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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江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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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쇠
작품등록일 :
2022.01.04 13:06
최근연재일 :
2023.02.21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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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168,486

작성
22.01.0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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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구사일생九死一生

DUMMY

짙은 먹구름이 넓게 퍼지며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였다. 어느 순간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어디까지가 땅인지 구분이 사라졌다.


우르르릉.


먹구름의 포박을 풀지 못한 우레가 낮고 답답한 소리로 포효했다. 부름을 받고 현신한 굵은 번개가 두꺼운 먹구름을 날리지 못한 채 세상에 잠깐의 광명만 선사하고 사라진 데 불만이 커 보였다.


슬슬 강해지는 텁텁한 흙냄새도 굵은 소나기를 자신 있게 예고했다.


"다들 모여."


소나기가 임박할수록 광풍이 기승을 부렸다. 칠공으로 검은 피를 쏟은 채 쓰러져 있는 백여 구의 시체를 일일이 흔들어 확인하던 검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부름을 받고 순식간에 모였다.


"그만 철수한다."


명령을 내린 자는 놀랍게도 키가 작고 팔다리도 가는 장방선생賬房先生이었다.


장방선생은 장부를 기록하고 주판을 튕겨 금액을 계산하는 사람으로 대부분 문약하다. 일꾼들의 삯을 나눠 주던 장방선생 역시 그래 보였다.


그런데 백여 명 일꾼을 마시는 물에 독을 타 독살한 후, 바로 진면목을 드러냈다.


"소문나선 절대 안 되니 확실히 죽었는지 한 번 더 검증해야지 않겠습니까?"


눈에 정광이 넘치고 태양혈이 불룩 솟은 사내가 말했다.


태양혈이 솟은 건 기의 흐름이 원활하다는 뜻이고 눈의 정광은 중기가 충만하다는 증거다. 사내는 외공의 고수가 분명했다.


"내 독을 의심하는 것이냐?"


장방선생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용 관계가 아니라면, 장방선생은 내공 고수가 분명하다. 신체 조건만 보면 장방선생은 사내의 주먹 한 개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속하가 실언했습니다."


장방선생에게 고개까지 숙여 사과한 사내가 수하에게 눈짓했다.


눈치 빠른 수하가 시체를 뒤져 거둔 은지를 상자에 담아 장방선생에게 공손히 바쳤다. 뚜껑을 안 닫은 나무 상자엔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하얀 은지가 수십 개 있었다.


"좀 줄까?"


상자 안의 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방선생이 갑자기 질문했다.


사내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봤다.


"그간 고생 많았는데 이걸로 한 잔씩 해."


말을 마친 장방선생이 은지를 연신 잡아서 뿌렸다. 정확히 한 명에게 네 개씩 날아가는 모습에 사내들 모두 속으로 감탄했다.


"독 선생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은지를 받아 소매나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챙긴 사내들이 장방선생을 향해 포권했다.


"감사하긴. 저승길 노잣돈인데."


장방선생의 이상한 대답에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순간, 사내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질렸다.


"멍청하긴. 무슨 근거로 너희들은 살려준다고 생각했지?"


백여 명 일꾼에게 먹인 독과 달리 사내들에게 쓴 건 절독이었다. 어느새 혀가 부은 사내들은 한 마디 항변의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다가 그대로 숨을 멈췄다.


장방선생은 절명한 사내들의 몸을 들춰 방금 준 은지뿐이 아니라 이들이 몰래 숨긴 은지까지 수거했다. 아까와 달리 하얗던 은지들이 하나같이 시커멓게 빛이 죽어 있었다.


장방선생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뒤 양손으로 은지들을 만지며 독을 회수했다. 귀한 독을 꼼꼼히 회수한 장방선생은 눈을 감고 운기했다. 운기함에 따라 장방선생의 장포가 서서히 부풀어 올랐고 다소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흡!"


기합과 함께 운기를 마치고 감았던 눈을 뜬 장방선생이 경공을 펼쳐 서남쪽으로 달렸다. 장포에 바람이 잔뜩 찼건만 여전히 왜소한 인영이 질주하는 야생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장방선생이 사라지고 백여 구의 시체만 남은 초원에 장대처럼 굵은 소나기가 쏟아졌다.


#


"성현께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했거늘."


소나기가 멈춘 초원에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성현의 말씀을 어겨 위험에 빠졌지만, 제자가 늦지 않게 눈을 뜬 덕분에 목숨만은 부지했습니다."


까만 눈동자가 환한 보름달의 비침에 별처럼 빛났다. 백여 구의 시체에 둘러싸인 사람답지 않게 미소가 머문 입가 때문에 장난스럽게 느껴지지만, 눈매가 무척이나 강인한 소년이었다.


입가와 코밑에 일부러 바른 검은 피 때문에 다소 기괴해 보이나, 잘생긴 얼굴이 어디 가진 않았다.


"물건 좀 빌리겠소."


밝은 달빛을 빌어 시체들 얼굴을 확인한 소년은 낯익은 몇몇의 품을 들춰 필요한 물건을 챙겼다.


칼등에 녹이 살짝 슨 비수, 제대로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으로 만들어 역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부대 두 개, 밑창에 토끼 가죽을 댄 신발 하나를 챙긴 소년은 주검들을 향해 제문을 짧게 읽어주고 곧장 장방선생이 은지를 버린 곳을 찾았다.


"내년에 여러분의 기일을 잊지 않고 지전을 태울 테니 이 돈은 소생이 갖는 거로 하겠소. 방금 극락왕생주를 읊어드리는 소소한 수고도 하였으니 다들 이해해 주실 거로 알겠소."


은지를 담은 상자를 천으로 잘 묶어 등에 멘 소년은 무인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했다. 이들 몸을 수색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 배후가 누군지 밝히고 싶지만, 괜히 잘못 만져 본인이 중독될까 봐 두려웠다.


"성현께서 말씀하셨지. 생사가 유별하고 부귀는 재천이니 각자 천명에 따라 살라고. 내 사주에 복수는 없었다고 하니 이만 가야겠다."


자신을 설득한 소년은 물이 고인 웅덩이를 찾아 가죽부대 두 개를 채운 다음 동남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대머리수리는 초원과 사막의 까마귀로 불린다. 이들은 눈이 좋아선지 코가 예민한 건지, 주검만 생기면 무리를 지어 나타나 썩은 살점으로 배를 채운다.


이날도 먹이를 찾아 날던 두 마리 대머리수리가 식사 거리를 발견하고 날개를 접었다.


둘이 착지한 곳에서 약 이 장 떨어진 거리에 큼직한 나무상자와 홀쭉한 가죽부대 두 개가 있고, 바로 곁엔 살갗이 까맣게 탄 소년이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두 대머리수리는 목표물을 자세히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사냥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썩은 고기로 배를 채우는 일이 많지만, 대머리수리 역시 신선한 고기가 좋다. 게다가 여긴 둘밖에 없어 얼마든지 포식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른 대머리수리라고 눈이 삐진 않았다. 어느새 몇 마리 동족이 근처에 착지했다.


그에 마음이 조급해진 두 대머리수리가 좀 더 과감하게 목표를 향해 움직였고, 다른 대머리수리들은 딴청을 부리며 둘이 하는 모양을 지켜봤다.


동족의 출현에 다급히 주검에 다가갔던 두 대머리수리는 정작 가까이 가자 다시 조심성이 발동했는지 일정 거리를 두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발걸음을 망설였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미동도 없던 주검이 벌떡 일어나 양손을 뻗어 대머리수리 한 마리씩 움켜잡았다. 그에 놀란 다른 대머리수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소년은 두 대머리수리의 목을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소매에 숨겼던 돌멩이를 꺼내 힘껏 던졌다.


왼손으로 던진 돌멩이는 안타깝게 빗나갔고, 오른손으로 던진 돌멩이는 갓 날아오른 대머리수리의 날개를 맞혔다.


소년은 가랑이 사이에 꼈던 두 마리의 목을 옷을 찢어 꼰 밧줄로 급히 묶었다. 그새 날개를 맞고 바닥에 떨어진 대머리수리가 달려서 도망쳤다.


소년은 옭매듭으로 단단히 묶은 두 대머리수리를 옆구리에 끼고 날개 하나를 퍼덕이며 달리는 대머리수리를 수십 장이나 따라가 기어이 잡았다.


"성현께서 말씀하셨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과연, 죽을 고비에 하늘이 음식을 내리는구나."


소년은 날개를 다친 대머리수리의 목을 비수로 자르고 피를 받아 마셨다. 이틀이나 갈증에 시달린 탓인지 비린내 심한 대머리수리의 피가 천상의 감로로 느껴졌다.


피로 갈증을 해결한 소년은 비수로 대머리수리의 고기를 얇게 썰어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성현께서 말씀하셨지. 과욕은 패망의 지름길이라고. 이 은지랑 상자만 아니었으면 이런 위기도 없었을 텐데."


배고픔까지 해결한 소년은 가죽부대를 챙긴 다음, 현재는 그저 짐인 나무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갈등했다.


"과욕이 패망의 지름길이라고 하나 지금 음식이면 며칠 넉넉히 버틸 수 있으니 이건 과욕이 아니야."


길게 고민하지 않고 마음을 빠르게 정한 소년은 은지로 묵직한 나무상자를 등에 멨다.


"그래. 성현께선 끝을 보지 못할 바엔 시작도 말라고 하셨지. 이는 시작한 일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가르침이야. 성현의 가르침이 틀릴 리 없어."


#


소년은 대머리수리 세 마리로 엿새를 버텼다. 그런데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황무지가 끝나지 않았다.


"성현께선 왜 황무지를 벗어나는 방법은 말씀 안 하셨지?"


작은 불만을 토로하며 소년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지난번엔 두 시진 가까이 기다렸던 거 같은데, 이번엔 또 얼마나 걸릴까?'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소리에 집중하며 대머리수리가 걸려들길 기다렸다.


그때, 허공에서 삑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소년은 궁금함을 못 참고 실눈을 떴다.


덩치가 며칠 전에 잡았던 대머리수리보다도 큰 매가 보였다. 꽤 거리가 있음에도 부리와 발톱의 형태가 확연한 거로 봐선 지금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클지도 모르는 거응巨鷹이었다.


삑은 매가 우는 소리였다.


'잡을 수 있을까?'


평소 보던 매보다 훨씬 컸다. 체구가 닭 정도로 작은 매도 성질이 사나워서 잡는 과정에 할퀴고 쪼인다.


저 정도 덩치에 잘못 쪼이면 대머리수리와 달리 살점이 크게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하루 정도 더 버틸 만하다는 생각에 소년은 안전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래서 대머리수리처럼 가까이 접근하길 기다리지 않고 소매에 숨긴 돌을 잡은 후 벌떡 일어나며 돌팔매질을 했다.


소년이 던진 돌멩이는 매에 닿지 못했다. 하강하던 매는 뜻밖의 공격에 놀랐는지 금세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화가 잔뜩 담긴 음성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소년의 귀를 때렸다.


"나쁜 녀석!"


소년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 자신을 욕한 장본인을 찾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꽤 가까운 거리에 푸른 궁장을 입은 어여쁜 소녀가 잔뜩 화난 눈으로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현께서 말씀하셨소. 모르고 저지른 잘못에 죄를 묻지 말라고. 주인 있는 매인 줄 모르고 실례한 점은 이렇게 사과드리겠소."


소년이 양 주먹을 맞잡고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흥! 어떻게 본 공주의 천뇌응天雷鷹을 모른단 말이냐.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소녀는 세상 사람이 다 자신을 알고 자신의 천뇌응을 안다고 여겼지만, 안타깝게도 소년은 길을 잃어 이곳이 처음이었다.


"내 이리 사죄했으나 그대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 혹시 달리 사죄할 방법이 있다면 내 기꺼이 행할 테니 그만 노여움을 푸시오."


성현의 말씀에 따르면 잘못을 저지른 건 분명히 소년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사죄로 일관했다.


소년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듯 보이자 소녀의 마음도 서서히 풀렸다.


"넌 누군데 내 천뇌응을 모르는 거지?"


"소생은 구후영歐侯盈이라고 하오. 부끄러우나 태원부로 가던 중에 길을 잃었소."


"멍청이. 태원부는 동남쪽에 있는데 넌 왜 줄곧 서쪽으로 걸었지?"


작가의말

??? :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비례물시非禮勿視), 야동은요?

공자님 : 그건 보라고 만든 거니까 봐주는 게 예의지.

??? : 역시 찐 예의를 아는 훌륭한 분이셨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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