금세 두 동강 날 것 같았다.


"합!"


기합으로 기세를 북돋은 청년이 검을 짧게 휘둘렀다.


번성점점繁星点点이라는 수비와 공격에 모두 쓰이는 기초 검술로, 상대의 공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를 때 넓은 범위를 수비하거나 상대가 어딜 수비해야 할지 모르게 넓은 범위를 공격권에 두는 게 특징이다.


지금은 정확한 판단으로 대공자의 거검과 연신 부딪쳐 상대의 기세와 위력을 죽이는 용도로 쓰였다.


아주 기초적이고 쉬운 초식이지만, 응용 능력만 봐도 청년의 검술 경지가 전혀 얕지 않았다.


그러나 검술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얇은 검을 든 청년이 힘에 밀려 비칠거렸다. 덕분에 청년의 뒤통수만 보던 둘은 처음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와!"


희고 청수한 얼굴을 본 소녀가 감탄을 뱉었다. 그제야 둘을 발견한 무사들이 검을 겨누고 신속히 접근했다.


"거기 멈추지 못할까."


삼엄한 검날이 자신을 겨누는데도 소녀는 일말의 두려움 없이 호통쳤다.


작가의말

독설여검 - 독한 혀가 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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